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
최강의 계약자 (2)
쿤타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마계군단에게 학살당하고 있는 요정들의 모습만 보였다. 밧줄을 타고 무사히 구출된 요정은 20명이 채 안 되었다.
전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희생이었다.
오르테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웠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하아, 쿤타님!”
굳이 묻지 않아도 상황을 알 것 같았다.
결국 그렇게 되었군. 바보 같은 놈. 적당히 하고 몸을 뺐어야지.
원래의 계획은 마계군단을 적당히 유인하자마자 몸을 빼서 달아나가나 성벽에 달라붙어서 밧줄을 타고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실패한 듯했다.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마계군단의 공격에 희생된 거겠지.
물론 소멸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는 정령계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제법 정이 든 놈이었는데.
하지만 정령계에서는 인간계에서와 달리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일 정도로 가까웠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나갔고, 모든 요정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내던졌다.
때문에 누군가의 죽음이 너무도 담담하게만 받아들여졌다.
정령계의 존재가 아닌 계약자 쿤타의 죽음조차도 말이다.
아마 내가 죽어도 마찬가지로 모두들 담담하게 생각하겠지. 물론 아리아나는 조금 슬퍼해주겠지만.
잠시 후, 성주의 전령들이 도착했다.
“요나스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성주님께서 정령신의 후보님들을 내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제 계약자도 함께 가겠습니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요나스 성이 크긴 컸다. 빠른 걸음으로 무려 20분을 걷고 나서야 내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요나스 성의 성주도 리니스 성의 성주처럼 금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모습이 제법 위풍당당했다.
하지만 정령신의 후보 앞에서는 그 역시 자세를 낮추었다. 아리아나와 오르테나가 내궁으로 들어오자 황급히 다가와서 고개를 숙였다.
“요나스의 성주 나얀이 두 분을 뵙습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해요.”
“이쪽으로 오시죠. 다른 정령신의 후보들도 와계십니다.”
다른 정령신의 후보들? 한두 명이 아닌 모양이네.
서유림이 조금은 놀란 표정을 했다.
하지만 아리아나도 오르테나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하긴, 정령신의 후보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있어서 텔레파시처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다른 정령신의 후보들 역시 아리아나와 오르테나가 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아리아나와 오르테나 역시 이곳에 그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겠지.
성주를 따라서 내궁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많아? 집무실에 무려 스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정령신의 후보는 그중 절반인 열 명이었다. 나머지 열 명은 그들의 계약자였다.
계약자들은 외모만 봐도 다른 요정들과 확연히 구분되었다. 하나같이 크고 우람하고 강인했다.
쿤타와 같은 종족인 드라크 족도 무려 다섯 명이나 되었다. 최강의 전투종족이라더니 정령신의 후보들도 드라크족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쿤타를 경험해본 결과 전투력은 어떨지 몰라도 전략적인 면은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정령신의 후보들은 전략보다는 전투력을 선호했다. 한마디로 ‘머리는 내가 쓸 테니 나는 열심히 구르기만 해라.’ 하는 식으로 계약자를 다룬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아리아나가 궁금해졌다.
아리아나는 왜 나를 택한 것일까?
나중에 기회 되면 한 번 물어나 봐야겠다. 심심풀이 얘깃거리로 괜찮은 주제잖아.
이렇게 쭉 둘러보니 그나마 서유림이 요정과 가장 가까운 외모였다. 물론 요정과 비교하면 조금 많이 못생긴 편에 속하긴 하지만.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원래 이런 자리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둥, 다친 곳은 없느냐는 둥의 안부인사도 건네고 말이야.
그런데 다들 눈빛이 곱지 않았다. 아리아나와 오르테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하긴, 돌이켜 생각해보니 놀랄 일도 아니다. 아리아나와 오르테나가 처음 만났을 때도 분위기는 냉랭했으니까.
그것이 정령신의 후보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이들 중 오직 한 명만이 정령신이 될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더욱 많은 후보들이 있겠지.
당연히 경쟁할 수밖에 없고, 서로를 견제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다짜고짜 ‘꿇어.’ 하거나 ‘눈깔아’ 하는 식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려 하지는 않았다.
비상시국이니까. 일단은 눈앞에 닥친 위기부터 극복하는 게 먼저임을 다들 알고 있는 거지.
“지금은 우리끼리 다툴 때가 아니에요. 밖에 몰려와있는 마계군단을 정리할 때까지는 우리의 문제는 덮어두기로 해요. 모두 그렇게 합의했어요. 아리아나, 당신 의견은 어때요?”
“동의해요. 후아니스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의견에 따르겠어요.”
눈빛이나 분위기와 달리 대화는 부드럽게 이어졌다. 다들 마계군단이라는 공동의 적만을 생각했다.
