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6화 (6/160)

〈 6화 〉 생존실습 ­1

* * *

신아린으로 산 지 1주일이 지났다. 해야 할 것들이 쌓여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빠르게 시간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적응하기 힘든 아카데미 생활은. 백진희의 도움으로 버텨내고 있다.

기억이 나지 않아 힘든 것도 있지만. 마법과 괴수, 마인과 마수에 대한. 판타지다운 것들도 학습해야 했기에 적응이 조금 힘들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본디 내가 영또플의 세계관에 열정적일 정도로 분석할 정도로. 이 세계관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남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수업조차도 나에게는 새로운 소설을 읽는 듯한. 신선한 재미를 느낀다. 신아린에 대한 과거의 기억이 없다 해도. 여자부 1, 2위를 다투는 머리는 어디로 가지 않았는지. 빙의 전보다 훨씬 더 머리가 몇 배는 잘 돌아가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상당히 큰 체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

신아린의 성격이 그렇게 남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성격이 아니었는지. 몇 일간 김비서와 차기사를 제외하고는. 개인적으로 연락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주변의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인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있다. 내가 잘 연기한다기 보다는. 어느정도 다른 사람에게 거리를 두고 살아온 신아린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물론, 임유모는 아직도 불편한 친근함을 보이지만….

차기사는 언제나처럼. 묵묵하게 등하교를 도와주고 있다.

1주일 동안 내가 알아낸 것이라면. 지금 사는 곳은 본가가 아니었다는 것. 여자의 옷은 종류가 상당하다는 것과. 나에게도 화장품이라는 게 상당히 많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화장품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 없는 상태였기에. 화장을 안하냐는 진희의 질문에 바빠서 못했다고 둘러대고.

너튜브의 도움을 받아 기초화장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올인원 스킨 하나만 바르던 남자의 삶에서.

임유모의 주도하에 잠들기전 온갖 영양제와. 이름 모를 미용팩을 해야했다. 심지어 군대에서나 바르던 선크림을 귀찮아서 넘겼다가 임유모에게 혼이 나고 매일 선크림을 발랐다는 것을 확인 받고 나서야 등교 할 수 있다.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초월 아카데미와 가까운 곳에서 살기 위해. 차성이 소유하고 있는 빌딩의 한 곳을 집으로 사용 중이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아카데미생들과는 다르게. 신아린은 다른 사람과 가깝게 지내는 것을 싫어하는 지. 따로 집을 구해 살고 있었다.

초월 아카데미 주변은 정부 시설들이 모여있는 곳이어서. 마인과 마수의 위협에서 거의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일반인들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비싼 땅값을 갖고 있다.

그 이유로 초월 아카데미 내부에 있는 기숙사에는 대부분의 재학생이 생활하고 있는 설정이었다. 그 기숙사에서도 돈에 따라 1인실 2인실 4인실 등으로 나뉘어 있다.

나도 기숙사 생활을 하며 김성현을 밀착 감시해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아직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차량으로 등교하고 있다.

남자 기숙사와 여자 기숙사는 거리적으로 멀리 떨어져있었고. 사감의 동행이 아닌 이상은 서로의 기숙사에 출입 하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초월이라는 세계 1위 아카데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성 문제로 구설수에 오를까 예방차원에서 해놓은 것이었다.

그덕에 소니아가 김성현에게 수작부릴 수 있는 일은 적었다. 거기에 소니아가 요즘 김성현에게 접근 한다기 보다는 주변의 다른 동정들에게 관심을 돌리고 있다.

일종의 김성현을 가운데 두고. '휴전'상태인 것이다.

뒷좌석에서 차기사의 부드러운 운전을 느끼며. 등교 전 잠깐 눈을 붙이려. 잡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주머니에서 요란한 진동이 울렸다.

[ 나는 반에 도착 ㅎ_ㅎ;; ]

반에서 크게 친구 하자고 김성현한테 소리 지른.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흑역사 같은 날.

나는 백진희의 재촉과 소니아의 도발에 못 이겨. 결국, 김성현과 원치 않은 번호를 교환했다.

그 뒤로. 김성현과 사적으로 원치 않은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백진희와 10번 정도 메시지를 주고받으면. 김성현에게는 1번 답장하는 정도? 백진희와 김성현의 대우는 당연히 차이 날 수밖에 없다.

