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
내 머릿속엔 오직 (2)
제법 깊은 밤.
“아휴, 답답해서 못 살겠네.”
어머니 윤정미가 집안 곳곳을 종종걸음으로 누볐다.
무려 48평이나 되는 넓은 아파트다. 전에 살던 24평 아파트의 딱 두 배다. 물론 완벽히 두 배는 아니지만, 그래도 전과 비교하면 운동장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넓은 아파트다.
그런데도 좁게만 느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난 나가서 산책 좀 하고 와야겠다.”
윤정미가 기어이 마스크에 모자를 집어 들었다.
서미연이 그런 윤정미를 만류했다.
“웬만하면 좀 참아. 오빠가 금방 해결한다고 했잖아.”
“네 오빠도 이렇게 잘 가리고 나가면 괜찮을 거라고 했잖니. 게다가 이 밤에 누가 날 알아보겠어? 아빠는 잘도 돌아다니던데 뭐. 너도 가끔 밖에 다니지 않니?”
하긴, 그 정도는 괜찮겠지.
서미연이 더는 윤정미를 만류하지 못했다.
“가서 장이나 좀 봐올게.”
윤정미가 모자와 마스크, 목도리로 완전무장하고 아파트를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아직 초봄이라서 날씨는 조금 쌀쌀했지만, 몇 달 전 갑자기 몸이 좋아지면서 추위나 더위는 거의 느끼지 않았다.
‘와! 이렇게 상쾌한 것을.’
마음껏 아파트 주변을 누볐다. 이따금 뻥 뚫린 길이 보이면 실컷 뛰어보기도 했다.
‘운동화 신고 나오길 잘했네. 와! 살 것 같아!’
오랜만에 나오니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어차피 가족들 저녁도 다 해결했고, 거리에 사람도 제법 있으니 위험할 일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곳으로 온 뒤로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해서 지리도 잘 몰랐다. 이참에 주변 지리를 익히는 것도 좋을 것이다.
‘실컷 돌아다니다 들어가야지. 그래도 명색이 주부인데 어디에 뭐가 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할 것 아냐?’
아파트 주변을 돌다가 점점 더 거리를 넓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주변 상가로 들어섰고, 이따금 인적이 거의 없는 골목을 지날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뒤쪽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은밀하게 그러면서도 빠르게 따라붙는 느낌이었다.
순간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곳은 인적이 거의 없는 골목이었다.
‘누구······?’
윤정미가 두려운 마음에 고개를 돌렸다.
얼핏 사내 두 명이 보였다. 그런데 윤정미가 뒤를 돌아보자마자 번개처럼 달려서 거리를 좁히더니 손에 든 무엇인가로 윤정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아니, 후려치려고 했다.
하지만 사내들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깜짝 놀란 윤정미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옆으로 굴렸기 때문이다.
“어맛!”
놀라운 반사신경이었다. 게다가 움직임도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사내들이 내뱉는 험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씨발! 뭐가 저렇게 빨라?”
“뭐해, 새끼야! 빨리 조져!”
윤정미는 그제야 사내들의 모습을 훤히 볼 수 있었다.
2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한 놈은 덩치가 곰처럼 크고, 다른 한 놈은 날렵한 외모였다.
손에 든 것은 쇠몽둥이였다. 저것으로 뒤통수 한 방 맞으면 그대로 사망일 것이다.
‘대체 왜? 누군데?’
순간 일국회가 떠올랐다. 서유림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 이름을 계속 머릿속에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윤정미의 생각은 더 이어질 수 없었다. 사내들이 윤정미를 죽일 듯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왜 저렇게 느리지?’
사내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훤히 보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윤정미가 재빨리 일어서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자 사내가 휘두르는 쇠몽둥이가 연신 허공만 갈랐다.
갑자기 자신감이 샘솟았다.
사실 몇 달 동안 몸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좋아졌다. 외모도 20년 이상 젊어졌다. 나이가 곧 60인데 밖에 나가면 모두가 30대 중반으로 본다.
물론 듣기 좋으라고 과장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젊어진 것만큼은 확실했다.
외모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운동신경이 다 그랬다.
아니, 운동신경이나 근력은 오히려 20대보다 더 좋았다. 얼마 전에 딸 서미연과 재미삼아 팔씨름을 했는데, 팔목을 잡고도 가뿐하게 이겼었다.
그뿐인가?
