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추궁
* * *
사람이 적고 괜찮아 보이는 카페 안에 들어온 우리는 각자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무언가 불편한 침묵을 유지한 채.
서로의 맞은편에서. 생각에 잠긴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혹시 기한신이 지금도 이 모습을 지켜보는 거 아닐까 하는 불안함에 주변을 둘러봤지만.
카페 안에는 손님도 적었고 혼자인 손님도 여자거나 나머지는 커플이었기에. 조금은 불안감을 지울 수 있었다.
테이블 위의 진동벨이 울리자. 김성현이 받아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에 쓰지도 않을 냅킨을 잔뜩 가져오던 김성현이 오늘은 음료가 담긴 컵 2개만 달랑 가져왔다.
가져다준 것에 고마워하자. 김성현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평소의 호들갑 떨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에. 김성현의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알았다.
1시간 넘게 기다린 것 때문에 그런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에서일까.
이를 꽉 깨물고 있는 것인지.
김성현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시시각각으로 다양한 표정을 보이는 김성현을 가만히 관찰하자.
순진해 보이는 눈망울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툭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컵 위에 생긴 물방울처럼.
무언가 말을 하는 순간. 이 기묘한 적막이 감정의 광풍으로 바뀔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에도.
나는 김성현에 대한 죄책감으로 먼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화났어?"
내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는 듯. 김성현은 자신이 주문한 청포도 에이드를 벌컥벌컥 마신 뒤에 나를 화난 표정으로 노려봤다.
"화 안나겠어?"
"미안해."
김성현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에. 오랜만에 거짓말이 아닌 진심을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기한신이 나를 자신의 개인 연구실로 부르기 전까지 나는 진희에게 "오늘은 뭔가 잘 풀리는 날 같아."라며 뒤에 닥칠 불행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긴 한숨과 함께 성현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모르겠어."
그 말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김성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자리에 앉았다.
평소라면. 연인처럼 보일까 봐 옆자리에 앉고 싶어도 참았던 김성현이었지만. 오늘은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는 듯이 옆에 가까이 앉아 투명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는 것 같아."
김성현의 말에 동감했다. 신아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에 신아린에 관한 얘기를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26살의 한성진에 대해 알려줄 수도 없으니.
나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대화를 주도하는 건 대부분 김성현이었고.
알기 싫은 TMI까지 방출하는 것도 김성현이었다. 나는 그저 듣기만 할 뿐.
항상 밀어내는 나와. 자신의 품 안으로 당기려 드는 김성현.
오늘의 잘못과 겹쳐져.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에 대해 알고 싶은 거 있어?"
"많아. 알고 싶은 거 물어보려면 하루도 부족할걸."
진지한 목소리의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나는 잠시 마음이 흔들리는 듯한 묘한 기분에 입을 다물었다.
김성현의 이런 모습이. 나는 싫었다.
텅 비어있는 내 마음에. 진심이라는 감정을 담아 휘두르는 말은.
양심의 가책인지. 단지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심에 대한 저항인지.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마음에 새기곤 했으니까.
"나한테 숨기는 거 있지."
김성현은 내 손을 붙잡고 애원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어 침묵을 택했다.
숨기는 게 너무 많았으니까.
동정을 상실하면 능력을 각성한다는 것을 막으려는 것과. 그것 때문에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한 것.
사실은 내가 남자라는 것부터.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너를 버릴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까지.
지금 자신이 잡은 손의 주인이.
사실은 거짓말 자체라는 것을 김성현은 눈치챈 걸까.
내 침묵에 김성현의 눈에 의심의 눈빛이 짙어졌다.
"대답해봐. 숨기는 거 있지."
"아니. 없어."
자존심인 걸까. 진실을 말해달라는 애원 어린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또다시 거짓을 뱉었다.
"거짓말 하지 마."
그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내가 거짓말을 하면 티가 나는 건가 걱정이 되었다.
기한신도 내 거짓말을 간파하던데. 나도 모르는 신아린만의 버릇이라도 있는 걸까.
생각에 빠져있을 때.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정신이 들어 김성현을 바라보자.
김성현은 허벅지를 거칠게 쓰다듬더니 손을 올려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 행동에 놀라. 혹시 주변에 누가 봤을까 시선을 돌려 확인했지만.
다행인지 버릇처럼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는 내 성격 탓에.
다른 사람의 시선은 물론. 카메라에도 잡히지 않는 위치였다.
그 사실에 안도하고 있을 때. 김성현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왜 가만히 있는 데?"
대답해보라는 듯. 가슴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 아파져 왔기에 고통에 얼굴을 찌푸리자. 손에 힘을 풀어줬다.
"...미안해서. 이제 미안한 거 끝이야."
그렇게 말하며 가슴에서 손을 떼내자. 김성현이 키스하려 얼굴을 들이밀었다.
