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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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좌석에 앉아.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봤다. 신아린이 먼저 차에서 기다리고 말한 지 30분이 넘게 지났다.
면담이 길어지는 건가? 차 안에는 어색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중년의 차기사님은 상당히 과묵한 성격이신지. 인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말 없이 운전석에 앉아있었다.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 김성현은 먼저 차기사님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그 차기사님은 차성에서 일하시는 건가요?"
"맞습니다. 차성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어른이 존댓말로 대답하는 것이 처음이었고 부담스러웠기에 김성현은 괜스레 뒷머리를 긁었다.
"말 편하게 하셔도 돼요."
"이게 편합니다. 직업병 같은 거라."
"아…."
말 문이 막혀 창밖을 바라보자. 김성현이 분위기를 깨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알았는지. 이번에는 차기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린 아가씨와는 사귀는 사이인 겁니까?"
"아뇨, 그냥 친구."
엄격한 집안 때문에 비밀 연애를 하는 상황에서. 차성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차성의 후계자와 사귀고 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린 아가씨가 친구분을 차에 태운 건 성현 군이 처음이라. 혹시나 해서 물었습니다."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신이 처음이라.
듣기 좋으라고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진짜로 기분이 좋아졌으니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생각해보니 자신은 신아린에 대해 아는 것이 적었다. 차성에 관한 것을 물어보기에는 무언가 좀 껄끄러운 느낌이 있기도 했고.
신아린이 그 대화 주제를 싫어한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기에 일부러 피하기도 했다.
자신에 관한 얘기는 잘 꺼내지 않는 신아린은. 물어보면 대답은 잘해주지만. 먼저 이렇다저렇다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그게 조금 불만이기도 했고.
이럴 때 아린이의 주변 사람들에게 정보를 얻어 여자친구를 감동하게 할 서프라이즈 이벤트를 꾸미는 것이.
이상적인 남자친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김성현은 평소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그, 아린이는 형제가 있나요?"
"형제는 없으십니다. 회장님께서 그 부분은 철저하셨거든요."
"아…."
바로 말문이 막혔다. 역시 재벌인가. 대화 주제를 조금 돌려보기로 했다.
"차기사님은 언제부터 밑에…. 아니, 그 근무를 하셨어요?"
"음, 아린 아가씨가 6살 정도 됐을 무렵부터. 전속 기사로 배정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차성에 소속된 영웅이었습니다."
차기사님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먼 곳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영웅이요? 현역?"
"그렇습니다. 당시에 A급 현역 영웅이었죠. 지금은 은퇴하고 기사 일을 하지만. 당시에는 꽤 유망주였습니다."
중년의 남자에게 그런 과거가 있다니. 조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아빠의 군 생활 사진첩을 보는 듯한 기분? 차기사님이 조금 듬직하게 보였다.
"그럼 아린이에 대해 잘 아시겠네요?"
"저보다는 임유모가 더 잘 알겠죠."
유모도 있구나. 또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기억했다가 아린이에게 물어봐야겠다.
"신기하네요. 유모라니. 진짜 재벌이 맞긴 한가 보네."
다른 학생들처럼 기숙사 생활이 아닌. 차를 타고 등하교를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돈이 많다 증거겠지만.
같은 교실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 것 때문인지. 엄청나게 차이 나는 재벌이라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물론 사람 자체가 되게 고급스러운 느낌이 있긴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일 때는 그냥 귀여워 보였을 뿐이니까.
"초월 아카데미에 입학하신 걸 보면. 성현 군도 뛰어난 영웅 지망생인 것 같습니다."
"뭐, 운이 좋았죠."
진짜로. 어떻게 내가 초월에 온 거지? 라고 종종 의문이 생길 정도로 운이 좋았으니까.
"운도 실력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성현 군도 열심히 노력하면 당당한 영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겠죠…?"
초월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것만으로도 상위 길드의 스카우트제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초라한 성적으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상위 길드는 꿈도 못 꾼다는 건 알지만.
차성이라는 거대한 배경을 가진 신아린과의 격차를 미세하게라도 줄이려면.
그래도 상위 길드에서 활약하는 현역 영웅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정도는 해야 데릴사위라도 하지.