그동안 운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남자처럼 우락부락한 근육이 나오면 보기 흉할 것 같아서 자제하고 있을 뿐이지 마음만 먹으면 100kg짜리 역기도 번쩍번쩍 들 자신이 있었다.
웬만한 남자들 저리가라 할 육체능력을 자신했다.
사내들도 비로소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공격을 멈추고 주춤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
이번에는 윤정미 차례였다.
윤정미가 용기를 내서 과감하게 돌진했다.
먼저 날렵하게 생긴 사내였다. 그가 쇠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윤정미가 돌격해오자 깜짝 놀라서 다시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으악! 씨발, 이년 뭐야?”
하지만 윤정미는 이번 쇠몽둥이조차도 가볍게 피하며 더욱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주먹으로 사내의 가슴을 때렸다.
퍼억!
“커억!”
단 한 방이었다. 불량배가 가슴을 싸잡아쥐며 쓰러지더니 더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자 곰 같은 덩치를 가진 사내가 칼을 뽑아들었다.
윤정미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다지 두렵지는 않았다. 맞붙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씨발. 꺼져. 안 꺼져?”
곰 같은 사내가 칼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윤정미를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윤정미의 자신감만 키웠다. 칼의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어설프고 느리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진짜. 죽인다!”
사내가 이번에는 진짜로 찌를 듯이 윤정미를 덮쳤다.
순간 윤정미가 사내의 칼 쥔 손목을 잡았다.
사내의 손이 그대로 턱!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윤정미의 손을 따라서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는 게 느껴졌다.
“어······ 어······.”
사내는 너무 놀랍고 당황스러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어······’하는 소리만 계속 되풀이했다.
그러다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온몸에 엄청난 충격이 느껴졌다.
그것이 사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윤정미가 쓰러진 두 사내를 바라보며 손을 탁탁 털었다.
“별 것도 아닌 것들이.”
비슷한 시각.
서유림이 집으로 향했다.
오늘도 바쁜 하루였다. 어제 채순실과 이명석에 이어서 오늘도 유진그룹의 회장 한유진을 포함해서 황국회원 세 명을 만났다. 다들 서유림의 마인드컨트롤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당했다.
채순실과 이명석은 벌써 여러 군데 부동산을 매물로 내놓았다. 무척이나 싼 가격이었다.
통장도 이미 열다섯 개나 만들어놓았다. 물론 더 만들 것이다. 빼앗을 재산이 어마어마하니까 한 100개쯤 만들어야 하겠지.
그러면 황국회원들의 재산을 그곳에 집어넣기만 하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준비가 완벽하게 되었다고 해도 놈들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 금방 될 일은 아니다.
황국회원들이 나중에라도 재산을 되찾으려 할 수 있다. 그때를 대비해서 자금세탁을 확실하게 해야 한다. 이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서유림은 그럴 능력이 없지만, 김영자에게는 그럴 능력이 충분했다. 시간만 적당히 주어진다면 말이다.
어쨌건 모든 일이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왜 기쁘지 않는 걸까? 왜 보람차지 않는 걸까?
왜 오히려 우울하기만 한 걸까?
물론 이유를 알고 있다.
‘아리아나!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리아나가 곁에 없으니 너무도 허전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하니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다. 그 무엇을 해도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흥미도 없고 재미도 없다.
그저 사명감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서유림의 머릿속은 늘 아리아나의 얼굴뿐이었고, 가슴에는 늘 아리아나를 향한 그리움뿐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가방을 열었다.
종이를 꺼냈다.
아리아나의 얼굴이 있었다.
서유림이 직접 그린 얼굴이다.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리고 또 다시 그려서 완성된 얼굴이었다. 처음 몽타주는 아리아나 비슷한 얼굴이었지만, 지금 이 그림은 아리아나와 거의 똑같았다.
마치 아리아나의 사진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김영자에게 다시 부탁했다. 경찰에게 이 사진을 바탕으로 찾아달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냥 찾는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일까?
하긴 워낙에 바쁜 사람들이니까. 실제로 바쁜 건지, 바쁜 척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사람도 없고 바쁘다고만 하는 사람들이니까.
‘휴우, 그런 사람들에게만 의지하는 내가 바보지. 차라리 TV 광고에다가 뿌리는 게 훨씬 낫겠······ 응? TV 광고?’
서유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왜 그 생각을 여태 못 했던 거지?
