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9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 (1)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계약자들이 벌떡벌떡 일어섰다.
이놈들 투지 좋네. 서로 도전하겠다고 난리다.
서유림이 손가락을 뻗었다.
“네가 가장 먼저 일어섰다.”
쿤타와 같은 드라크족이었다. 쿤타 못지않은 강인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그다지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왠지 쿤타의 얼굴이 자꾸 겹쳐보여서 나약하게만 느껴진다.
서유림이 손가락을 까딱까딱해보였다.
“덤벼봐.”
“크아압!”
기합 넣는 소리도 똑같군.
게다가 움직임의 패턴도 똑같다. 발은 거의 사용하지 않고 주먹만을 사용한다. 마치 복싱의 규칙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쯧쯧. 이래서는 백 번을 도전해도 소용없다.
그래도 조심할 필요는 있겠지.
서유림은 먼저 놈의 힘을 가늠해보았다. 날아오는 주먹을 맨손으로 막아보았다.
터억!
“헙!”
놈이 깜짝 놀라서 헛숨을 삼키는 소리였다.
반면 서유림의 입꼬리는 씰룩 말려 올라갔다.
“2차성장판 근처에도 못 온 놈이로군. 차라리 쿤타가 더 나아.”
서유림이 훈계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번개 같은 속도로 놈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놈이 재빨리 피하려 했지만, 힘에서도 스피드에서도 서유림이 압도적이었다.
“끄윽!”
놈은 순식간에 새우처럼 등이 굽었고, 서유림이 툭 밀자 무너지듯 옆으로 쓰러졌다.
“하루에 한 놈씩만 상대할까 했는데 시시하군. 기분이다. 오늘 한 놈 더 상대해주마. 자신 있는 놈은 나서라.”
이번에는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최강의 전투종족이라는 드라크족인데 저렇게 간단하게 제압하다니.
한참을 망설인 끝에 다른 놈이 나섰다.
이번에도 드라크족이었다.
역시 호전적인 종족이라니까.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덩치는 서유림의 두 배도 넘었지만, 힘도 스피드도 모두 서유림의 아래였다.
게다가 기술적인 면에서도 서유림이 월등했다. 겨우 30초를 버티지 못하고 앞의 놈처럼 새우가 되어서 바닥을 뒹굴었다.
“겨우 그런 실력으로 정령신의 후보를 어떻게 보호하겠다는 거야? 좀 더 강한 놈은 없어?”
서유림이 매서운 눈빛으로 계약자들을 둘러보았다.
계약자들은 어느새 꼬리 만 강아지 신세가 되었다. 서유림을 도발하던 눈빛은 어디 갔는지 다들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고생하셨어요.”
아리아나의 칭찬에 서유림이 입술을 쭉 찢었다.
“고생은 무슨. 상대가 되는 놈들이어야 고생을 하지.”
과장이 아니었다. 서유림 본인도 깜짝 놀랄 정도로 놈들과의 실력 차가 엄청났다.
역시 2차성장판을 돌파한 덕분이겠지.
“그나저나 이제 대충 완성되었군!”
“그렇군요. 다들 함께 노력해준 덕분에 작업이 빨리 끝났어요.”
서유림이 아리아나와 함께 완성된 내성의 성벽을 살펴보았다.
규모도 견고함도 완벽했다. 이 정도면 마계군단을 유인해서 섬멸해볼 만했다.
“이제 슬슬 마물 사냥을 시작할 때가 되었군. 인간계를 다녀오자마자 시작해보자고.”
* * *
서유림이 김영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영자는 서유림의 전화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기쁘게 받아주었다.
- 어머, 유림씨. 어쩐 일이에요?
“만나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세요?”
- 유림씨가 만나자면 없는 시간이라도 내야죠. 그런데 무슨 일이세요?
“만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사님께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어머, 이거 기대 돼요. 저는 지금 당장이라도 좋아요.
