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공략 플래그가 세워졌다-2화 (2/160)

〈 2화 〉 RESTART

* * *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한 뒤. 아직도 교장의 연설이 진행 중인 입학식에 돌아가기 위해 화장실을 나와 계단으로 향했다. 내 발소리를 들었는지 누군가 황급히 계단으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김성현인가 싶어 계단 밑을 내려봤지만, 이미 발소리의 주인은 계단을 내려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강당으로 돌아가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가자. 정수리가 벗겨진 교장의 연설이 때마침 끝났다. 운이 좋았다.

입학식이 끝난 뒤 학생들과 교사들이 강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등 뒤로 내일부터 정식으로 등교하라는 선생님들의 말이 들려 왔다.

손에 들고 있던 팸플릿을 의자 위에 두고 강당 밖으로 나가자. 출구 앞에 테이블을 놔두고 2학년으로 보이는 선배들이 사람들에게서 팸플릿을 회수하고 있었다.

다시 가져오기 귀찮았기에 인파에 섞여 몰래 빠져나가려고 하자. 이름 모를 선배가 팔을 들어 막아섰다.

"개인 물품 찾아가야지?"

고개를 돌려 주변의 테이블을 보니. 팸플릿을 받은 선배가 어느 기계에 팸플릿을 넣자 무인청소기 같이 생긴. 허리 정도 오는 크기의 로봇이 상자를 가져오는 것이 보였다. 상자 안에 담긴 가방과 휴대폰을 챙기는 모습이 보였다.

내 기억에 없는 개인 물품이 있을까 싶었지만, 자리로 돌아가 팸플릿을 가져왔다. 정부와 협회, 기업에서 엄청난 돈을 쏟아붓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모인다는 영웅 육성 아카데미라는 설정 때문인지. 이런 입학식 팸플릿도 개인용으로 하나씩 만들었나 보다.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 의자 위에 놓여있던 팸플릿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얼마 못 가 로봇이 상자를 가져왔다.

상자 안에서 낯선 가방과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생각해보니 나와 같이 주위 학생들은 휴대전화기를 제출해 상자에서 휴대폰을 회수했는데. 김성현은 제출하지 않고 몰래 들고 온 것 같다.

고개를 숙여 이름 모를 선배에게 감사인사를 한 뒤, 가방 안을 확인해봤지만. 딱히, 중요한 물건은 없었다.

강당 밖으로 나온 나는 곧장 본교 건물로 들어가 교무실로 찾아갔다. [노크해주세요]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기에 문을 두드렸다.

퉁­퉁­

플라스틱으로 된 문을 옆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가니 눈에 보이는 선생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남자 한 명뿐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 의자를 이리저리 움직이던 남자는 내 기척에 고개를 들어 나를 확인한다.

귀찮은 불청객이 아니라서 인지. 단순히 내 좋은 첫인상을 남길 수 있는 외모 때문인지는 모르나. 남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 덜 지친 미소로 다가오라며 손짓하였기에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남자는 의자를 돌려 내 명찰을 확인하고는 의자를 뒤로 젖히며 물었다.

"그래, 신입생! 무슨 일이야?"

"입학 취소해주세요."

"…1시간 전에 입학했는데? 왜, 신기록이라도 달성하려고?"

장난이라고 생각했는지 커피를 들이켜 마시던 남자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얼굴을 시선으로 뚫어버릴 듯 내려보는 차가운 시선에 장난이 아님을 인지했는지. 목구멍으로 쏟아 넣던 커피를 내려놓고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정말이야? 그 경쟁을 해서 아카데미에 입학해놓고 1시간 만에 입학 취소 한다고? 부모님이랑 얘기는 했니? 아니, 신중하게 생각은 한 거야? 물론, 교장 선생님의 훈화가 조금은 지루하게 느껴졌을지도 몰라. 그 때문에 싫증이 날 수도 있을 거라고 충분히 이해…."

"개인 사정입니다."

