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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10화 (10/160)

〈 10화 〉 갑과 을

* * *

프로필 사진 하나를 올리는데 이렇게 많이 찍는 건가 싶을 정도로 수 백 장을 찍고 나서야.

진희의 허락이 떨어진 한 장의 사진을 프로필에 올릴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에도 찍었던 사진들 중에서 가장 잘 나온 사진이었기에 불만을 표출할 순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자연스러운 포즈라는 것이 이리도 인위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종류의 포즈가 많았으니까.

"처음 올리는 포스팅은 나랑 찍은 사진으로 올려!"

진희가 내 옆으로 와 몸을 착 달라붙었다. 셀카모드로 또다시 수십 장을 찍고 나서야 만족했는지. 내 휴대폰에 사진을 전송하고 자신이 시범을 보여준다며 내 휴드폰을 가져가 새로 개설한 내 SNS에 사진을 대신 업로드 해줬다.

내 평생 친구 진희와 함께~!

#초월역 #초월역맛집 #초월아카데미 #초월미녀 #신아린 #백진희 #평생 친구…!

진희가 올린 포스팅을 보고 조금은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평생 친구라는 단순한 말이 상당히 마음을 울리게 했다.

진희는 별 뜻 없이 쓴 거겠지만. 진희같이 남을 배려하고 위할 줄 아는 사람과 평생 우정을 지속한다면. 절대 인생에서 손해는 아닐 거다.

진희와 일상얘기를 주고받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이 계속 진동하길래 확인해보니. 진희가 태그되 있어서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좋아요와 댓글을 달아. 알림이 울렸다.

왜인지 모르게 타인에게 내 일상모습을 보인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져 조금 부끄러웠기에 진희의 도움을 받아 알림 설정을 껐다.

남은 음식을 마저 먹으려다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로 변해 위가 작아졌는지. 남자였을 때는 2배는 먹었던 것 같은데. 벌써 위가 가득 차 몸이 불편한 느낌이었다.

"맛있는 거 사줘서 고마워~ 간식은 내가 살게!"

방금 밥 먹은 거 아닌가? 간식을 먹는다고? 내 의문을 해소하려는 듯 진희는 곧장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팔짱을 끼고 조각 케이크 전문점으로 날 끌고 들어갔다.

"일단 당근 케이크 하나랑 초코바른 망고 케이크 하나랑…."

일단…?

더는 위에 무언가를 넣기 거북했기에 급히 진희를 말렸다.

"나는 위가 꽉 찼어. 그냥 음료 하나면 될 것 같아…."

"여기까지 왔는데? 괜찮아 당근 케이크 진짜 맛있거든? 한 번만 먹어봐!"

결국, 딸기 스무디 하나와 억지로 당근 케이크 하나를 시키고 진희와 테이블에 앉았다.

여자들이 주 고객이라 디자인에 신경을 썼던 지. 상당히 여성스러운 디자인에 푹신푹신한 보라색의 의자였다. 주변 테이블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기에 나도 은근슬쩍 카메라를 들이밀어 진희를 찍어주었다.

아무렇게나 찍어도 잘 나왔지만. 진희는 자신이 맘에 드는 사진을 골라 전송받았다.

"아린아. 평소에는 뭐해?"

"응? 평소에?"

"재벌이니까 막 후계자 수업 듣고 그래?"

진희의 말에 천천히 내 일과를 떠올려봤다. 평소에 내가 뭘 했더라….

아침에 일어나 아카데미 등교 ­> 하교 ­> 저녁 먹기 전 자위 ­>저녁 먹고 휴식 ­> 잠들기 전 자위 ­> 씻고 잠 ­> 다시 일어나 등교….

"...공부해."

요즘 새로운 내 몸에 열심히 적응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에는 아무리 친구 사이라 해도 말하기 힘들었다.

"역시…! 평소에 수업도 잘 듣고. 생물수업 때 갑자기 쪽지시험 봤는데. 만점 받았잖아?"

내 거짓말에 밝은 표정으로 말하는 진희의 모습에 양심이 조금 찔렸다.

심지어 생물수업 때 쪽지시험은 영또플에서 답이 나왔기에 이미 알고 있었고. 신아린의 머리가 똑똑해서인지 들었던 내용은 기억을 잘하기도 했다.

"그거는 우연이긴 해…."

"아니야~ 그런 게 실력이지 실력!"

진희의 밝은 모습에 나도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진희의 추천으로 억지로 산 당근 케이크도 이름과 다르게 상당히 맛있었다.

딸기 스무디가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근데 성현이랑은 싸웠어?"

"어?"

갑자기 김성현 얘기라니. 순식간에 높이 올라갔던 행복도가 절벽으로 떨어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일부러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

"실습 끝나고 성현이가 말걸었는 데 일부러 무시하길레…."