정 안된다면 혼전임신도 생각 중이다. 임신한 후계자를 아무리 차성이라해도 매몰차게 내치지는 않을 테니까.
인터넷에서 본 건데. 콘돔을 포장지 채로 바늘로 중앙을 찌르면. 미세하게 구멍이 난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이상이 없어 콘돔을 낀 채 사정한다 해도 정액이 구멍으로 흘러나와 임신할 수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임신공격을 하려는 노처녀들을 조심하라는 남자들에 대한 경고 섞인 글이었지만.
김성현의 잔머리는 그 방법을 신아린에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로 기억 속에 남겨놨다.
자신은 신아린과의 관계에서 언제 그만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야 할지 모르는 을의 입장이고
신아린은 자신이 아니어도 잘나가는 영웅이나 재벌 후계자랑 결혼해서 잘 살 수 있는 인생이었다.
비록 공부 머리는 나쁘지만. 신아린이 자신의 인생에서 황금 동아줄이라는걸 아무리 멍청해도 모를 리가 없다.
어떻게서든 신아린이라는 황금 동아줄을 온몸에 칭칭 휘감아 절대 놓지 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김성현의 머리에 떠나지 않았다.
물론 차성의 후계자가 아닌. 신아린이라는 사람 자체만으로도 이렇게 매달릴 이유는 됐다.
"혹시 아린이가 좋아하는 거 알고 계신 거 있나요?"
잡념을 지우고 묻자. 차기사님이 잠시 고민에 빠진 얼굴로 자신의 턱을 긁었다.
"최근에는 독서를 좋아하십니다. 친구분과 카페도 자주 가고요."
"친구요?"
혹시 남자인가 싶어 걱정되는 마음에 물어봤다.
"백진희 양이랑 많이 친해지셨습니다."
아. 백진희.
김성현은 백진희 생각에. 조금 떨떠름한 기분으로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백진희와는 조금 이상한 사이다. 신아린을 가운데 두고 있을 때는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지만. 신아린이 빠지면은 둘 다 입에 자물쇠를 채운 채 서로를 바라보지도 않으니까.
어색한 공기만이 둘 사이를 흐를 뿐. 그러다 신아린이 나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을 주고받긴 하지만….
물론 백진희와 있을 때 어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생존실습 때 혼자 딸치는 모습을 들키기도 했고. 실수로 정액을 백진희에게 발사해 옷에 묻히기도 했다.
그 뒤로 경멸 어린 시선으로 자신과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백진희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다가갈 정도로 철면피도 아니었으니.
서로 거리를 유지하며 평행선을 달리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일 수도….
다행인 점은 백진희는 예쁜 외모처럼 마음씨도 착한 것인지. 신아린에게 얘기한 것 같지는 않았다. 만약 말했다면 신아린이 난리를 쳤지 않을까? 그 모습이 상상이가 조금 겁이 났다.
신아린이 생각보다 많이 늦었기에. 아카데미 생활과 강원도에 새로 나타난 던전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신아린이 문을 열고 차 안으로 들어왔다.
"미안, 기다렸지."
조금 흐트러진 모습으로 신아린이 말했다.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해서 달려온 걸까?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어 있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모습이 평소에 보던 고급스러워 보이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묘한 색기를 풍기고 있었다.
화장도 지웠는지 평소보다 청초한 모습이었다.
"아냐, 차기사님이랑 대화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
"그래? 다행이네…."
옆자리에 앉은 신아린은 어딘가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 아파?"
"아니, 괜…. 찮아."
그 대답에 김성현은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신아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높아져 있었다. 목소리에는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평소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에 상반되게 대리석처럼 하얗던 피부도. 몸 전체가 조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차기사님. 초월 역 근처 카페로 가주세요."
"네, 아가씨."
이동하는 차 안에서 김성현은 신아린에게 속삭였다.
"무슨 일 있었어?"
"아냐, 아무것도."
변명하듯 시선을 피하며 대답하는 모습에 의심이 더해졌다.
"그런데 왜 이리 늦었어?"
"선생님 일을 좀 도와줬어."
신아린의 말에 담임선생의 얼굴이 떠오르자 기분이 나빠졌다. 같은 반 여자들한테 인기 많은 남선생.
혹시 신아린도 담임을 좋아하는 걸까?