"아니, 그래도 이거는 너무…."

피곤한 얼굴임에도 쉴 새 없이 입을 여는 선생의 모습에 냉큼 말을 잘라냈다. 겉으로 보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으로 보이더니. 그 내면에는 예상치 못한 수다쟁이가 숨어 있다.

언제 김성현의 동정딱지가 따여 각성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이 아카데미를 벗어나 소설의 결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독자로서 안전한 위치에서 관음하기로 한 나에게는. 선생님의 설득은 불필요한 상황이었다.

당황한 선생님이 입학식을 거쳤으니 자퇴서를 작성해야 하는 데 부모님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더니 다시 설득하기 시작한다. 아직 미성숙한 이성이 저지른 사춘기의 반항 같은 거로 생각하나 보다. 속은 썩을 대로 썩은 어른인데.

주머니에 넣어 놨던 휴대전화기에서 진동이 울린다. 꺼내 들어 화면을 확인하니 [차기사]라는 이름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받자 조금 나이 든 목소리가 휴대전화기 너머로 들려 온다.

[아가씨, 입구에서 차량 대기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신아린을 태워주는 운전기사 같은 사람인가 보다. 세계 3위 기업의 후계자를 걸어서 등교시키는 안일한 행동은 하지 않을 테니.

"할 일이 있어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통화를 종료하고 휴대전화기를 확인했다. 다행히 비밀번호가 지문이었기에 휴대전화기 주소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많은 연락처가 있었지만, 어디에도 부모님의 전화번호로 추정되는 번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통화기록에 들어가 보니 차기사를 제외하고는 [김 비서]라는 사람과의 통화기록이 많았다.

비서라는 직책이기에 부모님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김 비서라고 적힌 번호에 통화를 걸었다.

[네, 아가씨]

"김 비서. 혹시, 엄마 전화번호 알아?"

[예? 아가씨 어머님 전화번호 말씀이십니까?]

당황한 김 비서의 목소리에 덩달아 나도 당황했다. 신아린에 대한 기억이 없어. 최대한 드라마에서 보던 여자 말투로 평범함을 가장하며 물어봤는데. 상대의 목소리에는 격한 당황이라는 감정이 물들어 있다.

[그, 혹시. 몇 번째 어머니를 말씀하시는 건지….]

김 비서의 대답에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았다. 드라마에서 여러 번 보던 장면. 아무래도 신아린의 아버지는 결혼을 여러 번 한 것 같다. 재벌은 확실히 일반인과는 다른 삶을 사는구나.

"됐어. 아버지 전화번호나 알려줘."

[회장님과 개인 연락은 불가능한 거 아시면서….]

몰랐다. 기억이 전혀 없으니. 그것보다 재벌은 아빠. 딸. 관계에서도 서로 통화조차 하지 않는 건가? 서로에 대해 매정한 집안인가 보다. 이 점은 상당히 맘에 든다.

"급해서 그래."

[무엇 때문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입학 취소하려 했는데 이미 입학식이 진행되어서 안 되더라고."

통화를 엿듣던 선생이 머쓱한지.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모니터로 의자를 돌려 다시 커피를 마셨다.

"그래서 자퇴하려고. 근데, 그러려면 부모님 동의가 필요하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회장님이 아시면 정말로 큰 일 납니다! 장난이라면 그만두세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자퇴가 안된다면 교칙을 어겨 퇴학이라도 당하겠어."

내 말이 끝나자 휴대전화기 너머로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쾌감에 휴대폰을 잠시 귀에서 떨어트려 놓아야 할 정도로. 숨을 거칠게 쉬더니 '금방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라는 비명과 같은 소리를 내지르고는 통화를 끝냈다.

별수 없이 교무실에 있는 테이블 앞의 빈 의자에 앉자. 남자 선생님이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지 차를 권유해왔다.

"녹차라도 마실래?"

"찬물이면 될 것 같아요."

"그, 그래."

