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결심
* * *
"흐음."
슬쩍 주변을 둘러본 김성현은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룸메이트 3명은 자기들끼리 일요일 밤을 불태운다고 나간 지 오래.
아린이랑 데이트하느라 룸메이트들과 잘 안 놀다 보니. 오늘은 약속이 없음에도 자기를 빼고 놀러 간 것이다.
"그래도. 노마크 딸찬스…!"
간만에 화장실이 아닌 침대 위에서의 프리한 딸찬스. 노트북이 켜질 동안 문을 잠그고 휴지와 물티슈를 세팅한 다음 아린이 컬렉션을 켰다.
아린이의 은꼴로 예열을 한 뒤. 처녀막을 보여주는 음란한 모습으로 딸을 잡을 계획.
아린이는 공부하고 있다고 메시지가 뚝 끊겼기에. 지금 같은 노마크 딸찬스는 일주일에 한 번 올까 말까 하는 소중한 골든타임이었다.
콧노래를 부르며 바지를 내리는 찰나.
침대 위에 대충 던져놨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 시발. 타이밍 뭔데."
엉덩이를 반쯤 깐 상태로 휴대폰을 확인하니. 백진희가 보낸 메시지였다.
[아카데미 식당 앞으로 나와]
[ 왜 ㅇㅅㅇ???]
[나와]
[나 바빠 공부 중 ㅇㅂㅇ!]
대충 둘러대고 팬티까지 내렸는데.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사진)ㅇㅇ]
귀찮아서 대기화면에 뜬 글만 봤는데. 백진희가 사진을 보냈다. 갑자기 사진을? 궁금하잖아.
메신저를 열어 백진희가 보낸 사진을 확인한 김성현은 휴대폰을 침대로 떨궜다.
"뭐, 뭐야 시발."
잘 못 본 건가? 자기 눈을 의심하고 다시 휴대폰을 들어 사진을 확인했다.
아린이의 엉덩이를 쓰다듬는 듯한 모습으로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기한신과 아린이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
[너 이거 뭐야?]
[나와 ㅋ]
황급히 바지를 올리고 노트북의 전원을 껐다. 아린이가 설마 자신을 속이고 기한신과 그렇고 그런 관계일까…?
믿기지 않는다. 아린이는 분명 자신을 좋아하는 게 티가 많이 날 정도로 부끄러워하는데. 그게 연기였다고?
백진희가 말한 식당은 남, 여 기숙사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어 만나기 편한 장소였다. 내부에는 편의점과 여러 편의시설도 존재해 많이들 이용했다.
식당 앞으로 달려 나가자. 근처 벤치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휴대폰을 보고 있는 백진희가 보였다.
"야…! 헉, 헉. 백진희!"
오래간만에 운동해서 그런가. 심장이 무척이나 화를 낸다. 평소에 안 하던 짓 하지 말라며. 거칠게 뛴다.
"앉아."
"사진 뭐야 도대체!"
"앉으라고."
서늘한 백진희의 목소리에 조금 흥분했던 감정이 누그러졌다.
이게 상대방이 너무 침착하게 반응하면. `내가 좀 오버하는건가`싶은 어색한 기분이 들기도 하니까.
백진희의 옆에 착 달라붙자. 서서히 미간이 좁혀지기에. 슬쩍 거리를 벌리자. 다시 고운 미간으로 돌아왔다.
"아린이가 너를 사랑하는 거. 잘 알고 있지?"
"응. 당연하지. 내가 왜 모르겠어."
그 대답에 백진희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백안을 마주했다.
"그럼 너도 아린이를 그만큼 사랑해?"
"당연하지! 난 항상 진심이었어!"
"아린이를 위해서 뭐든 할 수 있어?"
백진희의 말에 조금 당황해 말을 멈췄다. 뭐든 이라는 말은 조금 범위가 넓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 점점 서늘해지는 백진희의 눈빛에 황급히 대답했다.
"당…. 당연하지! 나를 뭐로 보고!"
"그럼, 사진에 관해 설명해줄게. 나도 확실히는 몰라. 아린이가 나한테도 다 말해주지는 않았으니까."
조금 씁쓸하다는 듯이 입을 여는 백진희의 모습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진실이 무엇일까. 자기 머리에서 떠오르는 최악의 상황만 아니었으면 했다.
"아린이…. 협박 받고 있어."
"뭐…?"
잊고 있던 망상이 떠올랐다. 비밀 연애를 들켜 선생님에게 협박당해 몸을 허락하
"아직은 기한신이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 아린이 아직은 처녀야."
백진희의 이어진 말에 조금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거 다행 잠깐 아직은 처녀?!"
백진희가 흘린 떡밥을 귀신같이 낚아챘다. 아직은 이라니?
"김성현 너. 이번 등급시험에서 좋은 성적 못 받으면 유급당할 수 있다며?"
백진희의 말에 고개를 돌려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1학년 첫 등급시험에서 유급을 당하는 학생은 대부분 거름망에서 걸러지지 못한 폐급들.
