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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3화 (3/160)

〈 3화 〉 문란한 아카데미 생활

* * *

"...야!"

이제는 익숙한 외침에 감았던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해진 얼굴의 남자애가 보였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내 추측이 맞아 떨어진 것에 대한 안도. 김성현이 죽어도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온다. 즉, 나는 아카데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소설 속 진행처럼 김성현과 같은 반에서 3년의 아카데미 생활을 해야 했다.

내 한숨을 자기 때문이라고 오해했는지 당황한 표정의 남자를 무시하려다. 불연듯 호기심이 들었다. 남자는 처음이겠지만 나로써는 몇 번이나 만난 불쾌한 사람이니까. 궁금했다. 이 사람은 소설에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일까?

"이름이?"

"어,엉? 나?"

"..."

"나는 김시온인데..."

말 끝을 흐리며 머리를 긁적이는 김시온이라는 남자를 바라보며 머리를 최대한 돌려 김시온이라는 등장인물이 있었나 떠올려봤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엑스트라인가? 흥미가 빠르게 식었다.

나를 바라보는 김시온을 무시한채 지나갔다. 이제는 익숙한 자리의 의자로 돌아갔다. 호기심이 사라지자 미뤄뒀던 감정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신적인 피로감은 쌓일 대로 쌓여있다. 하룻동안 입학식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으니.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자. 기다렸다는 듯 머리에서방금 전까지 일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잊으려 했지만 그럴 수록 김성현의 마지막 모습이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이 호흡이 가파졌다.

숨을 쉬고 싶은 데. 기도가 무언가로 꽉 막힌 것 마냥 가슴이 답답했다. 김성현의 마지막 모습이 사진처럼 뇌리에 박혀 계속해서 남아 있다. 결국, 참지 못하고 감았던 눈을 떴다. 시야가 뿌옇게 변해 얼룩져 있었다.

나는 또 다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넘쳐오르는 자기혐오를 막을 수 가 없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고통에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내 정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 추한 개인주의에 이유를 갖다 붙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저질렀던 살인은 없던 일이 되었으니 상관 없어. 김성현이 각성해서 나를 육변기로 만들 수 있으니까.

김성현의 성욕이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신아린이 아닌 김성현으로 빙의했다면 살인을 저지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 모든건 김성현때문이야.

스스로도 말도 안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이 무너질것 같았다. 김성현의 탓으로 일방적으로 우기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건방진 김성현. 나도 못뗀 동정딱지를 떼려하는 건방진 고등학생. 김성현이 10년은 더 모쏠아다로 살았으면 좋겠다.

"김성현때문이야..."

"괜찮아요?"

이를 갈며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누군가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갑작스런 스킨쉽에 놀라 고개를 돌려 손의 주인을 확인하니 백발의 미녀가 눈에 들어왔다.

"...백진희?"

"절 아세요?"

매혹적인 눈웃음. 첫 만남은 아니지만 이렇게 가까울정도로 얼굴을 맞닿은 적은 처음이 었기에 신기했다. 세상에 이렇게 하얗고 예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외모. 잡티하나 없는 흰 눈같은 피부에 눈 밑의 점이 상당한 매력이었다. 동화속의 백설공주 같은 사람이랄까. 대답을 기다리는 듯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오물거리는 모습이 상당히 예뻤다.

"아, 아니요."

"제 이름을 알기에 혹시, 아는 사람인데 제가 기억 못하는 건가 해서 물어봤어요."

"아, 아니에요. 지나가다 봤는 데 너무 예뻐서 기억에 남았어요."

"칭찬 고마워요. 저보다 예쁜분한테 칭찬 받으니까 더 좋네요."

당황한 내 모습에 감싸주려는 듯 답해주는 백진희의 따뜻한 마음씨가 느껴졌다.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난다랄까. 외모만이 아니라 마음씨도 이쁘다.

"근데, 힘든일 있는건 아니죠? 울고 계시길레..."

조심스레 걱정스런 물음을 하는 백진희의 모습에 부끄러워져. 손으로 급히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닦았다.

"너무 기뻤나봐요. 아카데미에 꼭 입학하고 싶었거든요."

"저도 엄청 기뻐요. 초월 아카데미에 입학하려고 엄청 노력했거든요. 아, 자기소개를 안했네요! 저는 백진희에요. 아 우리 동갑인데 말 놓을까?"

"아, 응. 난 한성...이아니라. 신아린이야."

