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전조
* * *
"아린아~"
교실에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진희가 안겨왔다. 아침마다 버릇처럼 교실에 들어와 진희를 안는 것으로 아카데미에서의 하루를 시작하는 것 같다.
진희와 대화를 나누며 자리에 앉자. 옆에서 얼굴을 파묻고 잠들어 있는 성현이가 보였다.
어젯밤부터 메시지를 보내도 답변하나 안 보내더니. 밤새 게임이라도 한 걸까? 아침부터 피곤해하는 모습이 조금 걱정됐다.
피곤한 것 같아 깨우지 않았더니. 수업이 시작돼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돼서야. 정신을 차린 성현이와 점심을 먹고 근처 벤치에 앉았다.
"어제 뭐 했어? 메시지 보내도 답장도 없던데."
"...많은 일이 있었지. 답장은 미안해. 휴대폰 볼 시간이 없었어."
무언가 하루 사이에 김성현이 조금 성숙해진 것 같다. 나쁜 변화는 아니었기에 미소가 나왔다.
"2일 뒤면 등급시험 시작되는데 공부는 좀 했어?"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김성현은 자신감 있는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마. 절대 유급 안 당해."
항상 시험 얘기를 하면 조금 짜증 섞인 반응을 보이는 성현이었는데. 따로 공부라도 한 것인지. 자신감 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
"수업 끝나고 같이 도서관 가서 공부할까?"
"그럴까?"
확실히 성현이는 조금 성숙하게 변한 것 같다. 무언가 믿음직해진 것 같아서.
좋았다.
*
도서관에서 우린 서로의 맞은편에 앉아 교과서를 꺼내 공부를 했다.
성현이와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게 될 줄 전혀 몰랐는데. 평소와 다르게 건전한 데이트를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아린아. 이건 뭐야?"
모르는 문제를 물어보려 속삭이는 성현이의 모습에 괜스레 미소가 흘러나왔다.
"이거는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말한 건데…."
자세하게 설명해주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간을 좁히고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성현이의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마음속에 차오르는 행복감에 나도 모르게 계속 미소를 짓자. 성현이가 나를 보고는 눈을 좁히며 물었다.
"왜 그렇게 자꾸 예쁘게 웃어?"
"...그냥."
같이 있는 게 너무 좋아서.라는 대답은 부끄러웠기에 말할 수 없었다.
금세 장난기가 도는 성현이의 표정에 경고의 눈빛을 보내자. 그제야 다시 책에 집중하는 모습에 나도 마저 공부하려는데.
주머니에 넣어 놨던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30분 안에 연구실로]
휴대폰 화면을 확인해보니 기한신이 보낸 메시지였다.
순식간에 하늘 높이 치솟던 행복감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성현이에게 기한신에게 당한 일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한다면 분명히 진희는 나한테 크게 실망할 것이기에.
거짓말을 하기 위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입술에 바른 틴트의 맛 때문인지. 입안이 썼다.
"...성현아."
"응? 왜?"
작게 이름을 속삭이자. 책을 보던 눈을 올려 순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성현이의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성현이에게 거짓말하기는 싫지만. 진희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나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해."
"일? 무슨 일 있어?"
걱정하는 듯 묻는 성현이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왜 이리 추궁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그냥 담임 선생님 도와주기로 했는데 깜빡하고 있었어."
"기한신…?"
성현이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따갑게 느껴졌다.
"응…. 먼저 일어날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책들을 가방에 넣는데 성현이의 손이 내 손을 붙잡았다.
"가지마."
애원하듯. 성현이가 나를 바라보며 작게 속삭였다. 성현이가 무언가 눈치 챈 걸까?
"가야돼…."
슬쩍 잡힌 손을 빼내자. 성현이의 미간이 좁혀졌다. 화가 난 것처럼 나를 노려보더니 자기도 책을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성현이도 나를 따라 도서관을 나왔다.
연구실이 있는 본관의 건물로 발걸음을 옮기자. 성현이가 따라왔다.
"왜 따라와?"
"나도 가서 도울게. 둘이 도우면 더 빨리 끝날 거 아냐."
딱딱한 목소리로 말하기에 발걸음을 멈추고 성현이를 바라봤다.
"아니야. 나 혼자서 충분하니까 돌아가서 공부해."
"왜? 일 도와주는 거라며. 내가 도와주면 안 돼?"
