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176화 (176/196)

# 176

발할라의 시험

서유림은 순간 가슴에서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리아나가 인간계로 온다고? 그게 가능한 이야기였어?

아니지. 불가능한 일일 수가 없지. 아리아나를 처음 만난 게 인간계인데.

서유림의 입술이 쭉 찢어졌다. 얼른 아리아나의 손을 잡았다.

그게 바로 서유림이 바라고 바라던 바였다.

“잘 결정했어. 인간계로 오면 내가······.”

뭘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하나?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해야 하나? 공주님처럼 떠받들어주겠다고 해야 하나?

해주고 싶은 것은 많은데 다들 입속에서 빙빙 맴돌기만 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네. 아리아나의 표정이 왜 저렇게 슬프고도 어둡지?

“왜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사실······ 제가 인간계로 간다고 해서 유림씨를 만난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답답해 죽겠네. 한 번에 쭉 얘기해주면 안 돼?”

“말씀드렸잖아요. 제 차원이동마법은 아직 완성되지 못했어요. 유림씨 곁으로 차원이동 할 수가 없어요.”

아, 그 얘기였어?

그건 아무 문제없다. 정령계와 달리 인간계는 주소라는 체계가 있거든. 어디로 떨어진다고 해도 돈과 시간만 들이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지.

“내가 주소 불러줄 테니까 그곳으로······.”

서유림이 말을 멈추었다. 아리아나가 고개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말해줘도 기억할 수 없어요. 정령신의 자격을 잃는 순간 모든 기억이 지워진 채 정령계에서 추방당하거든요. 다만 제가 원하는 세계만 정할 수 있을 뿐이에요.”

제길, 뭐가 그렇게 복잡해?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가능한 한 유림씨와 가까운 곳으로 가도록 해볼게요. 하지만······ 유림씨 곁으로 갈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그런 슬픈 눈빛 하지 마. 왠지는 모르겠지만, 아리아나의 그런 눈빛을 보면 내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단 말야.

아마도 마인드컨트롤 때문이겠지. 아니면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 사이를 연결하는 강한 교감 때문이거나.

어쨌건 그런 눈빛 보면 미쳐버리겠다고.

“발할라인가 뭔가 하는 거, 당장 취소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그렇게 서두를 이유가 없잖아.”

“사실 오랫동안 고민하고 결정한 거예요. 그리고 이미 정해진 일이에요. 취소는 불가능해요.”

그럼 어쩔 수 없군.

그렇다고 하늘이 무어지는 건 아니다.

서유림이 아리아나의 손을 와락 움켜쥐었다.

“걱정하지 마. 아리아나가 날 찾아올 수 없다면 내가 아리아나를 찾아가면 되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찾을게.”

비로소 아리아나가 엷은 웃음을 되찾았다.

“유림씨는 그럴 수 있을 거예요. 저는 기억을 잃지만 유림씨는 기억이 고스란이 남아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의 교감도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을 거예요. 저는 유림씨를 믿어요.”

그래. 날 믿어. 지금까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나만 믿으면 돼. 내가 뭐든 다 해결할 테니까.

서유림이 아리아나의 손을 더욱 힘껏 잡아주었다.

정오가 조금 못 된 시각.

요나스 동쪽 2번 성문 앞에 5만 명의 정예 요정군단이 운집했다.

성문 밖에서는 와아- 하는 요정군단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마계군단의 울음소리도 들려왔고 전투 소리도 들려왔다.

그 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멀어졌다. 요정군단이 마계군단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는 소리였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망루 위에서 붉은 깃발이 움직였다. 요정군단이 마계군단을 서쪽으로 무사히 유인했다는 신호였다.

즉, 정예 요정군단의 출발신호였다.

“가요.”

아리아나의 외침과 동시에 성문이 열렸다. 정령신의 후보들과 계약자들, 그리고 5만 명의 정예 군단이 빠르게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바람과 같은 속도로 동쪽을 향해 달렸다.

몇몇 마물이나 마귀와 마주쳤지만, 군단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사흘 동안 달리면서 1만여 마리의 마귀와 마물을 사냥했지만, 요정 군단의 희생은 거의 없었다.

