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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7화 (17/160)

〈 17화 〉 비밀들

* * *

김성현을 먼저 강당으로 돌려보내고 나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올라오던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변기 안에 위액을 쏟아내고 나서야.

자기혐오로 가득하던 마음도 어느 정도 내보낸 것 같았다.

쓰라린 통증이 느껴지는 위를 쓰다듬었다.

손을 씻고 김성현과 키스했던 혀를 손톱으로 긁어냈다.

불쾌한 느낌이 아직도 입안을 떠나지 않았다.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혀를 닦아내다. 아릿한 통증에 손을 멈추었다.

이게 뭐지.

이게 내가 생각했던 괜찮은 방법인걸까?

마음도 없는 상대를 속이려고 키스까지 먼저 해놓고 뒤늦게 후회하며 피가 날 때까지 혀를 긁는 나는 얼마나.

추악한 걸까.

나 자신도 받아들이지 못할. 그런 짓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김성현이 나에게 속았다는 사실에 기쁘다는 게.

내 감정을 더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혹시 냄새가 날까 입안을 물로 몇 번을 헹구고 나서야 수업 중인 강당으로 돌아갔다.

"아린아 어디 아파? 안색이 창백한데."

"속이 울렁거려서. 잠깐 화장실 갔다 왔어."

"보건실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냐. 조금 쉬었더니 괜찮아졌어."

진희와 얘기를 나눈 뒤.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는 조민성을 무시하고. 일부러 조금 떨어져 서 있는 김성현의 곁으로 갔다.

내가 다가올 줄 몰랐는지. 주변의 눈치를 살피는 김성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아파."

"어? 어디가!"

"너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미, 미안해."

"미안하면. 주말 데이트로 갚아."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내 속물적인 말에도. 환한 미소를 보이는 김성현의 반응을 보지 않으려. 애써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그 모습을 본다면.

아파질게 뻔했으니까.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 조민성이 준 기아스에 관한 정보를 읽었다.

파툴가의 마법 장갑같이. 기원이 명확한 실체가 있는 유물과 다르게. 신화마다 그 종류와 모습이 달랐기에 기아스로 밝혀진 것들은 모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기아스로 추정되는 [붉은 실]은 몇 주 전 연구를 위해 프랑스 정부의 비밀 금고 보관 중이 었다가 도둑을 맞았다고 쓰여 있었다.

삼엄한 경계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일순간에. 마치 공간을 도려내듯 [붉은 실]이 보관돼있던 지하가 통째로 사라졌다가. [붉은 실]만 사라진 채 다시 원상 복구되었다는 보고가 쓰여 있었다.

영웅의 능력을 제약시키는 마석이 있었기에. 마인의 `권능`과 관련된 일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 보고서의 마지막에 적혀 있었다.

"휴우…."

흘러나오는 한숨을 참지 못했다. 기껏 단서를 얻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인이 가져갔다면 되찾을 수도 없을 터. 아쉬움이 너무 컸다.

나머지 기아스들은 이미 사용되었다고 `추측`되거나. 이곳에 있었다는 `추정`뿐이었기에. 내 손에 기아스가 들어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목표가 사라졌다는 방황 감에. 침대 위의 베개를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눈을 감았다.

무기력함이 머리를 짓눌렀다.

앞으로 김성현을 어떻게 통제해야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한참을 뒤척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 생각나 책을 읽을 생각으로 가방을 열다.

저번에 챙겨놨던 비밀의 방으로 가는 방법이 적힌 종이를 꺼내 들었다.

비밀의 방이라….

작가가 만들어놓고 아직 소설에 등장시키지 않았던 설정 중에 하나인 걸까? 아니면 기아스처럼. 작가의 손이 닿지 않았음에도 세계가 임의로 채워놓은 설정인 걸까?

무기력하던 머릿속을 탐험 심과 호기심이 차오르며 무기력함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20시가 조금 넘은 시간. 기숙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개인 훈련을 하는 3학년 선배들이 밤늦게까지 있기 때문에 초월 아카데미는 거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방금까지 침대 위에 빈둥거리며 무기력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열정적인 탐험가로 변한 나는.

중요한 물건을 놔두고 왔다는 핑계로 다시 교복을 입고 가방을 가지고 차기사의 차를 타고 다시 아카데미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은 불이 꺼져 있지만 몇몇 불이 켜진 교실 안 선배들의 모습도 보였고 박물관 같이 대리석으로 꾸며진 복도의 불은 그대로였기에.

