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아리아나는 찾았지만 (3)
아리아나와 강세중, 마령의 계약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리아나를 쫓아가자니 이놈들이 회복해서 달아날 것 같고, 이놈들의 힘을 먼저 흡수하자니 애써 찾은 아리아나를 다시 놓칠 것 같았다.
하지만 갈등은 길지 않았다.
‘아리아나와의 교감을 믿자.’
그리 멀리 달아나지는 않을 것이다. 숲속 어딘가에 숨겠지. 그러면 어디가 되었건 교감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의 계약자는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잡는단 말인가?
어차피 오래 걸리는 작업도 아니다.
서유림이 강세중을 시작으로 마왕의 힘과 마령의 힘을 모조리 흡수했다. 채 2분도 걸리지 않는 작업이었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서 산속을 바라보았다.
아리아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교감은 남아있었다. 아리아나의 느낌이 서유림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서유림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거기에서 가만 기다리고 있어. 내가 지금 갈게.’
서유림이 아리아나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아리아나가 움직임을 멈추고 숨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빠르게 달려서 아리아나를 놀라게 할 이유가 없었다.
서유림의 시선이 불쑥 튀어나온 바위를 향했다. 아리아나가 몸을 감추고 있는 곳이었다.
‘저기로군!’
서유림이 바위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아리아나는 아직도 서유림을 경계하고 있을 테니까.
게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내들에게 겁탈을 당할 뻔하지 않았는가? 경계심이 극도로 높아져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유림이 20m쯤 거리를 남겨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아리아나. 무서워하지 마. 나야, 서유림.”
아리아나는 대답이 없었다.
혹시 인간의 언어를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서유림은 정령계에서 아리아나뿐만 아니라 모든 요정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으니까.
그 말은 언어소통이 정령신의 후보만이 갖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단지 경계하는 마음 때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뿐이다.
어떻게 해야 아리아나의 믿음을 얻을 수 있을까?
그러다가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리안! 부탁해!’
> 알겠어요.
아리안이 서유림의 마음을 읽고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주변의 이슬들을 모아서 제법 큰 물방울을 만들고는 아리아나가 숨어있는 바위 쪽으로 움직였다.
“아리아나도 이런 것 할 수 있지? 사람들은 할 수 없지만, 나는 할 수 있어. 아리아나로부터 선물 받은 능력이야.”
아리안이 바위 너머까지 움직였다. 그리고는 허공에 붕 뜬 상태로 모양을 바꾸었다. 사람 모양도 하고, 강아지 모양도 하고, 둥근 공 모양도 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자 저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리아나가 드디어 뭔가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서유림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제발······.’
아리아나가 슬며시 바위에서 벗어났다. 서유림을 향해 모습을 드러냈다.
서유림이 아리아나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정령계에서 본 바로 그 아리아나였다. 비록 옷은 다르지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똑같았다.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이해해. 아리아나는 기억을 잃었으니까. 내가 누구인지는 물론이고 아리아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테니까. 하지만 나와의 교감은 살아있을 거야. 내가 아리아나를 느끼듯 아리아나도 날 느끼고 있을 거야. 그렇지?”
서유림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이야기했다. 아리아나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아리아나는 한동안 서유림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입술을 움직였다.
“제 이름이······ 아리아나인가요?”
서유림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목소리도 정령계에서 만났던 아리아나의 그것이었다.
반가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래. 아리아나. 이젠 안심해. 내가 지켜줄게.”
서유림은 당장에라도 아리아나에게 달려가서 와락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리아나가 도망갈 것만 같아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대신 아리아나가 자신에게 걸어와 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아리아나의 경계심을 풀게 하려면 아리아나의 지금 마음을 이해해줘야만 한다. 얼마나 두렵고 당황스럽겠는가?
“알아. 날 믿지 못한다는 것.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와 아리아나의 관계를 증명할 방법은 많아. 그러니까 내게 기회를 줘.”
“가르쳐줘요. 제가 누군지.”
혼란스럽겠지. 모든 것이 낯설 테니까.