[ 오늘 생존 실습하는 거 준비는 했어 ㅇㅅㅇ? ]

[ 힘들면 내가 도와줄게. ㅋ_ㅋ ]

자문자답. 쓸데없는 이모티콘까지. 김성현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할 때마다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뭐라고 답장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답장을 바라고 보내는 건지도 의문스러웠다.

교실에서는 한 마디도 먼저 말을 건네는 적이 없으면서. 메시지는 상당히 수다스럽게 그것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자주 보낸다.

[ 나 곧 도착할 것 같아. 교실에서 보자. ]

[ ㅇㅅㅇ! 그랭! ]

기다렸다는 듯이 오는 답장에 한숨이 나왔다.

이 모쏠자식.

*

강당에서 날 막아선 근육으로 뒤덮인 덩어리는. 생존법이라는 과목의 담당 선생님이었다. 이름은 류재현.

현역 영웅이었다가. 임무 도중 부상으로 인한 기량저하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아카데미에서 선생을 하게 된 전형적인 은퇴 후 연금을 노리는 케이스였다.

"1학년 전원에게 알린다. 생존실습을 위해. 각 반은 운동복으로 환복한 뒤. 뒤뜰로 나오도록."

교실 안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류재현의 걸걸한 목소리가 교실을 울렸다.

저번 첫 수업 때 예고했던 대로. 이번 주부터 생존실습이 시작되었다. 방송을 들은 학생들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따라 나도 탈의실로 가. 교복을 갈아입고 남색과 흰색으로 된 체육복으로 갈아입었다.

슬쩍 눈을 돌려 옷을 갈아입는 백진희와 소니아의 몸매를 구경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생존실습.

영또플에서는 갓 능력을 각성한 김성현이 처음으로 공략에 성공해 C반의 미녀. 한서아의 처녀를 뚫는 날이다.

생존실습 전부터 김성현에게 조금씩 공략당하던 한서아가. 결국 김성현에게 넘어가 처녀를 잃게 되고.

김성현에게 빠져 미친 듯이 섹스를 하던 것이. 생존실습의 주 내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사이즈가 커 보이는 체육복을 입고 있는 멍청한 김성현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만족의 미소가 그려졌다.

나뿐만 아니라 한서아의 처녀까지 지켜냈다는 것에. 조금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한서아와 생존실습을 하는 오늘까지 일면식도 없는 상태였다. 저 멍청해 보이는 시골 똥강아지 같은 눈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아린아~ 또 성현이 보고 있어?"

"...그런 거 아니야."

"에이~ 방금도 보고 있어 놓고~~"

"....."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백진희가 몸을 달라 붙이며. 말을 늘렸다. 영또플에서 웃으며 김성현에게 철벽을 치던 백진희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많이 달랐다.

진희는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얼굴이었지만. 막상 대화하면 상당히 애교가 많았고 누구보다 웃음이 많았다. 심지어 스킨쉽을 즐겨 나를 조금 당황하게 하기도 했다. 물론 그 점은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백진희의 말이 들렸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 김성현이. 시선을 마주치자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김성현에게 가식적인 미소를 보여주자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모쏠자식 같으니. 김성현을 무시하고 내 허리를 감싸안은 백진희를 밀어내려 노력했지만. 등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촉감에 그냥 놔뒀다.

백진희는 나와 김성현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오해를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진희는 뜻밖에 이런 쪽에 고집이 셌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는 상황이다.

운동복을 입은 학생들이 서로 무리를 이뤄 얘기를 나누자. 뒤뜰은 들뜬 목소리로 가득해져 소란스러워졌다.

백진희에게 김성현에 대해 추궁받으며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류재현이 자신의 근육을 과시하듯 딱 달라붙는 옷을 입고 나타나. 박수 몇 번으로 이목을 집중시켰다.

"각 반으로 한 명씩. 출석번호 순으로 번호를 호명하겠다. 자신의 번호가 불리면 앞으로 나와. 호신 무기와 생존에 필요한 도구가 들어 있는 가방을 받는다. 그 뒤. 자신이 배정된 곳이 적힌 천막 안으로 순서대로 들어가. 안에 있는 유리구슬에 손을 올리면 된다."

"A반부터 C반은 우르퉁덩굴로. D반과 E반은 페이란설산으로 이동할 거다"

"이건 실습이기에 다칠 위험은 전혀 없다. 하지만 실제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실습에 임한다면 영웅 생활을 할 때 좋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부상을 당하거나 위험에 처 할시에. 생존 가방안에 들어 있는 비상용 신호탄을 사용하면 된다. 생일파티할때 쓰던 폭죽처럼 하늘에 대고 줄만 당기면 곧장 교관들이 달려갈테니 그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된다. 이상­ 질문있나?"