남자 선생이 건네준 물이 담긴 종이컵을 받고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종이컵에 담긴 물을 마시자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하루를 돌이켜보니 뒷목이 뻐근해졌다. 이유도 모른 채 소설 속으로 들어와 여자로 변했다. 거기에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소설 주인공이 각성하는 스토리의 시작을 의도적으로 막아버렸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바로 자퇴할 거면. 김성현이 각성하는 것을 막을 필요는 없지 않았나?

갑작스럽게 소설 안으로 들어오고. 미소녀로 변해있던 것에 조급함을 느꼈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나 보다. 지금에서야 굳이 할 필요가 없던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숨이 나왔다. 이리도 멍청하다니. 이 몸은 머리가 조금 늦게 돌아가는 걸까?

어찌 됐든, 내가 아는 소니아라면 얼마 못 가 김성현의 동정을 땔 것이다. 각성한 김성현은 원래보다 조금은 늦었지만, 소설 속 스토리대로 아카데미의 문란한 생활을 즐기며 악인들을 처단할 것이다.

예상보다 소니아가 너무 늦는다면 차성의 힘을 써.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여학생을 돈으로 매수해. 강제로 김성현의 동정을 떼게 할 수도 있으니까.

김성현이라는 괴물은. 주변을 서서히 자신에게 중독시키는 독을 한없이 뿜어낸다. 이 아카데미에서 멀어만 진다면. 더 이상의 내 안전에 대한 걱정은 없다. 그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자. 테이블 위의 유리에 비친. 아직은 어색한 내 얼굴에. 집에 돌아가면 이곳저곳 내 몸을 알아볼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변한 내 몸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도 있으니까.

종이컵에 담긴 물을 전부 마시고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휴대폰이 울렸다.

[그, 아가씨. 회장님께서 아카데미에서 자퇴하실 거면 지켜야 할 필수 조건이 있다고 합니다.]

"뭔데?"

[1번. 아카데미에서 자퇴할 시 해외에 있는 유명 사립고등학교에 입학할 것. 2번. 고등학교 졸업 시 회장님의 주선으로 약혼자를 만들 것. 3번. 영웅을 포기할 것. 이상이 회장님이 거신 필수 조건입니다!]

신아린의 아버지가 내세운 필수 3가지 조건. 2번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조건이었다. 고등학교에 다시 입학하여 공부해야 하는 것은 힘들지만, 김성현의 육변기가 되는 것보다는 나은 조건이다. 영웅을 포기하는 것? 전투에 관한 기술을 모두 잃어버린 내가 영웅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도 미정이었다. 오히려 그런 조건이라면 이쪽에서 환영.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모르는 남자를 약혼자로 받아들인다는 조건이 껄끄러웠지만, 어차피 결혼하는 것도 아닌 약혼이고 그때 돼서 다른 조건으로 협상하면 되는 것이기에 일단은 수락하기로 했다.

"알겠어. 대신, 바로 자퇴처리 할 수 있게 해줘."

[넵! 회장님에게 보고드린 뒤에 바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얼마 못 가 교무실의 전화가 울렸다. 피곤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보던 남자 선생님은 전화를 받고 몇 마디를 나누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이고, 그럼요.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넵! 교장 선생님! 곧장 책상 위에 올리겠습니다. 네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보이지도 않는 상대에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하는 선생님을 바라봤다. 이게 권력이라는 건가? 전화를 내려놓은 선생님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던 얼굴을 밝은 얼굴로 바꾸고는 곧장 자퇴서를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여기랑. 여기 이곳에만 서명하면 돼~ 차성의 아가씨라고 미리 말 해줬으면 금방이었을 텐데!"

묘하게 텐션이 올라간 게 기분이 나빠 서명하라는 곳에 곧장 이름을 쓴 뒤. 자퇴서를 건넸다.

작성한 자퇴서를 꼼꼼히 확인한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퇴서는 교장 선생님이 바로 처리한다 했으니!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 좋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내 초월 아카데미 생활은 이렇게. 입학 1시간 만에 끝이 났다.