기억도 잃었을 테니까.
자신이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겠지.
무엇보다도 왜 자신이 사람들과 다른지가 궁금하겠지. 다른 사람에게 없는 능력이 왜 자신에게만 있는지도.
“아리아나는 인간계의 사람이 아니야. 정령계에서 온 요정이야. 그래서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거고.”
서유림이 정령을 시켜서 손바닥 위에 작은 불꽃을 만들게 했다.
그러자 아리아나도 서유림을 따라서 손바닥을 펼쳤다. 아리아나의 손바닥 위에서도 서유림의 것과 같은 불꽃이 만들어졌다.
“이 세상에서 오직 아리아나와 나 둘만 가능한 능력이야. 이것도 우리 둘만 가능한 능력이고.”
다른 하위정령을 시켜서 이번에는 물방울을 만들게 했다.
굳이 아리안이 아니어도 이 정도 간단한 형태는 하위정령의 힘만으로도 가능했다.
아리아나 역시 서유림처럼 정령을 부려보았다.
서유림보다 아리아나의 정령력이 훨씬 강했다.
“이제······ 날 믿겠어?”
서유림이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리아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요. 뭐가 뭔지······. 제게 시간을 주세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남자를 믿지 못하겠어요.”
이해할 수 있다. 정령계에서 남자는 그런 존재니까. 암흑기가 가까워지자마자 마계의 힘에 제압당하여 여자 요정들을 겁탈하고 죽이는 존재니까.
아리아나가 슬금슬금 뒷걸음치려 했다.
잡을 수가 없다. 잡으려 하면 더 도망갈 테니까.
그렇다고 이대로 보낼 수도 없다.
서유림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럼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쫓아가지 않을게.”
“······뭔데요?”
아리아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서유림을 향한 경계심은 여전했다.
서유림이 다가가려 한다면 그대로 달아날 것이다.
물론 힘껏 쫓아가면 잡을 수야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멀어질 텐데.
서유림이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지갑을 꺼냈다. 혹시 아리아나가 놀랄까 무서워서 아주 천천히.
지갑에서 카드 하나와 메모지 하나를 꺼냈다.
“인간계에서 살아가려면 돈이 필요해. 그 정도는 이미 깨달았을 거야. 이걸 사용하면 돼.”
서유림이 카드를 자신의 발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건 내 휴대폰 번호야. 휴대폰이 뭔지도 알지? 날 찾아오고 싶으면 전화 줘. 아니······ 꼭 그래줘야 해. 아리아나 찾으려고 전국을 헤매고 돌아다녔어.”
휴대폰 번호를 메모지에 적어서 카드 위에 올려놓았다.
“난 지금 서울에 살고 있어. 어디에서건 전화만 주면 내가 즉시 달려갈게. 꼭 부탁이야. 제발 전화 줘. 언제까지고 기다릴게.”
아리아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젠 교감을 통해서 아리아나를 느낄 수 있으니까.
거리가 너무 멀면 교감이 닿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마음만 먹으면 다시 찾을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더는 아리아나를 위협할 존재도 없다고 생각했다. 마령의 계약자 정도는 아리아나의 능력만으로도 얼마든지 제압할 수 있을 테니까.
설령 제압하지는 못한다고 해도 피할 수는 있을 것이다.
‘설마 마왕의 계약자가 또 있진 않겠지.’
“도망가지 마. 내가 갈게. 아리아나가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올게. 알겠지?”
서유림이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었지만, 아리아나의 마음을 가까이 붙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적당히 거리를 벌리고는 몸을 돌려서 산을 내려갔다.
두세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곤 했다. 아리아나는 서유림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찾아올 거야. 반드시. 아리아나도 교감으로 나를 느끼고 있을 테니까.’
서유림이 보문산을 완전히 내려왔다.
민경도가 미간에 주름을 깊이 만들었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권오산이 그런 민경도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고 속으로 몇 번을 다짐하면서도 활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 노쇠하고 눈치 빠른 민경도가 그걸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민경도가 이상한 눈치로 물었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어째 표정이······?”
