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통제
* * *
잠시 사고가 멈췄다.
내 체육복이 왜 여기에 있지…?
당연히 체육복이 사라진 건 소니아의 짓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몸이 내 통제를 벗어나 떨려오기 시작했다.
차오르는 불안감에 긴장한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해졌다. 어두운 테이블 밑. 내 운동복이 담긴 체크무늬의 패턴의 쇼핑백을 바라본 채. 설산에 조난돼 그대로 얼어붙은 시체처럼. 숨을 쉰다는 본능조차 잊고.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기한신이 돌아오기 전에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숨을 쉬어야 한다는 뇌의 경고와 함께 들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쇼핑백을 원래대로 옷들의 밑으로 놔둔 뒤. 몸을 일으키자.
나를 기다리고 있는 늑대같이 매서운. 검은 두 눈을 볼 수 있었다.
두 개의 음료가 든 잔이 담긴 쟁반을 들고 기한신은 침묵한 채. 그저 나를 바라보며 턱에 힘을 주었다.
기한신이 벌써 돌아왔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나는 변명하듯 시선을 피했지만.
내 시선을 따라 검은 눈동자가 달라붙어. 마치 내 생각이라도 읽어내려는 듯 내 눈동자에 꽂혀 떠나가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치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의 모습 같아. 본능적인 두려움이 척추를 타고 소름이 되어 올라왔다.
"앉아 아린아."
마치 거절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한 권위적인 목소리에. 떨리는 몸에 억지로 힘을 주어 가까스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기한신이 앉아있는 테이블의 맞은편 의자에 앉자. 기다렸다는듯 기한신이 내게 쟁반 위의 아이스티가 담긴 잔을 넘겨줬다.
"고, 고맙습니다."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럽기보다는 내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눈치 못 챘으면 싶었다.
"뭘."
무슨 말이라도 꺼내면 나아졌을까. 조금 전까지 소란스럽던 기한신은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자신의 잔에 담긴 음료를 마시며 무거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고.
나는 눈에 보일 정도로 덜덜 떨리는 손을 억지로 참아가며 아이스티를 마셨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저체온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몸을 떨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지 않으면 턱이 떨려 딱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아.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이성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올 수 있는지. 워낙 손을 크게 떨어 잔에 든 아이스티 대부분이 내 손을 적시는 모습에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한신과 단둘이 누구의 간섭도 받지 못하는 개인적인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나는 다시 떠오르는 공포에 몸을 부르르 떨며 손에 묻은 아이스티를 치마에 대충 닦아냈다.
"신아린."
조금 전까지 밝았던 말투는 사라지고 그가 뇌까리듯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네."
침착함을 가장한 내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높은 것 같다.
진정하자. 아직 무슨 일인지 모르는데.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단순히 소니아가 버린 내 운동복을 발견하고 보관 중인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아무리 자신을 설득하려 해도 몸은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기한신의 낮은 목소리가 방안을 울리면서 위협적으로 들려왔다.
"금서 구역 출입증은 왜 받아 갔지?"
평소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사라진 채. 상황을 통제하는 듯 낮고 이를 가는 듯한 목소리에 시선을 내리깔았다.
"조사할 게 있어서…."
"어떤 거지."
"그냥 수업 관련된…."
"정말인가?"
내 말의 진위를 따지는 것이 아닌. 내 말 자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듯한 모습에 표정 관리가 힘들었다.
"...네."
갈라지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치는 것이 보였다.
"거짓말."
"..."
"학생에게 출입증을 써주면 그 학생이 어떤 걸 검색했는지. 어떤 걸 대출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것도 모르면서 자기에게 거짓말을 하느냐는 듯. 나를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기아스. 그런 허황된 소문을 진짜로 믿었던 건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거짓말이 들킨 것과 나를 마치 맛있는 먹이인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에 숨이 중간에 턱하고 막힌 것 같았다. 물속에 빠져 익사하는듯한 공포가 머리를 가득 채웠다.
공포 속에서. 나는 왜인지 모르게 평소처럼 진희가 아니라 성현이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진심으로 아껴준다며. 믿음 가지 않는 모습으로 어깨를 펴던 그 모습이. 지금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
그래도 남자친구라고 무의식중에 인정한 걸까. 김성현에 대한 마음도 없으면서. 자신의 안위가 위급해지자 다시 김성현을 찾는 위선적인 모습에.
공포 사이로 자괴감이 깃들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김성현이 이 상황을 눈치채고 나를 구해줬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떠올렸다.
