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이제 더는 참지 않겠다. (1)
다음날.
민경도가 회원들 하나하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그리 온화한 눈빛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달리 눈빛이 매서웠다.
그러다가 채순실에게서 멈추었다.
채순실의 어깨가 아주 살짝 움찔했다. 서유림으로부터 수차례 주의를 받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서 태연하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우리 대모님께서는 왜 자꾸 내 눈을 피하시는 걸까?”
“예? 호호, 제가 언제 어르신 눈을 피했다고 그러세요.”
채순실이 밝게 웃어보였다.
하지만 어색함이 가득한 웃음이었다. 민경도의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드는 웃음이기도 했다.
“조만간 크게 투자할 곳이 생길 것 같다고?”
“예.”
“그게 어딘데?”
“인도에요. 제가 전부터 봐둔 회사가 하나 있는데, 조만간 크게 성장할 것 같아서요.”
채순실은 서유림이 가르쳐준 대로 대답했다.
하지만 민경도는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는지 계속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게 어느 회사인데?”
“죄송하지만, 아무리 어르신이라도 그것까지는······.”
“흐음······.”
민경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충성심을 요구하는 황국회라지만, 그런 부분까지 말하라고 하는 것은 사실 무리이긴 했다.
그래도 의심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조만간 알겠군. 어느 회사인지. 내가 아주 관심이 크네.”
“예. 조만간 아실 수 있을 거예요. 호호.”
채순실이 다시 웃어보였다. 아까보다는 그래도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민경도가 다른 회원들도 하나하나 노려보며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다들 준비한 대로 잘 넘어갔다. 민경도가 아무리 허점을 찾으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다 싶으면 채순실처럼 조금 강하게 나갔다.
“죄송하지만 그건 개인적인 부분이라서 말씀드리기가 좀······.”
민경도가 권오산을 바라보았다.
조용히 눈빛을 나누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를 확인했다는 의미의 나눔이었다.
“알겠소. 뭐 다들 뜻한 바가 있겠지.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시오. 우리 황국회는 흩어지면 죽는 모임이오. 혹여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있다면 멈추는 게 좋을 것이오. 알겠지만 우리 황국회가 그리 만만한 모임이 아니거든.”
민경도가 마지막으로 채순실을 비롯한 황국회원들을 노려보았다.
다들 민경도의 시선을 피하느라 바빴다.
“오늘 정기회합은 이것으로 마치겠소. 다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오.”
가장 연장자인 권오산과 민경도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어서 회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각자의 차를 타고 떠났다.
민경도는 차량 안에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이유가 뭐지?’
이마에 주름이 절로 깊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손자 민석주의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는데 황국회까지 말썽이니.
손자 민석주를 생각하니 다시 가슴이 끊어질 듯 아팠다. 서유림이 그토록 힘을 써주는데도 좀처럼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악령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손자를 다시 멀쩡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뭐지? 누가 보낸 거지?’
민경도가 문자를 확인했다.
발신자가 감추어진 문자였다. 그런데 내용이 무척이나 놀라운 것이었다.
[저를 밝히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어르신. 황국회에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권오산 어르신께서 어르신을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권오산이가 나를 노려? 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혀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요즘 권오산의 눈빛이 좋지 않긴 했다. 무척 전투적이랄까?
‘대체 이유가 뭐야?’
이유를 떠나서 황국회를 무너뜨리려 한다니. 그건 휘발유를 들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일 정도로 미련한 짓이다.
자신이 이렇게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데? 모두가 황국회의 힘 덕분이 아닌가?
‘그런데 대체 누가 보낸 문자야?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민경도가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전화가 걸려왔다.
사무실을 지키는 경비대장의 전화였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민경도 얼른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인가?”
-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 사무실이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경호팀을 총동원해서 막으려 했지만, 너무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사무실에 괴한이라나? 대체 어떤 놈들인데? 그래서 뭘 가져갔는데?”
- 다들 복면을 쓰고 있어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사무실의 서류들을 몽땅 쓸어갔습니다.
“서류들? 어떤 서류들?”
- 어르신 캐비닛과 금고에 있던······.
“이런 빌어먹을! 너희는 도대체 뭘 하는 놈들이야?”
