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
보통 놈이 아니다. (1)
- 네, 팀장님 덕분에요.
권진아의 목소리가 밝았다.
하긴, 한상민이 그 꼴이 되었으니 더는 권진아를 위협할 사람이 없겠지.
그래도 마음고생은 심할 것이다. 비록 권진아가 원한 인사는 아니라고 하지만, 권진아가 감찰실로 인사이동 된 것이 정상적인 일은 아니니까.
아마 감찰실 동료직원은 물론이고 그룹의 다른 직원들도 모두 권진아를 색안경 끼고 보고 있을 것이다.
특히 새로운 감찰실장 한경민이.
틈만 나면 권진아를 내치려고 벼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잘 버티고 있는 걸 보면 역시 보통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마음고생이 심하겠어. 동료들 질투가 보통이 아닐 텐데.”
- 어머! 오해세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응? 그렇지 않다고? 목소리를 들어보니 왠지 거짓말 같지가 않다.
- 우리 감찰실 직원들이 저를 얼마나 예뻐해 주시는데요. 새로운 실장님도 처음에는 저를 싫어하셨지만, 지금은 예뻐해 주세요.
그거 정말 뜻밖인걸.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니지. 권진아 정도의 붙임성과 능력이라면 동료들로부터 인정받을 만하지.
“정말 다행이네. 권진아씨 걱정 많이 했는데.”
- 어머! 정말요? 팀장님이 제 걱정 해주셨다고 하니까 왠지 기분이 이상해요. 호호.
이상할 게 뭐 있어?
그런데 계속 ‘팀장님’이라고 그러네. 거리감 느껴지게.
호칭 좀 바꿀 수 없나?
- 그런데 팀장님. 저 저녁 사주시면 안 돼요?
갑자기 웬 저녁이지? 권진아가 나에게 작업 거는 건 아닐 테고.
물론 못 사줄 이유야 없다. 오랜만에 권진아 얼굴도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나도 좋지. 권진아도 뭔가 목적한 바가 있을 테고.
“뭐 먹고 싶은데?”
- 메뉴가 중요해요? 누구와 함께 먹느냐가 중요하지. 아시잖아요. 저 아무 거나 잘 먹는 거.
“그건 그렇지. 그럼 진아씨 좋아하는 한정식 먹으러 갈까?”
- 좋아요. 언제 시간 되세요? 전 오늘도 시간 되는데.
저녁.
부다다당-
서유림이 오토바이를 길가에 세웠다.
권진아가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정말로 오토바이 타고 다니시네. 저도 이런 거 타보고 싶었는데. 아직 한 번도 못 타봤거든요.”
권진아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나왔다. 치마 대신 청바지에 활동성과 보온성이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오늘 실컷 타봐.”
서유림이 피식 웃으며 헬멧을 건네주었다.
권진아가 헬멧을 뒤집어쓰고는 뒤에서 서유림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간다.”
서유림이 오토바이를 출발시켰다. 시내를 가로질러 시외로 향했다.
중간에 음료수도 마실 겸 잠깐잠깐 쉬는 시간을 포함해서 한 시간 넘게 바이크를 즐겼다.
그렇게 한정식집에 도착했다.
“와, 배고파!”
권진아가 음식들을 맛나게 먹었다. 저렇게 우걱우걱 먹는대도 비주얼이 파괴되지 않네! 역시 예쁜 애들은 먹는 모습도 예쁘다니까.
그런데 권진아가 식사하다 말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한상민 실장님 일 말이에요.”
“응?”
“그거 팀장님 작품이죠?”
풉!
하마터면 음식물을 뿜을 뻔했다. 그런 질문을 예고도 없이 던지면 어떻게 해?
서유림이 놀라서 커진 눈으로 권진아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권진아가 씨익! 하며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세요? 그냥 혹시나 해서 여쭤본 건데. 근데 팀장님 작품 아니에요?”
“내 작품이라니? 뭐가?”
“한상민 실장님 마약혐의로 붙잡히게 한 것 말이에요.”
권진아 뭐지? 혹시 무늬만 유진그룹 직원이고 실제 정체는 경찰 아니야? 그것도 특수경찰.
아니면 명탐정이거나.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팀장님이 저한테 장성식 부장님 관련해서 물으셨잖아요. 지난 3월 말에 자리 비운 것 관련해서요. 그리고 곧바로 일이 터졌고요.”
겨우 그것 가지고 여기까지 추리해낸 거야?
추리력이 대단한 거야, 상상력이 대단한 거야?
너무 놀라워서 말문이 다 막힌다.
