〈 42화 〉 괴물
* * *
방금까지 좋았던 분위기가 거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휴대폰을 확인하던 아린이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허둥지둥하며 가게 밖으로 나가려 했다.
다급해 보이는 아린이의 손목을 잡아 황급히 멈춰 세웠다.
"왜 그래? 뭐 놓고 왔어?"
"미, 미안해 성현아. 나중에 연락할게…."
잡은 손목을 황급히 풀고는 아린이는 그리 말하며 가게를 나가버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걱정이 되어 급히 가게 밖을 나와 아린이를 찾으니. 택시를 타는 뒷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
머릿속에서 한 가지가 떠올랐다. 매일 이 시간대가 되면은 신아린이 연락이 끊기는 이유.
기한신과 연관된 일이겠지.
김성현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신아린은 자신을 아직 온전히 믿지 못하는 걸까.
유급걱정은 하지 말라고 그리 말했는데도. 왜 오늘도 기한신에게 가는 걸까.
아니면 여태까지 당했던 것이 아까워서 그러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린이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이미 택시는 멀어진 지 오래라 그것도 불가능했다.
사라진 아린이의 빈자리에 근처 벤치에 앉아 고개를 들어 멍하니 어두워진 하늘을 바라봤다.
오늘 아린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몸의 반응부터. 심장의 떨림. 사랑이 담긴 눈빛이.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게 해줬으니까.
신아린과 보낸 하루는 이토록 행복하고 사랑스러우며. 말도 안 되게 시간이 빠르게 흐를 정도로 좋았는데.
김성현은 머리에서 떠오르는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고 씁쓸한 얼굴로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갔다.
***
"흐아악…. 아파, 아파요…."
카펫 위를 피로 물 들이며 나는 평소처럼 기한신의 발을 붙잡고 울며 빌고 있었다. 고통 속에서도 계산적이게. 살려달라는 말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체벌의 강도를 늘리는 역효과를 준다는 걸 몸으로 경험했으니까.
온몸이 불타는 듯. 뜨겁게 달아올라 아파져 왔다. 신체는 계속된 폭력에 노출되어 제어가 안 될 정도로 덜덜 떨려오고 있었다.
체벌시간에 늦었다는 것에 정말로 많이 화가 났는지. 어디선가 구해온 가시가 박힌 회초리로 나를 때릴 때마다. 교복을 뚫고 들어온 가시는 몸에도 구멍을 만들어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특히 끝 부분이 갈고리처럼 휘어있어서. 기한신이 회초리를 회수할 때 몸에 박힌 가시가 빠져나가며 살점이 찢겨나가는 게 너무 아팠다.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기한신의 발목을 붙잡고 두려움에 떨며 피와 눈물이 범벅이 된 채 빌 수밖에 없었다.
"멈춰봐."
진희의 차가운 말에 흥분해 내가 죽을 때까지 회초리를 휘두를 기세였던 기한신의 몸이 거짓말처럼 우뚝 멈춰 섰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고통이 진희의 말에 멈춰지자.
나는 진희가 기한신의 체벌을 멈춰준 게 너무나 고마워 눈물을 흘렸다.
찰칵
찰칵
다양한 각도에서 기한신의 발을 붙잡고 있는 내 모습을 찍던 진희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요구했다.
"아린아 고개 좀 들어서 기한신 봐봐. 얼굴이 잘 안 보여."
그 명령에 힘겹게 고개를 들어 기한신을 바라봤다. 깊어 보이던 검은 눈이 탁하게 변해 있는 기한신의 얼굴이 보였다.
"좋아. 그대로 있어."
다시 사진 찍는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이 졸린 것처럼 눈이 저절로 감겨 왔다.
"신아린. 눈 떠."
차가운 진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억지로 눈을 힘겹게 뜨자. 내 머리 위로 포션이 쏟아져 흘러내려 피투성이가 된 교복을 적셨다.
"오늘은 잘못했으니까 많이 맞아야지? 뭐해. 다시 때려."
"안, 안돼"
조금씩 살이 차오르던 몸에 또다시 기한신의 회초리가 날아들어 또 다른 구멍을 내기 시작했다.
팔을 들어 막자. 내 팔을 부러트리려는지. 발길질로 나를 쓰러트리고 내 팔에 자신의 체중을 실으며 올라탔기에.
발광하며 벗어나려 하자. 기한신의 회초리가 또다시 날아들어 왔다.
내 몸 구석구석 체벌의 흔적이 남는다. 포션으로 그 흔적을 지운다 해도 내 기억에 남은 흔적은 지워지지 않은 상처처럼 남아.
매일 두려워하며 내일이 오지 않기만을 빌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극심한 고통을 받으면 기절하는 장면이 많던데. 그건 거짓말인가 보다.
