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
나에게 부족했던 것은 (2)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떻게든 이기는 수밖에.
그나마 다행이라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맨손이라면 서유림도 자신 있었다. 인간계에서 격투기를 제법 오래 수련했고, 아리아나로부터 요정무술도 오래 배웠으니까.
“좋아! 해보자고!”
서유림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러자 아리아나가 서둘렀다.
“공정한 결투를 위해서 정령왕을 불러 심판하도록 하죠.”
“정령왕?”
오르테나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오르테나의 반응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바로 정령왕 아리안을 불러냈다.
아리안이 안개처럼 모여들더니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오르테나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대가 어떻게 정령왕을 부를 수 있지?”
“한때는 제 정령이었으니까요. 계약자께서 정령왕으로 성장시켜서 독립시켜주었습니다.”
오르테나의 눈이 더욱 커졌다.
서유림을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졌다. 계약정령을 정령왕으로 성장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엄청난 의미인 듯했다.
다시 쿤타를 바라보았다.
“조심하세요. 보기와는 다른 굉장한 실력자입니다.”
하지만 쿤타는 여유가 넘쳤다.
“내 실력을 못 믿는가?”
“물론 믿습니다. 하지만······.”
“그만. 결과로 보여주겠다.”
쿤타가 오르테나의 입을 막았다.
하긴, 이제 와서 무엇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결투는 이미 성사되었고, 결과는 반드시 나와야 하는 일이다.
아리아나도 결투를 재촉했다.
“마계군단이 뒤쫓아 오고 있습니다. 더는 시간을 끌 수 없어요.”
순식간에 결투장이 마련되었다.
곧장 결투가 시작되었다. 오르테나가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결투를 지켜보았다.
“이야압!”
쿤타는 덩치만큼이나 기합소리도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힘만 무식하게 센 줄 알았는데 스피드와 기술도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소리가 태풍소리처럼 들려왔다.
재빨리 거리를 벌리며 피했지만, 주먹이 일으키는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흩날릴 정도였다.
그래도 서유림이 조금 더 빠르긴 했다. 쿤타의 공격이 있을 때마다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갔다.
서유림도 이따금 공격했다. 특히 로우킥을 많이 날렸다. 재빨리 치고 빠지기에는 로우킥만한 게 없었다.
그런데 역시 강하긴 강했다. 오히려 맞은 놈보다 찬 놈의 발목이 더 얼얼한 느낌이었다.
후아! 저놈을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결투가 계속될수록 자꾸만 자신감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반면 쿤타는 자신감이 상승했다. 서유림이 이리저리 잘도 빠져나가자 마치 고릴라처럼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때리며 포효하기도 했다.
“이놈아! 그렇게 도망만 다니면 어쩌자는 거냐? 마계군단이 공격해올 때까지 시간을 끌자는 거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
지금은 결투의 승자를 가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이 마계군단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그러게 왜 이런 중요한 타이밍에 결투를 벌이느냐고.
그런데 쿤타가 말을 계속 이었다. 그것도 쓸데없는 말을.
아, 물론 서유림에게는 눈이 번쩍 떠질 말이었지만.
“이쯤에서 포기해라. 나와 맞서봤자 다치기만 한다. 내가 이래봬도 2차성장판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는 몸이다. 너는 1차 성장판이나 열었나? 2차 성장판이 있는 줄도 모르겠지? 으하핫!”
이게 무슨 소리야? 저놈이 아직 2차 성장판도 못 열었어?
나는 2차 성장판 연지 한참이 지났는데. 그것도 부족해서 그 후로도 계속 능력이 상승했는데. 비록 찔끔찔끔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2차성장판에 도달도 못한 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능력차다.
그런데 왜 이렇지?
2차 성장판도 열지 못했다면 근력이나 순발력 모두 아직 999가 못 되었다는 뜻이잖아. 반면 나는 모두가 999가 되었고.
그 자체만으로도 근력과 순발력 모두 내가 쿤타보다 높아야 한다.
그런데 막상 부딪쳐보면 쿤타의 근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느낌이다.
이게 말이 돼?
“하핫, 너는 죽은 목숨이다. 이제 항복해라.”
쿤타가 다시 공격해왔다.
