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3
아리아나의 결심 (1)
“오셨군요.”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은 어때?”
“순조로워요. 모든 계약자들이 정령계에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해서 전투에 임하고 있어요. 지금은 동쪽 1번 성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어요.”
“나가볼까?”
아리아나와 함께 동쪽 1번 성문으로 향했다.
정령신의 후보가 많으니 확실히 순조로웠다. 돌아가면서 축복마법을 사용해주니 전투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방식은 리니스 성에서와 같았다.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가 약 5천 명의 요정군단을 이끌고 나가서 싸우다가 쫓겨 들어오는 척 마계군단을 유인한다. 마계군단이 보조성벽 안에 갇히면 주변에 있던 요정군단이 섬멸한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문에서 대기하던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가 다른 요정군단을 이끌고 같은 방식으로 싸운다.
동쪽 1번 성문에서도 유인작전이 한창이었다.
서유림이 가르쳐준 깃발 신호와 북소리, 징소리 등으로 요정군단의 행동을 통제하니 움직임이 일사불란했다.
다시 한 번 적은 희생으로 2만 이상의 마계군단을 물리쳤다.
요정군단이 승리의 함성을 터뜨렸다.
“와아!”
이런 식의 전투가 벌써 한 달이 넘게 계속되고 있었다.
마계군단의 규모가 정말 대단하긴 했다. 매일같이 10만 이상의 머릿수를 제거하는데도 아직도 50만이 넘는 마계군단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물론 처음과 비교하면 우스운 숫자였다. 처음에는 무려 300만이 훨씬 넘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방심할 수 없었다. 남은 50만의 마계군단은 정예 중에서도 정예였다. 그중 5만 이상이 순수 마족이었다.
게다가 마신의 성물도 각각 북쪽과 남쪽에 하나씩 두 개나 있었다.
“우리 차례에요.”
또 몸 풀 때가 되었군.
이번에는 서쪽 2번 성문이었다.
그런데 다른 때와 달리 조금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서쪽 2번 성문 가까운 곳에 마신의 성물을 들고 있는 마족군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신의 성물이 얼마나 엄청난지는 이미 경험했다. 괜히 객기 부리다가는 뼈도 못 추릴 것이다.
“공격!”
기수들이 깃발로 서유림의 명령을 전달했다.
“마법!”
“방패!”
서유림은 직접 전투에 임하며 상황에 따라 적절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면서도 한층 업그레이드된 능력과 검술을 바탕으로 주변의 마물을 학살했다.
서유림의 무용은 이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또다시 잠재력을 몇 꺼풀 벗겨낸 듯했다.
그런데 그때 성문에서 둥. 둥. 둥. 하는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서유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마족의 군단이 마신의 성물을 들고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신의 성물이 벌써 움직이다니.
이곳에서 놈들과 맞닥뜨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위기는 곧 기회인 법. 놈들을 보조성벽 안에 가둘 수만 있다면 이 전투를 좀 더 빨리 끝낼 수 있겠지.
서유림은 서두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북소리는 점점 다급해졌다. 마신의 성물과 요정군단의 거리에 따라서 북소리 간격도 좁혀졌다.
대충 200m쯤 앞에 있군. 150m. 130m.
서유림은 마신의 성물이 100m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기다렸다. 더 기다렸다가는 마신의 성물 영향권 안에 들어서 상상도 못할 정도로 강력한 마물을 상대해야 할 것이다.
서유림이 북소리에 집중했다.
둥둥둥.
북소리가 더욱 다급해졌다. 기다리던 때였다.
“축복!”
“후퇴!”
기수대가 깃발로 서유림의 명령을 전달했다.
아리아나가 축복 마법을 걸어주었다. 아직은 힘을 아껴도 될 때였기 때문에 강도는 세지 않았다.
요정 군단이 일사불란하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서유림이 가장 후미에서 마계군단을 상대했다.
둥둥둥둥.
북소리의 간격이 더욱 짧아졌다. 마족군단이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는 듯했다.
굳이 북소리가 아니어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마물의 공격력과 방어력이 갑자기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축복 강화!”
“전속력으로 후퇴!”