번성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수만의 마계군단이 성을 에워싸고 있었지만, 마족군단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마신의 성물도 없었다.

아리아나가 이끄는 정예 군단이 성을 포위한 마계군단을 무참히 짓밟았다. 굳이 정령신 후보들의 축복 마법 없이도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동쪽에서도 한 무리의 요정군단이 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어마어마한 군세의 마계군단이 보였다.

아리아나의 말대로 백척간두의 상황이었다. 요정군단은 그 수가 많아서 행렬이 2km도 넘게 이어졌는데, 걸음이 느려서 뒤쳐진 요정들은 이미 마계군단에 의해 사냥당하고 있었다.

“저들은 지쳐있을 거예요. 우리가 번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열어줘야 해요.”

아리아나의 외침에 정예군단이 요정의 무리를 향해 거칠게 달려갔다. 수만 마리의 마물과 마귀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정예군단의 발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두 무리가 조우했다.

딱 봐도 누가 정령신의 후보인지 알겠다. 드라크 종족 두 명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두 명의 요정을 호위하고 있었다.

“감사해요.”

“인사는 나중에 해요. 일단 번성으로 들어가요.”

요정군단이 도착하자 번성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역시 요나스 성의 규모가 대단하긴 하다. 일개 번성일 뿐인데 그조차도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리니스 성과 비교해도 두세 배는 큰 것 같았다.

양쪽 군단을 합하면 7만 명이 넘는 군세였는데, 그 많은 인원을 다 수용하고도 공간이 남을 정도였다.

“성문 닫아!”

다행히 늦지 않게 성문이 닫혔다. 밖에서 마계군단이 성문을 부수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 때문에 결국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곧 요나스 성 주변에 있는 마족군단이 합류할 테니까. 마신의 성물까지 동원된다면 성문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부셔질 것이다.

그 전에 서유림이 발할라로 들어가서 잠재력을 각성하고 돌아와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급해도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아리아나가 새롭게 합류한 정령신의 후보들을 다급히 만나보았다.

서유림도 흥분된 표정으로 아리아나를 뒤따랐다. 드디어 부러진 카리스의 정령검을 원상태로 복구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그런데 젠장.

아리아나가 새로운 정령신의 후보들을 만나자마자 실망스러운 표정을 했다. 딱 하나 부족했던 색깔이 이들 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망했군!

아리아나는 정령신 후보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리고는 서유림과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서유림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이러면 아리아나만 쓸데없는 희생을 하게 되는 셈이잖아.”

“그건 아니에요. 새로운 색깔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도 같은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왜?”

“시간이 갈수록 마계군단은 강해질 테니까요. 그리고 조만간에 마왕들도 정령계로 넘어올 테니까요. 마왕을 상대할 힘을 제때 갖추지 못하면 정령계의 암흑기는 아주 오래 지속되어야 할 거예요.”

뭔 말인지 모르겠다. 어쨌건 카리스의 정령검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니라는 뜻이잖아.

어쨌건 힘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리아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을 응시했다. 서유림보다 앞날이 더욱 캄캄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정해진 길을 가는 수밖에.

그것도 서둘러서.

아리아나가 벌떡 일어섰다.

“가요. 약속을 지켜야 할 시각이에요.”

서유림이 털레털레 아리아나를 뒤따랐다. 차분하게 걸어가는 아리아나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어쩌면 저 모습이 아리아나의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겠다.

‘아니! 절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지. 오히려 이게 시작이지. 아리아나와 내가 함께 하는 새로운 시작.’

서유림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각오가 새로워졌다.

‘작별인사 따위는 하지 않겠다. 우린 곧 다시 만날 테니까. 반드시.’

아리아나가 향한 곳은 번성의 중앙에 마련된 공터였다.

모든 정령신의 후보들이 모여 있었다. 아리안의 모습도 보였다.

그 주변으로 계약자들과 최정예 요정군단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 서있었다. 발할라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목숨을 걸고 주변을 지킬 것이다.

아리아나가 다가가자 후아니스가 다가와서 손을 잡아주었다. 아리아나가 오기 전까지 요나스 성에서 정령신의 후보들을 이끌던 자였다.