본능적으로 다가오는 입술을 피하자. 김성현의 얼굴은 더욱 화가 나 일그러졌다.
"뭐가 미안한데."
"너 기다리게 한 거."
그것 말고도 미안한 것은 많았지만. 김성현이 지금 화난 이유는 이것 때문이겠지.
"그거 말고. 다른 이유잖아."
내 생각을 비웃듯. 김성현은 나를 위협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이유 없어."
내 대답에 짜증이 났는지.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음료를 마셨다.
그걸로는 성에 안 찼는지. 뚜껑을 열어 얼음까지 씹어먹는 모습을 보며.
그럼 도대체 왜 화가 난거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김성현이 화낼만한 상황은 그것밖에 없을 것 같은데. 혹시 내 과거의 잘못들 중 하나를 알아낸 건가?
"왜 그렇게 화가 난 건데."
화를 풀어주기 위해 이번엔 내가 김성현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평소였다면 내 스킨쉽에 놀라 하며 눈이 동그래졌을 김성현일텐데.
화난 얼굴의 김성현은 쏘아붙이듯 나에게 말했다.
"너. 담임 좋아해?"
"뭐?"
"담임한테 마음 있냐고."
김성현의 말에 당황스러워 말문이 막혔다.
기한신을 좋아하냐고? 기한신에 대한 생각은 오늘 종례 전까지만 해도. 그저 담임선생님이었을 뿐이었다.
김성현과 기한신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도 없고. 다른 여자애들처럼 기한신에게 관심이 있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는데.
김성현은 어째서 그런 의심을 하는 걸까?
혹시 기한신이 나한테 한 짓을 눈치챈 걸까?
불안한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너 좋아하잖아."
"거짓말하지 말고!"
발작하듯 소리 지르던 김성현은 씩씩대며. 말을 이어갔다.
"너 오늘 진짜 뭐했어."
"...너랑 같이 있잖아."
"기한신이랑 뭐했냐고!"
그 말에 김성현의 의심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빈약한 내 변명과 같던 거짓말에 위화감을 느낀 거겠지.
그렇지만. 사실대로 김성현에게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럴 마음이 있다해도 털어놓을 수 없을 만한 사정이 있었으니.
"아까도 말했잖아. 도서 일을 도왔"
"교복이 그따위로 될 정도로 격하게 도왔나 보네?"
김성현은 내 말을 자르며 구겨진 자국이 있는 블라우스를 가리켰다.
내 눈에도 평소와는 다르게 많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매일같이 고생해주는 임유모덕에 주름 하나 없이 항상 단정하게 입을 수 있도록 깔끔하게 다림질한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카펫에 구르고 강제로 눕혀지다 보니. 종례 전까지 깔끔했던 블라우스는 온갖 모양으로 구겨져 주름져있었다.
그 모습에 평소에도 나를 신기하다는 듯 관찰하던 김성현이라면 위화감을 느낄 만 했다.
그런데도 나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것 뿐이야."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 도서 일이었다며. 지금 네 말이 앞뒤가 맞다고 생각해?"
집요한 추궁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앞에 있었던 일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김성현마저 피곤하게 만들다니.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상한 의심 하지 마. 기한신은 담임선생님이고 나는 그냥 학생일 뿐이야."
"의심스러운 행동을 했잖아."
"...그럼 계속 의심하든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성현이 내 팔을 붙잡고 억지로 나를 다시 앉혔다.
"피하는 거야?"
"피하는 게 아니라. 이런 의심 받는 게 싫은 거야."
김성현이 말이 맞지만. 나는 오히려 김성현을 탓했다.
"넌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거야?"
"내가 왜 믿음이 없어."
"지금 의처증같이 행동하잖아."
내 말에 화가 난 듯 김성현은 상체를 나에게 들이밀며 위협하듯 내 어깨에 주먹을 올렸다.
"씨발. 네가 의심하게 행동했잖아."
화를 억누르며. 욕을 내뱉는 김성현의 감정적인 모습에.
나는 오히려 말꼬리를 잡을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나한테 더 욕 안 한다고 약속하더니. 또 약속 어겼네."
"그게 중요해?"
"응. 그게 중요해. 나는 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항상 노력하고 있어."
김성현을 바라보며. 차라리 대화 주제를 벗어나 말싸움을 하는 게 나을 거라는 계획을 세우며.
나는 김성현이 화가 날 만한 말들을 골라 말을 이었다.
"너는 항상 쉽게 약속한다고 말하고는. 지키려고 하질 않아. 그런 모습에 너에 대한 믿음이 안 가. 나는 너와의 약속을 어긴 적이 없는데. 너는 나를 이유 없이 의심하고 욕했어. 그런데도 그게 안 중요하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다면 많이 실망스럽네."