"그냥…. 그런 일이 있었어."

"흐응, 성현이랑 사랑싸움 중?!"

처진 분위기를 느꼈는지. 장난기 섞인 진희의 목소리에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 웃어 줬다.

"그런 거 아니라고~"

"에이~ 그러면 왜 그리 성현이 신경 쓰는 데? 다른 사람한테는 안 그러잖아."

"별로 신경 안 쓰는 데…."

"우리 반에 민성이 알지? 잘생긴 애 말이야."

"조민성?"

모를 리가 있나. 세계 1위 기업 플라틴의 후계자면서도. `푸른 마나 살인귀`라는 악명을 가진 이 세계관 최강의 `마법사`의 잠재력을 보유한 등장인물인걸.

거기에 나와 진희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학생은 조민성과 우리 반 담임인 기한신의 외모에 푹 빠져있었다. 조금 질투 날 정도로.

"민성이랑 대화나 눈 적 있어?"

"...없지?"

잘생기고 잘 웃으면 뭐해. 본 모습은 사람 죽이는 거 좋아하고 사디스트적 성향 가진 미친 싸이코놈인데. 일부러 거리를 벌린 이유도 있었다.

김성현 하나로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조민성까지 엮인다면 이건 재앙이다.

"봐! 다른 애들은 민성이랑 한 마디라도 나누려고 그리 노력하는 데! 아린이 너는 민성이 쪽은 보지도 않고 항상 성현이만 보잖아~"

남이 보기에는 내가 김성현만 바라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때 김성현을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소니아가 잠깐 방심한 사이에 김성현을 끌고 가 덮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멍청하게 놔둘 리가 없잖아.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진희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지 몰랐겠다.

"거기엔 사정이 있어…."

"무슨 사정?"

"말하기 힘든 사정…."

"아린아. 성현이 짝사랑하는 거지?"

말문이 턱 막혔다.

이게 뭔 개소리야?

항상 나를 배려해주는 말을 먼저 해주는 진희지만 왜 김성현 관련된 것에는 이리 고집을 부리는 걸까?

김성현에 관한 얘기를 하기 싫었기에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그것보다. 진희 너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아니, 나는 없어."

"아, 응…."

정색하듯 바로 차갑게 대답하는 진희의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나도 진희처럼 누구 좋아하는 거 아니야~? 하고 놀리려 했는데.

저렇게 칼같이 정색하는 모습에 괜히 입을 놀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아린아."

"응."

"기아스라는 거 알아?"

"기아스?"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고개를 젓자 진희가 웃으며 휴대폰으로 그림을 그려 설명해줬다.

"고대 마법이래. 아일랜드어로 `의무` `맹약` `구속`을 뜻하고. 켈트 신화에 많이 나오는 건데. 기아스를 이용해서 남에게 `나를 평생 사랑해야 해!`라고 하면은 그 사람은 거기에 구속돼서 평생 사랑하게 된대. 반대로 `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이라고 해버리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 죽게 돼버린 데."

"신기하네."

"이건 비밀인데…."

진희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은밀한 말을 하듯 가까이 상체를 숙이고 말했다.

"현역 S급 영웅 중에 한 명이 기아스를 이용해서 S급에 달성했다는 소문이 있어."

"정말?"

"응, 신화에서는 기아스에 묶이면 대가로 큰 힘을 얻을 수 있거든."

"기아스…."

진희의 말에 기아스라는 것에 대해 떠올려봤다. 영또플에 이런 설정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직접 김성현과 겹치는 스토리가 없었던 걸까?

조금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고 있자. 진희가 웃으며 내 팔뚝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뭐 그리 진지하게 고민해! 왜? 성현이에게 걸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라고!!!"

"반응이 크면 사실이라던데~"

오해에 빠진 진희는 이겨낼 수가 없다.

*

그 후로도 한참을 떠들다 시간이 많이 지나 진희와 헤어지게 되었다. 차기사를 불러도 되지만 집과 그리 먼 거리도 아니었고. 고기에 당근 케이크까지 쑤셔 넣었기에 불편해진 몸이었기에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밤거리를 걸으며 영또플을 쓴 작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은 알까?

내 앞에 자신이 쓴 세계가 현실로 구현돼있다는 것을.

이름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저렇게 웃고. 마시며 떠들어대는 것을.

밤이라 그런지 조금은 센치해졌나?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의 타일의 패턴을 보며 걷다. 누군가가 동선을 막기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내 앞에는 교복이 아닌 사복 차림의 김성현이 죄책감 어린 얼굴로 서 있었다.

"아린아…."

"할 말 없어."

보고 싶은 얼굴이 아니었기에 차갑게 말하고 지나가려는 데. 김성현이 다시 내 앞을 몸으로 막아섰다.

"오해야 아린아. 진짜로."