내 정신이 무너질 것 같을 때마다. 성현이를 위해서 버텨야 한다는 진희의 말이 떠올라. 입술이 터질 때까지 깨물며 버텨냈으니까.
얼른 이 지옥 같은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 이 지옥에서 나를 구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성현이뿐이라는 진희의 말이 떠올랐다.
나를 구해줬으면 하는 마음과 한편으로는 이런 내 모습을 성현이가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 서로 충돌한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성현이는 분명 마음 아파할 테니까.
성현이가 아픈 것보다.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더 나으니까.
기한신에게 머리를 짓밟혀 머리가 그대로 터질 것 같은 고통에 평소라면 고통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생각조차 들지 않았지만.
오늘 성현이와 보냈던 행복했던 감정이 불쑥 머리에서 튀어나왔다.
그 감정이 고통을 무시할 만큼 너무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더 참자. 진희의 말처럼 곧 사랑으로 바뀔 이 고통을 위해서.
오늘의 고통을 참아야 해. 내일을 행복하기 위해서.
육체의 고통에 마비된 의식 속에서.
나는 버릇처럼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
다음 날. 교실에서 자리에 앉아. 조금 있을 이론 시험을 대비해 진희가 접어준 페이지를 다시 한 번 읽고 있는데.
누군가의 손이 책 위로 올라와 글을 읽는 것을 방해했다.
고개를 드니 성현이가 있었다.
"어제 왜 자기 전에 연락 안 했어?"
"미안. 공부하다가 깜빡 잠들었어. 시간이 너무 늦어서 연락 못 했어."
걱정하는 성현이의 눈을 보며 준비된 거짓말을 뱉었다.
사실은 너무 맞아 결국 처음으로 기절을 했고. 다시 깨어나 기절한 대가로 또다시 체벌을 당해. 새벽에서야 집에 돌아왔다는 걸. 걱정하는 성현이에게 말할 수는 없으니까.
"아. 성현아 여기 접힌 곳 지금이라도"
"잠깐 얘기 좀 해."
시험이 코앞인데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한 문제라도 더 봐야 좋은 점수를 받을 텐데.
성현이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와 사람이 없는 구석진 복도 계단으로 갔다.
"왜?"
"아린아. 너 어제 기한신한테 갔지."
성현이의 말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당황해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자. 성현이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 진짜 유급 안 당해.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걱정 안 해. 믿어 성현아."
진심으로 나는 성현이를 믿고 있다. 성현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럼 기한신한테 오늘부터 안 가도 되는 거지?"
"응…?"
"갈 이유 없어졌잖아."
성현이의 말에 머리가 뒤죽박죽되었다. 갈 이유가 없다니? 당연히 체벌을 받으려면 가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야. 가야 해….
"왜 가냐고 도대체. 나 믿는다며. 내 유급 때문에 협박받고 있는 거 아니야?"
조금 화난 듯이 끌어안은 나를 살짝 밀치면서 말하는 성현이의 얼굴을 보고 그제야 이유를 떠올랐다.
당연히 성현이가나를 구하기 위해서. 체벌을 받는 건데.
아직 나를 못 구했잖아 성현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어서. 성현이를 보며 화제를 돌렸다.
"그, 그만. 이제 곧 시험이잖아. 얼른 가서 책 조금만 더 읽자. 이 얘기는 시험 끝나고 하자. 응?"
성현이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마음이 아파 주변을 둘러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성현이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다행히 성현이는 거부하지 않고 입술을 맞춰줬다.
성현이의 몸에 기대고 시골 똥강아지 같은 눈을 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랑해 성현아."
"...나도."
마지못해 대답하는 성현이를 꼭 끌어안아주고.
교실로 돌아와 진희가 접어준 페이지 부분을 성현이에게 알려주고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다.
***
시험이 끝나고 성현이와 도서관에 가서 공부하려 했지만. 진희가 잠깐 따라 나오라고 해서. 가채점중인 성현이를 한 번 보고. 진희의 뒤를 따라갔다.
기한신의 연구실 문 앞에서. 진희는 오늘따라 더욱 눈부신 외모로 나를 돌아보고 부드럽게 내 이름을 불러줬다.
"아린아."
"응. 진희야."
나를 보고 미소 지어주는 것에 심장이 본능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왜일까. 같은 여자인 진희를 좋아하는 걸까?
"성현이가 너를 구해주려면 기한신을 죽여야 할 텐데. 어떻게 생각해?"
"...어?"
진희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몸이 떨려왔다. 성현이가 사람을 죽인다고…? 그 이유가 나 때문이라니. 죄책감에 순식간에 시야가 울렁거렸다.
