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175화 (175/196)

# 175

아리아나의 결심 (3)

서유림이 소리쳤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마신의 성물이 있는 한 백 놈이건 한 놈이건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힘을 일순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족군단이 기다렸다는 듯 계약자들을 공격했다.

계약자들은 서유림처럼 움직임이 빠르지 못했다. 게다가 정령왕 아리안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크윽!”

“아악!”

듣기 싫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세 명의 계약자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들을 따라 마족군단 사이를 파고들려던 다른 계약자들이 놀라서 멈칫했다. 더는 욕심을 부리는 계약자는 없었다. 대신 마족군단을 하나씩 제거하는 데만 몰두했다.

마족군단과의 전투는 거의 다섯 시간 만에 끝이 났다. 더는 마신의 성물을 지키는 마족군단이 남아있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고도 마찬가지였다. 세 명이나 되는 계약자의 사망이 큰 충격을 주었는지 누구도 성물에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정령신의 후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모두 기력을 잃고 쓰러진 상태였다.

이번에도 서유림이 나섰다. 리니스 성에서 그랬던 것처럼 성물이 놓인 돌판을 통째로 들어서 널찍한 공터로 옮겨놓았다. 성주 역시 200m의 반경을 두고 사방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제야 요나스 성에서 요정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만세!”

“어떻게 됐어요?”

아리아나가 눈을 뜨자마자 물었다.

“마신의 성물을 공터에 옮겨놓았어. 좀 더 쉬어.”

“희생자는요?”

“요정들이 2천 명가량 희생됐어. 계약자도 세 명이나 죽고.”

“생각보다 희생이 더 컸군요.”

“그렇게 됐어. 좀 더 쉬어.”

“네.”

아리아나는 하루가 더 지나서야 생기를 되찾았다. 마족군단과의 전투를 마치고 사흘만이었다.

다른 정령신의 후보들보다 회복속도가 조금 느렸다. 아무래도 나이가 가장 어린 후보이다 보니 완전하게 성장하지 못한 거겠지.

“갈까? 다들 성주님의 집무실에 모여 있어.”

“네, 가요.”

서유림이 아리아나와 함께 집무실로 향했다.

정령신의 후보들과 계약자들 그리고 성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계약자를 잃고 혼자가 된 정령신의 후보들이 많았다. 그들의 옆자리가 무척이나 허전하게 느껴졌다. 표정도 쓸쓸한 것 같고.

하지만 지금은 슬픔 따위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었다.

성주가 중앙에 놓여있던 보자기를 걷어냈다. 그러자 황금색으로 빛나는 성물 허리띠가 보였다.

다른 정령신의 후보가 정화시켜놓은 상태였다.

“그럼 제가 성물의 주인을 정하겠습니다. 먼저 공정한 기준에 의한 평가로 정하였음을 정령신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정령신의 후보들 모두 표정이 굳어있었다. 성물의 허리띠는 이미 주인이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서유림의 활약이 독보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압도적일 정도로. 그래서 몇몇 계약자가 전세를 역전시키려고 무리하다가 죽은 것이고.

그러니 다른 정령신의 후보들이 표정이 밝을 수가 없겠지.

성주가 성물 목걸이를 들었다. 그리고는 예상대로 곧장 아리아나를 향해 움직였다.

허리를 깊이 숙이며 아리아나에게 성물 허리띠를 내밀었다.

아리아나도 조용히 일어섰다. 성주만큼이나 허리를 깊이 숙이며 공손하게 성물 허리띠를 받았다. 그리고는 스스로 성물 허리띠를 자신의 허리에 둘렀다.

그 모습을 보니 왠지 뿌듯했다. 마치 정령신으로 임명되는 대관식을 보는 느낌도 들었다. 조만간 그런 날도 반드시 오겠지.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어.’

아리아나는 요나스 성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서유림이 계약자 중 최강자가 되어준 덕분에 원래의 입지고 가장 강하긴 했지만, 두 개의 성물을 차지한 주인공이 되면서 그 입지가 압도적일 정도로 강했다.

적어도 요나스 성에서만큼은 아리아나가 이미 정령신의 위치에 오른 듯했다. 모든 요정과 정령신의 후보, 성주가 아리아나를 마치 정령신처럼 떠받들어주었다.

하지만 아리아나 본인은 무덤덤했다. 전과 달라진 점이 전혀 없었다. 모든 일을 정령신의 후보들과 모여서 상의했고, 그 어떤 명령도 일방적으로 하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직도 성 밖에 득실거리고 있는 마계군단의 섬멸에만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마치 기쁨을 못 느끼는 존재 같았다.