이제 아리아나가 떠나게 되었으니 다시 후아니스가 임시 책임자가 되겠지.

아리아나가 성물 목걸이와 성물 허리띠를 벗어서 후아니스에게 주었다.

후아니스가 마치 정령신에게 선물을 하사받듯 한쪽 무릎을 굽히고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아리아나가 성물 허리띠를 넘겨주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해요.”

“아시잖아요. 정령신의 후보는 자신이 한 약속을 어기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아리아나가 성물 허리띠까지 완전히 넘겼다. 그리고는 서유림과 함께 중앙으로 자리를 옮겨서 마주섰다.

마치 사랑의 서약이라도 하는 듯했다. 얼굴을 마주보고 두 손도 맞댔다.

아리아나의 얼굴이 정면으로 보였다.

아리아나가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그윽했다. 아무런 슬픔도 흥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허무함만 가득한 눈빛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슬퍼지려고 하지?

젠장. 하기 싫다.

“이거 지금이라도 그만둘 수는 없는 거야?”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 마요. 오직 한 가지만 생각해요. 잠재력을 각성하는 것. 제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하셔도 돼요.”

제길 또 마인드컨트롤을 당하는 모양이다. 아리아나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다.

“알겠어.”

그래. 어차피 해야 할 일이잖아.

기뻐하자. 설레고 흥분해야 할 일이잖아. 이제 인간계에서 아리아나를 만날 수 있잖아.

내가 반드시 찾아낸다. 반드시.

그러는 사이 정령신의 후보들이 주변을 빙 둘러서 진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손을 모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형의 진 안에서 빛이 뿜어지기 시작했다. 빛은 순식간에 강해져서 망막을 태워버릴 듯 타올랐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하얗게 불타 없어지는 듯했다. 백색의 섬광은 이내 잦아들었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암흑이었다. 그리고 정적이었다.

서유림이 눈을 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들리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아니, 나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눈을 떴다고 생각했을 뿐 눈도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으며 냄새도 감각도 없었다.

그저 홀로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다.

‘여긴 어디지?’

‘뭐야?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젠장, 어떻게 된 거야?’

서유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헛되이 시간만 흘렀다. 아니, 시간이 흐르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겠다. 뭐가 느껴져야 말이지.

이게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란 말인가?

그럼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이곳에서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평생 머물러있어야 하는 거야?

암담했다. 뭔가를 하긴 해야겠는데.

‘허둥대지 말자. 차분하게 생각하자. 내가 찾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지 분명 방법은 있다.’

서유림은 ‘잠재력’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분명 존재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해서 잠자고 있는 능력.

잠에서 깨어나야만 한다.

‘그래. 난 분명히 존재해. 나 스스로 잠을 자고 있는 것뿐이야.’

서유림이 몸부림치기 위해 애썼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서 몸부림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저 생각만으로도 몸부림치려고 노력했다.

‘제발 느껴져라. 아무 것이라도. 아주 작은 바늘구멍 같은 느낌이라도 좋다. 제발 뭐라도 걸려줘.’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가가 보이기 시작했다.

점이라고 해야 할까? 빛이라고 해야 할까?

너무 멀고 희미해서 도무지 단정 지을 수가 없다. 하지만 정적과 암흑만이 가득했던 곳에 뭔가가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마치 망막에 새겨진 상처 때문에 희미하게 보이는 잔상처럼.

‘저거다! 저걸 놓치면 안 돼!’

서유림이 그것을 잡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모든 생각을 지우고 점보다도 작고 잔상처럼 희미한 그것을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그 형체가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크기도 점점 커졌다.

눈도 느껴졌다. 눈의 시림도 느껴져서 자신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됐다. 감각이 살아나고 있어.’

그것은 빛이었다. 아주 멀리 있는 희미하고 작은 빛. 하지만 그딴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서유림의 눈에 보인다는 것, 그걸 볼 수 있는 눈이 느껴진다는 것이 중요했다.

서유림이 눈에 힘을 주었다. 빛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에 핏발이 서도록 노려보았다.

빛은 점점 가까워졌다. 점점 밝아졌고 커졌다.

