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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26화 (26/160)

〈 26화 〉 RESET

* *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지 모를 정도로.

한참을 울던 나는. 누군가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다.

남자화장실이기에 혹시 남자가 들어온 걸까. 급히 대변기 문을 닫으려는데.

문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여 손을 멈췄다.

"아린아. 여기 있었어?"

"진, 진희야…."

걱정하는 얼굴로 다가온 진희는 내 상태를 살피듯 이리저리 나를 관찰하고는. 나를 진정시키려는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힘든 일이 있는 거야?"

진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눈물이 더 흘러내렸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외하고 가장 나를 아껴주는 진희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미, 미안해 진희야…. 내가 꼭 다시 평생 친구 할 수 있게 노력할게."

울먹거리며 말하는 나를 보던 진희가 자신의 품에 꼭 끌어안아 주고. 어린아이를 달래듯 내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줬다.

"왜 그런 소리를 해 아린아. 우린 계속 친구일 거잖아?"

"아니…. 내가 너를 배신했어."

"배신…?"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는 진희에게 곧 입학식으로 돌아간다는 안일하고도 무책임한 마음에 감정에 휩쓸려. 나는 하지 말아야 할 말도 내뱉었다.

"나 입학식으로 회귀할 거야. 얼마 안 남았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린아?"

"나 자, 자퇴하면…. 입학식을 하는 순간으로 돌아가."

그 말에 진희는 내 말이 장난처럼 들렸는지. 눈물을 닦아주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 말했다.

"아린이 사춘기야?"

"아,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왜 입학식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데?"

"그, 그건…."

기한신에게 당했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당했던 일을 안다면 진희는 분명 마음 아파할 테니까.

차라리 나 혼자 안고 가는 게 나았다.

"말 못해…."

내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진희가 등을 어루만져주던 손을 멈추고. 내 뒷목에 올리고는 서늘한 손으로 쓰다듬어주었다.

조금 흥분했던 감정이 다스려지는 것 같아 거칠었던 호흡이 한결 나아졌다.

"아린아. 조금만 진정하고 나한테 말해봐. 무슨 일 있으면 숨기는 거 없이 나한테 전부 말해주기로 약속했잖아."

진희의 말에 죄책감이 커졌다. 진희가 나를 탓하는 게 아님에도. 나는 진희와 했던 약속을 어겼으니까.

"저번에 말했지? 항상 들어주겠다고."

진희는 나를 끌어안은 손을 풀고는. 마치 유치원생을 설득하는 선생님처럼 무릎을 굽혀 나와 시선을 마주하며 따듯하게 말했다.

그 따뜻한 시선과 진희의 배려를 결국 이기지 못하고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기한신 때문에…."

"기한신? 우리 담임?"

"응…. 기한신…. 미친놈이야."

내 말에 진희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듯 미간을 좁히더니. 몸을 일으켜 나를 내려다보며 허탈하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아. 그 새끼를 잊고 있었네."

진희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얼어붙은 듯. 방금 들은 말이 내 복잡한 감정 때문에 들린 환청인 건가 고민했다.

진희가 그런 말을 한다는 건 너무 현실성이 없는 상황이니까.

"...그래서? 기한신이 너한테 뭐했어?"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 다시 밝게 펴지며 따뜻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분명.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나 스토킹해서 몰래 사진 찍고 체육복도 훔치고. 체벌이라고 엉덩이가 터질 때까지 때리고. 젖, 젖꼭지도 꼬집고. 내가 다른 사람한테 이 사실 말할까 봐 협박하려고 내 심장에 고대 벌레도 넣어놨어."

기한신과 있었던 일을 떠올려서인지. 아니면 진희 목소리를 닮은 환청 때문인지. 심장이 크게 뛰어 계속 말을 더듬었지만, 최대한 내가 겪었던 일을 설명하자.

내 말을 들은 진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무어라 혼자 중얼거렸다.

"...개조..."

잘 들리지 않았기에 빤히 쳐다보자. 내 시선을 느낀 진희가 더 할 말 없느냐는 듯. 날 바라보기에. 머리를 굴려 기한신과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봤다.

"...그러고 매일 자기한테 살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으면 심, 심장에 있는 벌레가 깨어나서 심장을 갉아먹을 거라고 협박했어."

"글뤼시구나?"

"어? 으, 응. 어떻게 알았어 진희야?"

"아, 그냥. 들어봤어."

진희는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어 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글뤼시에대해 알고 있는 걸까? 진희는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웃으며 내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그래서 기한신때문에 입학식 날로 돌아가고 싶었던 거야?"

"...응. 분명 이상한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거니까."

"그냥 입학식 날로 돌아가고 싶었던 건 아니고?"

"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던 진희의 손이 점점 차갑게만 느껴졌다.

마음을 달래주던 목소리도 왜인지 모르게 서늘하게 느껴져. 조금 겁이나 몸을 움츠리자 진희가 시선을 내리깔아 나를 내려봤다.

"아린아. 내가 저번에 말했지? 포기하면 끝나는 거라고."

