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
이제 더는 참지 않겠다. (2)
민웅지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지금쯤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을 몽땅 동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권오산의 행방을 찾고 있겠지.
이번에는 권오산 차례였다.
서유림의 휴대폰으로 권오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민경도 어르신이 드디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움직이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권오산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누구를 공격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무력을 잔뜩 동원하고 있습니다. 혹시······ 어르신이 목표가 아닌지 걱정입니다.”
- 민경도가 나를?
“100%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민경도 어르신이 무력을 모으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대비하셔서 나쁠 건 없을 것 같아서 전화 드렸습니다.”
- 알겠네. 확인해보지.
간단하게 통화를 마쳤다.
이제 권오산도 바삐 움직일 것이다. 곧 민웅지의 움직임을 알아낼 것이고 다급히 대비책을 마련하겠지.
그 이후의 상황은?
‘후훗, 조만간 결판이 나겠군.’
서유림의 입술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 서유림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혹시 또?’
서유림이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카드가 사용되었다는 문자였다. 아리아나에게 준 카드였다.
사용처는 대형마트. 사용금액은 60여만 원.
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다. 옷이나 생필품을 사다 보면 이따금 수십만 원어치 물건을 살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런 금액을 거의 매일같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주로 대형마트에서 말이다.
웬만한 가정집에서도 그 정도 금액을 사용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거의 매일 50만 원 이상씩을 사용하는 것일까?
그래서 혹시 아리아나가 카드를 분실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유를 안다. 카드가 거의 매일 사용되는 대전의 대형마트를 몇 번 가보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아리아나가 보고 싶어지네.’
사실 갑자기는 아니다. 아리아나를 보고 싶은 것은 거의 매일 매순간이니까. 그저 늘 참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일주일에 세 번은 본다.
물론 몰래.
‘오늘도 잠깐 보고 올까?’
망설일 이유가 없다.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아리아나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만류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게다가 대전이라고 해봤자 금방이었다.
서유림이 승용차를 몰고 대전으로 향했다.
서유림이 대전 부사동을 향해 승용차를 몰았다. 아리아나가 주로 거주하는 곳이었다. 그러자 아리아나가 느껴졌다.
‘거기 있군!’
서유림이 주차장에 차량을 세웠다. 그리고는 도보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리아나를 찾겠다고 이리저리 둘러볼 필요도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감이 점점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부사동 인근에 도착하자 굳이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아리아나가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한참을 더 걷고 나서야 서유림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리아나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어디 있지? 아! 저기 있다.’
서유림이 슬쩍 몸을 감추었다. 이젠 아리아나 앞에 나서도 될 것 같은데 그래도 조금은 조심스러웠다.
아리아나가 먼저 서유림에게 다가와준다면 최고일 텐데.
그래도 이렇게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아리아나가 안전하게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정령계에서처럼 늘 함께 다니고, 늘 함께 끌어안고 잘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조급증으로 일을 더 어렵게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아리아나가 걷는 방향이 평소와 달랐다. 늘 저 길을 따라서 쭉 앞으로만 갔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게다가 시선이 서유림이 숨어있는 곳을 정확히 향해있었다.
순간 더욱 깊이 몸을 감출까 하다가 말았다. 왠지 아리아나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서유림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하긴, 교감이라는 것은 쌍방의 느낌이다. 서유림이 아리아나를 느낀다면 아리아나 역시 서유림을 느낄 수밖에.
아무리 모습을 감추고 훔쳐본다고 해도 아리아나는 서유림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괜히 숨었다가 들키면 분위기가 더 이상해질 것도 같고.
차라리 모습을 드러내는 게 낫겠다. 당당하게 말이다.
서유림이 슬며시 모퉁이를 벗어났다. 그러자 아리아나의 모습이 더욱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리아나는 제법 많이 변해있었다. 타이트한 청바지에 체크무늬 T셔츠를 입고 있는데 무척이나 발랄한 느낌이었다.