물론 재시험을 통해 유급에서 벗어날수 있지만. 애초에 유급을 당하는데 재시험을 통과할리가 없다.
유급당하는 숫자도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고. 거의 전통이나 다름없이 유급당한 인원은 자퇴하거나 퇴학엔딩이었다.
운 좋게 초월 아카데미에 입학했지만. 확실히 공부와 재능의 차이는 자신의 노력으로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너 공부도 안 하고 배정받은 훈련 카드 하나도 안 썼지?"
백진희의 말에 할 말이 없었다. 변명 같지만 아린이와 데이트하느라 훈련할 짬이 안 났다. 진짜로.
데이트를 끝내고 피곤한 몸으로 훈련장에 들어갔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오히려 안 좋으니까. 몸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는 어쩔 수 없었다.
언제 신아린과 섹스할 줄 모르는데.
"조금은 그래도 노력하고 있긴 해…."
"아린이가 너 유급할까 봐 엄청 걱정하는 건 알아?"
조금 많이 미안했다. 몇 번 유급당하는 거 아니냐며 공부 도와주겠다는 아린이의 말을 거절하고 데이트나 하자고 꼬셨었는데.
아린이는 남자친구의 앞날이 걱정되었던 걸까. 아니면 남자친구가 유급당할까 부끄러웠던 걸까? 잘 모르겠다….
"네가 유급당할까 봐 걱정하는걸. 기한신이 눈치챘어."
"...기한신이?"
갑자기 자신의 유급 얘기에서 기한신이 왜 나올까.
"기한신이 아린이에게 네가 유급당하지 않게 도와줄 테니 자신의 `도서`일을 도와달라고 제안했고. 아린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어."
`도서`라고 강조하는 목소리에 아린이와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느날. 기한신의 호출을 받고 1시간 동안 보이지 않다가 흐트러진 모습으로 나타난 신아린.
그때 `도서`일을 도왔다고 했었는데….
"그 `도서` 일이라는 게 혹시….`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야. 정말로 전투이론에 관한 자료들을 찾는 일이지."
백진희의 말에 일단 긴장이 풀렸다. 자신이 생각하는 19세 이상의 수위가 아니라면 일단은 안심이다.
"그런데 기한신이라면 말이 달라지지."
"어…?"
마치 긴장을 놓치지 말라는 듯. 서늘한 목소리에 다시 긴장감이 들었다.
백진희 조금 서바이벌 MC 스타일 일수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게 능숙하다.
"기한신은 지금 계속해서 아린이에게 집적대고 있어. 너를 빌미로 부탁하면서 엉덩이를 쓰다듬거나 뒤에서 껴안거나. 조금씩 선을 넘고 있지."
그렇게 말하며 백진희가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아린이를 뒤에서 끌어안고 목덜미에 자기 얼굴을 묻고 있는 기한신의 모습에 화가 났다.
"이 미친 새끼가…."
"아린이는 너를 위해 멍청하게 참고 있어."
"넌 뭐 했는데 안 말리고? 당장 말려야 할 거 아냐 그럼!"
평생 친구니, 뭐니 하던 애가. 친구가 성추행당하고 있는데 그걸 사진만 찍고 있어?
"말려봤어. 화도 내봤고. 그런데 아린이는 자기가 버티면은 너한테 좋을 거라고 괜찮다고 거절하더라."
씁쓸하다는 듯이 말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화가나 벤치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올렸다.
화가 치민다. 자신이 뭐라고 신아린은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아린이에 대한 미안한 감정과 자신을 걱정하는 걸 알면서도 게임과 노는 것에 열중했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김성현은 화가나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기한신은 학교라서 그런지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선을 넘지는 않았어."
"...시발 뭐가 다행이야 그게."
기분이 아주 좆같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린이한테 당장 전화해서 따져야 할까. 지금 신아린의 목소리를 들으면 분노가 폭발할 것 같아. 또 아린이에게 상처를 줄 말을 할 것 같았다.
"어제까지는 말이야."
"뭐?"
"어제. 기한신이 모텔로 신아린을 불렀어. 그것도 나 몰래."
백진희의 말에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자신이 사준 옷을 입고 있는 여자와 모텔이 있는 거리로 들어가던 기한신의 모습.
그게 정말….아린이였다고?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어깨를 끌어안고 억지로 모텔 쪽으로 끌고 가는 듯 보였던 기한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잠깐 너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구실로 아린이를 불러낸 거야. 아린이는 그런 것에 면역력이 없으니. 순진하게 믿고 따라갔다가 눈치챈 내가 막아서지 않았다면 큰일 날뻔했어."
"기한신 이 씨발놈."
다시 자리에 앉아 이를 갈았다. 내 여자친구의 처녀를 노리는 선생이라니. NTR야겜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
백진희의 말대로 신아린은 성 쪽에 있어서는 조금 무지한 것 같았다. 물론 어제 청소펠라를 해주는 모습은 평소에는 보여주지 않았던 색다른 모습이라 더 꼴렸던 거지만.
