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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6화 (16/160)

〈 16화 〉 기아스: 맹약,의무,구속.

* * *

기아스에 대한 것은 영또플에는 나오지 않은 진희에게 처음으로 들은 것이기 때문에. 인터넷검색만으로 정보를 확인하는 건 어려웠다.

그냥 그런 종류의 켈트 신화가 있다더라~정도의 진희에게 들었던 수준의 정보밖에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건가 싶었지만. 소설에 언급되지 않은 설정일 수도 있으니. 기아스에 대해 찾으려면 아카데미의 도서관을 열람해야 했다.

세계 최고의 아카데미라는 설정답게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 전 세계의 온갖 것들을 도서관 안에 쑤셔 박아 채워 넣었으니까.

그렇기에 일반 영웅들과 일반인들도 도서관을 출입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크기도 아카데미와 비슷할 정도였다.

수업이 끝나고 혼자 도서관에 들러 출입이 가능한 일반구역에서 기아스에 관한 문서를 찾아봤지만, 켈트신화에 대한 것을 제외하고는 수확이 없었다.

일반 학생들의 출입이 금지된 금서 쪽을 확인해야 했기에. 담임선생인 기한신의 허락을 받으려 교무실에 들렀다.

다행히 여학생과 면담을 하느라 아직 퇴근하지 않은 것인지. 기한신은 한 여학생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면담이 끝날 때까지 비어있는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그래. 아린아 무슨 일이니?"

잿빛 색의 머리에 나와 같이 깊어 보이는 검은 눈을 가진 미남의 30대 중반의 남성이. 10대 여자에게 얼마나 매력적으로 느껴지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학생들에게 독보적으로 인기가 많다는 건 피부로 느낄 정도였다. 심지어 유부남도 아니었기에 더 인기가 많은 걸까? 잘생겼는데 왜 아직 결혼을 안 했는지는 모르지만….

기한신의 눈과 마주쳤을 때 뒷목을 바늘로 긁는듯한 소름 돋는 감각이 들어 조금 의아했다. 요즘 들어 자꾸 이런 이상한 느낌이 든다.

"저 조사할 게 있어서 그런데. 금서 구역 출입증 좀 써주실 수 있으세요?"

"금서 구역?"

"네. 일반구역에서는 관련된 자료가 없더라고요."

"흠, 그래 써줄게. 금서 구역이라, 우리 반 애들은 학구열이 뛰어난가 보네. 뭐 아린이 너는 항상 수업도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하기도 하고. 또 차성의 후계자니까~ 사고 치지는 않겠지."

나랑 대화할 때마다 차성의후계자임을 언급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으나. 뭐 차성의 후계자라는 타이틀이 나에게 안 좋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고 편의를 봐주는 거니 그냥 무시했다.

금서 구역의 출입증을 받고 꾸벅 허리를 숙여 감사인사를 했다.

입구에서 금서 구역 출입증을 제시하고 재학생임을 증명하는 신분증을 목에 매고 금서 구역안으로 들어갔다.

이름만 들으면은 온갖 디자인의 괴이한 금서들이 있을법하지만 대부분이 나라에서 금지한 정치 서적이나 19금 이상의 책들이었다. 진짜 금서들은 지하에 보관되어있다고 들었다.

도서관 안에 배치된 금서 구역용 컴퓨터로 기아스에 대해 검색해봤지만, 딱히 나오는 건 없었다.

결국, 직접 기아스에 관련된 책들을 찾아 곳곳을 돌아보았다. 몇 시간 동안 큰 소득이 없어 한숨을 쉬고 [켈트 신화]라고 적힌 책을 꺼내 들다. 책 사이에 끼워져있었는지. 어떤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진 종이를 확인하니.

[8층의 거울 앞. 왼쪽으로 4걸음. 앞으로 2걸음. 다시 왼쪽으로 6걸음.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뒤로 2걸음.]이라는 알 수 없는 글이 적혀 있는 종이가 있었다.

"뭐지 이건?"

종이를 뒤집어보니. 큼지막하게. [초월 아카데미 비밀의 방]이라고 색이 바랜 녹색의 글자가 적혀있었다.

비밀의방….

해리포터에 나온 그런 건가? 일단은 주머니에 종이를 집어넣었다. 당장은 확인해야 할 정도로 급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르니까.

영또플에서 비밀의 방 같은 건 나온 적이 없었는데. 누군가의 짓궂은 장난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머리에 떠오르는 의심을 지우고 계속 책들을 찾아봤지만 결국 기아스에 관한 건 찾을 수가 없었다.

진희 말대로 그냥 소문인 건가?

