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약속
* * *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 떡볶이 뷔페로 가 떡볶이를 먹었다. 진희가 갑자기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했고 김성현은 `아무거나 상관없어`라고 했기에 진희의 의견에 따랐다.
김성현의 행동에 화가 나 있었기에 떡볶이를 먹는 동안 대부분 진희와 얘기했고 김성현의 말은 거의 무시하듯 대답도 별로 하지 않았기에.
눈치 빠른 진희는 김성현이 내게 뭘 잘못했다고 느꼈는지. 나를 위로하는 말을 해주고 자기는 옷 구경을 한다며 둘이 데이트하라고 자리를 비켜줬다.
진희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희도 우리 사이에 껴서 어색하게 있는 것보다. 편히 옷 구경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도 간만에 진희를 배려해 별말 없이 보내줬다.
진희의 말대로 김성현이 해달라고 하는 데로 끌려다니기만 하다가는 이러다 혼전순결 약속까지 깨질 것 같았다. 김성현은 또 실수인 척 하면서 거짓말로 날 속이겠지.
정말 진희의 말대로 기아스에 대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김성현과 근처 카페로 이동했다. 영화관에서 보였던 그 행동에 할 말이 많았기에.
진희와 있을 때 거리낌 없이 내 가슴을 주물럭대던 그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이제서야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음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아 나는 성욕대로 뒤 없이 행동하는 김성현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김성현."
"응…."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아니…. 우리 사귀는 사이잖아…."
"아무리 사귀는 사이라 해도. 내가 싫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억지로 그러는 거는 성범죄야. 그리고 옆에 진희도 있는데 그런 짓을 해?"
"미안해…."
풀죽은 얼굴로 처량한 모습을 보이는 김성현의 모습이 비 맞은 똥강아지 같아 마음이 약해졌지만. 김성현이 선을 넘은 건 맞으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확실히 교육해놔야 했다.
"나를 조금만 아껴줬으면 좋겠어! 성현아."
"당연히 아끼지!"
"그런 식으로 자꾸 행동하니까. 의심하게 되잖아."
"알았어. 미안해…."
너무 몰아붙이는 건 오히려 반항심을 끌어낼 수 있기에 적절히 당근을 내어주기로 했다.
"가슴은 조금 더 지나고 나서 만지면 되잖아. 못 만지게 할 것도 아니고…. 조급해하지 마."
내 말에 언제 기죽었느냐는 듯이 동그래진 눈으로 열심히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는 김성현의 모습에 조금 한숨이 나왔다.
"맞아. 우린 사귀는 사이니까. 헤헤. 미안해 내가 좀 빨랐지?"
"그래, 그러니까 좀 아껴달라고. 우리가 조금 사귈 것도 아니잖아."
"알았어. 딸기 케이크 위의 딸기처럼 아껴서 먹을게!"
아껴 `먹는다`라는 말이 조금 거슬렸지만. 대충 내 설득이 먹혔는지. 예상보다 김성현의 반응도 좋았기에 조금 잡스러운 대화를 했다. 화장을 고치려 잠시 화장실에 들어갔다.
작은 카페여서 그런지 공용화장실에 도어락이 걸려있는 화장실이었다. 영수증 밑의 비밀번호를 눌러 안으로 들어가.
입술 색이 옅어져. 그 위로 다시 틴트를 바르고 있는데. 누군가 비밀번호를 열고 들어왔다. 혹시 들어오는 사람이 모르는 남자일까 싶어 손을 멈췄는데. 익숙한 얼굴이었다.
"뭐야? 왜?"
"아니 나도 화장실 쓸려고…."
"이따가 들어오지 좀."
김성현을 무시하고 거울을 보며 다시 손을 움직이는데 김성현이 거울로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 말할까 고민하는듯한 표정에 미간이 좁혀졌다.
"왜?"
"그…. 약속한 거는…."
"...뭔 약속."
설마 그 건가 싶어 다시 물어보니 김성현이 부끄럽다는 얼굴로 "가슴…."이라고 얘기하기에 뒤를 돌아 김성현을 노려봤다.
"조금 전에 아껴준다고 말해놓고 가슴 만지게 해달라고?"
"약속은 약속이잖아. 아린아~~"
진희가 눈치챌까 봐 김성현의 행동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건데.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다. 조금 후회가 들었지만. 약속은 약속이었고 들어주지 않으면 또 들어줄 때까지 칭얼댈 게 분명했기에 조금 교섭을 했다.
"그럼 보기만 해."
"그런 게 어딨어! 만지게 해준다 했잖아."
"...그럼 10초. 얼마나 만지게 해준다고 안 했잖아."
"1분!"
"20초."
"1분만~!!"