그러면서 서유림의 감각도 더욱 또렷하게 살아났다. 눈에 이어서 피부도 느껴졌다. 서늘하면서도 축축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시야가 움직였다. 목이 느껴졌다.

눈을 아래로 돌리니 몸도 보였다. 정령계에서 입고 있던 그린루트차림 그대로였다.

손을 들어보고 발을 움직여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보았다.

그러자 땅도 느껴졌다. 몸무게도 느껴졌다. 온몸의 감각들이 하나둘 깨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다시 빛에 집중했다. 그 빛을 향해 계속해서 걸었다. 처음에는 걸음이 어색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뛸 수 있을 정도로 균형도 잡혔다.

바닥은 무척 평평했다. 거칠 것이 없었다.

점점 속도를 높였다. 빛을 향해 곧장 뛰었다. 거리가 좁혀지면서 빛은 더욱 커졌고 형태도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사각형의 빛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은 동굴이나 복도인 듯했다. 빛은 그 출구일 테고.

‘거의 다 왔어.’

한참을 더 뛰자 드디어 빛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너무 눈부셔서 그 너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유림이 손으로 눈을 가리며 빛에 적응하기 위해 애썼다.

시간이 흐르자 다시 시야가 적응되었다. 모래사막과도 같은 허허벌판이었다. 하늘에서는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뜨겁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마치 숯가마 속 같은 느낌이다. 태양 아래에 서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온몸이 지글지글 익어가는 것 같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재빨리 동굴인지 복도인지 모를 공간으로 돌아가······.

‘어! 어디로 갔어? 바로 뒤에 있었는데.’

뒤쪽에 아무것도 없다. 서유림이 나왔던 공간은 사라지고 대신 사방천지가 펄펄 끓는 사막으로 변해있다.

‘으윽! 죽을 것만 같아!’

너무 고통스러웠다. 아까는 아무 느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런 느낌이 모두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

마치 온몸이 프라이팬에 튀겨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게 더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이런 고통을 못 느낄 텐데 고통만 계속될 뿐 죽지는 않는다.

이걸 생지옥이라고 하는 건가?

‘어디로 피해야 하지? 아! 저기 뭐가 있다.’

오하시스 같았다. 아주 먼 곳에 가물가물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서유림이 움직였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한 걸음 떼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그래도 고통을 벗어나는 길은 오하시스로 가는 것뿐이었다.

‘이겨내야 해. 빨리 가야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이를 악물었다. 고통에서 초연해지려고 애썼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진 않잖아. 차라리 고통에 익숙해지자. 고통도 내 몸의 일부라고 생각하자.

문득 군대에 입대할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땐 입대하는 게 너무도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그때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해주셨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 죽겠다, 죽겠다 해도 어떻게 해서든 살아가지고, 그러다 보면 고통은 끝나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더 힘들고 덜 힘들 차이만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면 더욱 힘들어지기만 할뿐이다.

그냥 2년간 죽을 고통을 겪다가 오겠다고 생각해라. 그 고통이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여라.

오히려 이참에 세상에서 가장 힘든 고통을 찾아서 겪고 이겨내 보겠다고 도전해봐라.

그러면 제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을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러면 웬만한 것은 다 견딜만해지지.]

한번은 사탕과 아이스크림으로 용기를 주시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맛있는 사탕과 아이스크림을 찾아봐라.

그러면 제아무리 달콤하고 맛있는 사탕과 아이스크림도 네 욕심을 충족시키기는 못할 것이다.

반대로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사탕과 아이스크림을 찾아봐라.

그러면 어떤 사탕과 아이스크림도 지나치게 달고 맛있게 느껴질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네가 어떤 기준으로 바라보고 평가하느냐에 따라서 행복해질 수도, 불행해질 수도 있는 거란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미치도록 고통스럽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다. 이렇게 견디며 움직이고 있잖아.

그래. ‘겨우 이 정도’다.

이게 내가 버틸 수 있는 한계는 아니다. 더한 것도 견딜 수 있다.

이참에 내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시험해보자. 이런 고통 속에서 내가 얼마나 담담해질 수 있는지 견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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