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친구 (1)
서유림이 두리랜드로 향했다.
임채모는 혹시 있을지 모를 안전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놀이동산 곳곳을 돌아다니며 놀이기구를 살펴보고 있었다.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지런함 때문이 아니었다.
마령의 계약자로부터 두 번씩이나 공격을 당하지 않았는가? 물론 임채모는 그들의 정체를 전혀 모르겠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에는 충분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겁 없이 혼자 움직이는 걸 보면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를 정도다.
하긴, 그렇다고 평생 숨어살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하니.
그래도 다행이다. 놈들이 더는 임채모를 노리지 않고 있다. 물론 어딘가에 숨어서 경계가 누그러질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만.
“선생님. 여전히 바쁘시네요.”
“오! 유림군 왔는가?”
“좀 쉬시면서 하세요.”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인데 놀려 뭐 하나? 움직일 수 있을 때 많이 움직여둬야지. 그런데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인가? 이제 조금 한가해진 건가?”
나야 뭐, 바쁘다면 바쁜 몸이고 한가하다면 한가한 몸이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놀고먹을 수 있으니까.
“선생님하고 함께 갈 곳이 있어서요.”
“지금 말인가? 그럼 미리 연락이라도 좀 하고 올 것이지.”
그러려고 했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화부터 했거든. 그런데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잖아.
“휴대폰 꺼져있으시던데요. 사무실 전화는 아예 받지도 않고.”
“아, 그랬군. 받기 싫은 전화가 자꾸 와서 말이지.”
그래서 그냥 왔다. 다른 곳에 갈 분도 아니고.
게다가 마령의 계약자 때문에 임채모 혼자 어딜 움직이게 하는 게 부담스럽다. 이곳 두리랜드도 위험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밖이 더 위험하니까.
어차피 내가 모시고 가야 하니 그냥 아침 일찍 직접 찾아온 것이다.
“언제 시간 나세요?”
“나야 남는 게 시간이지. 급한가?”
“급할 건 없지만 바쁘지 않으시면······.”
“내가 바쁠 일이 뭐가 있겠나?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가세. 그런데 누굴 만나러 가는 건가?”
서유림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마루엔터테인먼트의 실질적인 소유주요.”
“실질 소유주?”
“가보시면 알아요.”
“어머, 어르신.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김영자가 임채모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임채모도 김영자에게 아는 체를 해주었다. 오면서 서유림에게 김영자와 관련한 이야기를 대충 들었다.
김영자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보이차를 대접해주었다.
이런저런 서론이 끝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본론의 시작은 황국회였다. 그리고 그 예하조직인 일국회와 사모회 등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임채모가 잘 알고 있는 고영대의 이름도 튀어나왔다. 연예인 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되고, 지금은 차기 대권후보로까지 급부상한 인물이었다.
“고영대. 썩을 놈.”
내내 조용히 듣기만 하던 임채모가 ‘고영대’라는 이름에서 비로소 반응 같은 반응을 보였다. 옆에 있으면 고영대를 씹어 먹기라도 할 태세였다.
“어머! 고영대 의원과 잘 아세요?”
“아니오. 그냥 악연만 가득할 뿐이오.”
임채모가 손을 내저었다. 고영대 이야기는 꺼내기도 싫다는 듯한 태도였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갈 수야 있나?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바로 고영대 때문인데.
“제가 듣기로는 고영대 의원은 평소에도 임채모 선생님을 무척이나 존경한다고 하는 것 같던데······.”
“말만 번지르르한 놈이오. 날 찾는 것도 다 자기 잇속을 위해서일 뿐이지. 다음 대권 도전하려고. 요즘에도 계속 전화를 걸어와서 귀찮아 죽겠소.”
문득 아까의 일이 떠올랐다. 받기 싫은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더니 그것이 고영대의 전화였던 모양이다.
고영대가 임채모에게 연락하는 이유는 빤하겠지. 임채모 같은 사람이 자신을 지지해주면 그만큼 지지율이 상승할 테니까.
임채모는 그것이 싫은 것이다.
