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아리아나를 찾아주세요 (1)
서유림이 걸음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몸이 아픈 것이지 정신이 아픈 것은 아니다.
피부가 아픈 것이지 근육이 아픈 것은 아니다.
따로따로 놀면 된다. 아픈 놈은 아픈 대로 놓아두자. 대신 정신과 근육은 제 역할을 하면 되는 거다.
그러자 놀랍게도 고통이 줄어들었다.
아니, 줄어들었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다. 단지 남의 고통처럼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을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걸 초연해진다고 하나?
여전히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움직임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사실 아까부터 그랬긴 했다. 아픈 것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서 움직일 생각도 못했던 것뿐이지 아픈 것이 움직일 능력을 갉아먹은 것은 아니니까.
뚜벅. 뚜벅.
무덤덤하게 걸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걷는 것은 걷는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고통에서 좀 더 초연해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고통이 뼛속까지 침투한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겉옷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훌훌 벗어버리고 싶었다. 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물질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정신적으로 생각하자. 피부를 벗겨낼 수는 없잖아. 하지만 정신에서 피부를 분리해버리면 된다.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서유림은 고통을 외면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러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고통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고통이라기보다는 자극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았다.
그래서 고승들이 자신의 몸을 불로 태우는 소신공양을 하는 것이로구나. 육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정신을 얻기 위해서.
비로소 그런 것들이 이해가 되었다.
이런 것도 깨달음인 모양이다. 깨달음을 얻자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초연해질 수 있었다. 이보다 천만 배 더한 고통을 당한다고 해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가물가물할 정도로 멀게만 느껴졌던 오하시스가 갑자기 코앞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오하시스의 푸른 초원이었다.
서유림은 망설임 없이 푸른 초원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자 작열하던 태양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사막도 사라졌다. 대신 사방은 끝없이 펼쳐진 초원으로 변했다.
서유림의 눈썹이 꿈틀했다. 날카로운 기척이 느껴졌다.
‘뭔가 있다!’
이어서 소리도 들려왔다.
두두두-
서유림이 고개를 돌렸다.
마물들이 보였다. 처음 보는 마물들이었다. 덩치가 코끼리만한 놈들이었는데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였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시작이군.’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이곳은 발할라. 깨달음을 얻는 곳이다. 그리고 저것들은 그 깨달음을 주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그 말은 서유림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존재들이라는 뜻이었다. 처음 쿤타를 이겼을 때처럼 정신으로 이기면 육체로도 이기는 것이다.
서유림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손에 카리스의 정령검이 생겨났다. 용기와 자신감이 마구 샘솟았다.
‘다 죽여주마!’
서유림이 땅을 박차고 마물들을 향해 뛰었다.
* * *
“앗! 몸을 움직였어요!”
“저도 봤어요. 깨어나려나 봐요.”
정령신의 후보들이 서유림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서유림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었다. 발할라 의식이 끝나자마자 쓰러진 상태 그대로였다. 누구도 감히 서유림의 몸에 손 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서유림의 눈썹이 다시 한 번 움직였다.
정령신의 후보들이 더욱 긴장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서 얼른 뒤로 물러섰다.
서유림이 눈을 떴기 때문이다. 게다가 눈을 뜨자마자 눈빛에서 순간적으로 섬광 같은 것이 빛났다.
“괜찮으세요?”
서유림은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켰다. 어깨도 돌려보고 목도 돌려보며 온몸을 풀어보았다.
지독한 전투였다. 시계도 없고 해도 달도 별도 없어서 시간을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느낌상으로는 거의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싸운 것 같다.
그리고 결국 모두를 섬멸시켰다. 불꽃의 마물도, 얼음의 마물도, 바람의 마물도.
모두가 카리스의 정령검 아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나중에는 긴장감은커녕 귀찮음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제야 마물들이 사라지고 주변의 환경도 바뀐 것이다. 지금 이곳으로.
서유림이 고개를 돌려서 정령신의 후보 하나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나는 어찌 되었죠?”
“발할라 의식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역시 그랬군. 인간계로 넘어갔겠지.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죠?”
“5분 정도 지났습니다.”
겨우 5분? 사나흘은 족히 넘게 지난 것 같은데.