실수로 한성진이라는. 원래 이름을 말할 뻔 했다. 이런 미녀가 호감을 갖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방금전까지 내 머리를 가득채우던 자기혐오는 모쏠남의 행복회로에 이미 머릿속에서 증발해 사라졌다. 여자로 변했다고 26년간의 감정이 하루만에 사라지지 않으니. 들뜬 마음에 실수 할 뻔 했다.

"친하게 지내자! 아직 아카데미에 아는 사람이 없거든."

"나야 좋지!"

백진희의 제안에 감동받아 크게 소리쳤다. 입을 가리며 웃는 백진희의 모습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무엇보다 이런 미녀와 친해질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이 후, 백진희와 잡다한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백진희는 내가 차성의 후계자라는 것에 놀랐는 지 큰 눈이 더욱 커졌다.

"차성이면 엄청 큰 대기업이잖아?"

"그치, 엄마도 여럿이야."

"정말? 드라마 같다!"

역시 이게 일반적인 반응이겠지. 백진희와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피곤함이 사라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시간가는줄 모르고 애기를 나누다 옆 자리의 주인이 다가왔기에 자리를 비켜준 백진희가 내 머리를 쓰다듬듯 만졌다. 여자끼리는 금새 친해져서 이리 친밀한 스킨쉽을 하는 건가? 여자의 우정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으니 그냥 미소만 지었다.

"이제 입학식 시작하려나보다. 자리로 돌아가야겠어. 입학식 끝나고 같이 나갈까?"

"같이? 좋아."

"아, 화장실 먼저 가야겠어. 아까보니까 화장실에 사람 많던데 윗 층으로 가봐야하나?"

백진희의 말에 까먹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화장실. 김성현이 윗층 화장실에서 소니아에게 동정을 뺏길 위기에 빠져있을 텐데. 백진희와의 대화에 푹빠져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이런 멍청이.

"윗 층! 지금 공사중이래!"

"그래? 아쉽네. 그럼, 급하지 않으니 입학식 끝나고 가야겠다."

내 말에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 머리에 올린 손을 치우고는. 백진희는 눈웃음과 함께 이따보자며 손을 흔들고 자리로 돌아갔다.

백진희가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난 뒤. 자리에서 일어나 윗 층으로 가려다 처음보는 남자 선생님의 제지에 막혔다.

근육으로 뒤 덮힌 몸. 짧게 자른 머리에 날카로운 인상의 선생님은 두꺼운 팔로 문을 막아서며 퉁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디가려고? 입학식 이제 진행하니까 자리로 돌아가."

선생님이 막아선것은 입학식에서 처음이었기에 전보다 시간이 상당히 지체된 것을 깨달았다. 조급해졌다. 이러다가 김성현이 소니아에게 동정을 따이면 각성하게 된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안되는데...

"그, 화장실이 급해서.."

"미리 갔어야지.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난 다."

타협없는 인간. 근육 덩어리 같은 모습과 똑같이 마음에 안든다. 조급한 마음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한 가지 여자의 변명거리를 겨우 찾아냈다.

"생, 생리 때문에..."

"어, 으음. 그, 그래."

"감사합니다!"

배를 부여잡고 아픈것 처럼 얼굴을 찡그리자 당황한 선생님이 냉큼 팔을 치우고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이런 변명을 할 줄은 몰랐는 데. 학창시절에 여자들이 툭하면 남선생들에게 변명거리로 삼은 것이 떠올라 써먹었다. 자주 애용할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급히 입학식에서 빠져나와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남자 화장실 문을 열자. 처음에 들었던 찔걱­거리는 불쾌한 소리가 화장실 벽을 타고 울려왔다. 급히 문으로 다가가 발로 걷어차. 문을 열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변기위에 앉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소니아에게 펠라를 받고 있는 김성현이 눈에 들어 왔다.그 모습에 억지로 이유를 붙여 봉합해놨던 감정들이 다시 역류했다.

변기 위의 김성현을 본 순간. 마지막으로 보았던 김성현의 참혹한 모습과 겹쳐 보였다. 이러면 안되는데. 또 다시 눈물이 차오르며 시야가 울렁 거렸다. 여자로 변해서 그런가? 전보다 몇 배는 감정적으로 변한것 같다. 이걸 왜 울지? 라는 의문이 들면서도. 눈물이 저절로 흘러나왔으니까.

쾌락에 빠져 있던 김성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눈에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갑자기 등장한 나에게 놀랐는지 시골똥강아지 같이 맹한 눈이 평소보다 커졌다. 나를 바라보는 김성현의 멍청한 시선을 애써 무시하고. 열심히 머리를 위 아래로 흔드는 소니아의 머리를 붙잡아 힘으로 떨어트려 놨다. 당장이라도 이 짓을 멈춰야 했으니까.