민경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큰일은 아니다. 사무실의 서류는 모두가 가짜일 뿐이니까.
아니, 사무실 자체가 가짜다. 누군가가 자신을 노릴 것을 대비해서 꾸며놓은 미끼일 뿐이다.
그래도 기분은 나빴다.
‘대체 어떤 놈이······?’
문득 권오산이 생각났다. 자신을 밝히지 않은 황국회원 누군가의 문자 때문이었다.
한편으로는 함정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과 권오산 사이를 이간질하기 위한 술책인 것이다.
권오산이 그동안 민경도에게 오해를 했다면 그것 역시 이간질 때문이겠지.
‘권오산에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볼까?’
생각해보니 무의미한 짓이었다. 설령 권오산이 한 짓이라고 해도 ‘내가 그랬소.’ 하고 자백할 일은 없을 테니까.
‘대체 누구의 짓이지?’
그런데 경비대장과의 통화를 마치자마자 또다시 문자가 날아왔다.
이번에도 발신자가 감추어진 문자였다.
[대모의 남자 서유림을 만나보십시오.
그라면 어르신의 궁금증을 시원하게 풀어줄 것입니다.]
서유림.
우주의 기운을 다룬다는 남자.
사실 평가하기가 애매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인데, 직접 만나보면 믿음이 팍팍 간다.
게다가 지금까지 서유림의 말대로 되지 않은 일이 있던가?
권오산의 아들 일도 그렇고, 자신의 손자 일도 그렇고.
‘한번 만나볼 필요는 있겠군. 손해 볼 일은 없잖아.’
“차 돌려!”
운전기사는 묻지도 않고 차를 유턴시켰다. 차량을 유턴할 수 없는 곳이지만, 그런 것은 전혀 따지지 않았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민경도가 곧 법이요 정의니까.
“어디로 모실까요?”
“아까 거기. 회합장소.”
민경도가 운전기사에게 지시하며 채순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순실이 곧장 정화를 받았다.
“내가 서유림 그 친구를 좀 만나야겠어. 아까 회합장소로 오라고 해. 아, 대모님은 나오지 않아도 돼.”
- 알겠어요, 어르신.
잠시 후.
서유림이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제법 넓은 방에 민경도 혼자만 앉아있었다. 서유림이 들어오자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권오산이 나를 노린다고?”
서유림이 움찔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누군가가 문자를 보내왔어. 권오산이 나를 노린다고 말이야. 그러면서 자네에게 물어보면 모든 걸 시원하게 알 수 있다고 하더군. 자, 이제 이야기해보겠나? 난 시간 끄는 건 질색인 사람이야.”
“하아······.”
서유림이 곤란한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시간을 끌었다. 민경도가 두세 번 더 재촉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권오산 어르신이 황국회 전체를 움켜쥐려 하고 있습니다. 저희 대모님은 물론이고 다른 분들의 재산마저 일부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다들 허겁지겁 재산을 처분하여 숨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충 들어보니 앞뒤는 맞았다. 황국회 회원들이 재산을 처분하여 숨기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권오산 때문이라는 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증거 있나? 권오산이 재산을 빼앗았다는 증거.”
서유림은 의아했다.
‘왜 민경도는 마인드컨트롤에 쉽게 안 걸리지?’
이쯤 되면 서유림의 말을 믿어야 한다. 증거 따위는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도무지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권오산도 그런 면이 있지만, 민경도는 특히 더 그랬다. 손자의 일과 직접 관련이 되어있으면 제법 강하게 걸렸지만, 시간이 흐르면 곧 풀리곤 했다.
그래서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아무래도 자존감이 무척 강한 사람인 듯했다. 아니면 선천적으로 의심이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거나.
‘어떻게 한다?’
증거 따위는 당연히 없다. 지금 막 생각해서 대충 꾸며댄 이야기니까. 그래도 마인드컨트롤 덕분에 믿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유림이 쉽게 답을 주지 못하자 민경도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네놈이 아무래도 무슨 수를 쓰고 있는 게로구나. 권오산에게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면 알겠지.”
말뿐이 아니었다. 민경도가 휴대폰을 꺼내서 권오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지금 민경도와 권오사이 통화를 하면 일이 완전히 꼬여버린다. 수습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젠장, 달리 방법이 없군.’