아니 고영대 같은 무리가 싫은 것이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인이 아닌, 단순한 자신의 영달을 위한 정치인이 싫은 것이다.
김영자와 서유림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서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더 확인할 것도 없다는 뜻이었다. 임채모는 확실히 생각하는 방향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
이제 서유림이 나설 차례였다.
서유림이 임채모의 손을 움켜쥐었다.
“선생님 부탁이 있습니다.”
“부탁? 뭔가?”
임채모가 조금은 경계하는 표정을 했다. 고영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부탁 이야기가 나오자 자신도 모르게 그런 표정이 된 것이다.
그런데 서유림이 우려하던 부탁을 했다.
“고영대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이번 대선에서 그를 확실하게 지지해주겠다고 해주세요.”
그러자 임채모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가? 아무리 자네 부탁이라고 해도 내가 그 짓만큼은 못하겠네.”
“크게 보셔요, 어르신. 고영대는 큰 고기를 낚기 위한 단순히 미끼일 뿐이에요.”
김영자가 서유림을 도와주었다.
그러자 임채모가 몸을 움찔하며 눈을 깜빡깜빡했다. 서유림과 김영자의 말 속에 뭔가 다른 뜻이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미끼? 더 큰 고기? 그게······ 뭔가요?”
“고영대는 황국회가 차기 대권주자로 밀어주는 사람이에요. 고영대를 잡으면 황국회를 잡을 수 있어요.”
“그 말은······ 황국회를······?”
“맞습니다, 어르신. 저희는 황국회를 제거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다시는 금권선거가 판을 치지 못하도록 할 것입니다.”
서유림이 최종 목적지를 먼저 보여주었다.
임채모는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다. 입을 떡 벌린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그건 제게 맡겨주세요.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고영대가 덜컥 대통령이라도 되면······.”
서유림은 순간 피식 웃음을 흘릴 뻔했다. 임채모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서다.
물론 임채모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스타 중 한 명이다. 게다가 두리랜드 이야기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의 인품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니 분명 대선에 영향을 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영향이 얼마만큼 크냐는 것이지.
사실 서유림은 아주 조금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 우리가 고영대를 지지한다고 그의 지지율이 얼마나 많이 올라가겠습니까? 우리의 지지는 대선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얻으면 되는 겁니다.”
임채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맞는 말이로군. 그런데 고영대를 통해서 어떻게 황국회를 제거하겠다는 건가?”
“그건 제가 맡겨달라니까요. 먼저 고영대의 신뢰를 얻을 계획입니다. 그런 다음 결정적인 순간에 고영대의 뒤를 봐주는 놈들을 일망타진할 겁니다.”
구체적인 계획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아니, 이야기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서유림 혼자서만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니까.
“도와주십시오, 선생님. 저 아시잖습니까? 제가 고영대 밑에서 콩고물이나 얻어먹겠다고 이러겠습니까?”
임채모가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내가 뭘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는가?”
고영대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 늙은이가 갑자기 어쩐 일이지?’
어쨌건 기분 좋은 일이긴 하다. 임채모 같은 사람이 자신을 지지해준다면 이미지 쇄신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물론 임채모의 지지가 진심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순식간에 돌변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분명 뭔가 거래를 하려 하겠지.
하지만 전혀 부담 없다. 임채모가 비록 이미지도 좋고 인지도도 높지만, 그래봐야 연예인 나부랭이니까.
반면 자신은 차기 대권후보다.
게다가 든든한 채순실이 자신을 밀어주고 있지 않은가?
임채모가 무엇을 원한다고 해도 아무 부담 없이 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똑똑!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온 모양이군.
고영대가 얼른 표정을 바꾸었다. 비열한 웃음기를 지우고 세상 누구보다도 밝고 환한 웃음으로 대신했다.
“들어오세요.”
목소리도 천진난만할 정도로 밝았다.
문이 열리고 임채모가 들어왔다. 그런데 그 뒤로 웬 커다란 청년 한 명이 더 들어왔다.
누군지 안다. 고영대도 나름대로 격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거든.
“오! 서유림 선수 아니십니까? 함께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유림입니다.”