진희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봤다. 생존 실습 날. 진희가 포기하지 않게 옆에서 도와줘서 파툴가의 마법 장갑을 찾았던 날.

진희는 포기하려는 나를 격려해주기 위해 그런 말을 했다. 그 말 덕분에 포기하지 않고 파툴가의 마법 장갑과 생존실습에서 만점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기억나. 그때는…. 고마웠어."

"기한신에게 못 벗어날까 봐. 나랑 성현이를 포기하고 입학식 날로 돌아가려 한 거야?"

실망이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보는 진희의 모습에. 덜컥 심장이 아파져 왔다.

"그, 그런 거 아니야! 나도 돌아가기 싫단 말이야…."

"정말? 자퇴서까지 내고서는 이제 와서 돌아가기 싫어?"

약간 내 말을 비꼬듯. 말하는 진희의 모습에 곧장 변명했다.

"너랑 성현이가. 나한테 너무나 중요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근데…. 어쩔수없잖아. 이미 저질렀는걸."

"만약 오늘 아침으로 돌아간다면 자퇴 안 할 거야?"

"응…. 지금도 많이 후회하고 있어. 그냥 솔직하게 너한테 말해서 방법을 먼저 찾아봤어야 했는데."

"맞아. 그래도 괜찮아. 앞으로 나한테 뭐든지 물어보고 하면 되니까."

귀여운 동물을 만지듯 즐거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계속 내 귓불을 만지는 진희의 손길에.

부끄러워져 시선을 내리깔자. 진희의 백안이 나를 뚫어져라. 내려보는게 느껴졌다.

진희를 속인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에. 미안한 마음에 변기에 앉은 채 고개를 들 수 없어 푹 숙이고 있자. 나를 침묵한 채 바라보던 진희가 무언가로 내 뺨을 툭­툭­ 쳤다.

뭔가 싶어 살짝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진희는 종이를 봉처럼 말아 내 뺨을 건드리고 있었다.

"이게 뭘까?"

씨익 밝은 미소로 진희는 종이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손에 든 종이를 확인하자. 나는 놀라 그만 종이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왜…. 이걸 네가?"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 멍청해진 머리가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고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정해주지 않아 종이를 떨어트린 그 모습 그대로 얼어붙어 진희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만 봤다.

진희는 땅에 떨어진 종이…. 아니, 내가 작성한 자퇴서를 다시 주워. 내 손에 꼭 쥐여주었다.

"친구가 포기하게 둘 수는 없잖아?"

밝은 미소로 말하는 진희의 모습에 뒷목을 바늘로 긁는 듯한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오한이든 것처럼 몸이 떨려왔다.

"뭐, 뭐가 어떻­"

"쉿. 아린아."

내 말을 끊고는 손을 올려 내 뒷목을 쓰다듬으며 진희가 얼굴을 가까이하고 속삭였다.

"나한테 이제 거짓말하면 안 돼. 알았지? 그러면은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거든. 내 마음이 아프면 아린이 너는 절대 못 견디잖아. 그렇지?"

"응. 못 견뎌."

진희의 말에 숨이 가빠졌다. 머리가 몽롱해졌다. 진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건 생각만 해도 너무 싫다.

"괜찮아. 지금은 하나도 마음이 안 아프니까. 아린이 네가 앞으로 나한테 사실대로 말해주기만 하면 돼."

"알았어. 약속할게."

당연히 그래야지. 더는 진희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싶진 않다.

나를 내려보던 진희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김성현을 사랑하지?"

"어?"

"성현이 사랑하잖아. 아린아."

마치 강요하듯. 내게서 원하는 답을 들어야겠다는 분위기로 내 뒷목을 주무르며 물었다.

내가 김성현을 사랑하는 걸까?

나도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냥 같이 있고 싶고. 헤어지기 싫은 친한 친구 같은 느낌인데.

키스하고 싶고 같이 자고 싶은 그런 성적 욕구는 전혀 안 드는데.

이걸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가 있을까.

"모, 모르겠어."

"왜? 왜 모르겠는데?"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진희는 나를 추궁했다.

"그냥 뭐가 사랑인지 정확히 모르겠어…."

"흐응, 그렇구나."

조금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내 목에서 손을 떼고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던 진희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속삭였다.

"그럼 성현이한테 미안해?"

"응…."

김성현한테 정말 사과받지 못 할 짓들을 많이 했으니까. 내 이기주의 때문에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한 성현이를 볼 때마다.

가슴을 쿡쿡 찌르는 죄책감이 미안함의 증거였으니까.

"미안해서 막 잘해주고 싶지?"

"응. 내가 잘못한 거니까."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기 위한 나의 위선적인 역겨운 행동이긴 하지만.

"아니야. 아린아. 네가 잘못해서 잘해주고 싶은 게 아니라…."

진희가 내 말이 틀렸다는 듯이 길고 흰 검지를 내 눈앞에 흔들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서잖아?"

"응? 그, 그런가…?"

가슴을 쿡쿡 찌르던 감정이 죄책감이 아니라. 사랑이었던 걸까?