“아닙니다. 요즘 많이 피곤해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러시군요. 우리처럼 나이 먹은 사람들은 첫째로 마음이 편해야 합니다. 건강관리 잘 하세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아주 이상해요.”
권오산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 이상하긴 했다. 여덟 명의 횡국회원 중 민경도와 권오산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부동산을 팔아대고 있었다. 그것도 무척 저가로.
적게는 시세보다 15%에서 많게는 25%까지 싸게 내놓고 있었다.
김영자와 이명석은 이미 거의 모든 부동산을 처분한 상태였다.
한 사람이 그런 움직임을 보여도 이상한 일인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채순실이하고 통화는 해봤습니까?”
“해봤죠. 그런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하더군요. 곧 해외에 크게 투자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현금을 확보해두는 차원이라고만 하고.”
“흐음. 저도 한유진이, 이명석이하고 통화를 해봤는데 비슷한 이유로 부동산을 처분하고 있더군요. 이것들이 무슨 꿍꿍이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이라서······.”
민경도가 안 되겠다는 듯 해결책을 제시했다.
“만나서 물어보면 되겠죠. 회원들 전체가 모이도록 정기회합을 한 번 갖도록 하죠. 설마하니 면전에서까지 딴소리를 하겠습니까?”
“그것도 좋겠군요.”
“이틀 후가 어떻겠습니까? 장소는 제가 정해서 통보하죠.”
“좀 촉박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틀 후로 하는 겁니다. 이참에 이자들의 충성심도 확인할 수 있겠죠.”
“나쁘지 않군요. 좋습니다.”
다음날.
채순실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서유림이 전화를 받자 숨넘어갈 듯 다급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 황국회 정기회합 일정이 잡혔어. 예정대로라면 정기회합은 두 달 후에나 잡혀야 하는데.
“정기회합? 그게 뭔데요?”
여덟 명의 황국회 회원 모두가 반드시 참여하는 모임을 의미했다.
한마디로 강제성을 띈 모임이랄까?
참여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도 컸다. 일단 한 번이라도 불참하게 되면 회장과 부회장인 권오산과 민경도의 눈 밖에 나게 되고, 정기회합에 두 번 연속 참여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황국회원의 자격을 잃게 된다.
“아무래도 내가 재산 처분하는 걸 눈치 챈 것 같아. 날 추궁할 것 같은데 어쩌면 좋지?”
하지만 서유림은 당황하지 않았다.
어차피 예상하던 일이었다. 그리고 민경도와 권오산을 제외한 나머지 황국회원들의 재산은 대부분 빼돌린 상황이었다.
물론 본인들은 안전하게 잘 보관해두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겠지만.
그 돈이 무려 12조원 가까이 되었다. 채순실의 재산이 8천억 원이나 된다고 해서 깜짝 놀랐는데, 다른 회원들의 재산을 확인해보니 다들 1조원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의 부자들이었다.
그렇다면 민경도나 권오산은 대체 얼마나 큰 부자일까?
놈들의 재산까지 모두 빼앗는다면 어쩌면 20조원도 넘을 수 있겠다.
그 돈을 좋은 곳에 쓰지 않고 나라를 좀먹게 하는 곳에만 쓰고 있었다니.
쳐 죽일 놈들.
이제 권오산은 서유림의 손아귀에 잡힌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직도 마인드컨트롤이 잘 안 돼서 재산은 빼앗지 못하고 있지만, 그거야 시간문제였다.
이제 남은 것은 민경도였다.
이번 기회에 민경도마저 처리하면 되겠지.
생각해둔 방법도 있었다.
“대모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우주의 기운이 함께 하고 있잖아요. 제도 대모님 곁에 있어드리겠습니다.”
- 고마워. 그때 꼭 내 옆에 있어줘야 해.
“물론이죠.”
통화를 마친 서유림이 대장로 김석균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석균이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 예, 주군!
<< 대장로가 다른 장로들을 이끌고 해야 할 일이 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성공한다면 큰 상을 내릴 것이다. >>
-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