깃발의 움직임이 커졌다.
요정군단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거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날 정도였다.
서유림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왕이면 한 명이라도 더 요정군단을 보호해야 맞지만, 그렇다고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
아니 목숨을 건다고 요정을 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마신의 성물로 강화된 마족은 서유림도 상대하기 힘드니까.
그런데 그런 마족이 주변에 천지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각자 목숨은 각자가 챙겨야 한다. 서유림은 오직 아리아나 하나만 챙기면 됐다.
“전속력으로 달려! 아리안! 어디 있어?”
“여기요.”
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정 군단의 빠른 후퇴를 돕기 위해서 무리 중앙 즈음에서 길을 열고 있었다. 덕분에 요정의 희생이 최소화되고 있었다.
아리아나도 빠르게 잘 달아나고 있었다.
성문까지의 거리는 약 300m. 이 정도면 안정적으로 후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
‘제발 마신의 성물이 성문 안쪽으로 들어와 주길.’
둥둥. 울리는 북소리를 보니 마신의 성물은 계속해서 뒤를 쫓고 있었다. 아리아나와 서유림이 성문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뒤에도 말이다.
서유림은 일부러 마계군단을 뒤에 붙이고 들어왔다. 그래야 성문을 닫고 싶어도 닫을 수 없는 상황처럼 꾸며지니까.
쿠오오-
마계군단은 성문 안으로 밀물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요정군단은 활짝 열린 내성의 성문 안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리고 내성의 성문은 순식간에 닫혀버렸다.
서유림이 내성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성벽으로 올라왔다.
들어와. 제발 들어와. 그렇지!
마족군단이 마신의 성물을 들고 드디어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서유림이 기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성문을 지키던 자들이 그걸 신호로 재빨리 보조성문을 내렸다.
두툼한 보조성문이 내려지자 마족군단과 마신의 성물은 순식간에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다.
“일제히 공격하라.”
화살과 창이 비처럼 날아갔다.
화르륵-
꾸궁-
쩌저적-
화염마법, 번개마법, 땅 마법이 쉴 새 없이 뿜어졌다. 요나스 성에 거주하는 요정이 워낙 많다 보니 거의 마법은 무한정으로 펼칠 수 있었다.
서너 시간도 못 돼서 성벽에 갇힌 마계군단이 거의 몰살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신의 성물을 지키는 200여 명의 마족군단 뿐이었다.
하지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마신의 성물이 보호하고 있어서 웬만해서는 상대하기 힘들다. 힘을 충분히 회복한 후에 여러 명의 정령신 후보와 계약자들이 한꺼번에 공격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 하나가 요정군단을 이끌고 보조성벽 안쪽으로 돌격한 것이다.
마신의 성물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이었다.
“안 돼! 물러서! 위험해!”
서유림이 직접 북을 두드리며 만류했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말을 들을 거였다면 저런 무모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겠지.
쯧쯧, 마신의 성물에 눈이 멀어서······.
도와야 할까? 계약자 둘이 나서면 가능할까?
하지만 아리아나의 상태가 나빴다. 이미 마력을 모두 소진하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마신의 성물보다는 아리아나의 보호가 우선이었다.
그런데 또다른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근처에 있던 또 다른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가 보조성문을 열고 전투에 합류했다.
이왕이면 한두 명 더 투입되면 좋으련만.
하지만 근처에는 다른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가 없었다. 다들 전투를 마치고 마력을 회복중이거나 다른 성문 앞에서 돌격을 준비하는 상태였다.
서유림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왕 나갔으니 제발 성공해!’
하지만 상황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최선을 다해서 싸웠지만, 마족군단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마신의 성물이 지난번 것보다 더욱 강한가?
아니면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들의 실력이 아리아나와 서유림 조합보다 나약한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건 싸움은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저대로 싸움이 계속된다면 요정군단은 물론이고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들마저도 모두 죽게 될 것이다.
“안 돼! 돌아와!”
둥둥둥.
서유림이 다시 북을 빠르게 울렸다.
이번만큼은 북소리를 무시하지 못했다. 요정군단이 정령신의 후보를 호위하며 빠르게 후퇴했다.