의심하는 듯한 성현이의 목소리에 조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하자.
성현이가 내 팔목을 붙잡고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갔다.
내 어깨를 붙잡으며 애원하는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정말 일 도와주는 거야?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
그 질문에. 사실을 말할 수 없어서. 나도 모르게 치마를 쥐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내 대답에 애원하던 눈빛이었던 성현이의 시선이 다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시골 똥강아지 같은 귀여운 눈에서 처음 보는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서로 거짓말 안 해야 하는 거 알지?"
"응. 난 성현이 사랑하니까 거짓말 안 해."
울렁거리는 가슴을 무시하고. 뻔뻔하게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거짓말을 하자.
성현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젓고 말없이. 나를 두고 어디론 가로 가버렸다.
말없이 뒤돌아 가버리는 성현이의 뒷모습에. 눈물이 날 것 같아. 잠시 숨을 고르고 연구실로 향했다.
무거운 마음 때문인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연구실 문 앞에서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노크를 한 뒤 들어가자.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때릴 것인지. 기한신이 운동복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네. 연락한 지 10분이 넘었는데."
으르렁거리며 다가온 기한신이 내 변명을 들을 생각도 없는지. 곧장 내 복부를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순간적으로 숨이 쉬어지지 않아. 앞으로 상체가 기울자. 기한신이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자신의 책상으로 끌고 갔다.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지자. 얼굴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얼얼해진 코와 부풀어 오른 입술로 뜨거운 액체가 입안으로 들어와 반사적으로 뱉어내자. 입안에서 나온 피가 카펫을 적셨다.
그 위로 기한신의 발길질이 멈추지 않고 내 몸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쏟아졌다. 카펫 위에 쓰러진 채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얼얼한 통증과 쉴 새 없이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기한신의 발길질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통을 피하려 몸부림쳤다.
"이 씨발년!!!"
"죄, 죄성해여…."
입술이 부어 발음이 이상하게 나왔다.
"내 명령을 무시하는 거지!"
"아니에여…."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분노를 풀려는 듯.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발길질하던 기한신이 숨이 찬지.
거칠게 숨을 내쉬며 쉬기에. 그때를 노려 입안에 고였던 피가 섞인 침을 내뱉고
팔로 얼굴을 가리자. 기한신이 내 머리카락을 붙잡고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머리카락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억지로 반쯤 몸을 일으키자. 기한신이 뺨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입안의 살이 터져 끊임없이 입안에서 피가 고여 기한신의 손길에 입 밖으로 피가 튀어나와 카펫을 피로 물 들였다.
"일어나."
기한신의 명령에 몸을 후들거리며 일으키려다 앞으로 쓰러졌다. 일어날 때까지 머리를 짓밟는 기한신때문에 억지로 다시 몸을 일으키자.
기한신은 더러운 걸레 하나를 물에 적신 채 내 입에 물렸다.
"네가 흘린 피 닦을 때까지 못 갈 줄 알아."
"네, 네에…."
오늘 체벌이 끝난 걸까. 고개를 끄덕이며 입에 문 걸레를 빼고 카펫에 묻은 내 핏자국을 지워보려 했지만.
오히려 핏자국은 카펫에서 크기가 커질 뿐 지워지지 않았다. 내 입과 머리 어디선가 흐르는 피가 전보다 더 많이 카펫을 적셔갔다.
그 모습에 잠깐 걸레질을 멈추고 입안에 흐르는 피를 블라우스에 닦아내자. 기한신이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집에 가기 싫나 보네."
기한신의 목소리에 두려움이 생겨 눈물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손을 움직여 카펫을 닦아봤지만.
기한신이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 충전기의 USB 선을 빼 채찍처럼 후려갈겼다.
"아아악! 아파…. 아파여…."
카펫 위를 뒹굴며 기한신이 휘두르는 USB 선을 피하려 했지만. 양팔에 끝없이 붉은 상처를 남기다. 내 뺨에 충전기에 꽂는 부분이 꽂혀. 다시 나를 내려치려고 선을 당겼기에 살이 찢어져 나갔다.
사과하고. 사과하고. 사과하고.
단지 기한신의 기분이 풀리기만을 바라며. 한참을 울며 빌자. 마침내 서야. 오늘의 체벌이 끝났는지. 기한신은 꺼지라는 소리와 함께 먼저 연구실을 떠나갔다.
가방을 향해 힘없이 기어가 가까스로 포션을 꺼내 들었다.
