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
보통 놈이 아니다. (3)
복면인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권혁진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가기만 했다. 마치 권혁진 정도는 한 주먹감도 안 된다고 자신하는 듯했다.
하긴, 덩치나 몸을 보니 그럴 법도 했다.
키는 190cm에 가까울 정도로 컸고, 어깨는 떡 벌어져서 힘깨나 쓸 것 같았고, 허리는 쭉 뻗어서 무척이나 날렵할 것 같았다.
전문적인 싸움꾼 냄새도 났다.
하지만 권혁진 역시 여유만만이었다. 복면인의 기세에 눌려서 뒷걸음질하기는커녕 오히려 반가운 친구 마중 나가듯 복면인을 향해 움직였다.
“후훗,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로군.”
둘 사이의 거리가 순식간에 4m 이내로 좁혀졌다.
그러자 복면인이 선수를 치듯 갑자기 몸을 날렸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듯 4m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서 권혁진의 복부를 향해 주먹을 집어넣었다.
깜짝 놀란 권혁진이 헛숨을 삼켰다.
‘뭐가 이렇게 빨라?’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었다. 일단은 피하고 볼 일이다.
본능적으로 몸을 팽이처럼 돌리며 복면인의 주먹을 옆으로 흘려보냈다.
권혁진의 몸 역시 복면인만큼이나 빨랐다. 아니, 오히려 더욱 빨랐다. 분명히 주먹이 복부에 꽂힌 것 같은데, 놀라울 정도로 빠른 움직임으로 피한 것이다.
이번에는 복면인이 깜짝 놀랐다. 권혁진의 실력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는 재빨리 몸을 굴리며 거리를 벌였다.
권혁진이 펀치로 반격을 가하려다가 복면인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주먹을 거두었다.
그제야 권혁진은 복면인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정령의 계약자로구나!”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잘 만났다는 듯 입술을 깊게 말아 올리며 웃었다.
서유림은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차원이 다른 놈이다.’
단 한 번의 움직임으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저 여유로움!
놈은 서유림이 정령의 계약자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그런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정령의 계약자를 만났다며 기뻐하고 있다.
그건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지금까지 여러 명의 마령의 계약자가 서유림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그걸 알고도 여유를 가질 정도로 강한 존재이거나.
서유림은 두 번째 경우라고 확신했다. 아니면 함정에 빠졌거나.
어쨌건 상황이 좋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자리를 피해야 하나?
그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았다. 서유림이 이길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해도 한 번의 패배는 그것으로 끝이니까. 10%가 아니라 1%의 가능성도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피하자!’
서유림이 다시 현관문을 향해 몸을 날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현관문으로 시커먼 무엇인가가 잔뜩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관문뿐만이 아니었다. 창문 쪽으로도 시커먼 무엇인가가 잔뜩 날아왔다.
게다가 권혁진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후훗, 어딜 도망가려는 것이냐? 가려거든 정령의 힘을 내놓고 가거라.”
젠장, 갇힌 건가? 그런데 밖에 날아다니는 것들은 뭐지?
서유림의 예민한 감각으로 소리가 들려왔다.
윙- 윙-
비- 비-
대충 짐작은 갔다. 파리, 바퀴벌레, 나방 등속의 벌레들이었다. 바닥에도 온갖 벌레들이 꿈틀꿈틀 기어오고 있었다.
이놈은 아무래도 벌레를 통제하는 능력이 있는 듯했다.
그런데 대체 저 많은 벌레들이 어디에서 날아온 거야?
문득 이곳이 신길동의 낙후된 지역이라는 점이 떠올랐다.
순간 서유림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럼 저놈이 일부러 이런 장소를 택한 건가?’
가능성이 높았다. 민들레의 텐프로들을 세 명씩이나 불렀다는 것은 그만큼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좋은 호텔이 아닌 이런 우중충한 장소로 여자들을 데려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벌레 다루는 능력이 있다면 그 벌레들을 활용하기 위해서 벌레가 많은 지역을 아지트로 삼을 것이다.
