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아리아나는 찾았지만 (2)
“씨발, 괜히 말해줬나? 이게 웬 개고생이야? 하암.”
신영범이 모텔방 창문에 기댄 채 입이 찢어지라고 하품을 했다.
하지만 눈은 연신 보문산 입구를 향했다. 그녀가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 그래서 세 명이 번갈아가면서 밤낮으로 이렇게 감시하고 있다.
조금만 더 고생하면 된다. 그녀는 반드시 다시 나타날 테니까.
그러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이다.
설마하니 여자를 잡게 되면 강세중이 혼자서만 즐기겠는가?
‘내가 지대한 공을 세웠으니 그래도 몇 번 정도는 품을 수 있게 해주겠지. 으흐흐, 그년 참.’
그녀를 품을 생각을 하니 그 자체만으로도 벌써 황홀해지는 듯했다. 그녀는 그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또 강세중이겠지. 아예 근처 모텔로 자리를 옮겨놓고 며칠째 그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면 바로 튀어나와서 잡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새를 못 참고 또 전화했나?
신영범이 한숨을 내쉬며 발신자를 확인해보았다.
‘어! 모르는 번호네! 누구지?’
전화를 받아보았다.
“누구세요?”
- 안녕하세요. 제보전화 받고 전화 드렸습니다. 지금 만나 뵙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될까요?
웬 사내의 목소리였다.
신영범이 ‘아하!’ 소리를 냈다. TV 광고를 보고 제보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찾아온 모양이다.
신영범의 입술이 쭉 찢어졌다.
‘이거 잘하면 님도 보고 뽕도 따겠는걸!’
포상금이 무려 1억 원이나 되었다. 그 얘기는 그만큼 부자라는 뜻이겠지.
이참에 이놈도 잡아서 탈탈 털면 한몫 두둑하게 챙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파묻어버리면 누가 알겠는가?
“보문산 입구로 와서 다시 전화하세요.”
- 아, 예. 알겠습니다.
상대방이 통화를 마쳤다.
그런데 그때였다. 신영범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예전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지난번에도 지지난번에도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저 옷 한 벌만 입는 듯했다.
여자는 보문산을 향해 뚜벅뚜벅 올라가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기도 했다.
‘놓치면 안 된다.’
재빨리 창문을 뛰어내렸다. 무려 3층이었지만, 마령의 계약자인 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높이였다.
재빨리 몸을 날려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따라붙지는 않았다. 자칫 기척이라도 들키면 또다시 순식간에 사라져버릴 테니까.
그녀를 몰래 뒤따르면서 강세중에게 전화를 걸었다.
‘빨리 받아. 왜 이렇게 안 받아?’
벨이 네 번 정도 울리고 나서야 강세중이 전화를 받았다. 강세중의 목소리가 살짝 흥분된 상태였다. 숨소리도 거칠었다.
“헉. 헉. 무슨 일이냐?”
‘이 새끼, 그새를 못 참고 또 여자를 품고 있었던 모양이군. 남은 밖에서 개고생하고 있는데······. 하여튼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니까.’
그래도 보스였다. 능력도 최고였다.
여자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녀가 나타났습니다. 지금 보문산 등산로를 오르고 있습니다.”
- 그래? 알았다. 지금 가마.
전화기 너머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다 말고 어딜 가겠다는 거야?’ 하며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강세중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령의 계약자 세 명도 대동했다.
강세중도 그녀를 발견했다. 단번에 사진에서 본 그녀임을 알아보았다.
“저 여자냐?”
“예.”
역시 사진에서 본 그대로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걸어가는 뒷모습만으로도 앞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다. 조금 한적한 곳으로 가면 그때 잡자.”
“예.”
강세중이 마령의 계약자 네 명과 함께 여자를 은밀하게 뒤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자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따금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강세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젠장! 눈치 챈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어쩌죠?”
