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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미친 잠재력-180화 (180/196)

# 180

지금 네게 필요한 것은 (2)

저녁 무렵.

서유림이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런 다음 다시 박첨지의 아들한테 가봐야 하겠지.

그런데 집 부근에 도착할 무렵에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누구지?’

그냥 무시할까 하다가 왠지 기분 좋은 느낌이 들어서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 민경도일세. 기억하는가?

물론 기억한다. 기억력이 좋아져서 목소리는 물론이고 얼굴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모두 기억난다.

왜 전화했는지도 알 것 같다. 손자 때문이겠지. 비로소 서유림의 말을 확인한 것이다.

아마 지금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나오는 중이겠지. 당연히 감기가 아니고, 의사는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겠지. 원인을 모르겠다는 식으로 말이다.

스토리가 눈에 빤히 그려진다.

“예, 어르신.”

- 지금 병원에서 나오는 중일세.

그럴 줄 알았다니까.

-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놓고 그냥 찌그러진 인생으로 살면 돼.

하지만 서유림은 모른 척했다. 민경도의 애간장을 살짝 태워줘야 원하는 것을 더욱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잘······.”

- 액운 이야기 말일세. 우리 손자가 알지도 못하는 병에 걸렸네. 벌써 병원을 세 군데나 다녔는데 망할 의사 놈들이 도통 원인을 모르겠다는 거야. 아무래도 자네 말대로 액운이 낀 것 같아.

“아, 그러셨군요.”

-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나? 아니, 얼마면 되겠나? 자네가 액운만 물리쳐준다면 원하는 만큼 주겠네.

후훗, 몸이 닳았군. 원하는 만큼 주겠다고? 그러다가 내가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려고?

어쨌건 그렇게 쉽게는 안 될 것이다. 애 좀 닳게 해야 한다니까.

게다가 어제 손자 놈을 만나보니 그 할아비에 그 아들에 그 손자였다. 어찌나 싸가지가 없던지.

고등학교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요즘 격투기를 한창 배우고 있었는데, 똘마니를 샌드백 대신 벽에 세워두고 뒤돌려 차기를 연습하고 있었다.

실제로 얼굴에 발차기를 집어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그걸 보고 어찌나 황당하던지.

그런 놈은 혼이 좀 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대로 자라면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조상인 민영휘를 능가할 놈이 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 없이 그레이 포이즌을 침투시켜주었다. 중독되면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게 되는 독이다.

어차피 한 달 안에만 해독시키면 피해는 없다. 오히려 더욱 건강해질 것이다.

하지만 과연 해독시켜주는 게 옳은 일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하는 꼴을 봐서 바른 쪽으로 변하겠다 싶으면 해독시켜주고, 영 아니다 싶으면 평생 그렇게 앓다 죽게 놔둘 생각이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저도 도와드리고 싶은데······.”

- 못 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게. 그건 자네가 죽겠다는 말과 같으니까. 무조건 액운을 몰아내.

이거 완전히 강요네. 그만큼 절박하다는 거겠지.

그럼 슬쩍 미끼를 던져줄까?

이정도면 콱 물어줄 것 같다. 어쩌면 바늘 째 꿀꺽 삼켜버릴 수도 있겠다.

“그럼 한 가지 필요한 게 있습니다.”

- 그게 뭔가. 뭐가 되었건 얼마가 들건 내가 해줄 것이네.

“돈은 전혀 필요 없습니다. 다만 믿음이 필요할 뿐입니다. 어르신께서 우주의 기운을 완전히 믿고 받아들여야만 액운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의심이라도 남아있다면 오히려 일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 그야 물론 믿지. 믿고말고.

민경도가 당연하다는 듯 목소리에 힘을 주어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게 될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으로 오묘하다. ‘까짓, 믿지 뭐.’ 하면 1초 만에 믿음을 가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믿음이 쉽게 생기지 않는 게 사람 마음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증오해야 할 사람인데도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내 마음 나도 몰라.

민경도도 이번에 그걸 느껴야 할 것이다.

물론 딴에는 ‘믿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진실 된 믿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의심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 의식을 진행할까요?”

- 나는 오늘이라도 좋으네.

“서두른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닙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완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두시고 저와 우주의 기운을 믿도록 노력해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해야만 안전합니다.”

- 믿는다니까. 그러니까 지금 당장 해. 내 손자가 지금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어.

급하기도 하셔라. 시간을 가지라고 했으면 최소한 일주일은 기다려야지.

뭐, 나야 좋지. 시간이 부족하면 그만큼 믿음이 못 자랐다는 핑계 대기도 쉬울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 내가 자네 집으로 사람을 보냈네. 30분 내로 도착할 걸세.

집으로? 집이 어디인줄 안단 말인가?

역시 정보력 하나는 대단하군.

하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람들 아닌가? 서유림의 집 주소쯤 알아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겠지.

잠시 후.

서유림이 민경도의 집으로 향했다. 민경도와 그의 아들 민자영, 손자 민석주가 모두 집안에 있었다.

민석주는 아예 침대에 앓아누운 상태였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하마터면 헛숨을 내쉴 뻔했다.

겨우 그 정도에 저렇게 엄살을 피우다니.

겨우 그레이 포이즌을 넣은 것뿐이다. 그건 고통은 크지 않고 대신 기력을 지속적으로 갉아먹게 해서 시름시름 앓게 하는 것뿐이다.

몸살감기 정도로 생각하면 적당하겠지.

물론 몸살기운이 있으니 온몸이 쑤시기는 하겠지만, 그걸 못 참고 가족 앞에서 저렇게 끙끙 앓는 소리를 내다니.