그런데 갑자기 그 움직임이 조금 느려진 느낌이다. 게다가 위력도 아까보다 훨씬 줄어든 것 같다.
겨우 쿤타의 말 한 마디가 가져온 변화였다.
순간 서유림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내 능력이 부족했던 게 아니었어. 내 자신감이 부족했던 것뿐이야.’
쿤타의 이미지에 처음부터 압도당한 것이다. 그래서 ‘쿤타가 나보다 강해.’라고 스스로 인정해버린 것이다.
1차성장판이 열린 후에 오르는 모든 능력은 잠재력이라고 했다. 즉 내가 터뜨리지 못하면 있으나마나한 능력이라는 거지.
그러니 쿤타 앞에만 서면 잠재력발휘를 못하고 자꾸 움츠러들 수밖에.
무조건 내가 이긴다. 내가 훨씬 더 강해.
서유림이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날아오는 쿤타의 주먹을 노려보며 손을 들어 막았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쿤타의 주먹이 서유림의 손에 잡힌 채 그대로 멈춰버린 것이다. 마치 서유림의 손이 거대한 벽이 되어 쿤타의 주먹을 막아선 듯했다.
쿤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놈이!”
다시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서유림의 손에 의해 막혔다. 옆으로 피하거나 흘리는 게 아니라 서유림의 힘으로 쿤타의 힘을 제압한 것이다.
쿤타는 물론이고 오르테나도 얼굴이 창백해졌다. 상황이 어떻게 이렇게 순식간에 돌변할 수 있단 말인가?
반면 아리아나의 입술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껍질 하나를 깨셨군요. 축하드려요.’
아리아나의 미소가 서유림의 입술에도 전염되었다. 서유림도 어느새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제 그만 끝내자. 마계군단 몰려오잖아.”
이번에는 서유림이 쿤타를 공격했다.
반대로 쿤타가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서유림의 주먹과 발차기가 날아올 때마다 막고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서유림이 숨겨두었던 비장의 한수를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강종범의 스텝을 사용해봐야 하겠군.’
서유림의 스텝이 갑자기 변했다. 어슬렁거리듯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다.
쿤타의 눈이 어지러웠다. 어느 순간에 펀치나 발차기가 날아올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펀치가 오나 싶어서 움찔하면 그냥 한 걸음 다가오는 것이고, 그냥 다가오는가 싶은데 갑자기 발차기가 날아왔다.
파앗!
“크윽!”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저토록 작은 체구로 공격했는데 어떻게 이런 엄청난 파워를 내뿜는 것일까?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유림이 자신의 입으로 직접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2차성장판을 열었단다.”
“거짓말. 말도 안 돼. 2차성장판을 연 사람은 거의 없다고 했다.”
“맞아. 거의 없지. 하지만 분명해 존재한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나이고.”
서유림이 몸을 날리듯 하며 주먹을 뻗었다. 쿤타의 얼굴을 향해.
쿤타가 재빨리 몸을 빼며 막았다.
하지만 진짜 공격은 무릎이었다. 서유림의 몸이 허공으로 붕 날아오르더니 그대로 무릎을 굽혀 쿤타의 복부를 찍었다.
“끄억!”
그것으로 끝이었다. 강한 충격을 받은 쿤타가 그대로 허리를 굽히며 쓰러졌다. 그리고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아리아나가 오르테나를 바라보았다.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말투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내용만큼은 조용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오르테나. 군례를 취하라.”
오르테나 역시 태도가 조금 전과는 180도 바뀌었다. 그토록 오만하고 도도하던 오르테나가 아무런 불반도 없이 아리아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굽혔다.
“오르테나, 지금부터 아리아나님을 군주로 섬기겠습니다.”
정령계는 참 독특한 곳이로군. 계약자의 결투 승패가 요정의 위아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다니.
그걸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그건 정령계의 존재에게만 국한된 이야기였다. 정작 서유림에게 패배한 쿤타는 여전히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서유림이 쿤타를 바라보았다.
“너는 왜 가만히 있냐?”
그러자 아리아나가 서유림을 만류했다.
“이건 요정들, 그중에서도 정령신의 후보 사이의 문제에요. 요정끼리 군신의 관계가 되었다고 해서 계약자까지 그 관계에 얽매이지는 않아요.”
