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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2화 (12/160)

〈 12화 〉 관점

* * *

집으로 데려다주겠다는 김성현의 불편한 호의를 가까스로 거절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결국 차기사를 불러 집으로 돌아갔다.

잘 다녀왔냐는 임유모의 질문에 피곤하다고 말하고 드레싱룸에 들어가 거울 앞에 쓰러지듯 몸을 누웠다.

한계를 넘어 폭주하던 감정덕분에 내 정신은 탈진해버렸다.

고개를 돌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봤다.

진이 빠졌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생기를 잃은 눈과 번진 화장. 운 것처럼 부어있는 눈.

내가 울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리가 몽롱하다.

당장이라도 잠에 빠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잘못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까. 어쩌겠­

이상하다.

몽롱한 머릿속. 무의식중의 무언가가 경고를 보낸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개씨발­"

신아린으로써 단 한 번도 내뱉지 않았던 단어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편해지라는 이성의 경고를 무시하고. 나는 느껴지는 위화감에 몸부림친다.

또다시 나에 대한 자괴감과. 김성현에게 했던 행동에 대한 후회감이 다시 찾아오­

쨍그랑­!

몸을 억지로 일으켜 눈앞의 전신거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손가락에 박히며 극렬한 고통이 느껴졌다.

뜨겁게 달아오른 피가 팔뚝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 몽롱했던 정신이 밝아졌다. 머릿속을 채우던 자괴감과 후회감이 고통으로 사라지고.

나는 무의식으로 빨려 들어갔던 것들을 끄집어냈다.

나는 이 세계에 빙의하고 난 뒤. 26살의 병장 만기제대 모쏠 공대생이었던 나. 한성진과 17살 차성의 후계자이자 미녀인 신아린. 두 명의 관점에서 생활했다.

첫 날. 한성진의 관점에서. 단순히 같은 남자에게 따먹히기 싫다는 이유로. 영또플의 흐름을 바꿨다. 내 안위를 위해. 신아린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했다.

지극히 개인적인 행동이었고 그 당시에는 그것이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는 백진희와 김성현과 아카데미생활을 하면서. 나는 한성진이 아닌. 소설 속 신아린처럼 행동하고 생각했다.

화장하고. 겉모습을 신경 쓰며. 신아린으로써 남의 시선을 의식했다.

한성진이라는 자각만 있었을 뿐. 한성진이었다면 하지 않을 행동을 하면서도 어떠한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내가 한성진으로써 생각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소니아를 죽이고 그 뒤에 벌어질 일을 확인한 뒤. 자퇴를 해 다시 입학식으로 돌아가 나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꿨을 것이다.

나는 분명 소니아를 죽일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김성현과 소니아가 같이 있는 모습을 경계하며 질투를 하기만 했다.

뻔히 시간이 지날수록 소니아의 유혹을 김성현이 버티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어째서 소니아라는 변수를 제거하지 않았지?

본래의 나. 한성진이었다면.

김성현이 내 팔목을 잡았을 때 쌍욕을 받으며 김성현을 두들겨 팼어야 했다.

김성현이 혀를 휘감았을 때. 이빨로 혀를 뜯어냈어야 했다.

원래의 난. 그런 성격이었으니까. 게이도 아니었고.

남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하면서도. 나에게 피해가 생길 것 같으면 남을 방패 삼아 나를 보호하는 이기적인 놈.

남을 배려하는 척 깎아내리며. 남의 약점을 잡는 것을 좋아하던 음흉한 놈.

응원한다고 말하며. 다른 곳에서는 작가를 비웃거나 작품을 비난하던. 이중적이던 놈.

잘되는 게 배 아파 작가의 실수를 퍼트리거나 거짓 정보를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올려 작가를 조리돌림하던놈이.

막상 소설이 연중 되자 가면을 쓰고 돌아오라며 착한 독자인 척 하던 그런 위선적이던 놈.

그런 역겨운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화신 같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김성현도 단지 가설을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 하나로 죽였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내가. 어느 순간부터 나조차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아린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신아린처럼 행동하고 있다.

남들 앞에서 무릎 꿇는 김성현의 모습이 부끄러워? 원래였다면 개지랄한다며. 그 얼굴에 사커킥을 날렸어야 했다.

신아린으로써의 기억은 전혀 없다. 그런데 왜. 신아린처럼 행동하는 걸까? 육체의 주인이 신아린이라서? 그렇다면 왜 처음에는 내 멋대로 하게 놔둔 건데?

오른손 박힌 유리 조각들을 빼내는 것으로. 고통에 적응해 다시 몽롱해지려는 정신을 제자리로 돌려놓은 뒤. 머릿속으로 지난 일들을 떠올려봤다.

입학식 다음 정식등교 날.

