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아리아나를 찾아주세요 (2)
요나스의 번성.
서유림의 모습이 스르르 나타났다. 마치 아리안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주변을 서성이던 요정이 깜짝 놀라서 군례를 취했다.
“오셨군요.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서유림이 하늘을 보았다.
이른 아침이었다. 지금 출발하면 사흘 안에 요나스 성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마계군단의 저항이 거세다면 하루 쯤 더 늦어질 수도 있겠지.
어쨌건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다.
“가죠.”
요정이 서유림을 안내했다.
정령신의 후보들과 계약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다들 서유림이 도착하자마자 출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럼 지체할 이유가 없다.
“출발할까요?”
“예. 저희는 준비됐어요.”
“그럼 갑시다. 성문을 열어요.”
서유림이 선두에 섰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카리스의 정령검을 뽑아들고 맹렬하게 뛰쳐나갔다.
8만여 명에 달하는 요정군단이 서유림을 뒤따랐다. 그 행렬이 끝도 없이 길었다.
하지만 성 밖에서 기다리는 마계군단과 비교한다면 오히려 초라한 규모였다. 마계군단의 규모는 거의 100만에 가까우니까.
하지만 마족은 거의 없었다. 마신의 성물도 없었다.
그런 마계군단은 각성에 성공한 서유림에게는 수수깡보다도 나약한 존재들일 뿐이었다. 카리스의 정령검을 휘두를 때마다 낫질에 베어지는 수숫단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다만 그 수가 너무 많아서 아무리 베어 넘겨도 표시가 나지 않을 뿐이었다.
서유림은 서쪽을 향해 곧장 길을 열었다. 앞을 가로막는 마계군단을 베어남기며 무인지경으로 달렸다.
계약자들이 꺾쇠 모양으로 진을 만들고 서유림이 만든 길을 더욱 넓혔다. 그 뒤로 요정군단이 긴 행렬을 이루며 달렸다.
마치 마계군단의 바대를 헤엄치는 바다뱀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적지 않은 희생이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정령신의 후보들과 계약자들은 안전했다.
그렇게 이틀쯤 달렸을까?
“휴우, 무사히 빠져나왔군요.”
정령신의 후보들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계군단의 포위를 완전히 뚫고 멀리 따돌리는 데까지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앉아서 휴식을 취한다고 해도 마계군단이 뒤따라오려면 적어도 두세 시간 정도는 걸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 좋아하긴 일렀다.
서유림이 카리스의 정령검을 뻗어 서쪽을 가리켰다.
“마신의 성물이 느껴지는군요.”
“마신의 성물?”
“그럼 마족군단이······.”
서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나스 성에 있던 마족군단이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정령신의 후보들이 바짝 긴장했다. 제아무리 각성한 서유림이라고 해도 마족 군단의 규모가 무려 1만 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신의 성물까지 힘을 보태고 있지 않은가?
서유림도 정면으로 맞붙을 마음은 없었다.
물론 힘 대 힘으로 맞붙으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체력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바닥난 체력을 잠재력으로 보완할 수는 없으니까.
한 100명 정도는 마물 베듯이 거침없이 사냥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이 되면 지쳐서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러면 살기 위해서 인간계로 달아나야 하겠지.
다시 복귀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기다리던 마족군단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테고.
물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이지만, 그런 상황은 조금의 가능성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우회해봅시다. 어쩌면 놈들을 피해서 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게 좋겠군요.”
다들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방향을 오른쪽으로 약간 틀어서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계획대로 되는 듯했다.
그런데 마족군단이 갑자기 이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놈들도 정령신의 후보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서유림을 느끼고 있거나.
요나스 성까지는 대략 하루의 거리쯤 남았다. 요나스 성에서 마계군단에 의해 길이 막힌다면 서유림이 제이무리 빨리 길을 연다고 해도 마족군단에게 따라잡힐 수밖에 없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서유림이 달리면서 후아니스에게 말했다. 아리아나가 없는 지금은 후아니스가 정령신의 후보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팀을 나누겠습니다. 제가 요정군단을 이끌고 시간을 벌 테니 그동안 최대한 빨리 달리세요.”
“감사해요. 그럼 이건 서유림님이 사용하세요.”
후아니스가 성물 목걸이와 성물 허리띠를 서유림에게 넘겨주었다.
지금은 사양하고 양보하며 허비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정령신 후보들의 안전 여부는 서유림이 시간을 얼마나 끌어주느냐에 달려있다.
당연히 서유림에게 모든 전력이 집중되어야 한다.
서유림이 망설임 없이 성물들을 받아 챙겼다.
“요나스 성에서 돌려드리죠. 1군단과 2군단은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요나스 성으로 간다.”
기수들이 서유림의 명령을 깃발로 전달했다.
각 군단은 1만 명으로 구성되어있다. 두 개 군단인 2만 명의 요정군단이 서유림을 따라서 남쪽을 향해 달렸다. 마족군단이 있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이들은 자살특공대인 셈이었다.