원작의 신아린이 들었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세계관에서 초월 아카데미의 학생이 된다는 건. 영웅중에서도 일부 엘리트들에게 한정된 특권이니까.

신아린이라는 존재는 백진희의 성장을 위한 필수였지만. 그것보다 내 안위가 무엇보다도 더 중요했다.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되든 솔직히 나에게 피해가 오는 것이 아닌 이상은 어찌 흘러가든 상관없다.

나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재벌의 후계자이고. 처음 보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의 외모를 가진 흑색의 미녀다. 거기에 김성현에게 차근차근 공략당할 걱정 없이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점이다.

생각해보니 교무실에서 머물러있던 시간이 길었기에. 기다리고 있을 차기사를 위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어 지금 나간다고 말했다.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 리무진이 내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멈춘 차량에서 나온 중년의 남자는 나를 보고 허리를 숙인 뒤. 다가와 내 가방을 들어주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뭘 요."

차 문까지 열어주는 정성에 조금 과한 예의가 아닌가 싶었지만 이제 차성의 후계자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적응하기로 했다.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 피로한 눈을 감았다. 채 2시간이 되지 않았지만, 정신적인 피로도는 상당했으니까. 귓가에 자동차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자동차의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등에서 느껴지는 편안함 때문인지 갑작스럽게 피곤함이 몰려와 눈이 무거워졌다.

무거워진 눈을 견디지 못하고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

"...야!"

누군가의 외침에 눈이 뜨였다. 꿈인가? 잠깐 눈을 감은 것 같은 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처음 보는 남자가 짜증이 난 표정으로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굴리며 머리를 긁적인다.

무언가 기시감을 느낀다. 처음 보는 데 익숙한 얼굴. 그다지 특징이 있지 않은 얼굴임에도 익숙한 불쾌감이 기시감을 이끈다.

"아니…. 다 했으면 나도 작성해야 하니까…."

그 말에 벼락을 맞은 듯 황급히 몸을 비켜준 뒤,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이 말은 분명히 들은 적 있다. 그것도 내가 이 소설 속 세계에 온 처음에.

불안한 예상이 맞아떨어진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시야에 들어온다.

[전문 영웅 육성 초월 아카데미 제9회 입학식]

"30분 뒤, 입학식이 시작됩니다. 접수를 끝낸 학생은 팸플릿을 확인해주시고 배정된 좌석에 앉아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곧 입학식이…"

강당 안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소리. 말 중간 들리는 노이즈 까지.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아카데미의 모습과 똑같다. 공포가 머릿속을 잠식한다.

나는 아카데미에서 입학한 지 1시간 만에 자퇴하고. 안심한 채 학교에서 나와 자동차의 뒷좌석에서 눈을 감았을 뿐이다.

나의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 김성현과 소니아의 스토리 진행을 방해하면서까지. 아카데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어째서.

처음 이 세계에서 눈을 떴을 때와 똑같은 장면이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왜일까?.

이번엔 정말로 꿈을 꾸는 걸까?

아까도 꿈인가 싶어 볼을 꼬집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또다시 볼을 꼬집어 봤다.

보드라운 볼의 감촉과 아릿한 통증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째서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온 거지?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하다. 밟고 있던 지면이 울렁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지럽다.

이유를 찾아야 한다….

*

"흐응~ 나쁜 어린이가 올라갔는데~?"

예정대로 소니아가 김성현이 숨어 있는 화장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타고 올라오며. 신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흥얼거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에 시선이 갔지만. 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지금 내 정신상태는 매우 불안했다. 소니아를 처음 봤다면 시선을 때지 못하고 가슴에만 집중했을 것이다.

"뭔데 씨발?"

화장실로 향하는 소니아를 몸으로 막아섰다. 신나서 흥얼거리던 소니아가 나의 등장에 금세 미간을 찌푸리며 거친 욕을 내뱉었다.