기아스가 있다면 김성현이 동정을 지키도록 맹세시킬 수 있었을 텐데. 아쉽긴 했다.

아쉬움에 몇몇 관심 가는 책들을 대출받고 차기사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

생존법 시간이기에 체육복으로 갈아입으러 탈의실에 갔다. 탈의실 안에는 각자 개인 보관함을 갖고 있기에. 내 보관함의 문을 열었는데 안에 체육복이 사라져있었다.

분명 등교할 때 체육복을 쇼핑백에 담아와 아침에 미리 보관함 안에 넣어놨었는데. 쇼핑백 채로 사라져있었다.

"왜 아린아?"

"체육복이 사라졌어…."

"어? 정말?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거 있는데 줄까?"

"그럼 나야 좋지. 고마워 진희야."

누군가 실수한 건가? 초월 아카데미에서 절도나 폭행 같은 범죄는 상당히 중하게 다루기 때문에 훔쳐갔을 리는 없을텐­

"자기가 안 가져오고 잃어버린 척 하는 거 아냐?"

속옷만 입은 채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며 소니아가 얄미운 목소리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뭐야 소니아."

"반응이 왜 그래?"

내 말에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소니아에 어이가 없었다.

날 죽일뻔해 놓고 좋은 반응을 원하는 건가? 나는 그 정도로 호구인 사람은 아닌데.

"설마 네가 가져간 건 아니지?"

"하. 이젠 나를 의심한다?"

솔직히 나에게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소니아뿐이다. 다른 애들은 이런 짓 할 이유가 없다. 나랑 인사만 주고받았을 뿐 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고 원한을 살 행동을 한 적이 없으니까.

서로를 노려보며 안 좋은 감정을 쌓고 있을 때.

"그만. 둘이 그만 다퉈."

진희가 나와 소니아사이에 끼어들었다.

"흥. 신아린은 좋겠네. 언니가 나서주니까."

"응, 좋아. 왜 부러워?"

일부러 진희의 허리를 감싸고 소니아를 따라 얄밉게 말하자. 화난 표정을 지으며 두고 보자는 소리와 함께 소니아는 몸을 돌려 자기 보관함으로 갔다.

"아린아~ 성현이 때문에 소니아랑 친하게 못 지내겠어?"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마음에 안 들어."

"흐응, 맞는 것 같은데~?"

또 장난을 치려는 듯 목소리에 장난기 섞인 목소리에 진희의 허리를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알았어~ 장난 안칠게. 얼른 갈아입고 나가자."

진희에게 여분의 체육복을 받아 갈아입고 진희와 함께 강당으로 갔다. 오늘은 운동장이 아닌 강당에서 새로운 수업을 한다 했다.

"자자. 떠들지 말고. 오늘 수업은 던전내 응급구조의 순서에 대해서 실습할 예정이니. 남자 여자 둘이서 한 조로 각자 원하는 파트너랑 짝지어라. 1분 준다!"

생존법 담당인 류재현의 말에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성에 대해 서로 인식하고 있는 고등학생들답게. 어쩔 수 없이 한 조가 되어야 하니. 다들 눈치 보며 서로의 짝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김성현이 자기랑 하자고 할 거라고 생각하며. 김성현이 어딨나 둘러보는데. 누군가 나한테 다가왔다.

"안녕. 나랑 같이 조할래?"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큰 키에 조각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조민성.

밝은 미소로 내 대답을 기다리는 모습에. 갑자기 나한테 말을 걸 줄 몰랐기에 엄청나게 당황했다.

이 녀석이랑은 일부러 엮이지 않으려고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이 잘생긴 얼굴에 속으면 안 돼.

"아, 나는…."

거절하려는 찰나에 조민성이라면 기아스에 대해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물과 신화에 관련돼서 꽤 많은 정보를 가진 플라틴의 후계자이기도 했으니까.

"좋아."

그 계산하에 조민성과 같은 조가 되어 줄을 섰다. 혹시 김성현이 소니아와 같은 조가 되지 않았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찾아보니 다행히 진희랑 짝을 이루었다.

무언가 불만스러운 눈빛의 김성현을 무시하고 진희에게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아마도 눈치 빠른 진희가 날 위해 성현이랑 짝을 해준 모양이니까.

솔직히 나 아니였으면 진희가 김성현이랑 짝할 이유가 없긴 하지.

"자. 조들 짰냐! 얌마. 거기 구석에 모여있는 너희. 조 짰어? 아직도 안짰어? 부끄러워 말고 그냥 대충서. 너랑 너랑 같은 조하고. 너랑 너랑 같은조하고. 됐지?"

서로의 짝이 마음에 드는 곳과 마음에 들지 않는 곳의 소리가 뭉쳐져 강당 안이 시끌벅적했다.