놈이 파놓은 함정에 빠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많은데.
벌레가 어찌나 많았는지 주변이 온통 벌레뿐이었다. 만약 대낮이었다면 벌레가 만들어내는 암흑을 경험했을 것이다.
“가라! 저놈의 살을 파먹어라!”
권혁진이 서유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주변을 가득 메운 파리며 바퀴벌레 따위의 벌레들이 서유림을 향해 맹렬하게 돌격했다.
보통 벌레가 아닌 모양이다.
하긴, 마령의 힘을 받은 벌레니 뭔가 다른 특별함이 있겠지. 어쩌면 독을 사용할지도 모르겠다.
권혁진의 얼굴이 미소가 가득 지어졌다. 벌써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아직 좋아하긴 이르다. 서유림이 비록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암울한 건 아니니까.
이깟 벌레들? 후훗, 간단하게 처리할 방법이 있지.
서유림이 손을 좌우로 펼쳤다.
그러자 갑자기 강한 불꽃이 서유림의 주변에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강하지는 않지만 돌풍까지 불었다.
정령의 힘이었다. 아직 사람에게 침투시키지 않은 정령 중에 불의 속성을 지닌 것들이 있었다.
능력은 약하지만 벌레들을 태워 죽일 정도는 되었다.
바람의 정령도 불러냈다.
불길이 타오르자 주변을 맴돌던 벌레들이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비록 일반 벌레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정령이 발현하는 불꽃과 바람의 힘을 버틸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서유림에게 느긋한 상황은 아니었다. 정령의 힘을 발현하는 것은 체력소모가 제법 크니까.
시간을 끌다가는 권혁진과 싸우기도 전에 체력이 고갈될 것이다.
어차피 달아나기는 힘든 상황이다. 벌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무리 태워도 계속 몰려왔다.
무조건 체력이 바닥까지 소모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서유림이 권혁진을 향해 몸을 날렸다.
권혁진도 피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움직임을 보니 격투기를 배워본 적은 거의 없는 듯했다. 모든 움직임이 무척 투박했다.
그런데 와! 권혁진의 육체능력이 정말 대단하다. 스피드와 파워 모두 서유림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서유림이 힘껏 몸을 비틀며 피했는데도 얼굴을 살짝 스치고 지나갈 정도였다.
격투기의 실력 차를 육체능력의 차이로 극복하고 있었다.
서유림은 강종범에게 배운 변칙스텝까지 사용했다. 일단 이기고 봐야 하는 싸움이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권혁진을 제압할 수가 서유림의 주먹이 권혁진의 가슴에 정확히 꽂혔는데도 별다른 충격을 안 받은 듯했다.
시간이 갈수록 서유림은 조급해졌고, 반대로 권혁진은 여유가 넘쳤다.
“후훗, 그게 전부냐? 그만 포기해라. 알아서 항복한다면 정령의 힘만 흡수하고 네놈의 목숨은 살려주마.”
이번에는 권혁진이 오히려 서유림을 압박해왔다.
서유림은 사면초가였다. 사방에서는 벌레들이 가득했다. 불꽃을 유지하느라 체력은 빠르게 소모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고.
“흡!”
권혁진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몸을 굴리며 피했다. 스피드와 파워가 워낙 대단해서 그런 식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권혁진이 다시 덮쳐왔다. 이런 식으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서유림의 체력이 고갈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으하핫! 포기하라니까.”
서유림이 다시 몸을 굴렸다. 그러면서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세웠다.
하지만 체력이 어느새 바닥이었다. 벌써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권혁진도 그걸 눈치 챈 듯했다.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후훗. 그러게 포기하라고 했을 때 포기했어야지. 이젠 죽여도 곱게 죽이지 않겠다.”
