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몽마에게 살아남기
* * *
비밀의 방이 정말로 존재했다니. 조금 얼떨떨했다.
방안은 뭔 호텔같이 으리으리한 디자인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빗자루까지. 진짜 비밀의 방다웠다.
어느새 들어왔는지. 백진희는 벽에 장식돼있던 스노 글로브 중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설명해줄게. 앉아."
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백진희의 모습이 조금 아니꼬웠지만. 백진희의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비밀의 방과 너무나도 잘 어울려 진짜 주인 같아 보였다.
"이게 뭔지. 대충은 알지?"
"그 뭐냐. 스노우 볼. 그런거 아닌가."
생존실습 때 들었던 것 같은데. 뇌용량이 적어 필요 없는 건 바로바로 지우는 성격이라.
"스노 글로브야. 넌 진짜 멍청하구나."
조롱하듯 말하는 백진희를 일부러 무시하자. 길고 흰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에 있는 스노 글로브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거는 엄청나게 특별한 스노 글로브야."
"특…. 별?"
우루퉁덩굴이랑 비슷한 거 아닌가? 스노 글로브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마치 어느 게임에 나올법한 판타지 속 중세의 도시가 작게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이건 우루퉁덩굴처럼 훈련용으로 만들어진 가상세계가 아니라. 실존하는 곳으로 넘어갈 수 있는 특수 글로브야."
"오. 텔레포트 같은?"
"설명에 한마디씩 끼어들면. 더는 말 안 할 거야."
서늘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뻘쭘할까 봐 리액션 해준 건데. 역시 싸가지 없긴해.
"이곳의 이름은 몽마(夢?)의 환락가. 이 안에서의 시간은 원래의 시간과 다르게 흘러가. 마족들이 사는 마계니까."
조금 궁금해서 입을 열려다 백진희의 미간이 좁혀지기에 다시 다물었다.
몽마라면…. 내가 아는 그 서큐버스인지 궁금했는데.
"이 몽마들의 유혹에서 벗어나. 네가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 메긴기요르드라는 이름의 유물이야."
백진희는 테이블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는 조금 음흉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메긴기요르드. 옛 노르드어로 힘의 허리띠라는 뜻이야. 이것만 있으면 넌 유급 걱정은 안 해도 돼."
백진희의 말에 침이 삼켜졌다. 몽마의 유혹. 메긴기요르드.
"질문 있으면 해봐."
"그, 몽마라는 게…."
조심스럽게 백진희를 바라보며 묻자.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백진희가 시선을 천장으로 하며 무언가 생각했다.
"그…. 큐버스들 있는 마계의 환락가야. 지금의 너에게는 수련장소로 괜찮은 곳이지. 물론 맨몸으로 가면 힘들 테니. 내가 몇 가지 장비를 지원해줄 거고."
서큐버스…!
이게 진짜인가? 만화책에서만 나오던 거 아니였냐고!
당장에라도 저 글로브인지 뭐인지 하는 것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맥인요르? 그거는 어떻게 알아?"
제일 중요한 것을 물어보자. 백진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선가 노트와 펜을 가져왔다.
"자. 이렇게 허리띠같이 생긴 게 메긴기요르드야. 이름이 어려우면 힘의 허리띠라고 불러."
"오케이. 내가 알아야 할 건 또 없어?"
"이 안에서의 하루는 이곳에서 1시간이야. 그렇기 때문에 너는 등급시험 전까지 시간을 벌 수 있어. 등급시험 전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내가 결석처리 안 되게 잘 해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대충 어느 정도 알아들었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백진희는 나에게 자신이 한 말을 다시 말해보라며 점검했고. 몇 번 혼이 나고서야. 정확한 정보를 숙지할 수 있었다.
"자. 이 망토는 어느 정도의 방어력이 있을 거야. 어차피 너는 주먹을 쓰니까. 무기는 필요 없을 테고. 뭐하면 장갑이라도 하나 가져갈래?"
"아니. 장갑 끼면 좀 불편해서."
"그래. 하지만 이건 가져가는게 나을거야. 아린이한테 잠깐 빌린거니까 꼭 다시 가져오고 가방안에 넣어놓을게. 자, 여기 이 망토에 달아둔 나비 브로치. 메긴기요르드를 손에 넣으면 이 브로치를 꾹 눌러. 그러면 글로브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을 거야."
마치 남편의 출근할 때 넥타이를 매주듯. 손수 나비 모양의 브로치를 달아주기 위해 다가온 백진희의 모습은 상당히 매력적이었기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나를 다시 한 번만 그딴 눈으로 보면 죽일 거야."
"어. 미안…."
정말로 진심이 뚝뚝 담긴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는 백진희의 모습에 급히 사과했다. 눈치도 빠르지.
백진희는 챙겨줄 것들을 가져온다며 잠깐 자리를 비웠기에. 자리에 앉아 백진희가 세운 계획을 다시 떠올려봤다.
환락가에서 메긴기요르드를 찾아서탈출.