“곤란하시면 말씀 안 하셔도 돼요. 그것 때문에 팀장님 뵙자고 한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얘기 안 하면 무언의 긍정이 되는 셈이잖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얘기야? 그런데 날 보자고 한 이유가 따로 있어? 그냥 나 보고 싶어서 만나자고 한 건 아니고?”
“호호. 맞아요. 팀장님 보고 싶었어요.”
권진아가 눈을 초승달처럼 만들며 웃었다.
자꾸 그러지 말라니까. 남자가 얼마나 오해하기 쉬운 동물인지 잊었어?
가끔 보면 권진아도 불여우 같은 면이 있다니까. 저렇게 웃다가도 어느 순간 보면 나에게 전혀 관심 없는 사람처럼 돌변한다.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다니까.
“그럼 그 호칭부터 좀 바꿔줄 수 없어?”
“왜요? 팀장님이라는 호칭이 싫어요?”
“당연하지. 막말로 내가 진아씨 직장상사도 아니고.”
“그럼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저도 강은영씨처럼 그냥 오빠라고 불러드릴까요?”
역시 명탐정 자질이 있다니까.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그것도 좋지.”
“호호, 알았어요, 오빠.”
“그런데 새로운 한경민 실장은 어때? 소문 들어보니까 면도칼 같은 사람이라던데.”
“소문대로에요. 오히려 소문보다 더하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한 구석도 있어요. 제가 사회경험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최고의 관리자라고 생각해요.”
뜻밖의 평가다. 너무 지독해서 다들 피하고 싶은 관리자라는 평이 많던데.
하긴, 소문은 믿을만한 게 못 된다. 사람은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다니까. 권진아가 아직 뭘 몰라서 그런 평가를 내리는 것일 수도 있고.
“우리 한경민 실장님이 이번에 푸르름 엔터테인먼트 대표 된 것도 알고 계시죠?”
“그랬어?”
금시초문이다. 그쪽은 아예 관심도 두지 않고 있었는데.
“하긴, 대표로 되신지 며칠 안 됐으니까. 어쩌면 YJY와 동방신화가 다시 뭉칠 수도 있을 거예요.”
“정말?”
오늘 뜻밖의 소식을 많이 듣는걸.
“실장님이 직접 그러셨어요. 푸르름 대표가 되자마자 첫 번째로 YJY를 향해서 사과부터 하겠다고. YJY의 배신은 괘씸하지만, 그래도 TV출연을 막고 했던 것은 잘못된 일이니까요.”
오, 이거 정말 빅뉴스인 걸.
그런데 권진아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 권진아와 한참 식사하고 있는데 중국에 있는 YJY의 영웅제중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 형님, 푸르름 대표한테 사과전화 받았습니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동방신화의 재결성도 제안 받았어요.
서유림이 화들짝 커진 눈으로 권진아를 바라보았다. 한경민이 결단만 과감한 게 아니라 행동도 거침이 없는 사람 같았다.
“오, 정말 잘됐네.”
- 형님 덕분입니다. 감사해요.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 당연히 재결합해야죠. 서로 오해했던 부분도 풀렸는데. 물론 소속사는 옮기지 않고 그룹활동만 함께 할 생각입니다.
“잘 생각했어.”
통화를 마친 서유림이 입을 떡 벌렸다.
권진아가 흐뭇하게 웃었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다음날 저녁.
TV에 YJY와 동방신화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동방신화가 직접 중국을 찾아가서 YJY와 함께 인터뷰를 진행한 것이다.
핵심은 동방신화 그룹의 재결성이었다.
물론 YJY만의 활동도 따로 하겠지만, 원래의 동방신화 멤버인 5명이 함께 모여서 최소 2년에 한 번은 앨범을 내고 활동하겠다는 다짐이었다.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터넷은 온통 동방신화와 관련한 기사로 도배되었다.
기사마다 댓글이 수천 개씩 달렸다. 모두가 동방신화 사생팬들이었다.
팬들과 인터뷰하는 모습도 TV에 보였다.
다들 울고불고 난리였다. 세상을 다 가진 사람들처럼 기뻐했다.
저까짓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저렇게들 좋아할까.
그래도 흐뭇하긴 했다. 잠깐 길이 엇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좋은 분위기로 동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가? 팬들의 기쁨을 떠나서 말이다.
후훗, 흐뭇하군.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만약 정령소환력이 더 오를 수 있는 상화이라면 이번 기회를 통해서 큰폭으로 상승했을 텐데.
하지만 정령소환력은 이미 오래전에 999에 도달한 상태였다. 제아무리 엄청난 사건이 터진다고 해도 더는 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 쓸데없는 욕심이다. 지금으로도 충분하지 뭐.
그럼 나도 잠 좀 자볼까?