귀신이 튀어나올까. 그런 걱정은 없었다…. 조금은 있었다.

"응? 아린아. 아직 집에 안 갔어?"

"야­앗!!!"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복도에서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내 입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놀랬잖아요."

"내가 더 놀랐어…."

누군가 했더니 담임 선생님인 기한신이었다. 가방을 메고 서류를 들고 있는 모습이. 퇴근하는 중에 나를 보고 다가온 것 같았다.

"집에 안 갈 거니?"

"놓고 온 물건이 있어서요."

"같이 가줄까? 혼자 가기 무서워 하는 것 같은데."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동행을 요구하는 담임 선생님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껴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불안함을 느꼈다.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 얼른 퇴근하세요."

"...그래. 물건만 챙기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내일 수업도 들어야지."

내 대답에 묘한 눈빛을 보내던 담임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퇴근을 하러 갔다.

나는 종이에 적혀있는 대로. 8층까지 중앙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수업 때문에 4층까지는 가봤는데. 8층은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기에. 조금 탐험 심이 샘솟았다.

뭐가 있으려나?

별생각 없이 계단을 오르다. 느슨해진 신발 끈이 풀려버려. 무의식적으로 나는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탁­

밟으려던 발을 멈췄던 나와 다르게. 복도에서 누군가 계단을 밟는 소리가 울렸다.

계단을 타고 울리는 소리는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몸이 굳은 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귀신인가…? 일부러 나와 발걸음을 소리를 맞출 사람은 없으니까.

무서움을 참으며 계단 밑을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냥 잘못 들은 거겠지.

그렇게 무서움을 극복하며 8층으로 올라갔다.

[8층의 거울 앞. 왼쪽으로 4걸음. 앞으로 2걸음. 다시 왼쪽으로 6걸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뒤로 2걸음.]

종이에 적힌 대로. 중앙 계단의 바로 앞에 있는 8층의 큰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거울 밑에 영웅협회 4대 회장 김선호 기증. 이라는 금색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대로 행동하기에는 조금 겁이나. 8층 복도를 둘러봤다. 연구실과 창고가 있는 공간인듯했다. 대충 종이에 적힌 대로 행동하면 어디로 들어가는 걸까 예상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빈 벽뿐이었다. 혹시 환영인 거 아닐까 싶어 벽을 만져봤지만. 그냥 하얗게 페인트칠 돼 있는 시멘트벽일 뿐이었다.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주변에 누가 있나 확인하고 종이에 적혀 있는 대로 움직였다.

"...6걸음."

분명 뒤는 벽이 있을 건데. 뒤를 돌아보지 않고 2걸음이라는 특이한 조건이 가슴을 뛰게 했다.

"뒤로…. 2걸음."

마지막 한 걸음을 뒤로하자. 딱딱한 벽이 느껴져야 할 등에서 부드러운 천을 지나친다는 느낌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붉은 벨벳으로 꾸며진 벽과 천장은 뻥 뚫린 밤하늘처럼. 별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진짜로 비밀의 방이 있었네…."

반신반의했었는데. 거기에 공간 확장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너 튜브에서나 보던 하룻밤에 수 천만 원 정도 하는 호텔의 스위트룸 같았다.

방안에는 온갖 것들이 반듯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르퉁덩굴 같은 스노 글로브들도 몇 개 있었지만. 괜히 만졌다가 안으로 빨려 들어갈까 봐 눈으로만 봤다.

동화 속 마녀가 탈법한 디자인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빗자루와. 물병에서 물이 반대로 올라와 다른 물병으로 들어가는 이상한 것도 있었다.

프랑스 황실에서나 사용할법한 거대한 크기의 크림색의 침대에 걸터앉아 주변의 신기한 것들을 둘러보다. 테이블 위 여러 보석이 박혀 있는 상자에 눈길이 갔다.

별 뜻 없이. 상자를 연 나는 그 내용물에 하마터면. 상자를 놓칠 뻔 했다.

조민성의 보고서에서 봤던. [붉은 실]이 이 상자 안에 있었으니까.

갑자기 심장이 엄청나게 크게 뛰었다. 도둑맞은 붉은 실이 이곳에 있다?

혹시 이곳은 비밀의 방이 아니라. 아카데미 안에 마인이 숨어 사는 방이 아닐까?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먼지 하나 없는 깔끔한 모습. 사람의 출입이 없었다면 이 정도로 관리돼있을까 싶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면 당장 이곳에서 도망쳐야 했다. 무기도 없었고 애초에 싸울 줄도 몰랐으니까.