손에 묻은 피 때문에 가방이 더러워졌지만.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급히 얼굴에 포션을 붓고 또다시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들이마셨다.
진통제라도 들이부은 것처럼. 온몸을 괴롭히던 격통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한참 시간이 지나. 몸을 일으킬 정도의 체력이 돌아와 몸을 반쯤 일으키고 치료가 되지 않는 부분에 포션을 들이붓고 있을 때. 누군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기한신이 돌아온 건가 싶어 두려운 마음에 급히 고개를 들자. 다행히 진희였다. 두려웠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안도감이 마음속을 채웠다.
"진, 진희야."
"수고 많았어. 자, 새 교복."
피에 젖은 교복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에 매번 진희가 이렇게 새로 교복을 줬다. 나를 생각해주는 진희의 마음씨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옷 벗어봐. 내가 발라줄게."
진희의 말에 피에 젖은 교복과 가방을 빈 쇼핑백 안으로 넣었다. 집으로 가기 전에 소각장에 쇼핑백째 불태워야지.
등에서 느껴지는 진희의 부드러운 손길에 마음이 놓였다. 그렇지만 통증은 계속 느껴졌기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됐다. 대충 겉에 보이는 부분만 일단 했으니까. 집에 가서 흉 남지 않게 잘 치료해."
"응. 고마워 진희야."
잘했다는 듯이 진희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조금만 참아. 성현이가 멋지게 너를 구해줄 거야."
"응. 참을 수 있어. 성현이를 위한 건데 뭐…."
내일도 이렇게 고통스러운 기한신의 체벌이 기다린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들었지만. 언젠가 저 연구실 문으로 들어와 나를 구해줄 성현이의 멋진 모습이 상상이 되어 기대가 되었다.
"그래. 성현이가 너를 구해주면. 꼭 금고 안에 들어있는 기아스를 성현이에게 써야 해. 알았지? 그래야 그런 멋진 성현이가 다른 여자에게 안 넘어가지."
"응. 알았어. 꼭 그럴게."
나도 성현이가 다른 여자에게 마음이 가는 건 싫었다. 기아스를 이용해 성현이가 나만을 사랑하게 하면 정말 행복할 것 같다.
"우리 아린이한테 내가 항상 고마운 거 알지?"
내 터진 입술을 포션이 묻은 손가락으로 만져주며 따스한 웃음을 짓는 진희의 모습에 조금 울컥해 눈물이 흘러나왔다.
"내가 더 고마워 진희야. 나는 너 같은 사람은 되고 싶어도 못될 거야."
"프흡. 그래. 좋은 자세야. 너는 내가 될 수는 없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될 수 있을 거야."
"응.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
내 대답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예쁜 눈웃음을 짓는 진희의 모습에 덩달아 나도 기분이 좋아져 웃다가 입술이 터졌다.
"안돼 아린아. 아직 상처 안 아물었어. 웃지 마~!"
"응. 미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것을 도와주고 새 교복을 입게 도와준 뒤 진희는 오늘은 자신이 교복을 버려주겠다며 쇼핑백을 들고 나갔다.
가방을 들고 연구실을 나와 1층으로 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신아린."
누군가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그곳에는 같은 반인 조민성이 있었다.
"어? 민성아. 여긴 무슨 일이야?"
"아~심부름 왔다가 뒷모습이 너 같아 보이길래 인사하러 왔지."
"등급시험 준비는 잘돼가?"
"응. 뭐 1등 하겠지. 나인데."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조민성의 말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난 1등 놓친 적 단 한 번도 없어."
맞아. 조민성은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
"신아린?"
"어, 미안. 잠깐 멍청히 있었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해 타자. 조민성도 안으로 들어왔다.
"저번에 부탁 들어주기로 한 약속은 잊지 않았지?"
"응. 당연하지. 내가 해줄 수 있는 선에선 최대한 노력해서 들어주기로."
내 말에 조민성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주말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
"주말에? 이틀 동안이야?"
주말 하루 정도는 성현이랑 같이 보내고 싶은데.
"아니, 하루면 될 거야."
조금 섬뜩한 눈빛으로 조민성이 나를 위아래로 흩어봤다.
기분 탓인가? 조민성의 눈을 다시 봤을 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았어. 그럼 토요일이 어때?"
"아주…. 좋지."
조민성은 긴 입꼬리를 그리며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