진짜 고통을 주는 레드 포이즌이나 블루 포이즌을 사용했다면 비명을 지르고 난리가 났겠다.

하지만 민경도나 민자영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있나?

병원에서는 그저 원인 모를 병이라고만 하고, 민석주는 저렇게 끙끙 앓고 있으니 그저 겁이 나서 달달 떨 수밖에.

서유림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손자 분께서 언제부터 저렇게 앓기 시작했습니까?”

“감기 기운이 있었던 건 어제부터네. 그런데 오늘 병원을 다녀오고 나서부터 저렇게 앓기 시작하더군.”

결국 의식이 부른 병이라는 얘기군.

즉 그냥 감기 정도로 생각했다면 ‘조금 아프네.’ 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 병원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심각한 병처럼 이야기하니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왠지 더 아픈 것 같고, 곧 죽을 것 같은 두려움까지 느껴지는 거지.

그럼 이제 쇼를 시작해볼까?

서유림이 먼저 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초소형카메라를 몰래 심어놓은 가방이었다.

렌즈가 민석주와 그 뒤의 벽을 향하도록 방향을 잘 맞추었다.

물론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러면서 부탁했다.

“물을 좀 떠와주시겠습니까?”

“마시는 물?”

“예. 마실 수 있을 정도로 깨끗한 물이어야 합니다. 마트에서 파는 생수도 좋고요. 세 개 준비하셔야 합니다. 의식에 필요합니다.”

사람은 간사해서 자신의 오감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쉽게 믿지 못한다. 하지만 오감을 통해 체험시켜주면 제아무리 거짓이라고 해도 완벽하게 믿기 쉽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물이다.

물 컨트롤이 서유림에게는 가장 쉬운 일이거든.

“알겠네. 아줌마. 빨리빨리 움직여.”

괜히 가정부만 바쁘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서유림이 가방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둘둘 말려있는 사진이었는데, 판판하게 펴놓고 보니 제법 큰 사진이었다.

사진을 본 민경도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그것은······.”

서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권혁진님의 사진입니다. 권혁진씨에게 깃든 악령의 짓이기 때문에 이 사진도 의식에 꼭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민경도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내키지 않으시면 지금이라도 중단을······.”

“아닐세. 그냥 하게.”

당연히 그렇게 나오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손자의 일이 아닌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가 저렇게 사경을 헤멜 듯이 아파하고 있는데 권혁진의 사진쯤이 대수이겠는가?

하지만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을 가르쳐주면 마음이 조금 무거워질걸.

서유림이 사진을 민경도에게 주었다.

“이걸 저쪽 벽에 붙여주십시오. 손자 분과 피를 나눈 가족이 직접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민경도는 시키는 대로 따랐다. 사진을 민석주가 누워있는 벽 바로 위에 차지게 붙였다.

서유림이 이번에는 가방에서 송곳과 칼을 꺼냈다. 오늘 의식을 위해서 미리 준비해온 것이었다.

민경도가 또다시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렇게 자꾸 놀라는 거야? 어차피 네 손으로 직접 할 거면서.

하지만 의사는 물어줘야 하겠지.

“거듭 말씀드리지만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마음이 있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악령이 그 빈틈을 파고들 테니까요. 악령을 죽인다는 마음으로 의식을 진행하셔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면 다음에······.”

“아니네. 되었네. 이걸로 저 얼굴을 난도질하면 되는 건가?”

“예. 원한을 갚듯 찌르고 베어주세요.”

그러자 민경도가 송곳과 칼을 받아들고는 권혁진의 얼굴을 사정없이 찌르고 베었다. 처음에는 조금 주춤주춤했지만, 몇 번 하다 보니 감정이 복받치는 듯 보기 민망할 정도로 과격하게 행동했다.

가정부가 대접에 물을 떠서 가지고 들어오다가 그 모습을 보고는 흠칫 놀랄 정도였다.

서유림이 민경도를 만류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제 손자님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여주세요.”

가정부가 물이 반쯤 든 대접을 민경도와 민자영, 서유림 앞에 각각 놓아주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전화로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은 믿음이 중요합니다. 작은 의심이라도 있으면 오히려 화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건 보지도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소리를 내는 것은 더더욱 금물입니다. 이점 꼭 명심해주십시오.”

“알겠네.”

민경도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민자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서유림이 기도를 하듯 손을 모았다.

그러자 민경도와 민자영도 서유림을 따라서 손을 모았다.

잠시 후 방안에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손자인 민석주를 중심으로 한 돌풍이었다. 아주 가벼운 바람이었지만,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흔들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민경도와 민자영이 깜짝 놀라서 눈을 떴다.

하지만 서유림이 눈을 꼭 감고 입술로만 뭐라 뭐라 주문 외는 것을 보고는 다시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눈을 떠야 했다. 느닷없이 쪼르르- 하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민경도와 민자영이 함께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세 사람 앞에 놓인 세 개의 대접에서 물로 만들어진 여자들이 나체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이다.

“헉!”

민경도와 민자영이 동시에 헛숨을 들이 삼켰다.

그러자 춤을 추며 놀던 여자들이 갑자기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오직 서유림의 앞에 있는 여자만 계속해서 춤을 추었다.

민경도와 민자영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하지만 뒤늦은 후회였다. 여자들이 갑자기 분노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물로 만들어진 여자인데도 그 표정이 너무도 실감나게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대로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손자인 민석주의 얼굴로 떨어졌다.

민석주가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러자 민경도나 민자영도 함께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으악! 석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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