자신이 어떻게든 설득하고 구슬리면은 결국 못 버티고는 무리한 부탁을 받아주는 게 아린이었다.
모쏠아다였던 자신조차 쉽게 아린이를 구슬려 보빨을 했는데. 기생 오라버니 같이 경험 많아 보이는 기한신이라면.
신아린이 정조를 잃는 것은 시간문제.
"어제 아린이가 한 말 기억하지?"
"어제…?"
"너에게 처음을 주고 싶다는 말."
"기, 기억하지."
백진희, 아니 이제는 여사친이라고 해도 되려나? 여친 친구인 여사친과 여친의 처녀를 주제로 얘기하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말은 진심이야. 아린이는 옆에서 보는 내가 느낄 정도로 정말로 널 사랑해. 그런데 기한신은 널 위해서라면서 자꾸 아린이를 설득하고 있고."
"...어떻게 해야 좋을까. 신고할까?"
"아니. 이런 사진 증거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알잖아. 선생들 철밥통인 거."
"그렇지. 개새끼들."
큰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은 대부분 감봉이나 한두 달 정직 처분일터.
"그리고 차성에 이 일이 알려진다면 아린이의 후계자에 대한 말이 나올 거야."
"어…?"
생각지도 못했다. 이미 후계자로 확정된 거 아니었나?
"아무래도 내부에는 고작 아카데미 1학년생이 후계자라는 것에 반발이 있으니까. 후계자의 자격을 운운하며 안 좋은 여론을 만들고 있는데. 이런 기회가 생긴다면 곧장 공격하려 들겠지."
"그렇구나…."
아린이는 차성의 후계자일 때가 가장 사랑스럽다. 데이트 비용도 선뜻 내주고. 가끔 비싼 선물을 주기도 하고.
데릴사위를 목표로 하는 나에게 여자친구의 집안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일이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린이를 붙잡고 설득해야 할까.
`난 괜찮아! 그런 짓 안 해도 돼!`
알겠다고 하고는 또 기한신이 `유급` 들먹이며 협박하면 버티지 못하고 도서 일을 도와주러 가겠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뭘 한 거냐 김성현.`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 하나 못 지키면서. 영웅 지망생이라니.
이런 우스운 꼴도 없을 것이다.
초월 아카데미에 들어오면 이전까지 있었던 생활을 버리고. 새 출발을 하기로 결심했었는데….
중학교 때와 달라진 건 여자친구가 생긴 것 말고는 전혀 없었다.
"기한신이 네 여자를 노리고 있는데. 가만히 기다리다가 신아린을 뺏길 거야?"
"어…. 어떻게 해야 하는데? 좋은 방법 있으면 알려줘 진희야. 부탁할게."
자신의 대답에 묘한 장난기가 섞인 미소를 짓는 백진희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저절로 침이 삼켜졌다. 생각해보니 단둘이 밤에 이렇게 벤치에 앉아 대화하고 있다니.
남이 보면 오해할만한 상황 아닐까.
나에게는 꽤 괜찮은 오해겠지만.
`확실히 밤에 보니 더 예쁘네.`
"내게 좋은 방법이 하나 있어. 신아린은 너의 유급 때문에 기한신의 말을 거부하지 못하는 거잖아?"
"그….렇지."
"네가 지금이라도 노력해서 유급에서 벗어난다면 아린이는 너에 대한 걱정을 접고 기한신의 말을 들을 이유도 사라져."
백진희의 말은 옳다. 하지만 이제 곧 등급시험이 시작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는 상황에서 저 조언은 쓸모없었다.
"이제 곧 등급시험인데. 내가 오늘부터 노력한다고 되겠어?"
"결심해. 아린이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다고. 그래야만 할 수 있는 방법이야."
"아린이를 위해 뭐든지 할게."
아린이의 처녀도. 차성도. 모두 포기할 수 없다.
이제는 자신이 바뀔 때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심한 자신을 보고 믿음이 갔는지. 백진희는 따라오라며 어디론가 향했다.
백진희의 뒤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 본관으로 들어왔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기에 8층까지 백진희를 따라 올라갔다. 헥헥 대는 자신과 다르게 숨 한번 안 흐트러진 백진희가 조금 신기했다.
`이럴 거면 엘리베이터 타지.`
"이곳에 숨겨진 비밀의 방이 있어."
"어? 뭐. 해리포터 같은 거?"
그 말에 비웃는 듯이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백진희가 돌아서 시선을 마주했다.
"시키는 대로 하기나 해."
그 서늘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백진희의 지시에 따라. 큰 거울 앞에서 백진희의 지시에 따라 이곳저곳 움직였다.
"이제, 뒤돌아보지 말고 뒤로 2걸음."
백진희의 말에 순순히 뒤로 2걸음 물러서자. 무언가 천 같은 것이 등을 스치고 지나가 조금 소름 끼쳤다.
조금 무서워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백진희의 말대로 정말 아카데미 안에는 비밀의 방이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