서유림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전과 달라진 점이 전혀 없었다. 낮에는 전투에 임하고 밤이 되면 함께 요정망토를 덮고 끌어안은 채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서유림이 일어나자마자 아리아나가 보채듯 이야기했다.

“망루로 가요. 뭔가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러지. 어느 쪽 망루로 갈까?”

“동쪽 망루요.”

함께 동쪽 성문의 망루를 올랐다.

아리아나와 서유림은 사실 거의 매일 이쪽저쪽의 망루를 번갈아가며 올랐다. 때문에 아침에 망루에 오르는 것은 일상적인 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모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망루로 오르는 아리아나의 움직임에 서두름이 느껴졌다.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무덤덤한 것 같지만 사실은 어딘가 모르게 흥분한 상태였다. 눈빛의 생기와 평소보다 조금 빨라진 호흡이 그것을 증명했다.

“무슨 일 있어?”

“모르겠어요. 바람의 정령을 느껴봐야만 알 것 같아요.”

망루로 오른 아리아나는 명상을 하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받았다.

서유림이 경호원처럼 아리아나의 곁을 지켜주었다.

물론 말이 경호원이지 사실은 구경꾼이다. 사방을 경계하는 게 아니라 내내 아리아나의 모습만 감상했으니까.

검게 출렁이는 아리아나의 머릿결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리아나가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그리고는 뭔가에 놀란 듯 고개를 돌려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서유림이 움찔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아리아나가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정령신의 후보들이 다가오고 있어요. 둘이나 돼요.”

바람의 정령을 통해서 그 소식을 들었던 모양이군. 그런데 그게 그토록 흥분할 일인가? 이곳에서 정령신의 후보는 많은데.

게다가 다른 정령신의 후보들이 온다면 오히려 경계해야 할 일 아닌가? 아리아나의 경쟁자잖아.

서유림이 아리아나의 뜻을 모르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그렇게······ 좋은 일이야?”

“딱 한 색깔이 부족했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앞뒤 다 자르지 말고 다 이야기를 해줘야지.

“한 색깔?”

“부러진 카리스의 정령검을 원상태로 회복시켜주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일곱 색깔을 가진 정령신의 후보가 도와줘야 해요. 그런데 딱 한 색깔이 부족했어요. 어쩌면······.”

서유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제야 아리아나가 뭘 기대하고 무엇 때문에 흥분했는지를 이해할 것 같았다.

“카리스의 정령검을 더 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거야?”

“어쩌면요. 그런데······ 엄청난 규모의 마계군단이 뒤따르고 있어요.”

역시 그렇군.

하긴, 정령신의 후보가 무방비상태의 벌판을 달려서 요나스 성으로 오고 있는데 그 좋은 기회를 마계군단이 놓칠 리가 없겠지.

“그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우리가 마중 나가서라도 구해줘야지.”

“그래야죠. 어서 회의를 소집해야겠어요.”

아리아나의 소집명령에 모두가 순식간에 모였다.

“정령신의 후보 두 명이 요나스 성을 향해 오고 있어요. 앞으로 늦어도 이레 빠르면 엿새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역시 그랬군요.”

“그래서 아침부터 가슴이 뛰었었군.”

정령신의 후보들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정령신의 후보들 사이에는 뭔가 강한 연결고리가 있는 게 분명했다.

게다가 다들 아리아나 만큼이나 설레는 표정을 했다.

“이런 식으로 정령신의 후보들이 무사히 요나스 성에 모일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힘만으로 정령신을 옹립할 수 있어요.”

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했다.

“맞아요. 하지만 요나스 성에 무사히 도착한다는 전제가 필요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규모 마계군단이 정령신의 후보들을 뒤쫓고 있어요. 상황이 무척 다급한 것 같아요.”

“저런.”

“그럼 어쩌죠?”

다들 안타까운 표정을 했다.

아리아나가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망루에서 서유림과 나누었던 이야기 그대로였다.

“우리가 마중 나가도록 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려서 요나스 성으로 데려와야 해요.”

“하지만 밖에는 마족군단이 버티고 있습니다. 아무리 수가 적다고 해도 마신의 성물을 함께 가지고 있어요.”

“그래요. 너무 위험해요. 자칫 마족군단에 의해 길이라도 끊긴다면 둘을 살리겠다고 더 많은 희생을 치르는 꼴이 될 수도 있어요.”

정령신의 후보들이 다들 반대했다. 그것도 격렬하게. 아리아나의 의견이 이토록 심한 반대에 부딪친 적도 처음인 듯했다.

덕분에 회의장은 잠시 시끄러워졌다.