백진희와 얘기하다 소니아와 말다툼을 하고 김성현의 멍청한 모습에 화가나 친구 하자고 소리치던 흑역사의 날.

그때부터 무언가 이상했다. 소니아가 김성현에게 교실에서 친한 척을 한다 해도. 그딴 건 상관없잖아? 굳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김성현이 소니아와 사랑을 하든 친구를 하든. 내게 중요한 건 김성현의 동정일 뿐이다.

김성현이 소니아에게 동정을 따이기전 마인 사냥집단에 접근해 소니아를 죽이게 하고 김성현을 감시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왜.

김성현과 소니아를 지켜만 봤을까? 김성현 옆의 소니아가 얼마나 위험한 변수인지. 그토록 경계해 놓고서는 왜 생존 실습 전까지 소니아를 죽이지 않았지?

한성진으로써. 나의 행동에 위화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김성현이 억지로 우겨 사귀게 되었을 때. 김성현의 눈에 보이는 뻔한 행동에 어째서 그렇게 멍청하게 행동한 걸까?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당장 김성현을 무릎 꿇고 빌게 할 방법이 몇 개는 떠오르는데. 어째서 그렇게 멍하니 당하고만 있던 거지?

내 행동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그딴 거 생각할 거였으면 애초에 죽이지도 않았어.

어차피 소설인데.

후회? 씨발 다시 시작해서 모두가 좋게 바꾸면 되잖아?

뭐야, 무슨 상황이냐고 이 씨발!!!!!

이 씨@#%$%@#..........................................

당장이라도 무언가 부숴버려야겠다는 충동심에 손에 잡히는 옷들을 바닥으로 내던지려는데.

지이잉­

주머니에 넣었던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김성현인가 싶어 쌍욕을 박으려 휴대폰을 꺼내들었는 데.

[백진희]

휴대폰 액정에 떠오르는 이름에 얼른 전화를 받았다.

[아린아 왜 메시지에 대답이 없어 걱정했잖아~]

"...아, 미안 못 봤어 이제 막 집에 도착했어."

[나는 기숙사 도착해서 이미 다 씻었지~ 맞다. 오늘 맛있는 거 사줘서 고마워 아린아.]

"나도 오늘 진짜 재밌었어 진희야. 그렇게 맛있는 케이크를 먹은 건 처음이야."

휴대폰 너머의 진희의 목소리에 지쳤던 정신이 조금은 힘을 찾은 것 같았다.

진희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리 마음이 편안해지다니. 진희는 나에게 참 중요한 존재인 것 같다.

진희의 도움덕에 아카데미 생활도 편했고. 처음으로 이런 미녀와 데이트아닌 데이트도 해보고.

생존실습도 진희아니였다면 만점을 받지 못했을텐데.

[아린아 주말에 시간 되면 영화 보러 갈래? 마침 재밌는 영화 개봉하던데]

"좋지. 주말에 할 것도 없었는데. 잘됐다. 주말에는 내가 진짜 비싼 거 사줄게."

[에이, 친구 사이에 그런 게 어딨어! SNS에 올린 거 알지! 우리는 이제 평생 친구라고!!! 이번엔 내가 사줄게]

"알았어~ 영화는 내가 예매할게."

진희의 말에 내 안의 무언가 치유되는 느낌이다. 어떻게 이리 착할 수 있을까? 사랑받고 자란 미인은 이리도 외모처럼 마음씨도 착하게 크는 걸까?

나를 항상 배려해주고.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는 유일한 사람. 이런 진희와의 관계가 깨질까 한편으로 두려움이 들었다.

나랑 평생 친구라고 한것을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줄테다. 혼자 속으로 그런 다짐을 했다.

[맞다. 혹시 성현이랑 만났어?]

"응? 김성현?"

갑자기 김성현에 관해 말하기에 당황했다. 진희에게 사귄다고 말해야 하나? 방금 진희가 우리 사이를 평생 친구라고 말했는데.

평생 친구끼리 연애 사실을 숨겨도 되는 건가? 고민이 들었다.

[너랑 헤어지고 버스 타려는데 반대편에서 김성현 본 것 같아서. 혹시 만났나 싶었지.]

"아, 그…. 진희야."

[응? 왜?]

진희에게 김성현의 고백을 받았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놀라워할까. 아니면 잘됐다고 축하해줄까? 진희의 예쁜 마음씨라면 축하해줄 것 같긴 했다.

"사실…. 성현이랑 만났어. 그러다 얘기 좀 나눴는데…."

[응, 응! 그래서!]

"그, 갑자기 고백하길래 생각 좀 하다가 결국에 받아줬어…."

[이럴 줄 알았어! 옆에서 보니까. 계속 서로 좋아하면서 모른척하는 것 같더니!]