“괜찮아. 끝까지 쫓아가. 제깟 게 가봤자 어디로 가겠어? 이왕이면 숲속으로 달아나면 좋겠군. 그러면······ 흐흐.”
강세중이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데 여자가 강세중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구부정한 길을 돌자마자 갑자기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강세중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넌 이제 내거다! 흐흐.’
강세중이 여자를 따라서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여자도 날렵했지만, 강세중의 움직임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마령의 계약자들도 강세중을 따라서 숲속으로 몸을 날렸다.
보문산 입구.
서유림이 승용차에서 내렸다. 사람이 제법 많았다.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누가 제보자인지 알 수는 없었다.
휴대폰을 꺼내서 다시 제보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벨이 여러 번 울리고 나서야 제보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서유림이 뭐라 이야기를 꺼낼 새도 없이 혼잣말만 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 바쁘니까 나중에 통화합시다.
뭐야 이거? 누구는 안 바쁘나?
서유림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받지도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아예 전원을 꺼버린 듯했다. 전화도 되지 않았다.
이런 괘씸한······.
갑자기 화가 나려고 했다. 드디어 아리아나를 만날 수 있는 싶었는데.
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순간 뭔가 모르게 느낌이 이상했다. 제보자와 아주 잠깐 통화하는데 전화기 너머에서 낙엽 밟는 소리,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아주 다급하게 들려왔던 것 같다.
마치 산속을 빠르게 뛰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길이 아닌 험준한 산을 말이다.
서유림의 고개가 보문산을 향해 날카롭게 돌아갔다.
‘혹시······?’
수풀이 우거진 보문산을 보니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서유림은 시간이 날 때마다 늘 아리아나를 생각했다. 아리아나의 입장이 되어서 ‘낯선 인간계로 들어왔다면 어떻게 행동할까?’도 예상해보았다.
아리아나는 정령계에서만 살아온 요정이다.
정령계는 숲의 세계다. 당연히 도시보다는 숲속에서 더욱 큰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만약 위험이 닥친다면?
그때도 숲속으로 달아나겠지.
게다가 만약 마령의 계약자들이나 마왕의 계약자가 아리아나를 발견한다면?
당연히 눈이 번쩍 떠질 것이다. 마계의 존재는 여자를 품는 게 본능이니까. 아리아나처럼 예쁜 여자를 본다면 참지 못하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놈들이다! 아리아나를 뒤쫓고 있는 게 분명해.’
물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1%의 가능성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어차피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잖아.
서유림이 보문산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해서 달렸다. 바람이 거칠게 일 정도로.
서유림의 엄청난 속도에 등산객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와! 저사람 뭐야?”
“뭐가 저렇게 빨라?”
하지만 서유림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아리아나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무작정 산을 뛰었다.
그렇게 2km쯤 뛰었을까?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괜히 고개가 왼쪽으로 돌아갔다.
그와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뭔가 모를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이게 무슨 느낌이지?’
그걸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나!’
그래. 이건 아리아나의 느낌이다. 드디어 아리아나와의 교감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리아나가 가까이 있다.’
서유림이 느낌을 좇아서 방향을 바꾸었다. 길도 없는 숲속이었다.
하지만 평지에서처럼 빠르게 달렸다.
삐쭉빼쭉 삐져나온 나뭇가지들에 옷이 찢기고 살갗이 긁혔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아리아나의 느낌만을 따라서 무작정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 저 앞쪽에서 웬 여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순간 서유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리아나!’
대충 200m쯤 떨어진 곳이었다. 서유림의 오감이 워낙 발달해서 거리도 방향도 정확할 것이다.
다리가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200m의 거리를 좁혔다.
하지만 서유림은 서두르지 않았다. 약 50m정도를 남겨놓고 속도를 늦췄다. 대신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 천천히 다가갔다.
아리아나는 일단 안전할 것이다. 놈들이 아리아나를 그냥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뭘 하건 아리아나를 겁탈한 후에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은 충분하다.