"성현이가 기한신을 죽이고 너를 구해줬으면 좋겠어? 아니면 성현이랑 계속 행복하게 연인으로 지내면서. 매일 같이 죽기 직전까지 고문받으면서 살고 싶어?"
마치 확인하듯. 나를 관찰하며 묻는 진희의 모습에 나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고 아무런 말도 못했다.
"솔직하게 대답해."
명령하듯 낮은 진희의 목소리에 나는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차라리 성현이가 모르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그냥…. 내, 내가 참을게."
내 대답이 정답이었는지. 진희는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으며 내 뺨을 쓰다듬어줬다.
"성현이를 진심으로 아끼는구나?"
"응. 성현이를 위해 대신 죽을 수도 있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성현이가 없는 세상이라면 난 더 살 이유가 없으니.
"아주…. 마음에 드는 말이야."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진희는 내 팔을 잡아 강한 힘으로 기한실의 연구실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 힘에 카펫으로 쓰러진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진희에게 등을 밟혀 그대로 카펫 위로 다시 쓰러졌다.
"자. 괴물아. 먹이가 왔네?"
진희의 장난기 섞인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잿빛 머리카락을 가진 흉포한 괴물이 나를 향해 웃는 것이 보였다.
*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김성현은 가방이 걸려 있는 아린이의 책상을 보며 옆 자리에 앉아. 아린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장실이라도 간 걸까. 메시지를 보내봐도 확인조차 하지 않아 답답했다.
가방을 둔 채로 집으로 가지는 않을 테니. 앉아서 기다리면 돌아오겠지라는 생각을 하며.
간만에 [거지 영웅키우기]를 실행해 열심히 등급을 올리고 있을 때.
보스를 죽이기 위해 열심히 휴대폰의 화면을 두드리고 있을 때. 백진희에게서 연달아 메시지들이 왔다.
게임을 일시 정지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숨어서 몰래 찍은듯한 구도에. 아린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 기한신에게 맞고 있는 듯한 사진.
살려달라고 빌듯. 피투성이가 된 채 기한신의 발을 붙잡고 애원하는듯한 표정의 사진.
그것들을 보며. 숨을 쉬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가슴 속 깊이 터져 올라오는 분노에 이성을 잃고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쳐 부숴버렸다.
[6층으로 와. 아린이 기한신에게 죽을지도 몰라.]
백진희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자 황급히 6층으로 달려갔다. 분노에 이성을 잃어 시험이 끝나 아무도 없는 복도를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6층으로 올라가자. 복도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백진희가 김성현의 눈에 들어 왔다.
"백진희!!"
백설공주처럼 백발의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를 가진 백진희는 평소와 다르게 붉게 변해 있었다.
피에 젖어하얗던 머리카락이 붉게 염색이라도 한 것처럼. 머리카락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김성현."
"씨발! 무슨 일이야 도대체."
그 물음에 진희는 눈물을 흘리며 팔목을 붙잡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기한신이 아린이를 강간하려기에 막으려다가 당했어."
"뭐?"
백진희의 말에 충격을 받아 몸이 떨려왔다. 기한신 이 씨발새끼가….
"일단 보건실로…."
이 정도로 피를 흘렸다면 과다출혈로 죽을 수 있다. 황급히 백진희를 안아 들으려는데 백진희가 팔을 막았다.
"안돼! 그럼 늦어. 잘 들어 김성현. 기한신은 지금 폭주상태야. 이성을 잃어서 괴물이 돼버렸어. 지금 당장 아린이를 구하지 않으면 아린이 목숨이 위험하다고."
"씨발 그럼 어쩌라고!"
"...기한신 죽일 각오 있어?"
"뭐?"
차가운 백안의 시선에 멍청하게 되묻자. 백진희는 미간을 좁히며 힘없이 말했다.
"기한신을 죽이지 않으면…. 아린이가 죽을 거야."
"죽일 거니까 걱정 마."
진심으로 죽여버릴 생각이니까. 아린이를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다.
"지금의 너는 절대 기한신을 못 이겨. 대신…. 이걸 먹으면 기한신을 이길 수 있을 거야."
흰색의 둥그런 공 모양의 무언가를 손에 쥐여주었다. 손에 딱들어오는게 기시감이 들었다.
아레아의 마령화와 사이즈가 비슷하다.
말랑말랑한 감촉에 조금 썩은내가 나는것이 먹기 꺼림직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게…. 뭔데?"
"미노타우로스의 고환."
"뭐…?"
방금 들은 말이 지금 진짜인가 싶어. 백진희를 바라보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백진희가 힘없이 속삭였다.
"아린이를 네 손으로 구하고 싶지? 그럼 먹어."
자신을 바라보는 백진희의 눈빛 속에. 묘한 즐거움이 숨겨 있다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