“그럼 지금 여사님 오피스텔로 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서유림은 채희라에게도 연락을 넣고 곧장 김영자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채희라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하게 차 한 잔을 마시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김영자가 평소와 달리 무척 조급한 모습을 보였다.
“이제 얘기해줘요. 무슨 일인지.”
서유림이 활짝 웃었다.
“여사님께서 제게 그러셨죠. 우리 서로 힘을 합쳐보자고. 그에 대한 대답, 지금 드려도 되겠습니까?”
김영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입술도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서유림이 마저 이야기를 마쳤다.
“한번 해보죠. 우리 힘을 모아서 큰일을 해보죠.”
김영자가 얼른 다가와서 서유림의 손을 와락 잡았다.
“고마워요, 우림씨. 정말 고마워요.”
채희라도 기쁜 마음에 입술이 귀에 걸렸다.
“그런데 갑자기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이유? 간단하다. 지금부터 할 일이 참 많다. 고영대도 그렇고 채순실도 그렇고, 또한 그 너머의 황국회까지도.
하지만 서유림 혼자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 일을 감당하자면 어마어마한 자금을 굴릴 능력이 필요하다.
김영자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영자를 끌어들이는 것뿐이다. 김영자도 그 일이 인생의 목표라고 했고.
“고영대와 채순실을 시작으로 황국회를 무너뜨릴까 합니다. 여사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김영자의 눈이 더욱 커졌다.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렇게 고마워할 건 없다.
왜냐고?
사실 서유림은 김영자를 완전히 믿지 못한다. 물론 믿긴 하지만 51% 정도에 불과하다.
게다가 사람은 누구나 간사하다.
견물생심. 큰 이익 앞에서는 마음이 변하기 쉽다. 그리고 서유림은 지금부터 고영대와 채순실의 재산을 빼돌릴 것이다.
아마도 수백억 원대에서 수천억 원대에 이를 수도 있다.
제아무리 김영자라고 해도 그런 어마어마한 돈 앞에서는 마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무슨 조치냐고?
“우리 그런 차원에서 힘차게 파이팅 한번 외치고 시작할까요?”
서유림의 제안에 김영자와 채희라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서유림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채희라과 김영자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서유림이 다시 김영자의 손 위에 손을 겹쳤다. 그러면서 정령 하나를 몰래 침투시켰다.
이제는 안심해도 좋다. 김영자는 믿을 수 없지만 정령은 믿을 수 있으니까. 이제부터 김영자가 다른 마음을 품거나 변심을 하게 된다면 서유림이 즉각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김영자의 인생은 불행으로 가득해지겠지.
“하나 둘 셋! 파이팅!”
“파이팅!”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파이팅이었다.
그럼 이제 고영대를 만나러 가볼까?
“동생!”
고영대가 손을 번쩍 들며 반색했다.
서유림도 얼른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다.
“형님! 아휴, 왜 나와 계세요? 날도 추운데.”
“우리 유림 동생이 온다는데 나와 봐야지. 들어갈까?”
“그럴까요? 하하.”
고영대는 서유림에게 완전히 넘어온 상태였다.
가족이 없어서 더 그런 듯했다.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시고, 아내가 있긴 하지만 벌써 수 년 전부터 별거중이라고 했다.
슬하에 자식도 없고.
그러니 마음 둘 곳 없이 떠돌기만 했고, 그런 상태에서 서유림이 나타나니 완전히 마음을 준 것이다.
물론 마인드컨트롤의 힘이 절대적인 작용을 했지만.
고영대의 오피스텔로 들어갔다.
서유림이 쇼핑백 가방 주둥이를 열었다.
“뭘 가져온 거야?”
“형님 드리려고 연태고량주 좀 사왔죠.”
서유림이 연태고량주를 꺼냈다. 값은 비싸지 않았지만, 고영대가 워낙 좋아하는 술이었다.
“오! 그렇지 않아도 술이 당기던 참이었는데. 역시 동생하고는 마음이 통한다니까. 가만, 그럼 안주 좀 시켜볼까?”