괜히 서둘렀다가 놈들에게 기척을 들킨다면, 그리고 놈들이 서유림을 알아본다면 아리아나가 더욱 위험해질 것이다.
바닥에 나뭇잎이며 나뭇가지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더욱 조심했다.
다행히 저쪽이 시끄러웠다.
“아악! 이년이 내 손을 깨물었어.”
“소란 떨지 마! 금방 낫는다.”
“이년이 계속 반항하네. 가만히 못 있어?”
서유림이 걸음을 조금 더 빨리 했다.
대충 20m 거리.
걸음을 멈추었다.
아리아나도 보통 실력은 아닐 것이다. 비록 정령신의 후보로서 자격과 능력은 잃었지만, 정령을 부리는 능력은 그대로일 테니까.
그런 아리아나를 저토록 쉽게 붙잡고 제압했다는 것은 놈들 중에 마왕의 계약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서유림이 정신을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손에 따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카리스의 정령검을 소환해온 것이다.
> 부르셨어요?
아리아나도 도착했다.
‘아리아나가 위험해. 도와줘.’
> 알겠습니다.
이 정도면 준비는 완벽하다. 이제는 타이밍 싸움이다.
서유림이 놈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자 나뭇잎 밟히는 소리,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서유림의 움직임을 훤히 알려주었다.
저쪽에서 놈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웬놈이냐?”
서유림이 대답 대신 놈들을 향해 도약했다.
남자 다섯에 여자 하나!
역시 아리아나였다.
아리아나는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사내 넷이서 아리아나의 팔과 다리 하나씩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데도 가녀린 아리아나의 힘을 제대로 당해낼 수 없어서 온몸이 들썩들썩하고 있었다.
나머지 사내 하나가 아리아나의 옷을 벗기려 했지만, 아리아나의 저항이 워낙 거세서 애를 먹고 있었다.
하지만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사내가 힘을 쓸 때마다 옷이 사정없이 찢겨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아리아나의 속살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사내를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때 권혁진과 함께 방안으로 들어왔던 그놈이었다.
마왕의 계약자!
놈도 서유림의 얼굴을 기억했다.
게다가 서유림이 손에 쥐고 있는 카리스의 정령검도 보았다.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으악!”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서유림은 이미 탄력을 받은 상태고, 놈은 이제야 몸을 빼기 시작했으니까.
강세중이 달아나려 했지만, 서유림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이것저것 잴 것 없다. 그대로 놈을 향해 카리스의 정령검을 휘둘렀다.
강세중이 다급한 김에 팔을 들어서 막았다.
하지만 카리스의 정령검은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몸은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버린다.
강세중의 팔도 마찬가지였다.
카리스의 정령검이 놈의 팔을 그대로 지나쳐서 머리와 가슴을 세로로 길게 그었다.
“크어억!”
카리스의 정령검이 뭔가를 베는 것 같은 묵직한 손맛이 느껴졌다. 마왕의 영혼이 베어진 것이 분명했다.
강세중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꿈틀거리기만 할뿐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서유림이 고개를 돌렸다. 매섭게!
마령의 계약자들이 놀라서 달아나려 했다.
더는 카리스의 정령검이 필요 없었다. 카리스의 정령검을 정령계로 돌려보내며 손을 뻗었다.
‘어딜! 슬립다운!’
마왕의 계약자에게는 통하지 않는 마법이지만, 마령의 계약자에게는 통하는 마법이었다. 놈들인 휘청거리며 쓰러졌고. 서유림이 재빨리 다가가서 한 놈 한 놈 강한 타격으로 쓰러뜨렸다.
그제야 아리아나의 상태를 살폈다.
“아리아나. 괜찮아?”
하지만 아리아나는 서유림을 향해서도 경계의 눈빛을 했다. 자유의 몸이 되자 서유림을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안 돼, 아리아나. 가지 마!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하지만 아리아나는 무작정 달아나기만 했다. 서유림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어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