"신아린. 차성의 후계자."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아까 뒤늦게 소니아를 막아서 김성현이 각성할 뻔한 실수를 만회할 기회이기에. 소니아가 김성현을 만나기 전 계단으로 올라와 대기하고 있었다.

"차성? 그 기업?"

내 대답을 들은 소니아의 눈이 커졌다. 기시감이 드는 반응. 차이라면 그때는 상의를 노출하고 있었다는 것.

"근데 왜 길을 막은 건데?"

"출입금지야."

"출입금지?"

"응, 입학식이 끝 날 때까지 이곳으로 못 가."

태연한 내 거짓말에 진위를 확인하려는 듯. 위아래로 나를 흩어보는 모습에 조금 짜증이 났다. 이럴 시간이 없는 데.

"하지만 아까 남자애 한 명은 저 화장실에 들어가던걸?"

"그 사람 때문에 출입금지인 거야."

"흐응, 확인해봐도 돼?"

나를 떠보는 듯 눈을 치켜뜨는 소니아의 모습에 침을 삼켰다. 불안함 때문에 이성을 잠시 잃었다. 소니아 앞에서는 냉정해져야 했다. 내 현재 힘으로는 마인인 소니아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전처럼 강하게 나가야 했다.

"내 경고를 무시할 정도로. 내가 우습게 보이나 보네?"

"뭐?"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소니아가 반문했다. 경험하지 못한 신선한 반응이겠지.

소니아 입장에서는 나이 차이가 수십, 혹은 수백이나 차이 날 수 있는. 멋 모르는 갓 입학한 아카데미 1학년생이. 자기 뒤에 있는 차성이라는 기업을 믿고 주제도 모르고 나대는 꼴이니까.

"우리 아린이. 언니한테 너무 까부네? 죽여버리고 싶게?"

"해 봐. 소란을 듣고 올라온 교사들까지 죽일 수 있다면."

내 말에 소니아의 미간이 깊게 파이다. 이내, 곱게 펴졌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상황판단이 빠르기도 했으니까.

"아무리 차성의 후계자라 해도 오늘같이 선 넘으면 언니 화낸다?"

살기를 감추고 미소를 짓는 소니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니아는 인위적인 코웃음과 함께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소니아가 보이지 않자 힘을 주었던 팔의 긴장이 풀렸다.

아까보다 더 좋은 상황. 김성현은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소니아에게 동정을 따이겠지. 스토리적으로는 이것이 더 매끄러웠다. 내가 다시 이 입학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는 이보다 좋을 수 없다.

계단을 내려가니 백발의 미녀와 눈이 마주쳤다. 소설 속 묘사가 부족했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 사람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분위기를 풍기는 미녀. 확인하지 않아도 그 외모덕에 누구인지 알것 같다. 백진희.

눈을 마주친 백진희는 슬쩍 고개를 내려 인사를 건넸고 기억이 없는 나는 별말 없이 고개를 숙인 뒤, 입학식이 진행 중인 강당으로 들어갔다. 지루한 표정으로 팸플릿을 보거나 꾸벅꾸벅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학생들을 보니 언뜻 지루했던 예비군을 떠올랐다. 지정된 자리로 돌아가 한숨을 내쉬며. 교장의 연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연설이 끝나고 전의 행동을 반복했다. 팸플릿을 챙겨 출구의 선배에게 제출해 핸드폰과 가방을 돌려받았다.

휴대전화기를 받자마자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조금 망설여졌다.

자퇴하는 것이 스토리에서 벗어나는 행동이라 돌아온 걸까? 김성현의 곁에서 백진희가 성장할 때까지 거울이 되는 존재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김성현의 육변기가 될 위험을 감수하고 아카데미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다. 나에게는 여자로 변해 남자의 육변기로 살아가는 그런 이상 성욕은 없으니까.

이곳은 소설 속 세계. 나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

심지어 나에게는 영웅에게 필요한 긍지도. 용기도 없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개인주의적인 인간 한 명뿐.