"씨발 내가 언제 약속을 안 지켰어? 솔직히 욕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리고 네가 묻는 건 기한신이랑 뭐했냐고 지. 너랑 나에 관해 물은 게 아니잖아."
이를 갈며 말하는 김성현을 도발하듯 비웃음이 담긴 얼굴로 답했다.
"내가 말한다고 네가 믿어?"
"믿으니까 말하라고."
"도서일 도왔어."
"씨발 거짓말하지 말고!!!"
카페 안을 채울 정도로 큰 목소리로 소리친 김성현 때문에 주의를 시키려는지 카페 알바생이 카운터에서 벗어나 모습을 드러내 시선을 보내기에.
죄송하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이자. 알바생은 내 행동의 의미를 알아채고 미소와 함께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김성현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봐. 안 믿잖아."
내 말에 화를 폭발할 줄 알았지만. 아쉽게도 김성현은 화를 참으며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상하잖아. 잠깐이라더니 1시간 동안 안보였는데. 네가 그 꼴로 나타나면. 의심이 안 들어?"
"그냥 믿어 주면 되잖아."
"믿을 상황이 아니잖아!"
"상황을 믿지 말고 나를 믿어주면 되잖아."
대화가 평행선을 이룬다. 차라리 이게 좋다. 진실을 아는 것보다. 말이 통하지 않아 나에게 답답해하는 게.
김성현과 나에게 더 좋았다. 양심의 가책과 죄책감은 내가 혼자 짊어지면 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김성현을 바라보자. 김성현은 내 어깨에 올려놨던 주먹을 펴고 내 어깨를 쥐며 물었다.
"너. 담임이랑 섹스했어?"
"뭐?"
정말로 그 말에 어이가 없어. 멍청하게 되묻자. 김성현은 확신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섹스했지?"
"미친놈…."
김성현의 모습에 내 안을 채웠던 미안함과 죄책감이 순식간에 혐오와 역겨움으로 변했다.
"대답해봐. 섹스했어 안 했어."
"미친 소리 좀 그만해. 너랑 혼전순결 약속하고 담임이랑 섹스했냐고? 그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 말에 김성현도 조금은 당황한 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김성현은 다시 화난 표정으로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히 네가 처녀인지 아닌지 나도 모르는데. 혼전순결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김성현의 그 말에. 어째서인지 나는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분명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대인데. 왜 저 말에 이리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걸까?
"말했잖아. 병원에 가서 분기마다 처녀인 것을 확인 받아야 한다고."
내 감정을 숨기고 거짓을 말했다. 김성현을 속이기 위해 말했던 거짓말.
차성에서는 그런 검사 따윈 하지 않았다. 단지 김성현과 혼전순결 약속을 받기 위한 내 거짓말이었을 뿐.
그렇지만 처녀인 것은 사실이다. 영또플에 나오는 히로인들은 소니아 같은 성과 관련된 마인을 제외하고는 처녀였으니까.
"그 말이 구라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믿지 마 그럼."
더는 김성현의 화를 받아주기 싫었다. 나도 짜증을 내며 얼음이 녹아 밍밍해진 커피를 마셨다.
"아 씨발 진짜…."
욕을 하며 중얼거리던 김성현은 내 어깨를 놔주고는 마른세수를 하더니 나를 노려봤다.
"솔직히 말하면 봐줄게. 했지?"
"안 했어."
진짜로. 아직 나는 처녀였다. 기한신에게 강간당할 거라 걱정했는데.
그의 특이한 성벽이 오히려 내 순결을 지켜줬다. 아직은.
그는 자신의 말대로 보험만 들어놨다. 내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지 못할 보험만.
"강제로 당한 거야? 그래서 말 못하는 거냐고."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도서일 하다가 몸을 구르기라도 했어? 교복은 왜 이런 건데."
김성현의 추궁에 할 말이 없어져 눈에 뻔히 보이는 변명을 했다.
"일하다가 이렇게 된 거 겠지……."
"씨발 그게 말이 되냐고. 걸레 년아."
김성현의 진심이 담긴 욕에 나는 서운한 감정이 더욱 커져 가슴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눈치가 빠르면. 내가 구해달라고 기도했을 때 구하러 달려오던가.
아무것도 모른 채 기다리고만 있어 놓고. 내가 정말로 필요할 때는 없었으면서.
그토록 바라던 기아스를 기한신에게 빼앗겼다는 상실감과.
기한신에게 당했던 일에 피곤한 몸을 당장에라도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컸지만.
나를 그때까지 기다려준 멍청한 너의 그 모습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돌려보내지 않고
이제는 갈 이유가 사라졌음에도 너를 위해 억지로 약속을 지키려 카페에 가기로 한 건데.
멋대로 내 허락 없이 허벅지를 만지는 것도 미안한 마음에 봐줬는데.
가슴에 복받쳐 오르는 서운한 감정을 참지 못하고 시야가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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