고영대가 중국집에 고급요리 몇 가지를 시켰다.
그렇게 술판을 벌이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영대는 주량이 엄청났다. 병이 큰 고량주인데 그것 세 병을 다 비울 때까지도 정신이 말짱했다.
물론 그중 절반은 서유림이 마시긴 했지만.
그래도 한계는 있었다. 집에 비치해놓았던 발렌타인 같은 양주를 두 병 더 마시고 나자 혀가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그르니까 말아쥐. 내가 말이쥐······.”
“역시 대단하쉽니다, 행님!”
서유림도 똑같이 취한 척해주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고영대 만큼만. 함께 취해줘야 상대방 기분이 더욱 좋아지니까.
그러면서 고영대의 아픈 곳도 살살 만져주었다.
“행님은 참 좋겠슴돠. 대모님 같은 분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계쉬잖아요.”
“휴우~.”
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고영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함이 가득 묻어있는 한숨이었다.
역시 그렇군.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대모님이란 채순실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채순실에게는 여러 명의 남자가 있다. 그냥 남자가 아니라 정(精)을 통하는 남자 말이다.
그중 한 명이 고영대다.
고영대는 이제 대성하여 잘나가는 정치인이 되었고, 조만간 대권에까지 도전할 사람인데 아직도 채순실의 기둥서방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고영대 같은 사람이 채순실을 좋아할 리가 없다.
채순실이 겉보기에는 피부가 탱글탱글하긴 하지만, 그건 모두 현대의학의 힘이다. 실제 나이는 60살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외모가 빼어난가? 채순실의 외모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립스틱과 마스카라를 짙게 바른 돼지’였다.
게다가 최근에 채순실로부터 면박도 많이 받았을 것이다. 내가 우주의 기운 어쩌고 하면서 체력을 쪽 빨아주었거든. 비아그라를 먹어도 그걸 못 세울 정도로.
채순실이 그걸 좋아할 리가 없잖아?
고영대의 입에서 한숨이 안 나온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
하지만 서유림은 모른 척했다.
“왜 한숨이세요. 대모님이 요즘 잘 안 해주세요?”
“몰라 인마.”
고영대가 말을 피했다.
채순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겠지.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 법이니까.
하지만 여기는 서유림과 고영대 단 둘 뿐이다.
그리고 오늘은 서유림이 단단히 마음먹고 왔거든? 이제 슬슬 풀어놓으시지.
“왜 그러세요, 형님? 혹시 저와 마음이 같으신 건가요?”
“무슨 마음?”
고영대가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기회다!
서유림이 고영대의 눈을 노려보며 마인드컨트롤을 더욱 강하게 걸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눈을 마주친 상태로 걸면 효과가 배가 되거든.
그러면서 고영대를 슬며시 부추겼다.
“사실 형님이 대모님 모시는 것 보면 많이 안쓰러웠거든요. 형님이 뭐가 아쉽고 부족해서 대모님 같은 할머니를······ 아, 죄송합니다. 제가 취했나 봅니다. 형님이 대모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서유림이 얼른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면서 고영대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고영대가 다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휴우, 눈치 챘구나! 사실 그년 만날 때마다 기분 X같다. 꼭 돼지새끼 끌어안고 그 짓 하는 느낌이거든. 씨발. 내가 씨돼지도 아니고. 게다가 요즘에는······ 휴우.”
드디어 걸려들었군. 꾹꾹 눌러두었던 불만의 샘을 살짝 건드려주자 기다렸다는 듯 마구 폭발하기 시작했다.
서유림이 손을 살짝 내려서 스마트폰 버튼을 살짝 눌렀다. 음성녹음 버튼니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변화시켰다.
“그러실 줄 알았다니까. 채순실이 남자를 그렇게 밝힌다면서요?”