이런 내가 이 소설 속 세계로 들어온 것은. 솔직하게 말하자면 등장인물 하나를 잉여 인간으로 만들어버리는 잘못된 선택일 것이다.

부정적인 생각이 점점 가득 차자 마른세수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교장의 연설 동안 머릿속에서 떠올린 가설을 확인해봐야 했다. 자퇴가 아닌 퇴학이라면? 그것도 아니면 전학.

무엇이든 시도해봐야 한다. 가만히 육변기가 될 날만 기다리는 것은 개인주의 인간에게는 고통이니까.

김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못 가 휴대전화기 반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가설을 확인할 때다.

*

"...야!"

누군가의 익숙한 외침에 고개를 떨구었다. 또다시 돌아왔다. 몸을 돌려 남자를 무시하고 익숙하게 자리를 찾아 의자에 몸을 기댔다.

"자퇴, 퇴학. 전학까지 모두 돌아왔네…."

땅이 꺼지라고 한숨이 나왔다. 지친 정신에 혼잣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소니아의 살기 어린 시선을 받은 것도 몇 번째다. 다행히 김성현의 동정은 철저히 지켜냈다.

반복되는 상황에서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영또플. 이 소설은 엄밀히 말하면 먼치킨 주인공이 여학생을 공략하는 [하렘 아카데미물] 소설.

넓은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소설 대부분은 `아카데미`에서 일어난다.

그 사실에 한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게임에서 구현된 곳만 플레이 가능한 것과 같은 상황인 걸까? 소설에서 나온 곳이 아니면 갈 수가 없는 것일까? 모르겠다. 자퇴나 전학이 아닌 온전히 입학식을 끝내고 마무리한 적이 없었으니까.

아카데미에서 벗어나는 건 안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나는 아카데미 밖을 나간 적이 있다. 잠깐이지만 자동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었으니까.

내가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교장이 돌아와 자퇴서를 처리했기에 입학식으로 돌아온 것 같다.

머릿속에서 확인해야 할 변수들을 떠올렸다. 급히 몸을 움직여 전과 같은 행동을 했다.

또다시 김성현의 동정을 노리고 계단 위로 올라오는 소니아를 김성현과 마주치지 못하게 하고 돌려보냈다. 그 뒤, 무기로 사용할만한 것이 있을까 싶어 복도를 둘러봐. 구석에 놓여있는 공구함을 찾았다. 안에 있던 망치와 몽키스패너 중에 고민하다 몽키스패너를 꺼내 들었다. 망치는 길이가 커서 화장실 안에서 휘두르기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몽키스패너를 손에 쥐고 떨리는 마음으로 남자화장실 문을 열었다. 화장실 안을 울리던 게임 소리가 급히 줄어들어 나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나왔다. 김성현의 행동이 상상이 되었기에.

이내 내가 저지를 일에 대한 생각에. 다시 얼굴이 굳었다. 이게 맞는 행동일까 하는 후회가 심장을 쿡쿡 찔렀다.

심장의 경고에도. 이성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 저지르라고 소리쳤다.

똑­똑­

똑­똑­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문을 노크했는데 반대편에서 김성현이 문을 두드렸다. 스스로 뭐하는 건가 싶어 멍청하게만 느껴졌다. 아무래도 첫 살인을 앞두고 긴장했나 보다. 심호흡하고 전처럼 문을 강하게 발로 걷어찼다.

자물쇠가 부서지며 문이 열렸다. 문을 오른발로 끝까지 밀어 열자. 변기에 앉아 멍청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들고 멍청하게 나를 쳐다보는 김성현이 보였다.

상황이 이해 가지 않는 듯. 시골 똥강아지 같은 순수한 눈이 당황이 섞인 시선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무것도 모르고 사람이 좋다고 다가온 강아지의 머리를. 자신의 가설이 맞는 지 확인하기 위해 발로 밟아 죽이는 것과 뭔 차이가 있는 걸까? 나에 대한 혐오감이 차오른다.