얼굴에 화장도 약간 했다. 어느새 인간 세상에 제법 적응한 듯했다.
예상대로였다.
아리아나도 서유림을 발견했지만 전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서유림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서유림의 가슴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아리아나의 입술에 아주 가벼운 미소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나는 어느새 다섯 걸음 앞까지 다가왔다.
서유림이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아리아나.”
“또 오셨군요. 왜 만날 그렇게 숨어서만 보세요?”
그럴 줄 알았다. 숨는다고 숨었지만 아리아나가 모를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그동안 서유림이 숨어서 본다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숨어서만 보았던 이유?
아리아나도 알면서 왜 물어?
“아리아나가 날 받아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려고.”
아리아나가 아까보다 조금 더 활짝 웃었다.
“서유림씨라고 하셨죠? 좋은 분 같아요. 유림씨는.”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아리아나에게만큼은 좋은 남자이고 싶다.
“고마워. 오늘도 마트 장 보러 가는 거야?”
아리아나가 손에 든 장바구니를 바라보았다.
“제가 돈을 너무 많이 쓰죠?”
“괜찮아.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 어르신들은 건강하시고?”
“덕분에요.”
행복하다. 아리아나의 저 밝은 미소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수 있다니. 그리고 이렇게 가까이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니.
오늘은 조금 더 욕심을 내봐도 될까?
서유림이 용기를 내보았다.
“오늘은······ 나도 어르신들 함께 뵈면 안 될까?”
“그렇게 해요.”
아리아나는 전혀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서유림은 순간 펄쩍펄쩍 뛰고 싶었다. 늘 저만큼 멀리에만 있었던 것 같던 아리아나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와준 듯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니,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 생각해보면 충분한 이유가 있다.
서유림은 그동안 일주일에 서너 번씩 서울과 대전을 오갔다. 그런 시간이 무려 두 달이나 되었다.
그때마다 아리아나도 서유림을 느꼈을 것이다. 어디에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뿐만이 아니다. 서유림의 마음도 대충은 느꼈을 것이다. 자신을 훔쳐보는 것이 음심이나 흑심 때문이 아닌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교감이 그만큼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에 서유림을 향한 마음의 벽을 스스로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이만큼 가까워진 거지.
“가자.”
함께 나란히 걸었다. 손을 잡지도 팔짱을 끼지도 않았지만, 30cm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나누는 교감은 그에 못지않은 행복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리아나는 주로 식품 위주로 장을 봤다. 쌀도 사고 반찬도 사고 과일도 샀다.
무거운 짐은 배달을 시켰다.
그리고 다시 마트를 나와서 허름한 주택가로 향했다.
홀몸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아휴, 색시 왔는가? 근데 함께 온 총각은 누구여? 인물이 훤하네.”
할머니가 서유림을 바라보며 몇 개 남지 않은 치아를 환하게 드러내고 웃었다. 그 웃음이 아리아나만큼이나 밝게 느껴졌다.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른 집으로 향했다.
함께 걷는 시간이 많을수록 아리아나와의 거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10cm도 안 되었다. 살짝만 움직여도 손이 서로 닿을 거리였다.
“몇 번이고 서울로 올라갈까 생각했어요.”
아리아나가 천천히 걸으며 툭 던지듯 이야기했다.
“그럼 올라오면 되지.”
“할머님들 때문에요. 제가 떠나면 혼자서 생활하기 힘드실 것 같아서요. 제가 처음 인간계로 왔을 때 아무런 조건도 없이 도와주신 분이신데.”
그랬었구나!
아리아나가 왜 그토록 홀몸노인들, 특히 할머니들께 정성을 쏟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할머니가 먼저 아리아나를 도왔던 것이다.
낯선 세계로 떨어진 아리아나에게 할머니의 도움은 엄청난 것이었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잠깐! 할머니 때문에 서울로 못 올라왔다고?