"...뭐가?"

"나 아직도 너 좋아해."

김성현의 말에 역겨움이 올라왔다. 날 좋아한다고? 나와 아카데미 졸업 후 교제하자는 약속까지 해놓고 다음 날 소니아와 그딴 짓을 하던 게?

"미친 새끼…."

"미안해. 근데 그거는 어쩔 수 없었어. 소니아가 나 도와준다고 하길레 따라갔는데…. 알잖아 너도 소니아가 어떤 애인지."

"미쳤어?"

"어?"

"네가 네 입으로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해놓고 소니아 탓을 하는 거야?"

내가 그 말을 들었다는 것을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변한 김성현이 허둥지둥거리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실수였어. 진심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 잠깐 미쳤었나 봐!"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는 휴대폰을 꺼내 나와 김성현의 모습을 담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에게는 이런 모습이 쏠쏠한 가십거리겠지.

"...내일 얘기하자."

이 모습이 아카데미에 알려질까 무서웠기에 도망치려고 걸음을 옮기자 김성현이 다리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아린아…."

나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행동에 화가 치밀었지만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흥미로운 얼굴로 발길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모습에 급히 김성현을 일으켜 세웠다.

"알았으니까 따라와. 쪽팔리니까."

"으, 응. 그럼 카페라도 갈까?"

"아니, 근처 앉을 수 있는 곳으로 가자."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의 행동이 멋쩍었는지. 뒷머리를 긁는 김성현의 얼굴에 뺨을 한 대 치고 싶다는 충동을 가까스로 참으며.

근처 골목 안에 있는 놀이터를 발견해 비어있는 벤치에 앉아 마주 봤다.

가슴속을 채우는 김성현에 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김성현을 노려보며 말했다.

"...너 정말 이기적으로 구는 건 알고 있어?."

"정말로 미안해…. 난 그냥 사과하고 싶었어…."

"사과받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용서해달라고 억지 부리는 거. 그런 게 이기적이라고 말한 거야."

내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 김성현이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내밀었다. 그 어이없는 모습에 억눌렀던 분노가 고개를 치들었다.

화낼 사람은 나인데 왜 자기가 기분 나빠하는 거지?

"미안하다더니 표정이 왜 그래?"

"너도 이기적이잖아…."

"뭐?"

미친놈인가? 고개를 치들며 아우성치던 분노도 지금 상황에 당황해 그대로 멈춰 섰다. 나는 그냥 말문이 막혀 김성현을 바라봤다.

"솔직히 아니야? 소니아랑 섹스할 수 있는 거 네가 2번이나 막았잖아. 소니아는 나랑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도 나 좋다고 섹스하려고 하는데. 너는 뭔데?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썸도 아니고. 나 좋다고 한 적 없잖아. 있어?"

"소니아는 나 좋다고 내 것 빨아주기도 했는데. 내가 너랑 키스를 했어 손을 잡았어?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카데미 졸업하고 사귀자는 약속을 뭘 믿고 기다려? 너는 이기적으로 너 좋은 대로 행동하면서 나는 왜 하면 안 되는데?"

"씨발! 솔직히 나만 이기적인 거 아니잖아!"

김성현이 쏟아내듯 토해낸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인 내 심장은. 내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뛰었다. 분노 때문인지 내뱉은 숨이 떨리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멍청하게도 무어라 욕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입안의 혀가 부풀어 오른 듯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감정이 육체를 마비시킨듯 자그마한 떨림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멈추질 않았다.

"할…. 말…. 다했어?"

가까스로 쥐어짜 낸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거북할 정도였다. 더는 김성현과 정상적인 사고로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돌려 집으로 가려는 나를 김성현이 내 팔목을 잡아 붙잡았다. 오늘따라 왜 내 팔을 잡는 남자가 많은걸까?

"...놔 줘."

"아니, 미안하다고…. 솔직히 너도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렇잖아."

"...다음에 얘기하자."

"아니, 그냥 지금 말해줘. 너 나 좋아해?"

"...뭐?"

"나 좋아하냐고. 여기서 확실히 해. 나 안 좋아하면은 소니아랑 섹스하는 거 방해할 이유 없잖아. 안그래? 사귈지 말지. 여기서 정해. 나 좋아해?"

꼭 대답을 듣겠다는 듯. 억척스러운 눈빛이 나를 노려본다. 저 순진해보이는 시골 똥강아지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이. 어찌 이리 내 마음을 아프게 할까?

김성현을 좋아하는 마음은 전혀 없다. 원작의 김성현이라면 매력을 느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김성현에게 느끼는 감정은. 혐오와 역겨움이 섞인 부정적인 감정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여기서 김성현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소니아를 막을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김성현과의 관계에서 자연적으로 을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사실이 내 기분을 더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우울감이 내 어깨를 짓누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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