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내 머릿속엔 오직 (1)
서유림이 눈을 떴다.
조금은 낯선 공간이었다. 새롭게 이사한 도봉구의 아파트였다.
아! 이사는 아니다. 이삿짐을 옮긴 건 아니니까. 생활에 필요한 웬만한 것은 모두 갖춰진 아파트였다. 때문에 개인적인 잡동사니 조금만 은밀하게 옮겨온 게 전부다.
“휴우~. 홀가분하군!”
진짜 개운했다. 어깨의 짊이 확 덜어진 기분이랄까?
이제 더는 정령계로 들어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론 전에는 정령계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설렘이고 흥분이었다. 정령계를 오갈 때마다 능력이 쭉쭉 올랐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아리아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그 아름다운 아리아나를 매일 밤 안고 잤잖아.
하지만 아리아나가 떠난 후로는 정령계로 들어가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다. 단지 의무감으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따금 그립기는 할 것이다. 낯선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남자의 본능일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그때마다 잠깐씩 들어갔다 오면 될 것이다. 이제는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서유림 혼자서 들어갈 수 있으니까.
단, 암흑기가 끝날 즈음에 들어갈 것이다. 더는 정령계의 혼란에 뒤섞이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제는 홀가분하게 인간계의 일을 정리할 수 있겠다.
무슨 일?
그야 당연히 아리아나를 찾는 일이다. 사실 서유림의 머릿속은 온통 아리아나 생각뿐이다.
하지만 그 일과 관련해서는 서유림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김영자와 채순실 같은 정보력 좋은 이들에게 부탁하는 것뿐이다.
대신 서유림이 해야 할 일은 따로 있다.
황국회와 관련한 일.
이제 분위기도 무르익었겠다. 마무리만 지으면 된다.
‘오늘부터 시작해볼까? 후훗.’
서유림은 적당한 시각에 채순실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순실은 서유림의 전화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마인드컨트롤에 완전히 빠져서 서유림의 광팬이 된지 오래였다.
“혹시 지금 시간 되십니까?”
- 물론이지. 난 언제든지 오케이잖아.
“그럼 대모님께 가겠습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 오피스텔이지.
서유림이 곧장 오피스텔로 향했다.
채순실이 얼른 문을 열어주었다. 서유림을 보자마자 반가워 죽겠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심각해져야 했다. 서유림이 다짜고짜 이상한 행동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누군가에게 미행이라도 당할까 무섭다는 듯 뒤를 살펴보고 안전을 확인한 후에야 오피스텔로 숨어들어갔다.
채순실의 눈은 어느새 화등잔만 해졌다.
“왜······ 그러는 거야?”
“혹시 최근에 주변에 이상한 사람 없었습니까?”
“이상한 사람? 글쎄. 잘 모르겠는데.”
“잘 생각해보세요. 이유도 없이 주변을 얼쩡거리거나, 대모님을 감시하는 것 같은 사람 정말 없었습니까?”
채순실이 고개를 갸웃하며 눈알을 허공에 놓고 굴렸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늘 주변에 존재한다. 아니,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웬만한 일은 다 정상으로 생각될 수도 있고, 반대로 멀쩡한 일도 이상한 일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볼까?
길을 걷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누군가가 아까부터 계속 뒤를 따라 걸어온다.
이상한 일일까, 아닐까?
이상한 눈으로 보면 ‘저놈이 나를 따라오는 건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방향이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낯선 사람이 길을 물어보는 것도 이상한 일로 생각할 수 있고, 누군가가 괜히 친절을 베푸는 것도 이상한 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 말이다.
그런데 채순실은 그런 일이 전혀 없었던 모양이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고개를 흔들었다.
“잘 모르겠는걸.”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블랙 포이즌을 사용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는데.
뭘 알아야 작업을 걸 것 아닌가?
“제가 기억 더듬는 걸 좀 도와드릴까요?”
“어떻게?”
“제가 우주의 기운으로 최면을 걸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무의식 속에 있던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을 겁니다.”
채순실은 서유림의 편이었다. 서유림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었다.