지금 내 행동이 얼마나 역겨운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리 가슴이 아픈 거겠지.

꽉 깨문 입술에서 흐르는 피가 턱을 타고 떨어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범한 남자였던 내가. 단순히 자기 안위를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도 설득이 된다. 나란 사람은 그토록 개인주의적이며. 남을 위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

오른손에 쥐고 있던 몽키스패너를 높이 들었다.

"뭐, 뭐하는…."

허공에 있는 몽키스패너를 보았으면서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멍청한 소리를 하는 김성현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 맹한 눈을 보고 있으면 가까스로 다잡은 용기가. 손가락 틈으로 빠져나갈 것 같았다. 시선을 김성현의 턱으로 내리깔고. 있는 힘을 다해 몽키스패너를 김성현의 얼굴에 내려찍었다.

"미안, 미안해."

말랑말랑한 베개를 주먹으로 내려치는 듯한 느낌. 몽키스패너를 통해 느껴지는 촉감에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팔이 내려갈때마다 김성현의 고통에 찬 신음에. 몽키스패너를 내던지고 두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팔을 들 때마다 얼굴과 몸에 튀는 뜨거운 피는 이성을 마비시켰고. 나는 더욱더 흥분하여 내려찍는 속도를 올렸다.

"빨리 죽어. 제발!!!"

영화에서는 망치질 몇 번으로 사람일 죽이거나 기절시키던데 김성현은 머리에 수 십 번을 맞아도. 기절하지도 죽지도 않고 살고자 몸을 비틀었다. 애원하듯 제발 죽어달라며 소리 질렀지만 김성현의 생존본능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막으려던 김성현은 얼마 못 가 팔이 부러져 들지 못했다. 손가락이 전부 불가능한 방향으로 꺾이고 이마가 크게 함몰된 채 왼쪽 눈은 어디로 갔는지 빠져나가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밟았던 물컹한 것이 눈이 아닐 거라고 애써 자위했다. 지나가듯 보았던 동물 다큐에서 들어 본. 큰 상처를 입은 짐승이 마지막으로 내던 신음만이 작게. 김성현의 입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김성현의 피인지. 나의 땀 때문인지. 온몸이 뜨거웠고, 축축했고. 역겨운 냄새가 올라와 코안을 찔렀다. 식도 끝까지 올라온 구토감을 몇 번이나 억지로 삼켰다.

피에 젖은 손 때문에 손에서 빠져나간 몽키스패너를 바닥에서 줍다 김성현과 그나마 성한 한쪽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김성현의 눈동자에 담긴 알 수 없는 감정에 몸을 크게 움찔했다.

화장실 바닥을 적신 피 때문에 무게중심을 잃을 뻔해. 나도 모르게 왼손으로 김성현의 머리를 붙잡으며 중심을 잡았다. 나에게 무어라 말하려 했는지 김성현은 부러진 치아와 핏덩이를 흘리며 입을 열었지만. 그 모습을 본 내 발작과 같은 마지막 공격에 턱이 날아가고 나서야.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덜덜 떨어대던 몸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한참을 김성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온몸을 잠식하는 탈력감에 손에 쥔 몽키스패너가 다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떨어진 몽키스패너가 낸 소음에 발작하듯 탈진한 몸이 덜덜 떨려왔다.

탈진한 몸. 기다렸다는 듯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자기혐오에 그대로 김성현이 흘린 피가 만든 바닥의 피 웅덩이 위로 몸이 무너졌다. 금방이라도 김성현이 다시 얕은 신음을 낼까 싶은. 두려움이 들어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눈을 감았다. 내가 저지른 짓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앞의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다.

온몸의 떨림을 막으려 팔다리를 몸으로 끌어들였다. 마치 태아처럼 피 웅덩이에서 온몸을 웅크렸다.

눈물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화장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혼미해진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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