하지만 계약자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정령신의 후보를 지키기 위해서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결국 마족군단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두 명의 계약자 모두 같은 신세였다. 심하게 몸부림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마신의 성물로 강화된 마족군단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으윽! 제길!’
서유림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마물이나 마귀, 마족이 죽는 꼴은 그리 흉측하지 않았는데, 계약자들의 사지가 찢겨져 죽는 모습은 두 눈 뜨고 보기 거북할 정도로 흉측했다.
‘젠장. 계약자를 둘이나 잃었군!’
계약자는 일반 요정군단과는 차원이 다른 자들이었다. 다들 일당백의 용사들로서 요정군단의 꼭짓점 역할을 해야 할 중요한 인물들이었다.
때문에 계약자의 죽음은 엄청난 전력손실이었다.
이틀 후.
아리아나가 눈을 떴다.
아직도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바닥까지 소모되었던 마력을 충분히 회복하려면 이틀은 더 쉬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됐어요?”
뭘 묻는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서유림이 짐짓 모른 체했다.
“뭐가?”
“마신의 성물이요.”
“아직 그대로 있어. 알잖아. 마신의 성물로 강화된 마족군단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다행이다. 아리아나가 더는 묻지 않았다.
물론 조만간 상황을 알게 되겠지만, 굳이 서둘러서 알려줄 필요는 없잖아. 그런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 마음 편히 푹 쉬는 게 마력 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시중을 드는 요정이 들어오더니 쓸데없이 입을 놀렸다.
“깨어나셨군요, 아리아나님! 아리아나님만 계셨어도······?”
서유림이 다급히 눈짓을 주었다.
요정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을 멈추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아리아나는 이미 대충의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누군가가 마신의 성물을 욕심냈었군요. 얘기해줘요. 숨기지 말고.”
서유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아리아나가 안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것도 아닌데 뭐.
“적지 않은 요정군단이 희생되었어. 계약자도 두 명이나 죽고.”
“······아!”
방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서유림도 아리아나도, 시중들러 들어온 요정도 할말이 없었다.
무거운 공기만이 가득했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쓸데없이 일찍 알려줄 필요가 없었는데.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그런데 왜 다들 그렇게 마신의 성물을 탐내는 거지? 아무리 가치 있는 물건이라고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는 아니잖아.”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조만간 이곳에서 정령신이 옹립될 테니까요. 성물을 가지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정령신의 얼굴이 바뀔 가능성이 커요.”
그런 거였어?
하긴, 성물이 있으면 그만큼 능력이 월등하게 강해지긴 하니까.
가만있어봐. 그러면 현재로서는 아리아나가 가장 유력한 후보잖아. 만약 성물 한두 개만 더 가질 수 있다면······.
“그럼 아리아나가 성물을 가지면 무조건 정령신이 되겠네.”
“아니요.”
아니라고? 뭐야? 말이 앞뒤가 안 맞잖아.
서유림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신 시중드는 요정을 밖으로 나가게 했다.
“일 다 보셨나요?”
“네. 편히 쉬세요.”
요정이 눈치껏 밖으로 나갔다.
아리아나는 그러고도 안심이 안 되는지 정령을 소환해서 주변을 지키도록 했다. 그 누구도 듣지 못하도록.
그제야 비로소 속마음을 이야기했다.
“저는 정령신이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럴 능력과 자격을 갖춘다고 해도 마찬가지에요.”
“······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아리아나가 지금껏 죽을 고생을 하며 여기까지 온 이유가 무엇인데.
단 하나의 목적 아니었던가? 정령신이 되기 위해서.
그런데 아리아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누가 정령신이 되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누가 되건 정령계를 빠르게 안정시키기만 하면 돼요. 하지만 저는 정령신이 되기를 원하지 않아요. 제가 원하는 것은 따로 있거든요.”
“그게 뭔데?”
“그건······.”
아리아나가 뭔가를 이야기하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입가를 맴돌았지만 애써 삼키는 느낌이었다.
“지금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유림씨도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어쨌건 지금 중요한 건 암흑기를 최대한 빨리 끝내고 정령계를 안정시키는 일이에요. 우리 그것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