진희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맞아. 나는 김성현을 사랑하­

내 ■■■■ 나■­!!!!!

"맞아. 성현이에 대한 미안함, 후회, 죄책감. 그런 건 다 성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잖아? 너는 성현이를 사랑하고 있어."

머리를 가득 채우던 죄책감과 후회가 옅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음에 박혀있던 감정의 파편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한다.

난 김성현을 사랑하는구나.

드디어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김성현을 바라볼 때 느꼈던 죄책감과 미안함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잘해주지 못한 마음이었다.

왜 그 사실을 진희가 말해줄 때까지 몰랐을까? 나는 참 바보 같다.

차가운 손길이 내 뒷목에 닿았다. 싸늘한 소름이 허리를 타고 뒷목까지 찌르르 올라왔다.

"아린아. 성현이가 하는 행동은 무조건 믿어야 해."

믿음이 가는 행동을 많이 한 적은 없지만. 믿고는 싶었다.

그래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응. 무조건 믿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진희는 잘했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린이는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내가 아린이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 데."

"응. 항상 고마워 진희야."

정말로 내 인생에서 진희 너는 축­

바아아아아아아아아아알녀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언­­­

잠시 멍하게 있다가 진희가 내 뺨을 툭툭 쳐줘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린아. 나한테 항상 진실만 말해야 하는 거 잊지 않았지?"

"응. 절대 거짓말 안 해."

"아린이는 그럼 몇 살이야?"

"나? 나는 당연히…."

■■살 ■■ ■■■■ ■■ ■자.

한■■.

그게 내 ■■이다.

차가운 손길에 마치 꿈에서 깬 것처럼 눈이 떠졌다.

"아린아? 피곤해?"

"아니야. 그냥 기분이 이상해."

"그래? 그럼 마저 대답해줄래? 아린이는 몇 살이야?"

"당연히 17살이지. 너랑 동갑이잖아."

너무 당연한 걸 묻는 진희의 말에 또 장난인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자. 진희는 귀엽다는 얼굴로 나를 끌어안아 줬다.

"김성현이 해달라고 하는 거. 못이기는 척 다해줘. 연인이면 그게 당연한 거야. 딱 한 가지만 빼고."

"어떤 거?"

"김성현이 아카데미 졸업식 전날까지 절대 동정을 잃지 않게 해야 해. 약속할 수 있지?"

"응. 당연하지 원래 그러려고 했어."

어차피 나도 그럴 예정이었으니까. 김성현의 동정 탈출을 막는 것이 최우선.

"왜? 왜 김성현의 동정을 막으려 했어?"

진희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 이유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뭔가. 중요한….

"내가 조언해줘서 그런 거잖아~ 그렇지?"

"아. 맞아. 진희가 조언해줘서 그랬어. 잘했지?"

"아린이~ 너무 착하다. 앞으로 김성현이 사랑한다고하면 너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솔직하게 답해줘. 그게 예의야. 다른 연인들처럼 데이트도 하고. 추억도 쌓아. 김성현의 동정만 지키는 선에서. 알았지?"

"응. 알았어!"

소중하다는 듯 날 끌어안아 쓰다듬어주는 진희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향이 너무 좋았다.

묘한 중독성이 있는 이 냄새를 계속 맡고 싶었다.

한참을 진희의 품에 안겨 얼굴을 박고 있자. 진희가 내 정수리를 만지며 말했다.

"이제 입학식으로 돌아가는 건 금지야.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응. 알았어. 이제 힘든 일있어도 포기안하고 진희에게 먼저 물을게!"

이렇게 나를 응원해주는 평생 친구가 있는 데. 왜 포기를 할까.

"그래. 그럼 이제 아린이 너는. 성현이가 기한신에게서 너를 구해줄 때까지…."

진희는 말을 멈추고 내 양 볼을 감싸며 차디찬 백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내 귀에 작게 속삭였다.

"기한신한테 몸이라도 대주고 있는 게 어때?"

진희의 진심 어린 조언에. 나는 마음이 따듯해졌다. 자신을 두고 회귀하려 했던 나를 탓하지도 않고 이렇■■■■..

"알았어. 고마워 진희야. 이런 말도 해주고…. 항상 고마워."

"오늘 일은 우리 둘만의 비밀이야. 절대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김성현한테도 알지?"

"응. 당연하지. 나는 김성현보다 네가 1순위니까. 항상 진희 먼저 생각할게."

"그래 착하다. 똑똑하기도 하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진희의 손길이 중독될 것 같았다. 더 쓰다듬어줘도 되는 데.

"알아들었으면 교실로 돌아갈까?"

진희의 서늘한 목소리에. 나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주말에 약속대로 맛있는 거 먹자."

환한 미소로 변기에서 일어나 진희에게 말하자.

진희는 언제나처럼 차가운 얼굴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평소같이 기쁜 미소를 지으며 진희의 팔짱을 꼈다.

다시 일상이 돌아온 것 같아.

너무나 기뻤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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