김성현은 단순히 `면담이 오래 걸리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나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김성현이라고 눈치챘을 것 같진 않다.
지금 휴대폰을 꺼내 김성현에게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까? 기한신의 매서운 시선이 아직도 나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기에 확인할 수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움츠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아이스티가 담긴 잔을 들어 마시면서 반대 손으로 주머니의 휴대폰을 떨리는 손으로 꺼내 들었다.
용기 내 시선을 들어 기한신을 보니. 자신의 잔에 담긴 음료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 안도하며 다시 시선을 내리깔아 김성현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작처럼 떨리는 손 때문에 단어조차 완성되지 않았다.
제발 가만히 좀 있어!
통제되지 않는 떨림을 원망하고 있을 때. 기한신의 차가운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김성현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가?"
휴대폰을 누르던 손가락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공포에 빠진 얼굴을 숨기지 못한 채. 기한신을 바라봤다.
서늘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나는 바닥 끝까지 떨어져 있던 용기를 혀를 깨무는 고통으로 억지로 끄집어냈다.
아직 남아있는 아이스티를 잔과 함께 기한신의 얼굴을 향해 던지고 문을 향해 냅다 달렸다. 공포에 흥분된 몸이 퍼트린 아드레날린에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뛸 수 있었다.
문에 다 와 갔을 때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던 내 시도는. 오른 다리를 걷어차여 몸의 중심을 잃고 그대로 관성에 따라 앞으로 크게 몸을 구르며 쓰러지는 것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바닥에 깔린 카펫 때문에 크게 다치진 않았지만, 평소에 쓰지 않던 근육들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욱신거리며 항의했다.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려는 시도는 목덜미를 누르는 강한 힘에 저항하지 못한 채 얼굴을 바닥에 박는 것으로 끝이 났다.
"가만히 있어."
뇌까리듯 낮은 목소리를 순순히 들을 생각은 없었지만. 내 목덜미를 밟으며 자신의 체중을 싣자. 원치 않아도 저항하지 못했다. 내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제발요…."
기한신을 애원하듯 불러봤지만. 내 말을 벌레의 날갯짓처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목덜미에서 발을 치우고는 거칠게 내 몸에서 가방을 벗겨내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내 몸을 밀어 자신을 바라보게 몸을 뒤집었다.
그 상태에서 내 배 위로 올라타 체중으로 나를 누르며. 내 양팔을 엑스자로 교차시켜 한 손으로 제압한 뒤. 나를 매서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차성에서는 남자랑 단둘이 있을 때 조심하라고 경고 같은 거 안 했나."
비웃음이 담긴 미소와 함께 다른 한 손으로 내 목을 쓰다듬는 손길에 몸을 움츠렸다. 시야가 울렁거리며 일그러졌다.
그제야 나는 두려움에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한테 위험하게 물건을 던지는 것도. 잘못된 거라는 걸. 안 알려줬나 보구나."
목의 피부를 스치듯 쓰다듬던 손길이 멈추더니. 이내 내 목을 움켜쥐더니 한 손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선…. 선생님. 숨, 숨을 못…."
"쉿."
또다시 누군가에게 목을 졸린다는 공포에. 발작하듯 두 발을 바둥거리며 반항했지만. 내가 반항할수록 더욱 세게 목을 조여왔기에 나는 숨을 쉬기 위해 억지로 반항을 멈추었다.
내가 반항을 멈추자 내 목에서 손을 떼었다. 과호흡이 올 정도로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 쪼그라들었던 폐가 빵빵해질 때까지 공기를 채워 넣고 나서야 다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마치 뇌리에 각인이라도 시키려는 듯. 내가 반항하면 더 강하게 목을 조여왔고 반항을 하지 않으면 손에 힘을 풀었다.
마침내, 내 목을 조르는 손길에도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자.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로 나를 내려보는 기한신의 시선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기한신은 이런 미친놈이 아닐 텐데. 분명 영또플에서 비중 없는 등장인물이었을 뿐이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것과 다르게 몸은 공포에 떨어.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기한신이 수업을 하듯 나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를 입학식에 처음 봤을 때. 그냥 평범한 여제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 제자가 차성의 후계자라면. 대우가 달라져야겠지. 그 세계적인 재벌 기업인 차성의 후계자. 그때부터 계속 너에게 욕심이 났다."
기한신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었다. 그리고 마치 자랑스럽다는 듯 나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이며 하나씩 넘겨주었다.