틀림없이 효과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1억 원쯤 포상금까지 내걸면 제보가 빗발칠 것이다.
그러면 분명 아리아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조만간 아리아나를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내일 당장 TV 광고를 때리자. 10억 원쯤 때려 부우면 밤낮으로 계속 광고를 내보낼 수 있겠지. 안 되면 김영자에 임채모에 황국회의 힘까지 동원하면 되지 뭐.’
다시 집을 향해 걸었다. 서유림의 발걸음이 갑자기 활기차졌다.
번호키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인데 온 가족이 거실에 모여 있었다. 서유림이 들어오자 어머니가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겼다.
“아들 왔어?”
오늘따라 어머니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시네. 매일 갇혀있는 게 답답해 죽겠다며 불만만 말씀하시더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어요?”
“좋은 일은 무슨. 호호호.”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아니면 어머니가 저렇게 갑자기 밝아지실 이유가 없잖아.
대체 뭐지?
여동생 서미연이 대신 이야기해주었다.
“오늘 뒷골목에서 엄마 혼자 깡패 두 명을 때려잡으셨대.”
거기까지만 들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것 같다.
충분히 즐거워하실만한 일이다. 어머니의 능력이 그만큼 강하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셨을 테니까.
하지만 조금은 위험한 일이다.
그러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서 놈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오면 어쩌려고.
‘응? 놈들이 몰려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왜 놈들에게 당한다는 생각만 했을까? 오히려 놈들을 끌어들일 함정으로 이용할 수도 있잖아.
지난날에 임채모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사실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집은 계속 옮길 계획이었다. 길게는 3개월에서 짧게는 1개월마다.
그래서 월세로 아파트를 얻은 것이고, 이삿짐도 최소한으로 한 것이다.
그러면 놈들이 설령 눈치를 챘다고 해도 계획을 세우고 이곳으로 몰려올 즈음이면 다른 곳으로 옮긴 후일 것이다.
서유림이 활짝 웃어주었다. 괜한 일로 가족에게 근심을 주고 행동을 제한했던 것 같다.
“잘하셨어요. 대신 얼굴이 노출 안 되게 조심하셨죠?”
“당연하지.”
“그러면 됐어요. 그리고 조만간 집을 옮길게요. 일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는 자주 옮겨야 할 것 같아요. 그건 좀 이해해주세요. 대신 최고급 아파트나 오피스텔에서 살게 해드릴게요.”
“어쩔 수 없지 뭐.”
다행히 가족 모두 크게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다음날.
서유림이 김영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뭐든 말씀만 하세요. 유림씨 부탁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드릴 준비가 되어있어요.
김영자에게는 마인드컨트롤도 걸지 않았는데 황국회 회원보다 서유림을 더욱 믿어준다.
그만큼 서유림의 활약이 크다는 이야기겠지. 김영자가 평생에 걸쳐서 이루고 싶은 꿈을 서유림이 대신 이뤄주고 있으니까.
다른 마음도 전혀 품지 않았다. 몰래 정령을 침투시켜놓았고, 이따금 김영자의 생각을 감시해보았지만, 늘 한결같은 마음뿐이었다.
황국회를 무너뜨리겠다는 사명감.
그래도 사람 마음은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따금 김영자의 마음을 읽곤 했다.
물론 그래봤자 김영자에 대한 믿음만 더욱 커질 뿐이었지만.
“지난번에 제가 찾아달라던 여자 있었죠?”
- 네. 그 일은 정말 죄송해요. 경찰을 닦달하고 있는데 도통 좋은 소식이 안 들려오네요.
“어쩔 수 없죠. 근데 TV 광고를 활용할 수 있을까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요. 밤낮으로 실종자 찾아달라는 광고가 나가게 해주세요. 포상금도 1억 원 걸어주시고요.”
- 어머! 정말 특별한 분인가 봐요. 유림씨 뜻이 뭔지 잘 알겠어요. 제가 책임지고 해드릴게요.
김영자가 호언장담하듯 했다.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김영자가 책임지고 하겠다고 한 일 중에서 제대로 안 된 일은 아직 없으니까.
아, 아리아나의 일은 빼고. 그건 아직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어쨌건 그 일은 김영자에게 맡겨둬도 될 것 같다. 제보가 들어오면 그때 서유림이 움직이면 되니까.
‘그럼 오늘도 열심히 움직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