“아리안은 날 도와줘.”
“알겠어요.”
얼마 달리지 않아서 마족군단이 희미하게 보였다.
지금은 마족군단을 싸워서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일 뿐이었다.
“동쪽으로 달아나.”
요정군단이 깃발의 움직임을 보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마족군단이 서유림의 군단을 따라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본진이 따로 있다는 것을 파악했는지 다시 방향을 바꿔 달리기 시작했다.
“다서 서쪽으로!”
서유림이 마족군단을 향해 곧바로 달렸다.
그러자 마족군단도 무리를 나누었다. 약 1천여 명의 마족군단이 마물과 마귀를 이끌고 서유림 쪽으로 달려왔다. 나머지는 정령신의 후보들을 뒤쫓았다.
이쪽의 머릿수가 무려 2만 명이나 되지만, 저쪽도 마족이 1천 명이나 되기 때문에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판단한 듯했다.
‘제법 머리를 쓰는군!’
하지만 후회할 것이다. 저 정도는 서유림이 거느린 요정군단으로 압살할 수 있으니까.
‘이제부터 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실히 보여주마.’
“아리안! 날 보호해줘.”
“예.”
아리안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서유림의 온몸에 은은한 오라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정령왕으로서의 면모를 확실하게 갖춘 아리안이 오라 방어막을 형성해준 것이다.
“전군 돌격!”
서유림이 선두에 서서 마족군단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카리스의 정령검을 마음껏 휘둘렀다.
그러자 카리스의 정령검이 갑자기 길어졌다. 원래는 검날의 길이가 1.5m가 채 안 되었는데, 지금은 무려 3m 가까이 되었다.
게다가 검날이 없는 곳까지 검기가 영향을 미쳤다. 카리스의 정령검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대여섯 명의 마족이 한꺼번에 목을 잃었다.
정령검은 춤을 추는 듯했다. 마족군단과 마계군단이 온통 붉은 색이라서 마치 붉은 수수밭에서 추는 춤 같았다.
춤사위가 거칠어질수록 마족의 목은 뎅강뎅강 잘려나갔다.
목이 잘려나가니 재생할 여유도 없었다. 그렇게 마족의 수는 빠르게 줄었다. 무려 1천 명이나 된다고 하지만, 2만 명이나 되는 요정군단까지 합세하니 불과 30분도 안 돼서 마계군단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물론 요정군단의 희생도 컸다. 얼핏 봐도 20% 가량은 규모가 줄어든 것 같다. 그렇다면 4천 명의 희생.
어쩔 수 없다. 이들을 모두 희생시킨다 해도 정령신의 후보들이 요나스 성에 무사히 들어가기만 한다면 작전은 대성공일 테니까.
“다시 출발!”
“하악. 하악.”
서유림이 가뿐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2만 명에 육박하던 요정군단은 이제 5천명도 남지 않았다.
서유림도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하지만 만족스러웠다. 서유림이 요정군단을 희생시키면서 시간을 끈 덕분에 정령신의 후보들이 오두 안전하게 요나스 성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멈출 수 없다. 5천 명의 요정군단이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서유림도 이곳에서 인간계로 돌아갈 수는 없다. 안전한 요나스 성으로 피한 후에 복귀해야 다시 정령계로 돌아올 때도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생각해둔 작전이 있었다. 만약 그 작전이 성공한다면 마계군단을 완전히 박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갑시다. 모두 요나스 성으로 들어갑니다.”
기수도 지친 모양이다. 깃발을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이 많이 느렸다.
하지만 달릴 수 있다면 달려야 하고, 걸을 수 있다면 걸어야 한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
서유림이 다시 선두에 섰다.
그러자 마족군단이 이쪽으로 맹렬하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분노의 추격이었다. 정령신의 후보들을 놓쳐서 화가 잔뜩 나있을 것이다.
‘그래. 마음껏 분노해라. 마음껏 달려들어라. 어서 와서 나를 잡아봐라!’
서유림은 곧장 성문을 향해 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마물과 마귀들을 베어 넘기며 무인지경으로 달렸다.
하지만 성문에 도착하기 전에 마족군단에게 꼬리를 잡히고 말았다. 요정군단이 마족군단에 의해 학살당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성문이 열렸다.
“어서 들어가요. 어서!”
서유림이 소리쳤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오히려 마족군단을 향해 뛰었다.
“위험해요. 어서 들어와요.”
성문 위에서 후아니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정령신의 후보들도 서유림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성문 안으로 피하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서유림은 못들은 체했다.
대신 요정군단을 학살하고 있는 마족군단과 정면으로 맞섰다. 카리스의 정령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리스 정령검에서 검기가 쭉쭉 뻗어 나왔다. 성물 목걸이와 성물 벨트의 힘까지 더해져서 1m가 넘는 검기가 뱀의 혓바닥처럼 휘며 마족의 목을 베고 가슴을 뚫었다.