몇 몇 질문에 답하고 류재현은 출석번호를 호명했다.

순서대로 간이로 설치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내 차례가 되어. 백진희와 안에서 보자는 인사를 한 뒤.

무기중에서 훈련용 검 한 자루를 선택하고 생존 가방을 들었다. 교관의 지도에 따라 천막을 나와. 표지판에 적힌대로 조금 걸어가자 우르퉁덩굴이라고 적힌 천막이 보였다.

천막 안에는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었는데. 스노 글로브같이 생긴 유리구슬이 보였다. 유리구슬 안은 덩굴에 둘러싸인 큰 나무들이 유리구슬안의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높이 쏟아 있었다.

밖에서 봤을 때 4명이 들어가면 꽉차보일 크기인 천막이었는 데. 공간확장 마법이 걸려있는 지. 내부는 외부의 크기와 다르게 교실만한 크기가 되어 있었다. 신기해 천막 내부를 구경하다. 뒤에서 기다리는듯한 인기척 소리에. 구경을 멈추고 유리 구슬에 손을 얹었다.

유리 구슬의 차가운 촉감을 느낌과 동시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며. 스노 글로브에서 보았던 거대한 덩굴숲이 눈 앞에 펼쳐졌다.

*

이번 생존실습은 1박 2일로 예정되어 있다. 차기사와 임유모에게는 미리 말을 해놨기에 걱정할 일은 없다.

생존 가방 안에는 구슬이 들어가게 홈이 파여 있는 판 하나와 식량들이 있었다. 첫 생존 수업 날 들은 대로 가방 안주머니에 있는 비상용 신호탄과 응급의약품의 상태를 점검했다.

"6개."

가방 안에 있는 생존실습의 목표. 플라스틱처럼 가벼운 나무판자에는 구슬이 들어갈 구멍이 총 6개가 있었다.

5개를 제외하고 1개만 유독 사이즈가 다른 것들에 비해 배는 컸다.

나무 판자를 뒤집어보니. 구슬을 구할 수 있는 설명이 적혀 있다. 무엇보다 1학년생의 첫 실습이기에. 난이도가 많이 낮아져 있다.

[1. ­3개의 청구슬은 숲의 수많은 나무에 열매처럼 달려 있다. 열매와 혼동하지 않도록. 구슬이 아닌 열매를 가져올시 ­점수.]

[2. ­ 2개의 적구슬은 땅바닥에 박혀있다. 집중해서 보지 않으면 돌이라고 착각할 수 있으니. 집중해서 수색하도록.]

[3. ­ 마지막 1개. 백구슬은 우르퉁덩굴내부에 사는 훈련용 괴수에게서 얻을 수 있다.]

[4. ­ 훈련의 종료는 하늘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음.]

[5. ­ 훈련의 종료될 시. 구슬의 수와 종류에 따라 점수를 부여함.]

[6. ­ 위급상황에서는 반드시 비상용 신호탄을 사용한 뒤. 그 자리에서 대기해야함.]

설명을 읽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붉은 글씨가 하늘의 별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남은 시간 37:58:21]

줄어드는 시간을 확인하고. 청구슬부터 찾기로 했다. 혹시 적구슬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 나무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고개를 숙여 땅바닥에 시선을 고정한채 걸음을 옮겼다.

나무에 다다르자. 청구슬을 쉽게 못 찾게 하려는 듯. 나무들에는 온갖 색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 많은 열매 중에서 청구슬을 찾아야 한다니…. 청구슬 같아 보이는 열매들을 만지며 하나씩 구슬인지 손으로 일일이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

몇 시간 동안 열매들을 만진 탓에 허리가 쑤셨다. 손은 열매에서 나온 진액에 푸르게 물들었다.

그래도 이런 노력 끝에 3개의 청구슬은 찾을 수 있었기에. 비교적 평탄해 보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생존 가방에 들어 있는 생존 식량을 꺼내 들었다.

군대에서 종종 먹던 전투식량과 비슷해 보이는 포장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지만. 나무 사이사이 열매들을 만지며 돌아다니느라 체력소비가 컸기에 어쩔 수 없었다.