"시끄럽고! 자. 던전 내 기본 응급구조의 순서에 대해 수업할 거다. 어디 보자. 그래. 거기 선남선녀 커플. 나와봐."

류선생님이 지목한 건. 나와 조민성이었다. 선남선녀 커플이라는 말에 주위 애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호를 보냈기에 부끄러웠다.

"자. 여자가 부상자 역할. 남자가 구조대 역할을 하면 된다. 여자는 바닥에 눕고. 남자는 내 지시에 따라 응급 구조를 하면 된다."

지시에 따라 강당바닥에 놓인 매트 위에 부상자인 척 드러누웠다.

"자. 첫째로 던전내에서 부상자를 발견하면 일단은 주변부터 확인해야 한다. 마수나 괴수. 다른 위협들이 숨어서 지켜보고 있을 수 있으니. 꼭 부상자를 확인하기 전에 주변의 안전을 꼭 점검하도록!"

류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조민성이 내 주변을 돌며 안전을 확인하는 시늉을 했다.

"그다음 부상자의 의식 확인이 우선이다. 먼저 조심스럽게 다가가 부상자의 어깨를 두드려 의식을 확인한다."

다가온 조민성이 무릎을 꿇고 나를 내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조민성이 지시에 따라 내 어깨에 손을 올린 뒤 가볍게 툭툭 쳤다.

"의식이 없는 부상자일시. 호흡을 확인한다. 호흡을 확인하는 방법은 숨을 쉬어 가슴이 올라오는지. 부상자의 호흡기에 귀를 대 호흡을 하는지 직접 듣는다."

내 가슴을 빤히 바라보는 조민성의 시선에 조금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그러다 조민성이 조각 같은 얼굴을 바로 내 입술 앞까지 들이밀었다.

주변의 여자들이 꺄앗­꺄악­ 거리는 소리가 강당 안을 가득 채웠다.

"의식을 잃었다고 판단될 시 안전한 곳으로 부상자를 이동시켜야 한다."

공주님 안기자세로 가볍게 나를 안아 드는 조민성의 모습에 주변 여자들의 환호가 더욱 커졌다. 나를 바라보는 조민성의 시선에 민망해져 고개를 돌리니 김성현이 질투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게 보였다.

지시에 따라 나를 옆 매트에 조심스레 나를 눕힌 조민성이 나를 보며 괜찮으냐는 듯 쳐다보길래 고개를 끄덕여줬다.

"자. 선남선녀 커플이 한대로. 던전 내 기본 응급구조의 순서는 이렇다. 첫째. 부상자발견 시 주변 안전 확인. 둘째. 의식확인. 여기서 의식이 있고 움직일 수 있을 시 즉시 그 자리에서 벗어나 안전자리로 이동. 의식이 없을 시. 안전구역으로 들어서 이동. 셋째.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고 생각된다면 곧장 주변의 영웅협회나. 군대에 연락을 취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다들 한 번씩 나와서 응급구조 순서에 맞춰 실습해본다. 끝난 애들은 옆에서 체력 단련해도 좋다."

자리에서 일어나 조민성과 옆으로 빠져나왔다. 큰 키 때문에 눈 마주치는 게 힘들어 일부러 조금 거리를 벌렸다.

"저 물어볼 게 있는 데."

"뭔데?"

조민성이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혹시 기아스라고 알아?"

"기아스? 흠, 들어는 봤지? 왜? 관심 있어?"

"관심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이지."

내 대답에 머리를 긁적이며 조민성이 대답했다.

"차성도 기아스를 노린다고 봐도 되는 건가?"

"차성도? 플라틴도 기아스를 노리는 거야?"

"뭐, 그런 건 우리 전문이니까."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그 말에 더 믿음이 갔다.

"혹시 기아스에 대한 정보를 알려줄 수 있어?"

"맨입으로?"

"어?"

"플라틴과 차성. 이 둘이 거래할 때는 항상 한쪽이 손해를 봐야 하는 거 알지? 근데 내가 손해 보기는 너무 싫네?"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조민성의 모습에 마치 잘생긴 배우를 보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잊고 있던 남자였을 때의 감정이 떠오른다.

열등감.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지는 좁혀지지 않는 차이.

같은 남자가 봐도 잘생긴 놈은 잘생긴 거구나.

그래서인지 조민성의 조각 같은 얼굴은 김성현의 편안한 똥강아지 같은 얼굴에 비해. 보는 것만으로 열등감이 느껴져 쳐다보기 싫었다.

"돈으로 살게."