“마계군단의 규모가 너무 커요. 마족도 많고, 마신의 성물까지 가지고 있어요. 정면대결을 펼친다면 큰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토론은 후아니스라는 요정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후아니스가 이중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는 듯했다.
아니면 후아니스의 계약자가 가장 강한 자이거나.
“그래도 어쩔 수 없어요. 정령신의 후보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어요. 그들을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길을 열어줘야 해요. 시간이 늦어지면 정령신을 옹립하기 위한 최소한의 머릿수도 채우지 못할 거예요.”
토론의 방향은 한 곳으로 몰려갔다. 요정들을 대거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요나스 성으로 들어오는 길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리아나는 그때까지 조용히 있었다.
오르테나 역시 아리아나와 군신의 관계가 성립된 상태라서 아리아나의 허락 없이는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조용히 지켜보던 아리아나가 손을 움직였다. 그린루트 안에 갈무리되어있던 성물의 목걸이를 밖으로 꺼내놓았다.
마치 보란 듯이.
그러자 성물의 목걸이가 아리아나의 뜻을 읽기라도 한 듯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화악!
성물의 목걸이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졌다. 집회실 전체에 영롱한 빛이 가득했다.
그러자 정령신의 후보들이 일제히 입을 떨 벌렸다.
“그것은······.”
“설마 마신의 성물?”
“맞아요.”
아리아나가 크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그 작은 목소리만으로도 좌중을 압도했다.
성물 목걸이 덕분이었다. 그것은 마족군단을 물리치고 마신의 성물을 취했다는 뜻이니까.
“대체 어떻게······?”
“제 계약자이신 서유림님의 공입니다.”
정령신의 후보들이 일제히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계약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마신의 성물을 손에 넣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서유림이 그 어려운 걸 해냈다고? 저렇게 비리비리하고 유약하게 생긴 서유림이?
서유림이 비록 인간계에서는 키도 크고 어깨도 떡 벌어진 편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다른 계약자들이 워낙에 크고 거칠고 강인해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위라면 서유림은 진흙이었고, 그들이 태산이라면 서유림은 그저 뒷산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희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증명한다는 사실.
싸움은 주먹이나 칼로만 하는 게 아니거든.
전쟁에서도 장군보다 더욱 대우 받는 사람이 군사잖아. 한마디로 현대의 작전참모.
서유림의 어깨가 괜히 활짝 펴졌다.
‘내가 바로 그런 군사 같은 존재란다.’
물론 육체능력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보기만 이렇지 그 무식하게 생긴 쿤타를 하루가 멀다고 밟아주었던 서유림이니까.
“서유림님께서 리니스 성에서 새로운 전략을 보여주셨어요. 저는 그 전략이 이곳에서도 큰 효과를 볼 거라고 확신해요.”
“어떤 전략인가요?”
“유림씨?”
아리아나가 서유림에게 공을 넘겼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로군. 이놈의 미친 존재감이란.
서유림이 리니스 성에서의 작전을 설명해주었다.
매우 간단한 작전이었기에 긴 설명은 필요 없었다. 게다가 그림을 그려가며 설명하니 다들 단번에 알아들었다.
“정말 좋은 작전이군요. 그렇다면 그 일은 서유림님께서 맡아서 진행해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야 어렵지 않지.
내성을 쌓는 공사는 곧바로 시작되었다.
요나스 성은 엄청난 규모답게 성문도 많았다. 무려 열여섯 개나 되었다.
하지만 작업자도 엄청나게 많았다. 다들 정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는 충성도 만땅의 힘센 요정 일꾼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열여섯 군데에서 동시에 작업이 진행되는데도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랐다.
서유림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공사를 진두지휘했다.
그럴 때마다 아리아나는 늘 서유림 곁에만 붙어있다.
다른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딜 가나 어디에 있으나 늘 실과 바늘처럼 함께 다녔다.
그러다 보니 둘만 있는 시간도 많았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궁금한 게 있어.”
서유림의 말에 아리아나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 이상하단 말야. 아무리 예쁜 여자도 자꾸 보면 질리게 마련이다. 예쁜 구석은 자꾸 익숙해지고 보이지 않던 결점이 하나씩 드러나기 마련이거든.
그런데 아리아나는 그런 게 없다. 보면 볼수록 정만 깊어질 뿐이지 결점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다.
정령신의 후보만 아니었어도 벌써 그냥······. 아휴, 내 팔자야.
“뭔데요?”
“아리아나는 왜 계약자로 나를 선택한 거야? 다른 후보들의 계약자들과 비교하면 우리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존재잖아.”
정말 궁금하긴 했다.