겉에 적힌 설명서대로 안에 따로 포장된 내용물을 뜯어. 몽땅 다시 포장지 안에다가 쏟아 넣은 뒤 재포장했다. 주먹이 그려져 있는 앞부분을 때리자 푸쉬­소리와 함께 포장지가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설명에는 물리적인 충격을 주면 안에 있는 소량의 발화가루가 3분 안에 맛있는 식량으로 바꿔준다고 쓰여 있었기에. 참고 기다리자 부풀어 올랐던 포장지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라앉더니 축 늘어졌다.

포장을 뜯자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야채비빔밥이 완성되었다.

"진짜 전투식량 같은 데?"

다행히 플라스틱 쌀을 씹는 듯한 전투식량과 다르게 이곳의 생존 식량은 상당히 맛있었다.

오래간만에 땀 흘리고 먹는 밥이라 그런 거 일수도 있고. 볼 안 가득 밥을 집어넣었다.

"진희는 어디에 있을까?"

청구슬을 찾는 동안 몇 명 다른 애들을 만나긴 했지만. 딱히 친분 있는 관계도 아니었기에. 가벼운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야채비빔밥을 바닥까지 긁어먹었을 때. 누군가 덩굴을 검으로 베어 가며 모습을 드러냈다.

"신아린?"

갑자기 들려온 김성현의 목소리에 미간이 저절로 좁혀졌다. 솔직히 만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소니아가 실습 동안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있었기에.

진심을 숨기고 밝은 미소로 인사했다.

"안녕."

"밥 먹고 있었구나?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밥 먹어야 하는 데…."

"...?"

우물쭈물하며 내 눈치를 보는 김성현의 모습에 의아함이 들었다.

어쩌라고? 나한테 원하는 대답이 있는 건가? 김성현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있자. 김성현이 냉큼 옆으로 다가오더니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서 먹어도 될까? 배가 너무 고파서."

"...상관은 없는데. 나는 다 먹어서 이동할 거야."

바닥까지 긁어먹은 야채비빔밥을 보여주자 당황한 김성현이 눈을 돌리며 말했다.

"아, 그럼 같이 갈까?"

"...? 밥 먹는다며?"

내 물음에 난처한 듯 시선을 내리깔고, 뒷머리만 긁는 김성현의 모습에. 속이 꽉 막히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데. 왠지 김성현의 반응에 본능적인 불안함이 들었다.

생존본능이 당장 김성현에게서 멀어지라고 신호를 보냈다.

소니아가 없었다면 당장에라도 김성현을 무시하고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다 먹고 남은 쓰레기들을 가방 안에 있는 봉투에 넣고. 억지로 궁금하다는 듯이 김성현에게 물었다.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거야?"

시골 똥강아지 같은 눈과 시선을 마주하자. 김성현은 잠깐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내 손을 움켜잡았다.

갑작스러운 김성현의 행동에 놀라. 몸이 굳은 채. 김성현에게 해명을 요구하듯 잡힌 손으로 눈길을 주자. 내가 손을 뺄까.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는 게 느껴졌다.

"아린아. 나도 네가 좋아."

"뭐?"

"나도 네가 좋다고!"

"..."

생각지도 못한 대화 주제에 당황한 내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김성현은 방금 보다 더 자신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봤는데. 나도 널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계속 보고 싶고. 같이 맛있는 거 사 먹으러 다니고 싶기도 하고. 이렇게 손도 잡고…."

"좋아해…."

김성현의 생각지도 못한 말에 말문이 막혀 멍하니 있자. 내 손을 허락 없이 주물럭대던 김성현이. 입술에 침을 묻히며 무언가 결심한 표정을 짓더니.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눈을 감았다.

짝­

본능적인 불쾌함에 나도 모르게 다가오는 김성현의 뺨을. 잡혀있지 않은 반대 손으로 쳤다.

김성현의 고개가 내 손길에 크게 돌아갔다.

"아­얏! 왜 때려?"

자신이 뺨을 맞을 거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빨갛게 변한 뺨을 잡고 날 쳐다보는 김성현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화가 났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대뜸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더니. 나에게 키스를 하려 한다니.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행동이다. 자신의 마음만 우선으로 생각한 나쁜 행동.

내가 우습게 보였던 걸까? 아니면 친구 하자고 소리치던 그 기억하기 싫은 모습에 쉽게 봤던 걸까?

김성현이 주물럭대던 손을 힘으로 빼내고. 일어서서 김성현을 내려보며.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미쳤어?"

"아, 아니. 너 나 좋아하잖아?"

"...내가 왜?"

"어?"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어?"