역시 이곳의 시간개념은 종잡을 수 없다니까. 이곳에서 닷새를 지내도 인간계는 겨우 몇 분이 지나있을 뿐이고, 인간계에서 하루를 지내고 와도 이곳의 시간 역시 거의 지나지 않아 있다.
서유림이 시선을 돌려서 다른 이들을 바라보았다.
계약자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가뜩이나 상대하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서유림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이다가 후아니스에게 멈추었다.
그러자 후아니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후아니스의 손에는 양피지 같은 것이 쥐어져 있었다. 아리아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다.
“이제 이것은 서유림님의 것입니다.”
서유림이 그것을 받았다.
차원이동마법의 서였다.
“감사합니다.”
서유림이 차원이동마법을 익혔다. 그러자 마법진을 잃은 마법의 서가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이제 누구의 도움 없이도 인간계와 정령계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인간계에 있는 육신도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육신을 가져오면 더욱 강력한 힘을 낼 수 있겠지만,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그땐 완전히 소멸되고 말 테니까. 인간계에서조차 말이다.
“일단 인간계를 다녀오겠습니다. 시간이 너무 지났어요. 여러분은 요나스 성으로 복귀할 준비를 해주세요. 다시 정령계로 들어오자마자 출발하겠습니다.”
서유림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위치는 여전히 계약자 신분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모두를 지켜줄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게 되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서유림이 차원이동마법을 펼쳤다.
* * *
서유림의 미간에 주름이 깊이 파였다.
‘왜지? 왜 느껴지지 않는 거지?’
아무리 교감하고 싶어도 아리아나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티끌만큼도.
시간이 지나면 느껴지겠지 싶어서 벌써 두 시간째 집중하고 또 집중했지만, 아리아나의 느낌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설마 인간계가 아닌 다른 세계로 간 것 아냐?
아닐 것이다. 절대로. 아리아나는 약속을 어길 여자가 아니니까.
분명 인간계로 왔다. 단지 힘을 잃은 것뿐이다.
맞아. 발할라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정령신의 후보로서 가졌던 모든 능력을 잃는다고 했잖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낯선 세계. 나약한 능력. 게다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운 외모. 무엇보다도 모든 것이 어설퍼서 마치 시골에서 갓 상경한 촌뜨기처럼 굴지 않겠는가?
그런 상태로 거리를 활보하면 어떻게 될까?
‘안 돼! 빨리 찾아야 해! 내가 지켜줘야 해!’
서유림이 얼른 김영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직은 아침 여덟 시. 조금 이른 시각이었지만, 마음이 급해서 낮 시간이 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다행히 김영자가 재깍 전화를 받아주었다.
- 어머, 유림씨. 아침부터 어쩐 일이세요?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릴 여유가 없다. 서유림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아주 급한 일입니다.”
- 뭔데요?
“당장 만나고 싶습니다. 괜찮을까요?”
- 물론이죠. 다만 황국회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세요.
그야 물론이다. 아무리 급해도 조심할 건 조심해야지.
“어디서 만나는 게 좋을까요?”
- 제가 운영하는 신사동 옷가게 아시죠?
“압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서유림에게는 오토바이가 세 대나 있었다. 승용차도 두 대였다.
오늘은 평소에 잘 타고 다니지 않는 125cc짜리 오토바이를 탔다. 헬멧도 평소의 것과는 다른 것으로 착용했다.
그리고는 곧장 신사동의 옷가게로 향했다.
옷가게 뒤쪽에 사무실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김영자에게는 아지트가 여러 곳이 있는데 그런 아지트 중 하나였다.
“오랜만이에요. 황국회는······.”
김영자가 서유림을 반겼다. 하지만 서유림은 김영자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며 자신의 말부터 꺼냈다.
“사람 좀 찾아주세요. 꼭 찾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김영자가 움찔하며 놀랐다. 서유림이 이토록 다급하게 뭔가를 부탁한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아침 일찍 전화한 것도 처음이었다.
대체 누굴 찾는 것이기에.
“사람이라면 누구······?”
“여자입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예쁜 여자죠.”
서유림이 아리아나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정령계와 관련한 이야기는 모두 뺐다. 다만 어떤 외모에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정도만 설명했다.
김영자가 난처한 표정을 했다.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게다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대충 어느 도시, 또는 어느 지역 정도로 압축시켜줘야 찾아볼 텐데 너무 막연한 정보뿐이었다. 하다못해 대한민국 안에 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고 하니.