평소에 비해 3옥타브는 올라간 듯한 자신의 일마냥 기쁨에 찬 진희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나도 뭔가 싶긴 해. 김성현이랑 사귈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그래도 성현이 은근히 인기 많으니까! 약간 강아지 같은 인상 때문인가? 귀엽긴 하니까.]

"그런가…? 맞아. 조금 귀엽긴 해."

진희의 말에 김성현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그런 시골 똥강아지 같이 순진해 보이는 얼굴도 없지. 귀여운 양 볼을 쭉 늘려잡­

이씨이이이바아아아알ㄹㄹㄹㄹㄹㄹㄹㄹㄹㄹ­

[걱정 마! 그런 관상이 막상 사귀면은 한 여자만 보는 사랑꾼 관상이야! 소니아만 조심하면 돼! 걔는 쪼금…. 개방적이잖아?]

"..으, 응"

무언가 뒷 목을 바늘로 긁는 듯한 소름 돋는 감각이 들었던 것 같은데…. 뭐지? 이상한 기분에 몸을 둘러보다 손을 다친 것을 자각했다.

일어서려다 어지러움에 실수로 거울을 깨트렸었지? 진희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고통마저 까먹고 있었다니….

"진희야 나 이제 씻어야 해서 이따가 전화해도 될까?"

[아니야! 못다 한 얘기는 내일 만나서 직접 하자! 성현이랑도 통화해야 할 거 아냐.]

"응. 알았어. 그럼 내일 보자."

생각해보니 김성현한테도 집에 잘 들어왔다는 전화는 해야 할 것 같았기에 진희와 통화를 끝내고 곧장 김성현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내 꼴이 말이 아니었고. 피 때문에 찝찝했기에 밖으로 나가 임유모에게 실수로 거울을 깼다고 말하자.

걱정이 컸는지 차기사를 불러 병원으로 가라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어차피 병원에서도 이런 외상은 포션으로 치료했기에.

차기사의 도움으로 손에 박혀있는 유리 조각을 끄집어 내고. 집에 있는 비상용 고급포션을 담은 대야에 오른손을 넣고 의자에 앉아 김성현에게 전화했다.

"여보세요?"

[으응. 아린아. 잘 들어갔어? 히히.]

"응, 잘 들어갔어. 기숙사야?"

[엉. 이제 씻고 잘 준비해야지.]

"응, 그럼 내일 봐."

[잠, 잠깐!!!]

통화를 끊으려 휴대폰을 내렸는데. 김성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리기에 다시 귀에 가져다 댔다.

[그…. 잘자.]

"응, 너도 잘자."

[응! 사랑해!!!]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모쏠자식 같으니. 조금 그 행동이 귀엽게 느껴졌다.

김성현에게 한 행동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대가라고 생각하며 그 마음을 못내 받아주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진희도 이렇게 좋아하고 응원하는데.

김성현이 날 정말로 좋아한다면 그 마음을 받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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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이제 손 빼도 돼요!"

임유모의 말에 멍하니 있다가 정신이 들었다. 잠깐 졸았던 건가?

아무래도 피곤한 것 같다. 진희와 데이트한다고 긴장하기도 했고 김성현 때문에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으니.

심지어 내일도 아카데미에 가야한다니. 한숨이 나왔다. 아프다고 하루만 쉬면 안될까? 강한 유혹이 들었지만. 진희와 내일 보기로 '약속'했으니. 어쩔 수 없지.

임유모에게 화장을 지워달라고 말하며 몽롱한 정신으로 의자에서 일어났다.

***

"자기 피부에 마력을 둘러쌓아 외부의 위험을 막는 `크론트`라는 괴수는 3M의 큰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칠판을 응시하며. 정수리가 벗겨진 짧은 머리 선생의 말을 듣고 있다.

영또플을 수 십 번 정주행하고. 파이어위키에 스토리 정리본까지 올린 나로서는. 남들에게는 지루한 수업이 하나하나 즐거울 정도로 재밌었다.

코끼리와 낙타를 합친 것 같은 `크론트`라는 이상한 동물. 아니, 괴수의 사진은. 꿈에서 본다면 악몽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처음 보는 괴이한 모습이었다.

소설 속 묘사로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에 주변의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나는 항상 수업에 열정적으로 임하고 있다.

원작에서 백진희와 여자부 1, 2위를 다투는 신아린답게. 나는 빙의 전과는 다르게 기억력이 매우 좋았다. 책 한 권을 집중해서 읽으면 금방 암기할 정도로.

새로 배우는 수업임에도 똑똑한 머리 때문인지. 즐거운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단지 신아린의 원래 성격 탓인지. 오른쪽 옆자리의 2명이 상당히 거슬렸다.

수업 시작과 동시에 책상에 고개를 박고 죽은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동도 없는 소니아와.

앞 사람의 등에 숨어 즐거운 표정으로 휴대폰 게임을 하는 김성현의 모습에.