붉은 실이 담긴 상자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들고 가는 게 맞을까? 그냥 제자리에 다시 그대로 놔두면. 누가 침입했는지 모르지 않을까?

하지만 갖고 싶은 마음이 컸다. 파툴가의 마법 장갑도 없는 상황에서 기아스는 나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물건.

기적같이 내 손에 들어온 이걸 포기할 수는 없다. 탐욕적인 생각이 내 안위를 걱정하는 이성을 위로 했다.

"어차피 들어온 거…."

에라 모르겠다. 상자 채로 급히 출구로 추정되는 붉은 벨벳을 손으로 치우고 나가자. 8층의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뒤를 돌아보니. 마치 꿈이었다는 듯. 그곳에는 흰 벽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내 손에 들린 보석함만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급히 훔친 보석함을 가방에 넣었다.

살면서 무언가를 훔친 적은 처음이었기에.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괜한 시선이 느껴졌다.

"후으…."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1층까지 도달한 나는.

잡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에 급히 차기사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도망쳤다.

***

기아스를 손에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김성현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나는 매우 여유로워졌다.

마인이 찾아오는 거 아닐까 불안에 떨며 잠이 들었지만. 하루가 지나도 별일이 없었고 마침 타이밍 좋게 칠격도 김성현의 호위를 시작한다는 연락을 해왔기에.

혹시 마인이 찾아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사라졌다.

그도 그럴게. 마인이 나를 죽이려 찾아온다면 오히려 좋다며 마인을 죽이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칠격이니까.

막혔던 흐름이 한 번에 뚫린 것 같은 시원함을 느꼈다.

이게 사이다지.

김성현의 칭얼거림조차도 귀엽게 느껴졌다.

"주말에 놀이공원 가자! 기념사진도 찍고 재밌을 거야!"

"됐어. 이제 곧 중간 등급시험인데. 공부 안 할 거야?"

"공부는 이제 학교 끝나고 기숙사에서 하지…."

자신도 자신감 없어 하는 목소리의 김성현을 말없이. 지그시 바라보자. 내 시선에 뜨끔했는지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유급해서 졸업 못 하면 난 책임 안 질 거야."

"아냐! 유급할 정도는 아니야!"

"할 정도는 인 게 문제 아닐까?"

그런 소모적인 대화를 한다. 담임선생님이 들어왔기에 대화를 멈췄다.

진희가 몸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린이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그런가? 오늘은 뭔가 잘 풀리는 날 같아."

"좋겠다~ 아린이 옆에 있으면 나도 좋은 기운 받을 수 있으려나~"

담임선생님의 말이 시작되었기에 진희는 다시 몸을 돌려 앞을 봤다.

잠들기 딱 좋은 편안한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김성현에게 어떻게 기아스를 걸지. 생각을 해봤다.

`동정을 상실하면 죽음`

이거는 내가 다시 입학식으로 돌아가니 안 좋은 방법 같았다.

`나만을 사랑함`

지금보다 더 집착할 것 같아서 조금 무섭기도 했다. 애초에 김성현을 받아줄 마음도 없었고.

`내 말에 무조건 복종`

이게 가장 나으려나?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옆에서 혼잣말로 "놀이공원…."이라고 중얼거리는 김성현을 보고.

오늘 안에 반드시 기아스를 김성현에게 써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혹시 누군가 훔쳐갈까 봐 가방 안에 넣어놓은 상자를 계속 확인했다. 오늘은 일부러 화장실을 갈 때 가방까지 들고 갔다.

그 모습을 의아하게 생각한 진희가 물어왔지만. 대충 얼버무리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김성현에게 드디어 기아스를 걸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항상 재밌던 수업시간이 오늘은 길게만 느껴졌다.

김성현에게 걸 기아스는 `내 말에 절대복종`으로 정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거만큼 좋은 게 없었으니까. `절대 동정 상실하지 않음` 같은 건. 소니아가 덮친다면 깨져버리는 것이기에. 선택을 잘해야 했다.

"성현아. 끝나고 나랑 같이 카페 가자."

"카페? 나야 좋지."

내 음흉한 계획을 눈치채지 못한 김성현은 좋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담임선생님의 종례가 끝나고 김성현과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담임선생님이 나를 불러세웠다.

"잠깐 얘기 좀 할까? 도서 관련해서 전해줄 게 있거든. 금방이면 돼."