"아! 씨발 뭐야? 이거 안놔?"

머리를 붙잡힌 소니아가 화가 났는 지 몸을 일으키려해 손을 놔주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소니아는 또 다시 자신의 커다란 가슴을 자랑하듯 내세우며. 매서운 눈으로 나를 노려봤지만. 또 다시 찾아온 자기혐오와 김성현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뒤섞인 나는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소니아의 큰 가슴이 전보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꺼져 소니아."

"뭐? 너 누구야? 이 미친년이..."

"신아린. 차성의 후계자. 알아들었으면 옷챙겨서 꺼져."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기에.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하자 소니아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표정이 변한 소니아의 모습에 조금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하. 차성 하나 믿고 이리 나대나 본대.아무리 차성의 후계자라 해도. 오늘같이 선 넘으면 언니 화낸다? 한 번 봐줄테니 못 본척 입학식 하러 돌아­"

"꺼지라고. 김성현한테서."

"뭐­?"

"접근하지마. 아는 척도 하지말고. 말도 걸지마. 그냥 김성현한테서 멀어져."

내 말에 무어라 말하려던 소니아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짜증나게 들리는 코웃음치며. 바닥에 떨어진 상의를 챙겼다.

"임자있는 몸이었나보네? 후훗."

느릿하게 상의를 입고 나서는 귀엽다는 듯이 내 뺨을 한 번 쓰다듬고서는. 경고의 눈 빛과 함께 소니아는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는 소니아의 등을 한참을 노려보다 지퍼 올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김성현이 튀어나온 바지 앞 부분을 가리며 어색하게 날 보며 웃었다.

그 모습이 처음 만났던 김성현이 보여줬던 행동과 겹쳐보였기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를 다스리기 힘들었다.

김성현 앞에서는 냉정해야하는 데.

그럴 수가 없다.

***

김성현은 많이 당황스러웠다. 야겜에나 존재할 것 같은 금발태닝빗치한테 입학 첫 날. 그것도 아카데미 강당의 화장실에서. 변기 위에 앉아 같은 또래의 미녀에게 펠라치오를 받았다.

경험이 많은지 능숙하게 리드하는 모습에 어느 순간 정신차리고 보니 바지가 벗겨진 채 당하고 있었다. 뜨겁다고 느껴질정도의 입과 뱀처럼 이리저리 훑고 지나가는 혀에 참지 못하고 절정에 다달았을쯤에 거짓말처럼 문이 부숴졌다.

열중한건지. 아니면 쾌락에 눈이 돌아간건지 상황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소니아는 도발하듯 붉은 혀를 낼름 낼름 비추며 내가 절정에 도달하기만을 노력 했다. 혀의 테크닉에 금방이라도 쌀 것 같아 고개를 들자 문 밖에서 울고 있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소니아보다 뛰어난 미모. 흑요석 같이 밝은 눈에서 흘러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충격받은 듯 몸을 떨며 원망의 눈길을 보내는 미소녀. 비현실적인 상황에서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미녀를 봐서 그런지. 김성현은 몸이 굳어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꿈이 아닐까? 금발태닝빗치가 내 자지에 열중하고. 그 모습을 본 아카데미에서 제일 예쁘기로 소문난. 미녀 동급생이 질투하며 눈물을 흘리는 상황. 망상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망상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망상은 아니다. 자기주제를 알기 때문에 그런 생각자체를 해 본 적이 없으니. 그렇다고, 몽정이라기에는 아직도 자지를 괴롭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소니아의 테크닉이 여태까지 느껴보지 못한 생생한 감각이었기에 몽정은 아닐거라고 확신 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감각을 어떻게 꿈꾸겠어?

한 동안 자신과 시선을 주고받던 미녀는 미간을 좁히더니 피가 날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도 김성현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화난 얼굴로 다가온 미녀는 소니아의 머리채를 붙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둑­하는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데. 착각이겠지?

"아! 씨발 뭐야? 이거 안놔?"

상당히 아팠는지 소리지르는 소니아에게 미녀는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꺼져 소니아."

아는 사이인가? 소니아도 꽤나 이뻤으니까. 둘이 같이 다니면 남자들의 눈에는 상당히 보기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소니아의 반응에 자신의 추측이 틀린 것을 깨달았다.

"뭐? 너 누구야? 이 미친년이..."

"신아린. 차성의 후계자. 알아들었으면 옷챙겨서 꺼져."