조금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시선을 마주친 김성현이. 연인이 보내는 한심한 시선을 느꼈는지. 슬며시 휴드폰을 내리고 공부하는 척했다.

귀엽네.

한참이 지난 끝에야 드디어 모든 수업이 끝났다.

김성현은 자신의 한 말을 지키려는지 등교 전 나에게 연락해 사귀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비밀로 하겠다고 말해줬다.

조금은 나를 배려해주는 모습에 김성현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조금 풀렸다.

"아린아~ 오늘은 저녁은 바쁘겠네~? 대화 잘하고 와! 끝나고 연락하고. 분위기 깨게 중간에 연락 안 할게."

진희에게는 차성의 후계자라는 집안 사정 때문에 비밀 연애를 한다고 미리 말해줬다. 그 뒤로부터 자꾸 저런 식으로 놀리면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진희와 인사하고 `우리`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사람들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김성현과 함께 차기사의 차에 탔다.

아무래도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보이는 건 주위 시선이 신경 쓰였다.

초월 아카데미생이 오지 않는 거리가 먼 카페에 도착해. 서로 마실 것을 주문하고 구석진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거 우리 첫 데이트라고 쳐야 하나…?"

"그것보다. `우리`의 교제를 위해서 서로를 위한 약속을 하는 게 우선인 것 같아. 성현아."

김성현의 헛소리를 자르고 건실한 대화 주제를 꺼냈다.

"일단은 연애 사실을 공개하지 않아 줘서 고마워. 초월 아카데미 생활 동안 내가 누군가와 연애한다는 사실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가면 아카데미에서 자퇴하라 하실 거거든."

"아냐. 내가 약속한 건데 뭐. 남들한테 공개 안 한다고 우리가 안 사귀는 건 아니잖아. 조금 아쉽긴 하지만…."

가볍게 거짓말로 입을 열었다. 김성현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운 티를 냈다.

그런 김성현에게 손을 뻗어 손을 맞잡아 주었다. 닭살이 돋을 것 같지만. 김성현을 속이려면 이 정도의 터치는 감수해야지.

"배려해줘서 고마워 성현아."

"헤헤. 뭘 사귀는 사이에서 이 정도는 해줘야지."

멍청한 웃음소리를 내는 김성현이 모습에 어제의 김성현에게 느꼈던 감정들을 느낄 수가 없었다.

어제는 분명…. 내가 잘못했었지? 어제는 내가 너무 감정적이었기에 기억이 잘안났다.

"어제는 내가 미안했어. 너무 감정적으로 너한테 대한 것 같아서 집에 가서 많이 마음이 아팠어."

"...나도 미안해. 어제 너한테 너무 심한 말 한 것 같아서 욕한 것도 미안하고…. 다시는 너한테 욕하는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

김성현이 내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어울리지 않게 듬직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조금 사랑스러워 보였­

"왜? 어디 아파?"

"...응? 왜?"

"아니, 아니야."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고는 뒷머리를 긁는 김성현의 엉뚱한 모습에 김성현은 김성현이구나. 하며 말을 이어갔다.

"내가 어제 고민했던 게. 네가 나랑 연애하려는 이유가 혹시 단순한 성적 호기심 때문이면…."

"아냐! 그냥 진짜로 너 좋아해서 그런 거야. 그거는 뭐 보너스 그런 거지…? 헤헤"

마지막 말은 조금 능글맞게 말하는 것이 어이가 없어 나도 웃음이 나왔다.

능글맞은 시골 똥강아지인가?

"그러면 나랑 서로 약속하나 할래?"

"무슨 약속?"

"아카데미 동안 나는 가정사 때문에 원래는 연애할 수 없어. 분기마다 병원에 가서 처녀인 것도 확인받고. 남들과 다른 특이한 집안이니까…."

"아, 으응…."

"그래서….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만약 우리가 사귄다면…. 내 처녀를 너한테 줄게. 원래는 혼전순결이지만…. 그때 정도 되면 너랑 반드시 결혼할 테니까."

물론 거짓말이다. 내가 왜? 졸업하면 바로 차야지.

하지만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조금은 부끄러웠다. 아무래도 원래는 남자였으니까.

"어? 나는 당연히 좋지…. 너랑 오랫동안 연애하고 싶고, 졸업하면 나도 당장 결혼식…."

부끄러워하며 말하는 김성현의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마시는데. 김성현이 조금 음흉하게 변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근데 그, 뒤로 하는 건 혼전순결이라는 룰에서 살짝 벗어나는 약간의 변칙플레…. 크흠, 어휴. 이거 청포도가 싱싱하네. 직접 갈았나?"

정색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김성현은 헛소리를 멈추고는 자신이 주문한 청포도 에이드를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이런 찌질함이 김성현이지.

귀엽긴 하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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