"무슨 일?"
"...그냥 도서 일."
"그걸 갑자기 너한테 시켰다고?"
"응."
의심이 더 커졌다. 갑자기 집에 가려던 신아린을 붙잡고는 도서 일을 한 시간 넘게 시켰다? 이상한 일이다.
거기에 항상 주름 한 점 없이 깔끔한 교복이 평소와 다르게 온통 주름져 있는 흐트러진 모습이. 도서 일을 도왔다는 신아린의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시발 설마 둘이 섹스한 거 아냐?`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심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머리가 빠르게 회전해 평소 즐기던 미연시들을 떠올렸다.
이런 상황. 이런 모습.
뻔하디뻔한 클리셰 같은.
익숙한 스토리다.
남자주인공과 알콩달콩 비밀 교제를 하던 여자주인공이. 비밀교제를 눈치챈 거구의 근육질 체육 선생님에게.
"너희 둘 연애하고 있지? 이 사실을 알리면 남자친구가 어떻게 될까?"라는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남자주인공을 지키기 위해 "이번 한 번만 이에요!"라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며 섹스를 한다.
`이 자지 남자 친구 꺼보다 더 커`, `절정 하면 안돼~!` 같은 꼴리는 속마음을 표현하며. 원치 않은 오르가즘을 끝으로 협박이 끝난 줄 아는 순진한 여자주인공이.
알고 보니 오르가즘에 달하는 동안 자신이 모습이 촬영 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는 설정.
그 영상을 지워준다는 조건으로 또다시 섹스하고 그러다 남자주인공의 빈약한 자지보다 거대한 선생의 자지에 함락당하는…. 전형적인 야겜 스토리.
생각해보면 담임도 조금 음습해 보이는 게. NTR물에 적합해 보이는 외모였다. 잘생기고 금발은 아니지만 우중충한 잿빛 색의 머리.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생이라기보다는 어디 호스트바 선수 같은 얼굴이었으니까.
정말로 그런 걸까? 신아린은 처녀를 잃은 걸까?
불안한 망상이 계속 떠올랐다.
허벅지 위에 놓여있던 신아린의 손을 잡자. 몸을 움찔한 신아린이 순수히 손을 잡는 모습에.
의심은 더욱 커져 확신으로 변했다.
평소에 이렇게 순수히 손을 내주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손을 만지려 들으면. `뭐하는 짓이야`라는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경계하며 손을 치웠는데.
자신도 모르게 신아린의 가랑이 사이를 바라봤다.
정말 처녀를 잃었다면…. 혹시 치마에 피라도 묻어 있는 거 아니야?
의심 섞인 시선으로 허벅지와 치마를 바라봤지만, 핏자국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왜?"
시선을 의식했는지 미간을 좁히며 신아린이 노려봤다.
자신의 의심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심에 김성현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앞에 있는 차기사의 눈치를 보며 신아린의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뭐, 뭐하는 거야."
당황해하며 속삭이는 신아린의 말을 무시하고 뜨겁게 달아오른 신아린의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말랑말랑한 허벅지의 촉감과 부드러우면서도 뜨거운 피부는 탄력 있게 손에 파고들었다.
이쯤에서라면 눈을 흘기며 뭐라 했을 신아린이지만.
그저 신아린은 입을 다문 채 약간 물기 있는 눈으로 바라만 볼 뿐 제지하려 들진 않았다.
평소였다면 자신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환호성을 지으며 마음껏 주물럭댔을 텐데.
섹스한 거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소와는 다르게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신아린의 반응이.
김성현의 마음속에 불을 질렀다.
당장이라도 신아린에게 담임이랑 섹스하고 온 거 아니냐고 소리치며 묻고 싶었지만. 이성이 그 행동을 가까스로 막아 세웠다.
정말로 자기 생각대로 협박당해 섹스한 거라면. 그건 강간일 뿐이다. 그렇다면 신아린은 피해자일 뿐이었다.
차기사님이 있는 곳에서는 신아린을 강하게 추궁할 수는 없다.
허벅지에서 손을 떼자. 달뜬 한숨이 신아린에게서 흘러나왔다.
그 모습이 위가 쓰릴 정도로 스트레스가 치솟았다.
이를 갈며 얼른 카페에 도달하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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