서유림이 눈을 감았다.
* * *
정령계로 도착한 서유림은 먼저 정령들부터 소환했다. 일단 소환해놓으면 굳이 사냥하지 않아도 알아서 조금씩은 성장하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소환된 정령의 수가 크게 줄어있었다.
“어? 왜 열일곱 마리밖에 안 돼? 나머지 세 마리는 어디 갔어?”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리아나가 서유림에게 다가왔다.
서유림이 보유하고 있는 정령의 수는 20마리다. 정령소환력으로 소환할 수 있는 정령이 10마리고, 마령의 힘을 흡수하여 만든 정령이 10마리다.
서유림은 모든 정령을 한꺼번에 모두 소환했다. 그러니 20마리가 소환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17마리뿐이었다.
가만 보니 이상한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놈이 있었다. 꼭 호랑이를 닮았는데, 언제 봤다고 서유림을 향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넌 뭐냐? 내 정령 중에 이런 놈도 있었어?”
게다가 유독 덩치가 크고 힘도 세어보였다. 물론 가장 오래된 정령인 워리 만큼은 못 되었지만.
아리아나도 이상한 일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했다.
“유림씨 정령소환력이 몇이에요?”
“당연히 999지. 설마하니 정령소환력이 700대로 줄었을까?”
정령소환력이 줄어든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다. 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특별히 잘못한 일도 없는데 왜 준단 말인가?
“한번 확인해보세요.”
까짓 어려운 일도 아니니 확인해보지.
서유림이 망막의 스텟을 확인해보았다. 2차성장판을 돌파하고 모든 스텟이 999가 된 후로는 거의 확인하지 않았었다. 스텟의 변화가 전혀 없으니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정령소환력 찾는 것도 조금은 어색했다.
‘아! 마법창에 있었지? 저기 있군!’
서유림이 마법창을 확대했다.
그러자 조금 이상한 게 보였다.
[마법]
체력흡수 : 999
정령소환 : 000%
“어! 이게 뭐야?”
“왜요? 변했어요?”
“숫자가······ 999가 아니라 000이네.”
그러자 아리아나가 갑자기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그랬군요. 축하해요.”
왜? 뭔데? 좋은 일이야?
서유림이 의아한 표정을 했다.
아리아나가 얼굴에 웃음기를 간직한 채 설명해주었다.
“정령소환력도 껍질이 깨졌어요. 이제 유림씨는 원하는 만큼의 정령을 소환할 수 있어요.”
원하는 만큼? 가만, 이게 무슨 의미야?
“백 마리도 가능하고 천 마리도 가능하다 그거야?”
“네.”
오! 이거 왠지 대박 분위기인 걸. 정령의 수가 무제한이라는 건 단순히 그 의미에서 끝나는 게 아니잖아.
“그럼 정령의 계약자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뜻이야? 백 명이건 천 명이건?”
“맞아요.”
아리아나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대박! 이런 엄청난 일이.
그런데 왜 이렇게 무덤덤하지? 너무 기쁘면 그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아니면 너무 엄청난 일이라서 실감이 안 나는 건가?
아니다. 믿어지지 않아서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엄청난 능력을 그냥 줄 리는 없잖아. 뭔가 패널티가 있는 게 분명해.
아니나 다를까? 아리아나가 아주 잠깐 텀을 두고 그 패널티를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큰 패널티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정령력 힘의 합계가 변하지는 않아요. 그 힘을 몇 마리의 정령이 나눠 갖느냐의 문제죠. 한 마리가 독식하면 강한 정령을 부릴 수 있고, 수백 마리의 정령을 부리고자 한다면 아주 약한 정령들을 부려야 하겠죠.”
어쩐지. 너무 좋다 했어.
계약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정령을 합치고 분기하는 것은 서유림의 의지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계약된 정령만큼은 건들 수 없다. 누군가에게 침투시킨 정령도 마찬가지다.
그 정령은 이미 계약자나 침투된 자와 교감이 강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정령과 완벽한 교감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약을 해지하거나 정령을 회수해도 그 교감이 완전히 지워질 때까지는 다른 정령과 융합할 수 없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서유림이 호랑이 모양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서유림이 특별한 머릿수를 생각하지 않고 소환했기 때문에 나머지 정령들이 한 마리로 뭉쳐서 소환된 결과였다.
나약한 여러 마리보다는 강한 한 마리가 낫겠지. 그래야 사냥도 빨리 하고 성장도 빨라질 테니까.
그렇게 정령의 총량이 커지면 여러 마리의 정령을 소환해도 각각의 정령이 웬만큼은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이제부터 네 이름은 호군이다. 가자 호군.”
크어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