"30초. 더는 안돼. 그리고 지금 카페인 거 잊었어?"
"알았어. 대신 30초 동안 마음껏 해도 되는 거지?"
대답 대신 김성현을 대변기 칸으로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카페안에 손님이 별로 없었지만 누가 화장실에 들어와 우리 모습을 보는 끔찍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좁은 대변기 칸에 마주 보고 서서 나는 부끄러움을 숨기고 가슴까지 옷을 올렸다.
"지금부터 30초 셀 거야."
"그런 게 어딨"
"30.29."
숫자를 세자 말을 멈추고 황급히 가슴을 만지던 김성현은 브래지어가 거슬렸는지. 위로 올려 치우고는 양손으로 가슴을 크게 움켜쥐고 주물럭댔다.
"16, 15. 야! 만지기만 하라고!"
눈을 감고 초를 세며 김성현의 손길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또 금세 나를 속이고 젖꼭지에 입을 가져다 댔다.
혼자 가슴을 만지는 느낌과 다르게 김성현의 혀가 젖꼭지를 휘감으며 빨아대는 느낌에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처음 느껴보는 야릇한 감각에 신음이 나올 것 같아 얼른 입을 막았다.
"끝났어! 그만해!"
30초는 훨씬 지난 것 같은데. 언제까지 할 생각인 거야? 김성현을 밀어봤지만 내 가슴을 놓지 않으려는지 더 격렬하게 젖꼭지를 빨기 시작했다.
"30초 센다 했잖아. 끝까지 세야지!"
"10, 9.8…. 야! 아프다고. 깨물지 마."
일부러 숫자 세는 걸 멈추게 하려고 그러는지. 아플 정도로 젖꼭지를 깨물어 통증이 느껴졌다. 젖꼭지에서 통증만 느껴지는 건 아니었기에. 느껴지는 이상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고 아픈 척 말하자.
그래도 이성은 있는지 김성현이 더는 젖꼭지를 깨물지는 않았다. 단지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아기처럼 쪽쪽 빨아대기만 했다.
1초까지 세고 끝났다고 3번은 외치고 나서야 김성현이 가슴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얼굴이 빨개져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짓는 김성현의 모습이 어이가 없었다.
가슴에 묻은 김성현의 침을 닦기 위해 옆의 휴지를 뜯어 가슴을 닦으려 하자. 김성현이 굳이 자기가 해주겠다며 나를 말리고 직접 내 가슴을 닦아줬다.
은근슬쩍 더 만지려 하는 속셈을 모를 리 없었지만. 그냥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봐. 나는 약속 이렇게 잘 지켜. 김성현 너도 나처럼 나랑 한 약속은 지키려고 노력해야 해 알았어?"
"알았어! 나도 약속 잘 지킬게."
믿음이 별로 안가는 김성현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아직은 내가 을이니까. 정말로 기아스를 찾아내든가 해야겠다.
***
일요일이 되고. 나는 알펜시아와 다시 만났다. 계약서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과. 실물의 파툴가의 마법 장갑을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소설의 묘사대로 알펜시아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판박이였기에. 다시 전에 보았던 카페에서 만난 초록의 눈동자를 가진 미남에게 호감을 느꼈다.
"다시 보니 저번 제 말이 틀렸군요. 오늘은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조각 같다는 말이 더 맞는 말 같습니다."
꿀이라도 떨어지듯 달콤한 목소리로 느끼한 말을 하는 알펜시아의 모습에 또 웃음이 나와 입술을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대부분의 독자가 남자인 영또플에서 [왠 남자 새끼가 저리 느끼하게 말하냐?] [제비아님? ㅋㅋ] [쌉게이일듯ㄷㄷ] 이라는 안 좋은 평가를 받는 알펜시아였기에 그 행동이 웃길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런 미남이 나에 대해 직접적으로. 찬양하듯 말해주는 것은 나쁘지 않았기에 웃음을 참고 가까스로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이게 파툴가의 마법 장갑이에요."
장갑만 달랑 들고 올 수는 없었기에 집 안에 있는 고급 상자에 장갑을 넣어왔다. 상자를 내밀자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한 알펜시아가 장갑을 꺼내 착용했다.
"확인은 해봐야 하니까요."
알펜시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자. 주머니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신기하게도 돌멩이는 혼자 공중에서 2cm 정도 떠오르고 있었다.
"간단한 주문이 걸려있는 돌이에요."
신기한 눈으로 보자. 친절하게 설명해준 알펜시아가 장갑을 낀 손으로 돌멩이에 손을 뻗자. 공중에 떠 있던 돌멩이가 힘을 잃고 테이블 밑으로 떨어졌다.