“죄송합니다. 저도 아는 정보가 그뿐이라서. 하지만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찾아야 합니다.”
“알겠어요. 몽타주라도 간단하게 그려주면 좋겠는데. 그러면 제가 아는 경찰 라인을 통해서 부탁해볼게요.”
그러고 보니 채순실에게 부탁해도 될 것 같다. 김영자보다는 채순실이 여기저기 인맥도 넓고 입김도 셀 테니까.
황국회 회원들에게 마인드컨트롤을 걸어서 그들을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 동원해야지.
“한번 그려보겠습니다.”
먼저 아리아나의 몽타주부터 그렸다.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그림을 잘 그렸지?
하긴, 감각이 일반 사람들보다 다섯 배 정도 뛰어나지 않은가? 스킬은 조금 부족하지만 그림을 잘 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기억력이 워낙 좋아져서 아리아나의 얼굴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물론 처음에는 실수가 많았다. 턱이 과하게 뾰족하게 그려지거나, 코가 너무 높이 그려지거나, 눈이 너무 크게 그려지거나 하는 식이었다.
‘이건 똑같지 않아. 다시.’
‘이것도 눈이 달라. 다시.’
‘이번엔 입술이 이상하군. 다시.’
서유림은 아리아나 얼굴을 100장도 넘게 그렸다.
시간과 정성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몽타주가 정확해야 아리아나를 조금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늦은 밤까지 그리고 또 그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기어이 아리아나를 종이 위에 환생시킬 수 있었다. 마치 사진으로 찍은 것처럼 똑같았다.
그대로 스캔을 떠서 김영자의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꼭 부탁드립니다. 제발.]
채순실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어느새 밤 열한 시. 조금 늦은 시각이다.
하지만 채순실 역시 김영자처럼 야행성이었다. 게다가 서유림에게 푹 빠져있는 상태라서 어느 때보다도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었다.
- 어머, 유림씨! 어쩐 일이야?
김영자에게 부탁했던 방식으로 채순실에게 부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당장에 질투심을 느낄 테니까.
“혹시 느끼셨습니까?”
- 느끼다니? 뭐를?
“역시 못 느끼셨군요. 아주 강력한 우주의 기운을 품은 여자가 나타났습니다. 대모님과 궁합이 딱 맞는 여자입니다.”
- 어머! 그런 여자가 있어요?
전화상으로 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마인드컨트롤은 눈앞에서 사용해야만 효과가 있으니까.
채순실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직접 대면해야만 한다.
“만나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급합니다. 지금 당장 대모님 계신 곳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 물론이지. 내 오피스텔로 와.
“지금 가겠습니다.”
서유림이 평소에 타고 다니는 오토바이를 타고 채순실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오피스텔에서 야릇한 향기가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남자들을 불러놓고 이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모른 척했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우주의 기운을 품은 여자라고?”
“꿈을 꿨습니다. 아주 생생한 꿈이었죠. 강력한 우주의 기운을 품었는데, 대모님과 궁합이 너무도 잘 맞았습니다. 곁에 두시면 대모님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겁니다.”
마인드컨트롤을 강하게 걸어주었다. 그러자 채순실의 눈빛이 흥분으로 초롱초롱 빛났다.
“그게 누군데? 어서 데려와.”
“그건 저도 모릅니다. 이름도 주소도 나이도 모릅니다. 단지 꿈속에서 본 얼굴만 기억합니다. 그래서 그대로 그려보았습니다.”
서유림이 비로소 아리아나의 몽타주를 꺼내서 보여주었다.
채순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아리아나의 얼굴이 워낙 예뻐서였기 때문이다. 일종의 질투심이랄까?
주제도 모르고 요정한테 질투심이라니.
“시간이 흐르면 우주의 기운이 빠르게 약해질 겁니다. 그러기 전에 빨리 찾아서 대모님의 기운과 상보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대모님이 제대로 기운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알겠어. 그런데 몽타주만 가지고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꿈속에서······.”
서유림이 아리아나의 특징을 몇 가지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서유림도 더욱 많은 힌트를 주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정보가 없었다.
채순실과 헤어진 서유림이 집으로 향했다.
갑자기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너무도 막연했기 때문이다.
‘대충 어느 지역에 있는지 정도만 알아도 좋을 텐데. 아니, 그냥 대한민국 안에만 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