화가 났다기보다는 분노에 가까울정도로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 아니, 신아린. 잠깐, 차성이라면? 그 대기업? 자신이 쓰는 휴대폰 회사의 후계자라는 말에 저정도 외모면은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느끼지 못한. 그런, 고급진 분위기가 물씬 풍겨왔으니까. 그러니까, 사람이 고급져 보였다.

"하. 차성 하 나 믿고 이리 나대나 본대.아무리 차성의 후계자라 해도 오늘같이 선 넘으면 언니 화낸다? 한 번 봐줄테니 못 본척 입학식 하러 돌아­"

"꺼지라고. 김성현한테서."

소니아와 신아린의 말싸움에서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김성현은 당황했다. 자신은 저런 미녀와 접점이 없었다. 공통분모라면 같은 아카데미생이라는 것과. 소니아와 같이 노란 명찰을 차고 있어 같은 동급생인 것이라는 점뿐. 대화를 나눠본적도 저런 미모를 가진 여자를 지나가면서도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 건지. 혼란에 빠진 김성현을 뒤로 하고 소니아와 신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접근하지마. 아는 척도 하지말고. 말도 걸지마. 그냥 김성현한테서 멀어져."

신아린의 차가운 말에 소름이 돋았다. 단순히 어처구니 없는 망상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정답이 아니었을까?. 언제부터 자신을 지켜본건지는 모르지만. 신아린이라는 동급생은 자신에게 첫 눈에 반했다.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며 발만 동동구르며 자신이 느끼는. 이성에게 느끼는 이상한 감정이 무엇인지 깨닫게되고. 언제 고백할지 어쩔줄 몰라하며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던 신아린을 두고. 왠 금발태닝빗치가 나타나 자신을 뺏어가자 화가난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는 지금 이 상황. 설명이 되지않는다.

"임자있는 몸이었나보네? 후훗." 라는 말과 함께 화장실을 나간 소니아가 일으킨 소음에. 정신이든 김성현은 냉큼 팬티를 올렸다.소니아의 침과 자신의 애액이 고여 축축해져 찝찝하게 느껴지는 팬티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바지까지 마저 올리고 지퍼를 채우자. 신아린의 흑요석 같이 밝은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절정에 거의 다달았음에도 배출하지 못한것에 화가 났는 지. 아직도 발기가 풀리지 않아 고통이 느껴졌다. 신아린의 시선이 내려가는것을 보고 부끄러움에 손으로 가리자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아, 그 이게 말이야..."

말을 이어갈수록 역겨운 것을 보는 듯이 불쾌한 표정으로 변하는 신아린의 모습에 말 끝을 흐렸다. 실망한걸까? 짝사랑하던 남자의 이런 추한 모습을 본 것때문에?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엉? 아, 아니. 돌아가야지 입학식 하러..."

차가운 목소리에 허둥지둥대며 교복을 정리하고 빠져나가려는데 신아린이 손을 들어 움직임을 막았다. 가까이서보니 정말로 미친 외모였다. 흉터하나 없이 매끄러운 대리석 같은 흰 피부와 대조되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는. 가까이서 볼 수록 눈동자 안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할정도로 매력적이었으니까. 예쁜 사람은 눈동자도 예쁘구나.

"...잠깐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지. 막아설때는 언제고. 눈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채. 입술을 쉼 없이 오물거리며. 양손은 자신의 치마를 가만 놔두지 못하는 신아린의 모습에 돌연 머리속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미연시에서 본 듯한 익숙한 이 장면.

좋아하는 남자주인공을 위해 밤새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와 수줍게 건네는 여자주인공. 지금과 상당히 유사한 분위기였다.

'설마 이 타이밍에 고백을..?'

금발태닝빗치한테 위기감이라도 느낀걸까?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미녀가. 자신을 종아한다니. 어떻게 반응해줘야 이 이벤트씬을 성공시켜. 히로인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을까?

[나도 처음 본 순간 사랑에 빠졌어], [나도 너가 좋아], [뭐, 사겨줄게!], [오늘부터 1일인거지?] 등등 미연시에서 보던 선택지가 김성현의 머리를 가득채웠다.

"...미안해."

"엥?"

순식간에 머리를 채우던 선택지들을 지웠다. 기다린 끝에 입을 연 신아린의 반응은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으니까.