"아니, 돈은 됐고 나중에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

"응, 어려운 부탁 말고 네가 허락할 수 있는 조건 안에서 최대한으로 성실히 부탁을 들어준다는 약속 하면. 정보 줄게."

"알았어. 거래 성립이야."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이상한 부탁도 아니고 내가 허락할만한 조건에서 도와주는 것쯤이야. 뜻밖에 깔끔하게 거래가 끝났다.

그렇게 생각할 때쯤. 내 옆으로 김성현이 가자미눈을 한 채 다가왔다. 조민성의 옆에 김성현이 있으니 너무 차이가 나 조금 웃겼다.

원래대로 김성현이 각성했다면 조민성에게 꿇리지 않을 조각 같은 외모와 능력을 가졌을 텐데. 지금은 조각상 옆에 작은 똥강아지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웃는 데. 김성현이 갑자기 내 팔을 잡고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해."

나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하는 조민성을 뒤로하고 나는 김성현을 따라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계단 위로 따라온 나는 기시감을 느꼈다.

아.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망각이 치료해준 감정이.

이 공간에서 다시 그 기세를 잃지 않고 머리를 가득 채운다.

몇 번이나 이 계단을 올라오던 소니아를 막았었지.

그리고 저기 보이는 남자화장실 안에서 김성현을 죽였었다.

또다시 차오르는 죄책감과 나에 대한 혐오감을 애써 무시한 채 김성현을 응시했다.

김성현이 이런 나의 본모습에 대해 몰랐으면 좋겠다.

그냥. 이유 없이. 그랬으면 좋겠다.

"할 말이 뭐야?"

"...나 좋아하는 거 맞지?"

맥락 없는 의심에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김성현이 대뜸 내 양팔을 붙잡고 소리치듯 말했다.

"나 좋아하냐고!"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맥락 없는 행동에 어이가 없어 말없이 쳐다보자. 내 대답을 꼭 듣겠다는 듯 조금 두려움이 깃든 눈으로 나를 보는 모습에 마지못해.

또다시 김성현에 대한 죄책감을 더하며 거짓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좋아하지. 안 좋아하면 왜 사귀겠어?"

평소의 목소리로 거짓을 뱉었다. 이제는 자연스러울 정도로 익숙해진.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는 나.

나도 모르게 말을 끝내고 입술을 깨물었다.

나에 대한 구역질이 올라왔으니까.

"...증명해봐."

그런데도 의심 가득한 눈을 한 김성현은.

내 말의 거짓을 간파했다.

증명해달라고 말하는 김성현의 얼굴에서 다양한 감정이 보였다.

진실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보였다.

나는 말 없이 김성현의 그런 감정 섞인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이유가 뭘까? 조금 생각해보니. 김성현이 불안해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평소 나와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는 마치 연인과의 `추억`을 쌓고 싶어하는 김성현의 모습과.

`추억`을 쌓아도 일이 잘못되어 입학식으로 돌아가면 너는 기억도 못할 텐데라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나.

무엇보다도 마음이 없는 상대와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구 자체가 들지 않았기에.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김성현과 그 요구를 난색 하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들어주는….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무게추가 기울어진 불평등한 관계였다.

김성현이 종종 선을 넘으며 연인과의 관계를 확인하려는 이유도.

나에게 사랑을 확인하려는 듯. 애원 섞인 시선으로 부탁하는 것도.

김성현을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그런 행동을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김성현은 자기만 사랑하는 거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것이겠지.

지금이라도. 더는 김성현을 속이지 말라는 양심의 질책을 무시하고.

나는 이 거짓 관계의 내 실수를. 흘러나오는 감정의 구멍을. 다시 거짓으로 덮어씌우기로 했다.

나는 김성현의 눈을 그대로 응시하며.

내 머릿속의 자기혐오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김성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 나에게 온전한 사랑을 바라는 순진한 눈빛에 더 해지는 죄책감에 몸을 떨면서.

김성현에게 키스했다.

몇 번 서로의 혀의 촉감을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입술을 떼고 죄책감과 자기혐오로 가득 찬 불안한 눈으로 김성현을 바라봤다.

"나도. 참는 거야 성현아."

내 거짓된 말에. 감동했는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의심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미안한 표정을 짓는 김성현의 순수한 모습이.

거짓뿐인 추악한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3년만. 아카데미만 졸업하면…. 매일 사랑해줄게. 그땐 참지 않아도 되니까."

그런데도 나는.

지키지 않을 약속을 자연스레. 입 밖으로 내뱉었다.

"사랑해 성현아."

김성현에게 느끼는 죄책감과 나에 대한 자기혐오가.

사랑과 비슷한 감정이길.

"진심으로."

진심으로 바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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