그러자 마족군단이 흥분하며 서유림을 향해 전력을 집중했다.
크루루-
크아아-
성물 벨트와 성물 목걸이를 알아본 것이겠지.
‘그래. 나에게 와라, 이놈들아!’
서유림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신 마족들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정령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오래 버틸 수 없어요.
정령왕 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아리안도 체력이 빠질 때도 되었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조금 더 버텨야 한다.
‘30분만! 아니 10분만 더 버텨줘.’
> 해볼게요. 하지만 장담하지 못해요.
시간이 없었다.
“빨리빨리 움직여. 무조건 뛰어!”
서유림이 요정군단을 향해 힘껏 소리쳤다.
그러면서 요정군단을 뒤쫓고 있는 마족군단 사이를 계속 파고들었다.
요정군단은 더는 마족군단에 대항하지 않았다. 뒤에서 칼이 날아와 등을 찌르건, 손톱에 목이 잘리건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뛰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5분이나 지났을까?
‘이 정도면 웬만큼 정리는 된 것 같군!’
이제 서유림 차례였다. 서유림도 요나스 성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슈앗- 턱!
“끄윽!”
어깨에서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깨를 관통하고 앞으로 삐져나온 화살촉이 보였다. 마족군단의 누군가가 쏜 화살인 모양이다.
> 더는 버틸 수 없어요. 죄송해요.
아리안도 이번 화살에 큰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서유림의 대답을 기다릴 여유도 없이 스르르 힘을 풀었다.
서유림이 어금니를 깨물고 요나스 성으로 뛰었다.
마족군단도 이를 악물고 뒤쫓았다. 정령신의 후보들을 놓쳤으니 서유림이라도 잡겠다는 듯했다. 아니, 서유림이 갖고 있는 성물들을 탐내는 거겠지.
마신의 성물도 서유림을 쫓고 있었다.
서유림이 요나스 성을 향해 전력으로 뛰었다.
둥둥둥둥-
요나스 성에서 북소리가 바삐 울렸다.
성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다. 서유림이 들어오기만 하면 언제든지 닫을 태세였다.
“흡!”
또다시 어깨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마족의 손톱에 당한 듯했다. 손톱이 송곳처럼 날카로워서 그 자체가 강력한 무기였다.
이어서 계속해서 통증이 느껴졌다. 사방으로 몰려든 마족들이 온몸을 찌르고 할퀴는 중이었다.
하지만 서유림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온몸이 만산창이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서유림의 발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리고 드디어 요나스 성문을 통과했다.
요정들이 성문을 닫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서유림이 소리쳤다.
“닫지 마! 그냥 둬!”
요정들이 깜짝 놀라서 손을 멈추었다. 슬쩍 닫히려던 성문은 마족군단의 힘에 의해 다시 활짝 열러졌다.
서유림이 뒤쪽을 흘끔 보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마신의 성물을 보관하고 있는 성물의 탑이 서유림을 계속 뒤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들어와라. 어서!’
서유림은 계속 달렸다. 마족군단보다 서너 걸음 앞서서 보조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 닫아!”
서유림의 외침과 동시에 보조성벽의 성문이 내려왔다.
마족군단이 더는 서유림을 쫓지 못했다.
서유림은 순식간에 보조성벽 위로 올라갔다.
성물의 탑이 눈에 보였다. 성문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지금이야! 보조성문 내려!”
그러자 성문 안쪽에 추가로 마련되어있던 5중의 보조성문이 일제히 내려왔다. 전부터 마계군단을 유인하여 섬멸하기 위해 만든 덫이었다.
서유림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됐다! 잡았어!’
그러는 사이 정령신의 후보들과 성주가 서유림 곁으로 황급히 다가왔다. 다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괜찮으세요? 부상이 심각하신데.”
괜찮고말고.
사실 일부러 부상을 당해준 것이다. 서유림이 궁지에 몰린 모습을 보여줘야 마족군단이 이성을 잃고 마구 뒤쫓아 올 테니까.
물론 어깨를 관통한 화살은 뜻밖의 일격이었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성공하지 않았는가?
“괜찮습니다.”
“저게 상처를 보여주세요. 치료해드리겠습니다.”
서유림이 그린루트와 교감하여 상체의 옷을 열어주었다.
후아니스가 상처 곳곳에 손을 대며 힘껏 치료해주었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었다. 그린루트의 힘까지 더해지면 하루 정도면 흔적도 남지 않고 완치될 것이다.
“이제 좀 쉬어도 되겠군요. 여러분들도 좀 쉬세요. 이틀 후에 마신의 성물을 가져오도록 하겠습니다.”
“네, 좀 쉬세요.”
서유림이 숙소로 들어갔다.
전에는 늘 아리아나와 함께 쓰던 신혼방 같은 숙소였는데, 지금은 서유림 혼자만의 숙소가 되었다.
왠지 모르게 방안이 썰렁했다. 그럴수록 아라이나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아리아나. 조금만 참고 기다려. 내가 금방 찾아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