알겠다고 답하고 차기사님에게 말해놓을 테니 먼저 차에 타 있으라고 성현이에게 말했다.

"알았어. 기다릴게. 얼른 와!"

귓속말하고 먼저 나가는 김성현을 뒤로. 나는 담임 선생님을 따라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기에. 교무실이 바로 밑층인데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나 하는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얼른 가서 김성현을 복종시키고 싶은 데.일단 꿀밤 한 대 때리는 게 목표다,

그런데 엘리베이터는 교무실이 위치한 2층이 아닌. 6층으로 향했다.

의아함에 담임 선생님을 바라봤다.

"아, 교무실이 아니라 선생님 개인 연구실이야. 아린이 너는 처음이지?"

아카데미의 선생님들은 대부분 개인 연구실이나, 실습실. 훈련장 같은 공간이 배정되어 있었다. 물론 대부분 선생님은 교무실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네. 처음이에요."

"전투이론이라는 게 조사할 게 꽤 많거든. 나도 대학교수들처럼 조교라도 있으면 편할 텐데..."

장난스럽게 한숨을 쉬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공대를 나와서 그런지. 저렇게 피곤해하는 모습들은 많이 봤었거든.

그때가 조금 그립긴 하다. 그 때로 돌아가긴 싫지만.

[전투이론 연구실 ­ 기한신]이라고 적힌 문을 뒤를 따라 들어가자. 공간 마법이 걸려 있는지. 상당히 큰 크기의 서재 같은 곳이 나왔다.

서점이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갖 책들이 꽂혀있는 책장들이 벽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기한신의 유럽 귀족 같은 모습과 퍽 잘 어울렸다.

바닥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카펫이 깔려있어 걸을 때마다 푹신푹신 했다.

잿빛 색의 머리 때문인지 외국인 같아 보이기도 했으니까. 혼혈인가? 상대방이 밝히지 않는 이상 물어보는 건 큰 실례이기에 혼혈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영또플에서도 그렇게 비중 있는 등장인물도 아니었으니까.

"잠깐 마실 것 좀 내올게. 홍차? 아이스티? 커피? 뭐가 좋니?"

테이블 위에 쌓여있는 종이들을 확인하며 물어보기에 거절하기도 뭐해. 아이스티를 달라 했다.

커피는 곧 김성현이랑 마실 거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마실 것을 가져오기 위해 옆 방으로 건너간 담임 선생님을 앉아 기다리기 뭐해서.

벽들에 꽂혀 있는 책들을 구경하며 방을 걸어 다녔다.

"학교생활은 어때? 차성의 후계자라고 불편하게 대하는 애들은 없어?"

"네. 그런 경험 없어요."

멀리서 차를 타며 담임 선생님이 말을 했다. 잔과 수저가 부딪치며 딸깍딸깍 소리가 들려 왔다.

테이블 위의 전투 이론 계획표라 적혀 있는 것들을 한 번씩 훑어보며 걸음을 옮겼다.

"근데 요즘 전투 실습 담당 선생님이 아린이 너는 실습에 참여 안 한다던데. 무슨 문제라도 있니?"

"몸이 안 좋아서요."

사실 기억을 잃어서 내 능력이 뭔지도 모르지만.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실습에 참여하지 않았다.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르면 김성현이랑 같은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컸다.

"그래도 이제 곧 등급 시험에 좋은 점수를 얻으려면 따로 전투 훈련은 받아야 할 거야. 차성에서 지원해준다니?"

자신의 가르치는 학생이 열등생일까 겁나는 걸까. 아니면 그냥 오지랖이 넓으신 걸까.

"괜찮아요."

대충 대답하며 방을 둘러보다. 종이들이 쌓여있는 테이블의 뒤로 돌아간 나는 무심코 고개를 내려 테이블 밑.

시선이 닿지 않는 깊숙한 곳에 옷들 사이에 파묻혔지만, 살짝 귀퉁이가 튀어나온 익숙한 체크무늬의 패턴을 보았다.

"차성의 후계자라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할 텐데. 아린이 네가 고생이 많다."

차성, 차성거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무릎을 꿇어 테이블 밑으로 들어갔다.

담임 선생님이 입었던것으로 추정되는 옷들을 치우자.

고급 브랜드의 쇼핑 팩이 모습을 드러냈다.

떨리는 손으로 쇼핑백의 안을 확인하자.

그곳에는 잃어버린 내 운동복이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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