권혁진이 다시 서유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 서유림이 이번만큼은 피하지 않았다. 권혁진의 공격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날리며 권혁진을 향해 함께 돌격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내가 얼마나 불렀는데.’
정령왕 아리안의 힘이 느껴졌다. 온몸이 강철처럼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지금까지는 권혁진의 주먹 한 방도 맞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만 싸웠다. 힘이 제대로 실린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권혁진이 저렇게 기고만장할 수밖에.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정령왕 아리안이 권혁진의 공격을 막아줄 것이다. 물론 100%는 못 막겠지만, 서유림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세기로 약해지겠지.
반면 서유림의 공격은 아리안 덕분에 오히려 더욱 강해질 것이다.
권혁진이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버텨내기 힘들 것이다.
서유림과 권혁진이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한 점으로 만났다.
권혁진의 주먹은 서유림의 가슴에, 서유림은 몸을 살짝 비틀며 크로스카운터로 권혁진의 얼굴에 주먹을 꽂았다.
파팟!
펀치력이 얼마나 강한지 충격음이 묵직하게 뿜어졌다.
그와 동시에 서유림도 권혁진도 뒤로 벌러덩 나자빠졌다. 두 사람의 펀치력이 생각보다 더욱 강했다.
하지만 서유림은 버틸 만했다. 재빨리 몸을 추스르며 일어섰다.
그런데 권혁진도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엄청난 주먹을 맞고도 녹다운되지 않았다. 조금 비틀거리긴 했지만, 넘어지자마자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강한 놈인 거야?’
어쨌건 지금이 기회였다.
아리안이 보호해주고 있으니 벌레를 태우겠답시고 체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었다. 서유림이 다시 온 힘을 다해서 권혁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권혁진이 비로소 위기를 느낀 듯했다. 서유림을 피해서 현관문 밖으로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서유림이 한 발 빨랐다. 달아나는 권혁진의 등을 향해 다시 강한 주먹 한 방을 날렸다.
꿍!
권혁진이 마치 테니스공이라도 된 것처럼 앞으로 튀어나가며 쓰러졌다.
그런데 이번에도 쓰러뜨리지 못했다.
오히려 권혁진에게 달아날 기회만 주고 말았다. 저만큼 날아가서 나자빠지자마자 다시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몸을 날려서 전력으로 뛰었다.
그런데 스피드가 엄청났다. 서유림이 열심히 뒤쫓아보았지만 거리가 계속 멀어지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권혁진이 또다른 함정을 파놓고 그곳으로 서유림을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권혁진 같은 놈이 하나 더 있다면 서유림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서유림이 결국 추격을 포기했다.
어차피 실패한 일. 그렇다면 재빨리 사라지는 게 답일 것이다.
얼른 오토바이를 타고 단독주택 부근을 떠났다.
그제야 정령왕 아리안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 마령의 계약자인가요?
‘마령의 계약자 치고는 너무 강한 것 같아.’
> 저도 느꼈어요. 그렇다면 마왕의 계약자인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아! 젠장, 저 정도로 강하다니. 어떻게 해야 저놈을 사냥할 수 있을까?’
>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래도 다행이다. 놈의 정체를 알아냈으니까. 조금만 조사하면 놈의 집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기습할 타이밍도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놈은 서유림의 정체를 전혀 모른다.
서유림이 놈보다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 선 것이다.
‘빨리 방법을 찾아내야겠어. 아리아나는 알겠지?’
* * *
“하악. 하악.”
권혁진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부상이 제법 심각했다. 물론 부상 따위야 금방 치료될 수 있지만, 문제는 놈의 능력이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라고 해도 놈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대체 뭐였지? 마지막 그건?’
엄청난 방어력이었다. 자신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력을 다해서 친 일격이었다. 제아무리 강한 놈이라고 해도 그 한 방을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다니.
‘단순한 정령의 힘이 아니다. 이건······.’
권혁진의 눈이 커졌다.
‘정령왕의 힘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