“그래볼까?”
“그럼 침대에 반드시 누워보세요.”
채순실은 서유림이 시키는 대로 침대에 반드시 누웠다.
서유림이 그런 채순실의 정수리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블랙 포이즌을 제법 강하게 주입했다.
채순실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이내 환각에 빠져서 마약에 취한 것 같은 흥분상태를 보였다.
과연 잘 될까?
아무리 마인드컨트롤이 강하게 걸린다고 해도 정신력이 강한 자는 쉽게 걸려들지 않는다. 민경도처럼 말이다.
채순실은 잘 걸려들었으면 좋겠다.
해보면 알겠지.
서유림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산이 얼마나 되나요?”
그러자 채순실이 순순히 대답했다.
“한 8천억 원 정도?”
오! 된다!
그런데 재산이 무려 8천억 원이나 된다고? 무슨 재산이 그렇게 많아?
고영대의 재산이 450억 원이나 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는데, 채순실과 비교하니 하루살이급도 안 되는 재산이었다.
“가장 많은 재산은 어디에 있나요?”
“싱가폴 P은행.”
“그 다음으로 많은 재산을 쭉 얘기해보세요.”
“강화도에 7천 평 정도 땅이 있고, 평창에는 차명으로 5천 평 정도 땅이 있고, 대전에는······.”
채순실은 마치 정신이 제압된 사람처럼 서유림의 질문에 순순히 답을 놓았다.
하지만 채순실 본인도 자신의 재산을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단지 큰 덩어리의 돈이 어느 은행에 있고, 제법 값이 나가는 부동산이 어디어디 있는지 정도에 불과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서유림이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신이 오랜만에 거리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젊은 남녀 한 쌍이 당신을 붙잡고 이렇게 물어봅니다. 인상이 좋으시군요. 당신은······.”
그리고 잠시 후.
채순실이 눈을 떴다.
채순실이 몽롱한 눈으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환각 상태에서 벌어졌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이건 처음 시도하는 게 아니니 100% 확실하다.
서유림이 들려준 이야기도 실제로 겪은 일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서유림이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생각났습니까?”
채순실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났어.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사람이 있긴 있었어.”
“어떤 사람인데요?”
“웬 이상한 연놈들이 나보고 인상이 좋다며 얘기 좀 하자는 거야.”
서유림이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척했다.
“오, 역시!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 말도 안 했지. 난 원래 낯선 사람하고는 얘기 안 해. 이유도 없이 아부 떠는 사람은 더욱 싫어하고.”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놈들 틀림없이 민경도가 보낸 자들일 겁니다.”
“민경도 어르신이? 왜?”
채순실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이 시점에서 민경도의 이름이 왜 갑자기 튀어나오느냐는 식이었다.
“아직도 눈치 못 채셨습니까? 민경도가 대모님을 노리고 있습니다.”
순간 채순실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그만큼 놀랍고 충격적인 말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서유림의 강력한 마인드컨트롤 때문에 채순실의 마음속에는 이미 민경도에 대한 불신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민경도가 대모님을 제거하려고 작업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고영대도 알고 보니 민경도의 지시를 받고 대모님을 노렸던 것입니다.”
“뭐······ 뭐라고?”
채순실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손이 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서유림이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정말 까맣게 모르고 계셨구나. 하긴, 그럴 법도 하죠. 민경대가 무려 1백억 원이나 되는 돈을 포상금으로 걸었으니까요. 제게도 1백억 원을 주겠다며 대모님 제거하는데 협조해달라고 하더군요.”
“유······ 유림씨에게까지?”
서유림이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제게 대모님의 재산내역까지 알려주며 그중 5%를 떼어주겠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대모님 비자금이 싱가폴 P은행에 있죠?”
“엄마야!”
채순실이 깜짝 놀라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후훗, 놀랄 수밖에. 그건 오직 채순실 본인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놀라긴 이르다니까.
“강화도에 7천 평의 땅이 있죠? 평창에도 차명으로 5천 평 정도 땅이 있고, 대전에도······.”