사실 이 방법은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나치게 극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방법을 사용하고 나면 그때부터 빠른 시간 안에 모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금방 탄로 날 수밖에 없는 방법이거든.
하긴, 이제 민경도와 권오산만 남았다.
서유림이 망설임 없이 최후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것은 폭력이었다.
물론 대놓고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상황을 되돌릴 여지는 만들어두는 게 좋겠지.
“어! 저게 뭐죠?”
서유림이 손을 뻗었다.
그곳에 백색의 구체가 있었다. 동전만한 크기였는데 마치 날파리라도 된 것처럼 허공으로 솟구치고 있었다.
민경도도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저런 것은 생전 처음 봤기 때문이다. 민경도를 수행하고 있는 두 명의 청년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멍한 표정으로 빛의 구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빛의 구체가 섬광으로 폭발했다. 시야를 잠깐 동안 멀게 할 정도의 강력한 섬광이었다.
파앗!
“악!”
민경도도도 수행원들도 깜짝 놀라서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서유림의 주먹이 뿜어졌다. 민경도와 수행원 두 명이 순식간에 기절하여 몸을 늘어뜨렸다.
‘됐어, 호군! 들어와!’
서유림의 명령이 떨어지자 빛의 구체가 노을처럼 흩어지면서 서유림에게 흡수되었다.
서유림이 기절한 민경도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왜 버티고 그래? 사람 피곤해지게.’
서유림은 김영자에게 연락해서 민경도과 수행원을 관악산 별장으로 옮기도록 했다.
그러는 사이 서유림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권오산을 공격해라. 아아. 권오산. 내가 당했다.”
역시 쉽지는 않았다. 똑같이 흉내 내기에는 민경도의 목소리가 워낙 늙수그레한데다가 독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80% 이상 똑같다고 자신했다. 제아무리 아들이라고 해도 몸이 좋지 않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긴, 전화를 받자마자 깜짝 놀랄 소식에 정신을 차릴 수도 없을 것이다. 민웅지는 아버지 민경도와 달리 겁도 많고 덜렁대는 놈이라고 들었으니까.
부딪쳐보다.
서유림이 민경도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아들 민웅지였다.
민웅지가 얼른 전화를 받았다.
- 예, 아버지.
목소리에도 군기가 바짝 들었다. 목소리만 들으면 40대가 아니라 20대 같았다. 아버지 민경도를 얼마나 무서워하는지 전화 받는 태도만 봐도 알 것 같았다.
일이 더욱 쉽게 되겠군.
“권오산이가 우릴 배신했다.”
서유림은 가능한 한 말을 짧게 했다. 그게 민경도의 스타일이기도 했고, 또 약간 다른 목소리 톤을 감추기에도 효과적이었다.
민웅지는 목소리의 다른 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 예? 권오산 어르신이요?
“황국회원들을 포섭해서 배신했어. 당장 권오산이를 잡아와. 어서!”
민경도가 호통 치듯 이야기했다.
민웅지가 움찔하는 느낌이었다. 무서워서 감히 이유도 묻지 못하고 얼른 대답했다.
- 예, 아버지!
하지만 잠시 간격을 두고 이유를 물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냥 처리하기에는 너무도 엄청난 일이었겠지. 제아무리 무서운 아버지 민경도의 지시라고 해도 말이다.
- 그런데······ 정말로 잡아오라고요? 무력으로요?
“그래. 지금 당장 놈이 있는 곳을 찾아서 잡아 가두란 말이다. 놈도 대비하고 있을 테니 동원할 수 있는 힘은 전부 동원해서 잡아! 절대 실패하면 안 돼!”
서유림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하면 민경도의 목소리와 다른 점을 좀 더 쉽게 감출 수 있다.
-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이놈이 생각보다 의심이 많네. 꼼꼼하기도 하고.
“놈에게 당했다고 했잖아. 지금 놈들에게 포위당해서 꼼짝도 못하고 숨어있다. 권오산 그놈을 잡아야 내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얼른 움직이지 않고 뭘 하고 있어? 애비 말이 말 같지 않은 것이냐?”
- 아, 아닙니다. 지금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에이, 답답한 놈!”
서유림이 한차례 더 혼을 낸 후 통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