아리아나는 소란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정령신의 후보들도 이내 소란을 그치고 침묵과 함께 아리아나에게 시선을 모아주었다.

그제야 아리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동쪽으로 닷새 거리에 번성이 있어요. 그곳에서 정령신의 후보들과 합류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계획은요?”

“번성에 갇혀서 마계군단의 공격을 받으면 요나스 성으로 복귀하지도 못한 채 모두가 몰살당하고 말 겁니다.”

말 좀 끝까지 듣자. 아리아나가 아직 할 이야기가 더 남았다잖아.

아리아나의 말은 다시 끊겨야 했고, 회의장의 소란이 가라앉은 후에야 다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말은 서유림과 관련된 일이었다. 하지만 서유림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정령신의 후보 열다섯 명이 모이면 발할라로 향하는 문을 열 수 있어요. 번성에서 제 계약자를 발할라로 인도하겠어요. 그러면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겠죠.”

“예에? 발할라······ 라고요?”

“아리아나님께서?”

“그건······.”

회의장이 다시 어수선해졌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아까는 다들 아리아나의 의견에 반대의 뜻을 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다는 하지 않지만 대신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당혹스러운 정도가 아니었다. 다들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했다.

발할라가 어딘데 저러는 거지?

나를 발할라로 인도한다는 게 무슨 뜻인데?

하지만 지금은 서유림이 끼어들 게재가 아니었다. 아리아나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궁금증은 회의가 끝난 후에 풀어도 될 것이다.

아리아나가 답을 재촉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번성에서 합류하려면 오늘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자 정령신의 후보 하나가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열다섯 명이 되죠? 우리 열두 명에 새롭게 합류하는 후보 두 명을 더해도 열네 명밖에 안 되는데.”

저런 바보. 눈에 안 보인다고 없는 건 아니잖아.

아리아나가 간단하게 답을 주었다.

“아리안!”

그러자 아리안이 안개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순식간에 요정과 똑같은 모습으로 회의장에 나타났다.

그제야 정령신의 후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이 비록 요정이 아닌 정령왕이긴 하지만, 정령신의 후보임에는 분명하니까.

“이견 있으신가요?”

아리아나가 다시 물었다.

“정말 아리아나님의 계약자를 발할라로 인도하시겠어요. 그러면 아리아나님은 영영······.”

“네. 제 입으로 이야기했잖아요. 불필요한 질문으로 낭비할 시간 없어요.”

아리아나가 칼처럼 질문을 잘랐다.

그런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 걸. 마치 아리아나가 나에게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듯하다. 발할라와 관련한 걸 이야기하려고 하자 다급히 입을 막는 느낌이잖아.

지금 물어봐야 하나?

그러는 사이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다들 이견 없이 찬성이었다.

“아리아나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를 재촉했다.

“정오가 지나기 전에 출발하겠습니다. 성주님은 정예의 요정군단을 조직하여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회의는 끝나고 아리아나와 함께 회의장을 나섰다.

서유림이 아리아나 곁에 바짝 붙었다.

“얘기해줘. 나에게 숨기는 게 있지? 나를 발할라로 인도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간단해요. 유림씨는 2차성장판을 연 계약자에요. 그러면 발할라의 문을 통과할 자격이 있죠. 그곳에 들어가면 유림씨의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 거예요.”

한마디로 강제 각성이라는 뜻이군.

알겠어. 그건 이해하겠다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아까 정령신의 후보가 말하려고 했던 것, 아리아나가 다급히 입을 막았던 그게 난 궁금하다고.

“그러면 아리아나는 어떻게 되는데?”

그러자 아리아나가 갑자기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저 눈빛은 뭘 의미하는 거지?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슬픈 것 같기도 하고 두려운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빛이다.

저건 마치······ 요정이 아닌 사람의 눈빛 같다. 그것도 감성이 풍부한 여자의 눈빛.

아리아나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답을 주었다.

“정령신의 후보 자격을 잃게 돼요.”

이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그런 결정을 한 건데?

정령신이 되는 것이 아리아나의 유일한 목표 아니었나? 그게 아리아나가 살아있는 이유 아니었어?

그런데 그걸 포기한다고?

“그리고 정령계에서 추방당하게 돼요.”

이런 망할. 그런 결정을 왜 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 하는데?

“미쳤어?”

“아뇨. 제가 그랬잖아요. 제가 원하는 것은 다른 데 있다고. 전 정령신의 후보가 되는 걸 포기하는 대신 그걸 얻을 거예요.”

“대체 그게 뭔데?”

“유림씨를 따라서······ 인간계로 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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