혹시 아리아나에게 예지 능력이라도 있는 것일까? 인간이라는 종족이 지금 당장은 다른 종족보다 나약하지만, 성장속도가 빨라서 금방 역전할 거라는 예지 같은 것 말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뒤뇌를 보고 선택한 것일까?
그런데 아리아나의 대답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잖아요.”
“아, 그랬나?”
그러고 보니 맞는 말이네.
아리아나는 마족의 공격을 피해서 차원이동마법을 펼쳤고, 재수 없게 인간계로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하필 나를 만난 거고.
정령계로 이동해서도 나 외에는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조금 심하게 말하면 울며 겨자 먹기로 나를 계약자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데 또 하나 궁금한 게 있다.
“마족에게 쫓길 때 왜 하필 인간계로 차원이동을 한 거야? 드라크 종족이 있는 중간계로 차원이동 했으면 됐잖아. 다른 후보들은 다 그런 식으로 계약자를 선택한 것 같은데.”
“전 다른 정령신의 후보들보다 한참 어리거든요. 아직 차원이동마법을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차원으로 이동할 능력이 없어요.”
아, 그랬군!
허무하네. 괜히 물어봤어.
하지만 무슨 상관이야. 처음이야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그들 못지않은 능력자가 됐잖아. 쿤타를 그렇게 가볍게 꺾었으니 다른 드라크 종족도 쉽게 제압할 수 있겠지.
“부탁이 하나 있어요.”
이번에는 아리아나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아리아나의 부탁이라면 뭐든 콜이지.
“뭔데?”
“조만간 다른 계약자들이 유림씨를 제압하려고 시도할 거예요. 그때 절대로 봐주지 마세요. 유림씨가 계약자들 사이에서 가장 강한 자라는 걸 확실하게 가르쳐주세요.”
아리아나가 변했다. 오르테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무조건 충돌을 피하라고 하더니 이제는 충돌을 조장하네.
이해는 한다. 그게 정령신 후보의 운명이니까.
오르테나와의 일에서 경험하지 않았는가? 계약자 사이의 우열이 가려지면 그것에 따라서 정령신 후보의 우열도 함께 가려진다.
즉, 서유림이 가장 강한 계약자가 되어야만 아리아나도 가장 강한 정령신의 후보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최강의 계약자가 되라는 거겠지.
그런데 봐주지 말라고?
내 실력이 정말 그 정도로 강할까?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라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노력해볼게.”
“반드시 그래야만 해요. 유림씨는 그럴 실력이 충분해요.”
아리아나의 이런 응원, 너무 좋다니까.
물론 아리아나 본인을 위한 응원이겠지만.
“나도 알아. 아리아나가 다른 후보들 위에서 군림하도록 해줄게.”
서유림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런데 아리아나가 고개를 흔들었다.
“제가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유림씨가 최강의 계약자가 되어야만 우리가 서로······.”
거기까지 말한 아리아나가 말을 멈추었다. 대신 눈빛으로 남은 이야기를 하겠다는 듯 가만히 서유림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리아나의 눈빛이 바람에 흔들리는 새벽별빛 같았다.
“우리가 서로 뭐?”
“아니에요. 그건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아무튼······ 저와 헤어지기 싫으시면 꼭 최강이 되셔야만 해요.”
아리아나는 거기까지만 이야기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서유림이 틈날 때마다 툭툭 찔러보듯 계속 물어보았지만,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곧 알게 될 거라는 말만 반복했다.
대체 뭘 알게 될 거라는 건지.
어쨌건 서유림도 남에게 지는 것은 싫으니까.
원하는 대로해주지 뭐.
늦은 오후.
정령신의 후보들끼리 회의가 있었다. 이번 회의에 계약자들은 제외되었다.
덕분에 집무실 앞 공터에 계약자들만 따로 모이게 되었다.
아리아나가 말하던 그때가 오늘이 되겠군.
역시나였다. 계약자들끼리만 모이게 되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다들 ‘난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 하는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중에서도 도발의 눈빛이 가장 많이 몰린 사람이 바로 서유림이었다.
모든 정령신의 후보들이 입을 모아서 그 능력을 칭찬하니 질투심이 샘솟는 거지. 다들 ‘서유림만 꺾으면 내가 최고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네가 정말 그렇게 강한가?”
어차피 결말은 빤하다. 이런저런 험한 말을 주고받다가 치고받고 싸우게 되겠지. 저쪽이 원하는 게 그거니까.
그렇다면 불필요한 험담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 서로 감정만 상하게.
그보다는 깔끔하게 우열만 가리는 게 낫겠지.
서유림이 벌떡 일어섰다.
“난 말 많은 것 싫어한다. 도전하고 싶은 놈 나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