"보여? 여기 있는 게 다 네 사진이다. 내가 직접 찍은 것들이다."
언제부터 나를 도촬했던 건지. 심지어 김성현에게 고백받았던 날도 찍혀 있었다. 진희와 함께 있던 순간과. 성현이와 카페 화장실에서 같이 나오는 사진까지.
나의 평범했던 하루에. 이 사람이 여태까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심장을 움켜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내 눈에 담긴 두려움에 즐거움을 느낀 듯. 입꼬리를 올리며 내 귀에 대고 속삭이듯 물었다.
"성현이랑 첫 키스는 심장이 떨릴 만큼 설렜나?"
"네."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 같이 곳곳에서 느껴지는 통증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목을 졸렸을 때 목이 쉬었는지. 평소보다 목소리가 이상했다.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고 싶지 않았기에. 거짓을 말하자.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내 뺨을 툭툭 쳤다. 나는 눈물을 멈추고 마주 노려봤다.
"또 거짓말을 하는군."
낮으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며. 제압했던 양손을 풀어주고는 내 몸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어서 따라와."
명령하는 목소리에 반항하듯 몸을 일으키려다 곧장 옆구리를 걷어차였다. 갈비뼈에 느껴지는 고통에 눈물이 다시 찔끔 흘렀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으르렁거리는 듯한 살벌한 경고에 무릎을 꿇고 기한신을 따라 기어갔다. 의자에 앉은 그는 나를 무시하듯 내려다보며 말했다.
"체벌이 필요하겠지."
자기 허벅지를 두들기는 모습에 이해하지 못한 채 바라보는 나를 보고 화가 나듯 한쪽 눈썹을 올리더니. 내 머리카락을 붙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자기 허벅지 위로 강제로 눕혔다.
"뭐 하는…."
"쉿. 체벌 중에는 입을 열면 안 되지."
그는 경고하듯 내 입술에 손을 올려 내 입을 막았다.
손을 내려 내 치마의 단추를 푸는 행동에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다시 한 손으로 내 목덜미를 지그시 눌러 내 행동을 막았다.
"목이 졸리고 싶은 건가?"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말하는 무심한 목소리에 두려움을 느껴 반항을 멈추자. 단추가 풀어져 느슨해진 치마를 거리낌 없이 내렸다.
엉덩이가 보인다는 부끄러움을 느낄 새도 없이. 엉덩이를 내려치는 고통스러운 손길에 이를 악물었다.
짝
짝
짝
손으로 살을 내려치는 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이 정도면 손이 아플법하건만 내가 고통을 참자. 계속해서 손을 내려쳤다.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이 터진 나는 계속되는 손길에 공포감이 밀려와 이유도 모른 채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흐윽, 죄송해요…."
그제야 만족한 듯한 미소와 함께 손을 거둔 기한신은 다친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에 달아오른 피부가 따가웠다. 입을 다물고 울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
그의 명령에 몸을 일으키자 그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던 가방을 가져왔다.
가방 안에 기아스가 있는데. 혹시 기한신이 내가 기아스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을까? 기아스를 믿었느냐며 비웃었지만
그것조차 나를 기만하는 거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래 봤자. 눈물에 화장이 엉망이 된 얼굴로. 아래는 팬티만 입고 있는 이상한 모습이겠지만.
기한신은 가방 안의 내용물을 바닥으로 쏟아내었다. 교과서와 연습장, 책들과 함께 보석함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었다.
그는 몸을 숙여 보석함을 집어 들었다.
"좋은 물건이군."
그는 보석함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붉은 실은 기아스의 사용법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는 평범해 보이는 붉은 실일 뿐이었다.
내 예상이 맞았는지. 그는 붉은 실을 기아스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다시 보석함을 닫고는 내 눈앞에 흔들었다.
"김성현에게 선물로 주려 했던 건가?"
대답을 기다리듯 보석함을 흔들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겨우 아카데미생이 이런 값비싼 보석함을 남자친구 선물로 주다니. 어이가 없군. 아니, 그래서 차성인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그는 나를 노려봤다.
"그럼 내가 갖지."
당연하다는 듯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보석함을 들고 몸을 돌려 개인 금고로 보이는 곳에 넣었다.
나는 닫히는 금고문 사이로 보이는 보석함을 멍하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험을 받아 보실까."
낮은 목소리와 함께 몸을 돌린 기한신의 눈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음욕의 기운에.
나는 그저 몸을 떠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