내 쪽으로 떨어진 돌멩이를 주워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다시 공중에서 2cm 떠올랐다.
"성능은 확실하네요."
"마법 장갑이니까요."
장갑을 벗어 다시 상자 안에 넣고 나에게 넘겨주었다. 오늘은 확인만 하는 자리였고. 계약이 끝나는 날에 파툴가의 마법 장갑을 넘기는 조건이었으니까.
"아, 계약서를 놓고 와서. 잠시만…."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알펜시아의 모습에 의자에 등을 기대 커피를 마셨다.
"곧 직원이 계약서를 들고 올 겁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실수를 한다니."
"실수아닌 것 같은데…."
"네?"
"아. 혼잣말 혼잣말."
이런 자리에서 계약서를 놓고 오는 초보적인 실수를 한다고? 그것도 그 효율충인 알펜시아가? 믿음이 안 갔다.
아카데미 생활은 괜찮냐는 조금은 잡다한 얘기를 주고받으며 기다린 끝에. 노란 머리에 하늘색 하와이안셔츠와 샌들을 신은 조금 양아치스러운 남자가 서류가 든 봉투를 들고 다가왔다.
"요~ 서류 가져왔어."
하와이안셔츠를 즐겨 입고 귀찮다는 표정이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는 모습. 자연스레 한 명을 떠올릴 수 있었다. 칠격의 2번. 린자이 우시오.
상대방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희귀한 능력자지만. 귀차니즘의 끝판왕이다.
소설에서는 항상 누워있다는 설명이 붙어있었기에 이렇게 평범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이 조금 신기했다.
슬쩍 알펜시아의 옆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왜 서류를 놓고 왔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 기억을 읽으려고요?"
내 말에 알펜시아와 우시오의 얼굴에 조금 당황으로 물들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하긴 영또플을 안 봤으면 그냥 직원이 저렇게 하고 다녀도 뭐라 안 하는구나. 회사가 되게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난 심지어 영또플의 애독자라고. 후반부에서 가장 김성현과 맞부딪치는 일이 많은 칠격에 대해 기억 못할 리가 없잖아.
"허. 나에 대해 아시나 보네."
"역시, 차성인가."
무언가 오해하며 감탄하는 둘을 무시하고 우시오를 바라봤다. 우시오의 능력이라면 빙의 전 내 과거까지 알 수 있을까? 아니면 내가 떠올릴 수 없는 이 몸의 과거를 알아낼 수 있을까? 궁금증이 생겼다.
"해봐요."
"예?"
"능력 써보라고요. 저한테."
내 말에 당황했는지 알펜시아를 보며 눈치를 보던 우시오가 알펜시아의 허락이 떨어졌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시선으로 내 미간 사이를 뚫으려는지. 한참을 내 미간을 노려보던 우시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손으로 자신의 두 눈을 누르며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되는데?"
"뭐?"
"네?"
우시오의 말에 당황한 알펜시아와 나의 대답에 우시오는 눈이 아픈지 손으로 비벼대던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만 해봐도 될까?"
방금까지 귀찮다는 표정이 역력했는데. 조금 의욕이 생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우시오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여주자. 내 옆으로 다가와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지?"
"이건 뭐지?"
"...몽롱해지는데?"
혼자 중얼중얼 무어라 떠들던 우시오는 돌연 흥미로워하던 눈빛을 지우고 탁한 눈동자로 변했다.
"에이, 포기. 안되네."
"우시오의 능력이 자신에게 통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했던 건가요? 역시 차성…."
알펜시아의 헛소리를 무시하고 우시오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표정을 살폈지만. 진짜로 자기 능력이 안 통한다고 생각한 건지 금세 포기하고 탁한 눈동자로 귀찮아하는 우시오의 모습에 진짜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심지어 그 먼치킨인 김성현에게까지 우시오의 능력이 통했는데. 왜 나만 안되는 걸까?
혹시 빙의자라는 특이한 설정 때문인 걸까? 수많은 추측이 떠올랐지만.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우시오도 안된다면 칠격이 나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우시오의 능력도 안 통하는 데. 나에 대한 조사. 가능한가요?"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을 뿐인데. 알펜시아의 눈이 조금 차갑게 변했다.
"...칠격을 너무 우습게 보지 마세요."
칠격을 무시했다고 생각한 건가? 오해를 풀려 했지만. 알펜시아는 딱딱한 얼굴로 우시오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의뢰의 시작은 따로 알려드릴게요."
"계약서는요?"
"어차피 우시오를 만나게 하기 위해 만들어낸 구실이라는 거 아시잖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휙 뒤돌아 카페를 나가는 둘을 보고 조금은 어이가 없었다.
나 뭐 잘못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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