"아니, 그렇지만…."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할만한 상황이 있기는 했던가?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

나는 김성현의 옆에서. 항상 불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밖에 없었다.

언제 김성현이 각성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나에게 죽었던 전의 김성현에 대한 미안함에 드는 불편한 마음.

심지어 노골적으로 접근하는 소니아에게 좋다고 웃으며 대화하는 김성현을 바라볼 때마다 드는 분노와 짜증은.

온종일 내 기분을 나락으로 떨어트렸으니까.

설마 메시지 몇 번 주고받았다고.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오해한 걸까? 모쏠아다인 김성현이면 그렇게 오해할 수 있다.

"무슨 오해를 한 것인지 모르지만. 난 너와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던 거 뿐이야."

선을 긋는. 내 말에 김성현의 입이 평소보다 몇 배는 앞으로 튀어나왔다. 할 말이 많은지. 억울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김성현의 시선을 무시하고 다른 곳으로 갈까 했지만.

김성현에게 최대한 좋은 친구로. 김성현 주변으로 다가오는 이성들을 막고. 김성현의 동정을 아카데미생활동안 무사히 지키는 것을 목표했기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 네가 이성적으로 싫은 건 아니야.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이 차성이라…. 아카데미 졸업 전까지 정상적인 이성 교제는 힘들어."

"아…. 그렇긴 하겠네."

마지못해 수긍하듯 말하는 김성현의 모습이 꿀밤 한 대 때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났지만. 언제든지 김성현을 덮칠 수 있는 소니아가 있는 한. 싫더라도 김성현을 최대한 내 곁에 둬야 했다.

결심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김성현의 옆으로 가까이 앉았다. 일부로 서로의 온기를 느낄 정도로 김성현에게 밀착한 나는. 김성현에게 최대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지그시 바라봤다.

"미안해. 아팠지?"

"아냐, 맞을 짓 했지."

"너무 갑자기 다가오길레…. 나도 모르게 그랬어. 미안해."

"괜찮아. 내가 너무 성급했지 뭐…."

뒷머리를 긁으며 방금까지 침울했던 모습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짓는 김성현의 모습에. 조금이지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모쏠아다 선배로서. 김성현이 지금 느끼는 감정의 혼란을 모를 수가 없었다. 나도 남자일 때 많이 경험했으니까.

사귀는 것처럼 일어나자마자 연락하고. 같이 밥 먹고 영화도 보던 여자가. 막상 사귀자 하면 "친구로는 좋은데 남자친구로는…."이라며 거절하던 경험이 한두 번이었나.

상념을 지우고 여태 내가 여자들에게 당했던 것처럼. 김성현을 내 어장에 넣기 위해 낚싯대를 드리웠다.

"...나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이야?"

일부러 조금 뜸을들이며 조심스럽게 말하자. 김성현도 조금 다른 분위기를 느꼈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 당연하지. 진짜로 좋아해…."

말을 더듬는 김성현의 머리에. 정말로 하기 싫었지만, 손을 올려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스킨쉽에 긴장한듯한 김성현의 반응에 그나마 조금 불쾌한 마음이 사라졌다.

"성현아."

일부러 김성현의 머리를 강아지처럼 만지며. 김성현이 내가 뭐라 말할지 궁금해. 안달 날 정도로 뜸을 들였다.

"으, 응."

"정말로 좋아하면…. 기다려줄수 있어?"

"어?"

"아카데미만 졸업하면 아버지도 교제 허락하실 거야."

물론 김성현과 교제를 허락하는 일은 없을 거다. 차성이라는 거대한 재벌기업의 배경을 가진 후계자와. 평범한 아카데미 졸업생과의 교제를 허락할 리가 없으니까.

애초에 허락한다 해도. 내가 김성현과 교제할 생각도 전혀 없고. 그때쯤 동정을 떼어 미남이 된다 해도. 싫었다.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건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내 말에 고민에 빠진 김성현이 갈증이 나는지. 계속해서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힘들구나?"

실망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침울하게 말하자. 김성현이 격한 부정을 표현했다.

"아, 아니야! 충분히 기다릴 수 있지! 나 진심으로 너 좋아하니까. 약속할게!"

스스로 다짐하듯 말하는 김성현의 모습에. 계획대로 되었다는 만족감과. 김성현의 멍청함에 차오르는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을 숨기기 위해 김성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

3년간 날 위해 모쏠아다로 있겠다는 성급한 약속을 하는 김성현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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