채순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유림이 자신의 재산내역을 이토록 자세히 알고 있을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민경도의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권오산과 함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이니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언제부터 황국회에 밉보인 것입니까? 아니면 원래부터 민경도와 사이가 나빴던 겁니까?”
“딱히 밉보인 것도, 사이가 나빴던 것도 아닌데. 단지······.”
채순실이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역시 그렇다니까. 사람 사이의 일인데 어떻게 갈등이 없고 오해가 없을 수 있겠어?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있을 수밖에 없다니까.
그럼 그걸 크게 부풀리기만 하면 될 것이다.
나머지는 마인드컨트롤이 알아서 해줄 테니까.
“단지?”
“고영대를 차기 대권후보로 내세우는 일 가지고 조금 의견충돌이 있었어. 나는 시기상조라고 했는데 민경도 어르신이······.”
“역시 그랬군요.”
채순실도 비로소 감이 온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고영대가 그 사실을 알고 채순실에게 원한을 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민경도와 손을 잡은 것이고.
채순실은 어느새 울 듯한 표정을 했다. 제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채순실이고 황국회 회원이라지만, 민경도에게 찍혔다는 것은 사망선고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난 이제······ 어쩌지?”
서유림이 그런 채순실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모님께는 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는 우주의 기운을 다룰 수 있고요. 누가 감히 우주의 기운에 대항할 수 있겠습니까? 아! 어쩌면 민경도의 손자가 그 꼴이 된 것이 황국회의 주도권이 대모님께 넘어가려는 징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그럴까?”
“절 믿으시라니까요. 제가 대모님 편에 있는 한 우주의 기운도 대모님 편입니다. 확실해요. 이번 기회에 민경도는 제거되고 그 자리를 대모님께서 차지하게 되실 겁니다. 대모님은 제가 시키는 대로만 하세요.”
채순실이 서유림의 손을 더욱 힘껏 잡았다.
“뭐든 말만 해.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서유림의 입술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이제 다 된 밥이었다.
“놈들이 노리는 것은 대모님의 재산입니다. 일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해서 숨겨두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대모님을 함부로 건들 수 없습니다. 시간을 버는 거죠.”
“알겠어. 그런데 어디에 숨겨두지?”
“제가 사흘 안에 재산을 숨겨둘 통장을 만들어드리겠습니다. 통장은 차명으로 하되 대모님만 관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곳에 모두 넣어두세요.”
“그래. 알겠어. 내일 당장 부동산부터 정리해야겠어.”
“급매를 해서라도 빨리 처분하세요. 민경도가 눈치 채고 나면 부동산 처분하는 것도 막힐 수 있으니까요.”
“그게 좋겠네. 시세보다 20% 정도 싸게 내놓으면 금방 처분될 거야.”
채순실은 이렇게 정리 되었고.
그럼 다음으로 이명석 차례인가?
이명석 역시 황국회 회원이었다. 채순실처럼 핵심에서는 조금 벗어난 인물이기도 했다.
민경도의 이름을 팔면 발발 떨 사람이라는 뜻이지.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대모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민경도가 알게 되면 저까지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 얼른 가봐. 민경도 어르신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해.”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모님도 몸조심하십시오.”
서유림이 채순실의 오피스텔을 나왔다.
김영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순실이 곧 부동산을 정리할 계획입니다. 채순실의 부동산 리스트는 오늘 저녁에 이메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 알겠어요. 내놓는 즉시 사들일게요. 그런데 정말 대단해요. 대체 무슨 수를 쓰고 있기에 채순실을 떡 주무르듯 하고 있는 거죠?
“저한테는 사람 마음을 휘어잡는 특별한 기술이 있다니까요. 하하. 조만간 이명석도 재산을 처분하게 될 겁니다.”
- 알겠어요. 그것도 준비하죠.
현금은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다. 채순실의 부동산은 고영대의 재산과 채순실의 동산으로 사들이면 되고, 이명석의 부동산 역시 같은 방식으로 사들이면 된다.
통화를 마친 서유림이 이번에는 이명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