아주 심플한 계획이다.
단지 그곳이 몽마의 환락가라는 사실이. 어쩔 수 없이 늦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고민했다.
`한 10일 정도는 서큐버스한테 정기 좀 빨리고`
머릿속으로 시간을 계산해 봤다. 10일이면 10시간. 하루 정도는 학교를 안 나가고 서큐버스들과 뒹굴 생각을 하니.
벌써 `레오나르도 김성현 주니어`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조금만 백진희의 연락이 늦었으면 정력을 허튼 곳에 쓸뻔했다.
"자. 생존실습 때 받았던 생존 가방이랑 최대한 비슷하게 넣어놨어."
내용을 확인하니 먹을 것들과 등산용 밧줄, 캠핑용 나이프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고맙다. 백진희."
"고맙긴. 그래서 확실히 결심은 한 거야? 네가 노력하지 않으면 많이 힘들 거야."
백진희의 의심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당연하지. 사랑하는 아린이를 위해 서큐버스따위의 유혹에 지지 않아."
내 말에 비웃는듯한 표정으로 백진희가 작게 말했다.
"내 앞에서 다시 한 번이라도 그 더러운 물건을 세웠다가는 잘라버릴지 몰라."
황급히 몸을 돌려 눈치 없이 텐트를 치고 있는 주니어를 한 대 살짝 때려줬다. 주인 마음을 읽으라고!!
"준비됐으면 잡아. 보내줄게."
"내가 없는 동안 아린이 처녀. 부탁한다……. 친구."
"그딴 말 멋있게 하지도 말고."
백진희의 싸가지 없는 말을 배경 삼아. 스노 글로브에 손을 올리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며.
눈앞에 몽마의 환락가가 나타났다.
`기다려 아린아. 조금만 즐기고 갈게.`
***
`나는 좆됐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사실 그대로.
"저기다. 저기서 싱싱한 동정의 냄새가 난다!"
그 소리에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적에게 타이밍을 맞춰 나를 잡으려는 손을 피하고 마나가 담긴 주먹을 힘껏 내질렀다.
"크아악!"
나를 노리고 달려오던 괴물은 주먹에 얼굴을 맞고 뒤로 쓰러졌다. 벌써 오늘만 5명째.
그 괴물 뒤로 따라오는 무리가 보였기에 황급히 강을 따라 흔적을 최대한 지우며 상류를 향해 올라갔다.
"백진희 개씨발년…."
분노가 담긴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곳은 백진희의 말대로 몽마의 환락가가 맞았다.
단지. 서큐버스가 아닌 인큐버스들이 모여 있는 환락가였을 뿐….
*
몽마의 환락가 입성 첫날
"이리 오너라!!!"
당당하게 환락가의 중심거리에서. 김성현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마치 공무원 시험을 합격하고 설날에 친척집에 간듯한 자신감.
그동안 친적들에게 받았던 설움을 털어내겠다는 결심과 비슷하게.
여태까지 망상으로만 했던 플레이들을 직접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끝이 없는 자신감을 심어 줬다.
자신을 찾아올 음란한 모습의 서큐버스들을 기대하며 다시 한번 크게 외쳤다.
이제 계산대로 10일 정도는 마음껏
"오옹? 멋있는 인간 소년이넹~?"
"그르겡? 길을 잃은걸깡?"
귓가에 들려오는 이질적인 목소리.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싫을 정도로 칠판을 긁는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김성현은.
자신의 아버지 연령대의 남자가 분홍 치마와 하이힐을 신은 끔찍한 모습을 한 채 자신을 향해 요염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뭐, 뭐지 시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니. 웬 미남자들이 상체를 노출한 채 신기하다는 듯. 창문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우웅~ 소년앙 이 형이 길을 알려줄까?"
"그…. 혹시. 몽마의 환락가가 맞나요?"
"우웅~맞아. 몽마의 환락가. 인큐버스의 천국이지."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은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는 걸. 김성현은 이날 처음 깨달았다.
"아니, 크큭…. 인큐버스라고? 흐흐흫 서큐버스가 아니고?"
"서큐버승~? 걔네는 다릉곳에 있징~업종이 다르다궁~"
양옆에서 좆같은 말투로 떠들어대는 아버지뻘의 남자들에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아 제가 착각을 했네요. 가려 했던 곳이 거기거든요."
"우웅~? 우리 소년은 모르는구나?"
"...뭘요?"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씩 다가오는 양옆의 남자들과. 자신의 몸에 시선을 집중하는 남자들이 느껴졌다.
"드러올때능 망대로지만~"
"나갈때능 아니랑다~"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 서로 말을 주고받던 두 놈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을 뻗어 붙잡으려 들었다.
무언가 더러운 짓을 할 것 같다는 불안함 예감에 본능적으로 경계하고 있었기에 곧장 반응할 수 있었다.
급히 손을 피해 몸을 뒤로 빼내자.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스트레칭도 하지 않은 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이 씨발!!!"