미안하다는 감정이 절실하게 느껴질정도로 떨리는 목소리.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절절히 느껴졌다. 정말 큰 죄라도 저지른 죄인이 피해자에게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듯한. 절실함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김성현은 진지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아린이 이정도로 사과할 이유는 없다. 알고 보니 부모님의 원수?! 라는 클리셰적인 설정은. 우리 부모님이 멀쩡하게 살아계시며. 아직도 금슬이 좋다는 것으로 반려되었다. 이제 막 4살이 되는 여동생이 금슬의 결정적인 증거기도 했고. 집안이 크게 부유하진 않지만 부모님은 먹고 살만한 직장에. 자기소유 아파트까지 있었다. 학창시절에도 괴롭힘 같은걸 당한 적도 없고. 누군가에게 이정도로 사과를 받을 만한 고통스런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다. 이 미녀는 무엇때문에 나에게 이리 죄책감을 갖고 있을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의 발 끝만 바라보는 신아린의 모습은 보호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할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억지로 허리를 낮춰 눈을 마주치자. 타이밍 좋게 눈물 한 방울이 뺨을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너 울어..?"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른 거야? 신아린의 눈물에 조금 겁이 났다. 내가 알지 못하는 큰 죄를 저지른 건가? 아니, 그래도 방금까지는 고백하는 분위기 아니었나? 오늘 하루 감정이 롤러코스터처럼 급상승과 급하락을 겪고 있다. 어지러울 정도로.

"내가 이기적으로 굴어서...정말로 미안해."

신아린의 말에 잠시 생각하다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깨달았다. 지금 신아린은 소니아와 자신이 하던 짓을. 자신의 이기심때문에 막아선것에 대한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질투심에 눈이 멀어 다짜고짜 문을 부수고 소니아와 말싸움을 한 것이. 신아린에게 큰 잘못처럼 느껴졌나보다. 그래서 저리 어쩔줄 몰라 한걸까? 갑자기 신아린이 모습이 엄마와 대화하는 것에 질투를 느껴. 자신이랑만 말하라고 투정부리던 여동생과 겹쳐보여 귀엽게 느껴졌다.

"괜찮아. 큰 일도 아닌데."

솔직히 아쉬운 마음이 크긴 했다. 할 거 다 끝나고 나타났으면 서로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조금은 들었다. 이제 막 본 타임에 들어가려는 타이밍에 나타난 것이. 남자로써는 조금 많이 짜증나는 상황이지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눈을 즐겁게 해주는 신아린의 미모가 짜증을 설래임으로 바꿀정도로 뛰어 났으니까.

'내가 그정도로 먹히는 외모인가?'

남중을 나와서 몰랐다. 아니, 사실은 어느정도 괜찮은 외모인가 하는 의심은 했다. 엄마와 친한 이웃아주머니들이 지나가며 인사할때마다 성현이 참 잘생겼다고. 좀 더 크면 연애인해도 되겠다고 하는 말을 흘러듣지 않긴 했다.

남자가 남자를 볼때의 외모와 이성인 여자가 남자를 볼때의 외모는 다른가보다. 무언가 여심을 자극하는 플러스 점수가 내 외모에 있나보다. 야겜의 주인공들 보면 그러잖아? 그렇게 김성현은 스스로 납득하였다.

서로 할 말이 없어 어색해진 분위기에 김성현은 뒷 머리를 긁었다. 상황이 이렇다해도. 여자와 이런 개인적인 대화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어떻게 말을 이어갈지 과부하걸린 뇌는 온갖 선택지를 내놓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어 안절부절했다.

"그, 바지는 닦아야 할 것 같은 데..."

신아린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내리니 회색 교복 바지위로 하얀 타액들이 보였다.

"아! 아~ 이거는 아무것도 아니야! 침이야 침!"

혹시 자신의 정액이라고 생각 할까봐 냉큼 대답했다. 침도 이상하긴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못하고 세면대로가 바지에 묻은 흔적을 열심히 닦았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어색한 분위기에 숨막힐것 같았으니.

"난 이거 닦고 갈게. 먼저 가!"

할 말도 없었고 분위기가 어색했기에. 거울을 보며 그리 말하자. 신아린 부끄러운지 양볼이 상기된채로 고개만 끄덕이고는 조용히 화장실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찬물로 세수부터 했다. 거울을 보니 충혈된 눈과 빨개진 양쪽 귀가 보였다.

"이거 실화지?"

거울 안 자신에게 물었다.첫 날부터 여자 두 명과 썸? 비스무리한 것을 타다니. (심지어 한 명은 첫 만남에 입으로 해주기까지) 새 해 소망으로 가족들과 봉은사에서 [문란한 아카데미생활] 이라고 빈 것이 효과가 있는 것일까? 그 날따라 절밥이 맛있더니.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신아린의 모습이 떠올라 실실 웃음이 새어나왔다. 김성현은 한참을 실성한듯 거울을 보며 웃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또 다시 찬물 세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꿈인지 다시 한 번 확인 해볼 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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