전혀 서유림의 목소리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고영대는 마인드컨트롤에 강하게 걸려있는데다가 술까지 잔뜩 취해서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말도 마. 돼지 같은 년. 자기가 아직도 이팔청춘인 줄 안다니까. 게다가 그 못생긴 얼굴에 화장 덕지덕지 하고 옷 같지도 않은 속옷 걸치고 있는 꼬라지 보면 아휴, 생각만 해도 욕지기 밀려오네.”
그뿐이 아니었다.
요즘 서유림이 시도 때도 없이 고영대의 체력을 흡수해주었다. 그러니 아무리 노력해도 그게 제대로 세워질 리가 없었다.
특히나 채순실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것 몇 번 못 세웠다고 얼마나 면박을 주던지. 사랑이 식었다느니, 마음이 움직였다느니. 요즘 같아서는 그저 독립하고 싶은 마음뿐이라니까.”
고영대의 입은 터진 봇물이었다. 지금까지 눌러두었던 불만이 보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유림이 마인드컨트롤로 고영대의 불만을 계속 자극해주니 서유림이 말을 걸지 않아도 혼자서 마구마구 쏟아냈다.
채순실에 이어서 황국회와 관련한 불만도 쏟아냈다.
“내가 이래봬도 독립군의 자손이라고. 우리 증조할아버지께서 의열단에 자금 공급하시던 분이셨어. 그때 집안 재산이 모두 거덜 났지. 그런데 황국회 이 개새끼들은 전부 다 친일파 후손들이란 말이지.”
고영대도 알고 있었구나.
하긴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지. 제아무리 무식한 사람이라고 해도 위치가 차기 대권후보인 사람인데.
어쩌면 서유림이나 김영자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고영대가 독립군의 후손이라고?
전혀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하는 말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진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할 필요까지는 없고.
“내가 이런 굴욕을 참으면서까지 출세하려는 것도 사실은 황국회 이놈들을 갈아엎기 위해서야. 힘이 있어야 이런 친일파 새끼들을 색출해낼 것 아냐? 후우, 누가 내 이런 깊은 뜻을 알아주려나.”
말로는 뭘 못하겠어? 모든 일이 말대로만 이루어진다면 남북통일도 벌써 이루어졌겠지.
중요한 건 실천이다.
고영대가 속으로 그런 깊은 뜻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해온 행동을 보면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다.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희생한다고?
그러기엔 지금까지 희생된 작은 것들이 너무 크다. 수많은 연예인, 정치인, 그리고 일반인들이 고영대의 출세욕에 짓밟혀서 꽃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떨어졌거든.
그렇게 유능하고 선량한 사람들을 짓밟고 올라간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듣기가 역겨울 정도다.
하지만 꾹 참고 맞장구 쳐주었다.
“제가 알죠, 형님.”
이런 인내야말로 큰 것을 얻기 위한 작은 희생이라고 할 수 있는 거란다. 알겠냐, 고영대?
“더러운 새끼들. 이미 충분히 가졌으면서도 욕심이 끝도 없어요. 아주 자손만대 영화를 누리려고······.”
고영대는 계속해서 불만을 터뜨렸다.
술은 아직도 많이 남았고, 안주도 많이 남았기에 이야기할 시간은 충분했다. 서유림은 고영대가 저 밑바닥에 있는 것까지 모두 토해내도록 계속해서 마인드컨트롤을 사용하며 부추겨주었다.
정말 정신이 없긴 없는 모양이다. 자신의 혀가 자신의 목을 자르는 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그럼 이쯤에서 마무리작업을 살짝 들어가 볼까?
“그럼 언젠가는 독립하셔야 할 것 같은데······ 혹시 채순실이나 황국회가 형님 재산을 움켜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게 좀 불안하긴 해. 그놈들에게 전부 노출되어있거든.”
“그럼 차라리 제가 관리해드릴까요? 사실 제가 재테크의 달인이거든요. 제 재테크 수익률이 1년에 최소 13% 이상이에요. 그러면 재산 숨기기도 좋고, 재산도 빨리 불릴 수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