포기하지 않고 다가오는 한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고 황급히 도망쳤다.
"반반한 동정 인간 청년잉 나타났당!!!"
김성현을 놓친 인큐버스가 크게 소리치자. 거리에 있던 인큐버스들의 눈빛이 변했다.
"동정잉 나타났당!"
"동정이다! 동정이다! 야생의 동정이다!"
"꺼지라고 이 씨발놈들아!!"
급히 주먹에 마나를 담아 자신의 앞을 막는 것들을 치워내며 환락가를 빠져나갔다.
***
그로부터 10일이 지났다.
인큐버스들을 피해. 강을 따라 무작정 흔적을 지우며 숨어 살고 있다.
상류로 향한다고 생각했는데. 환락가를 중심으로 빙빙 돌고 있는 구조였다. 아예 강의 상류로 올라가려면 환락가를 통해야 했다.
밤이 깊어졌기에 모닥불을 피웠다. 이제 요령이 좀 붙었다.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은 뒤. 그 중심에 모아놓은 나뭇잎들을 불쏘시개로 사용하면 쉽게 불을 붙일 수 있다.
오늘은 수확이 꽤 좋았다. 대충 나무를 깎아 만든 작살이 꽤 좋은 성능을 보였으니까. 강에 있던 이름 모를 생선 3마리가 오늘의 노력을 알려준다.
백진희가 챙겨준 생존 가방에 든 캠핑용 나이프를 꺼내 능숙하게 생선의 내장을 발라냈다.
민물고기는 기생충이 많아 무조건 구워 먹거나 익혀 먹어야 한다는 말을 너튜브에서 본 적이 있기에.
미리 꼬챙이 형태로 깎아놓은 나뭇가지에 생선을 꽂은 뒤. 모닥불 옆에 돌로 고정해 세워놨다.
이미 백진희가 준 생존 식량은 바닥을 들어냈고. 자급자족하지 않는 이상. 살아남을 수가 없다.
분명 나비 브로치를 누르면 돌아간다고 했는데. 백진희가 또 사기라도 친 것인지. 아무리 눌러봐도 반응이 없었다.
이미 몇 일 동안 내내 백진희를 욕하면서 버텨왔기에 더는 그럴 맘도 들지 않았다.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보면서. 요즘 유행하는 불멍을 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삶.
나쁘지 않을 수도...?
만약 돌아간다면 아카데미 안에 작은 집을 하나 만들어볼까.
요 며칠 노숙생활에 조금 그런 자신감이 붙었다.
열기에 구워지고 있는 생선을 뒤집어줬다.
향신료가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노릇 하게 구워야 그나마 맛있게라도 먹을 수 있다.
"활을 만들어 볼까."
어느 순간부터 따라오는 무리의 수가 늘어난 것 같다. 꿈에 나올까 본능적인 공포가 들 정도의 욕망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호모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공포를 주었기에. 괜스레 엉덩이에 힘이 들어간다.
지금처럼 주먹으로 싸우다가는 언젠가 발목을 붙잡혀 사로잡힐지 몰랐다.
심지어 그 무리 중에서는 기한신보다 잘생긴 놈들도 더러 있었고. 여자보다 더 예쁘게 생긴 미소녀들도 몇몇 있었다.
아직 생선이 구워지기에는 모닥불의 화력이 작아 오래 걸렸기에 근처의 나무들을 확인해봤다.
활로 사용할만한 탄력 있는 나무는 없었기에. 길게 일자로 된 나뭇가지를 나이프로 자른 뒤에 모닥불로 끌고 왔다.
창이라도 만들 생각이었다.
다시 모닥불에 앞에 앉아 의무적으로 나무를 깎기 시작했다. 작살보다는 조금 더 크게 만들어야지.
한참을 나무를 깎고 생선을 뒤집으며 시간을 보내다. 문득 예전 생각이 났다.
"아린이는 뭘 하고 있을까…."
등교준비를 하고 있을까? 그 아름다운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보고 싶었다. 밤과 모닥불은 이렇게 사람을 센치한 감성으로 만들어준다.
40% 정도 만든 창을 바닥에 두고 노릇노릇 구워진 생선을 집어 들었다. 후후 바람을 불며 생선을 한입 베어 물자. 입안을 가득 채우는 맛에 행복감이 들었다.
오늘 처음으로 먹는 음식.
근처에 열매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먹었을 텐데. 이름 모를 버섯들만 있었기에 먹지 않았다.
식용 버섯을 구분하는 건 힘들다고 수업시간에 잠깐 들었던 게 떠올랐으니까.
솔직히 조금 퍽퍽한 맛밖에 나지 않는 생선살이었지만. 스스로 물고기를 잡아 구워 먹었다는 것이 맛의 플러스 요소였달까.
하나를 해치우고 다음 것을 먹기 위해 손을 뻗는데. 누군가 어둠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달빛에 빛나는 청 푸른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트윈테일의 머리가 잘 어울리는 초월 아카데미의 교복을 입고 있는 귀여운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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