그 말은 잠깐 서울을 다녀오는 게 아니라 아예 서울에서 터를 잡고 살 생각을 했다는 얘기잖아.
좀 더 확대해석을 해보자면······.
‘나와 함께 살겠다고 마음을 굳힌 거야?’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만큼 교감의 힘은 강하니까. 아리아나도 은연중에 자신의 짝은 서유림이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러자 아리아나의 심장도 쿵쿵 뛰기 시작했다. 교감 덕분에 서유림의 감정을 느끼고 그에 반응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아리아나의 뽀얀 볼에 어느새 살짝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유림이 걸음을 멈추고 아리아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아리아나도 걸음을 멈추고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크게 떠진 눈망울이 서유림을 향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서유림이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대전으로 내려올까?”
아리아나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보다 15cm정도 큰 서유림의 눈을 가만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아리아나의 생각을 읽지는 못했지만, 그 감정은 조금 느껴졌다.
갈등하고 있었다.
서유림은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결론을 내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결론은 같을 테니까.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다.
아리아나가 한참을 갈등한 끝에 가볍게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그래도 돼요?”
되고말고. 안 될 이유가 뭐야?
물론 서울에서 봐야 할 일이 많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거야 그때그때 서울로 올라가면 그만이지.
“물론이지. 당장 오늘 짐 싸서 내려올게.”
말뿐이 아니었다. 서유림은 당장 아파트부터 알아보았다. 아리아나와 함께 침대도 알아보고 냉장고도 알아보고 하며 부산을 떨었다.
아리아나는 그저 조용히 따라다니기만 했다.
“이거 어때?”
서유림이 물을 때마다 가만히 웃어주기만 했다.
마치 ‘아무 거면 어때요?’ 하고 대답하는 듯했다.
김영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서유림이 기다리던 내용이었다.
- 권오산의 재산은 다 처리했어요.
갑자기 앓던 이가 빠지는 느낌이었다.
힘든 작업이었다.
권오산이 끈질기게 버텨서가 아니다. 워낙에 곳곳에 숨겨둔 재산이 많아서였다. 그 재산을 확인하는 작업만도 엄청났다.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권오산 한 사람의 재산만 무려 7조 원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대한민국 최고 갑부의 순위를 잘못 조사한 듯했다. 갑부 50명에 권오산은 들어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신의 재산일 꽁꽁 숨겨두었던 것이지.
대체 언제 이런 재산을 축적한 것일까?
아마 일제 강점기 때부터 온갖 친일행각으로 부정축재 한 재산이겠지.
그것들을 모두 처분해서 서유림이 마련한 통장에 집어넣은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그럼 이제 민경도 한 사람 남았군요.”
- 정말 대단해요.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 엄청난 사람들의 재산을 이렇게 쉽게 빼앗다니.
쉽게 빼앗는다고?
하긴,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겨우 1년도 안 돼서 모든 재산을 바닥까지 긁어서 가져왔으니까.
서유림이야 나름대로 죽을 고생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빼앗아온 재산과 비교한다면 그건 고생도 아니겠지.
“운이 좋았어요.”
- 그런데 민경도의 재산은 어떻게 해결할 셈이세요?
그거? 방법이 다 있단다.
마인드컨트롤.
물론 민경도는 마인드컨트롤이 쉽게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신뢰를 쌓으려고 해도 마지막 순간에 버티더란 말이지.
하지만 그것도 해결방법을 찾았다.
역발상이라고 들어봤나 몰라?
마인드컨트롤에 필요한 것이 신뢰만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의 심리는 무조건 다 가능하다. 흥분, 공포, 기쁨 모두 다.
한마디로 마인드컨트롤이란 사람의 감정을 수십 배로 증폭시켜서 이성적인 행동을 못 하게 만들고 내 지시에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서유림도 뒤늦게 안 사실이었다.
그래서 민경도에게는 신뢰가 아닌 다른 마음을 이용하고 있다.
그것은 공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