서유림이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최고의 예의를 보여주었다.
고영대가 흐뭇하게 웃어주었다.
“반가워요.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쪽으로 앉으세요.”
고영대가 임채모를 향해 허리를 굽실굽실했다.
임채모도 웃음을 지으며 소파에 앉았다.
당연히 억지웃음이었다. 하지만 평생을 연기자로 살아온 사람답게 누구보다도 인자한 웃음으로만 보였다.
“이렇게 절 지지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그동안 의원님을 크게 오해했습니다. 이래서 떠도는 소문은 믿어서는 안 되는 거라니까.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평생 후회할 선택을 할 뻔했습니다.”
임채모가 모든 공을 서유림에게 돌려주었다.
고영대는 의문부호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물론 임채모가 어떤 오해를 했고, 떠도는 소문이 무엇인지도 안다. 자신이 호스트바의 텐프로 출신이고, 채순실의 성노리개 역할을 하다가 눈에 띄어서 출세했다는 소문이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될 거짓이어야만 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서유림 덕분이라니?
서유림이 고영대의 눈치를 살피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제가 의원님 팬입니다.”
“아, 그래요? 정말 감사합니다. 하하.”
“진심입니다. 대한민국 정치는 의원님 같은 젊은 분께서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개혁과 혁신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런 분을 이상한 소문을 내서 헐뜯는 놈들은 그냥 단두대로······.”
서유림이 눈빛을 번들거리며 격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누가 봐도 고영대의 사생팬 같은 모습이었다.
고영대는 그 모습이 너무도 믿음직스러웠다. 왠지 모르게 보는 순간부터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말을 가려서 해야 하는데. 어쨌건 이번 대선에서 의원님께서 반드시 대통령이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임채모 선생님께서 이상한 오해를 하고 계셔서 제가 며칠간 설득을······.”
“아,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하. 정말 감사합니다.”
고영대는 비로소 이야기의 전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제 봤더니 임채모가 마음을 바꾼 것이 서유림의 설득 덕분이었다.
‘기특하군. 아주 마음에 들어.’
이상했다. 보면 볼수록 서유림에게 마음이 끌렸다. 마치 운명 같은 존재로 느껴졌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좋은 말로 시작해서 좋은 이야기만 나누었다.
함께 훈훈한 분위기로 사진도 찍고, 그 자리에서 임채모의 블로그, 고영대의 블로그, 두리랜드 홈페이지에 올렸다.
그 사진만 봐도 임채모와 고영대가 얼마만큼 친한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조만간 임채모와 고영대가 함께 연예단신 프로그램의 인터뷰도 할 예정이다.
한마디로 고영대를 향한 임채모의 전폭적인 지지였다.
마무리도 훈훈했다.
임채모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고영대의 손을 잡았다.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이 친구 확실하게 밀어주세요. 아시겠지만 제겐 생명의 은인입니다.”
“물론입니다, 선생님. 서유림씨는 이미 제 사람입니다. 하하. 아, 말 나온 김에 우리 셋이서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저는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서유림군. 이제부터 자네가 모셔야 할 사람이네. 자네는 여기 남게.”
“알겠습니다, 선생님.”
임채모는 혼자 두리랜드로 향했고, 서유림과 고영대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들지.”
“감사합니다, 의원님.”
서유림은 고영대가 주는 대로 납죽납죽 받아마셨다. 작은 잔으로 주건 큰 잔으로 주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벌써 소주와 맥주, 양주를 섞어서 혼자 대여섯 병은 비운 듯했다.
마치 충성을 보이듯 거침없이.
고영대가 그런 서유림이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서유림을 보고 있으면 그냥 괜히 흐뭇했다.
그러다 보니 만난 지 하루 만에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다.
“앞으로 넌 내 동생이야. 너도 날 형님이라고 불러?”
“아휴, 제가 어떻게 의원님을. 가당치도 않습니다.”
서유림이 허리와 고개를 굽실굽실했다.
사실 고영대도 그런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단 하루만에 이렇게 마음이 열리다니.
역시 운명적인 만남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