하긴, 생각해보니 그렇군.
계약자는 마음에 안 들면 정령계로 안 들어오면 그만이니까.
쿤타도 그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조금 회복된 모양이다. 다시 서유림을 향해 도전적인 눈빛을 보였다.
“왜? 다시 한 번 붙어보게?”
서유림이 도발했다.
그제야 슬쩍 시선을 피했다. 단 한 번의 결투만으로 자신이 서유림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확실하게 깨달은 거겠지.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마계군단이 더 가까이 쫓아오기 전에 거리를 벌려요. 오르테나. 지금부터 요정 군단을 통합하겠다. 내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오도록.”
“예, 아리아나님.”
“유림씨는 목걸이와 마법의 서들을 챙기세요.”
“아, 그럴까?”
서유림이 손을 내밀었다. 아리안이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던 성물 목걸이와 마법의 서들을 서유림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나타날 때처럼 안개가 되어서 사라졌다.
그런데 과연 어떤 마법의 서들일까?
성물 목걸이와 비견될 정도의 물건이니 틀림없이 굉장한 것들이겠지.
게다가 아까 듣기로는 쿤타의 마력이 999가 되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그 말은 마력이 이미 999가 된 나는 얼마든지 익힐 수 있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아직 마법의 서 이야기를 꺼낼 적절한 타이밍이 아니다. 일단 출발한 후에 달리면서 물어보면 되겠지.
아리아나는 신속하게 명령했다. 그리고 곧장 요정군단을 출발시켰다. 오르테나와 쿤타가 약 10m쯤 뒤에서 따라왔다.
그제야 서유림이 아리아나 곁으로 바짝 붙어 섰다.
“설마 오르테나나 쿤타가 뒤에서 기습을 하진 않겠지?”
“정령계에서 군신관계는 정령신께서 맺어주는 겁니다. 자의로 그 관계를 배신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안심이군.
쿤타는 위험요소가 조금 남아있긴 하지만, 오르테나가 잘 관리하겠지.
그건 그렇고.
“이 마법의 서들은 내용이 뭐야? 내가 익힐 수 있는 거야?”
“물론이죠. 유림씨는 2차성장판을 연 분이잖아요. 정령신께서 금지한 것만 아니라면 모든 마법을 다 익히실 수 있어요.”
오! 역시!
“그럼 이 마법서는······ 내가 가져도 되는 거야?”
“네, 그건 유림씨의 몫이에요. 지금이라도 익히세요. 익히는 방법은 알고 계시죠?”
그야 물론이지. 단지 내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참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지.
달리는 와중에도 마법의 서를 익히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서유림이 하나하나 마법의 서를 익혔다. 손을 뻗고 의지를 발현하면 알아서 서유림의 몸에 흡수되었다.
마법의 서는 무려 다섯 개나 되었다.
서유림이 하나하나 흡수할 때마다 아리아나에게 그 특징과 사용법 등을 물어서 익혔다.
그런데 마지막 마법의 서를 흡수하는 순간 서유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앗! 마인드컨트롤이다.”
아리아나가 가볍게 웃었다.
“맞아요. 저도 아까 그게 있는 걸 보고 조금 놀랐어요. 좀처럼 보기 힘든 마법의 서인데.”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마인드컨트롤은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마법이에요.”
아리아나는 제법 빠르게 뛰면서도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전에도 체력 하나만큼은 대단했지만, 성물 목걸이를 찬 후로는 달리기 정도로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마인드컨트롤은 가장 큰 특징이 상호간의 호감도와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마법이라는 점이었다.
즉 호감도와 신뢰가 높을수록 강한 마법구현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런 호감도나 신뢰를 높이는 데에도 마인드컨트롤을 사용할 수 있다.
쉽게 말하자면 신뢰도 1을 바탕으로 마인드컨트롤을 사용하면 신뢰도 2까지 금방 오를 수 있고, 다시 신뢰도 2를 바탕으로 마인드컨트롤을 사용하면 신뢰도 4까지 금방 오르는 식이다.
그렇게 계속 공을 들이다 보면 상대방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한신뢰도를 갖게 되고, 그렇게 되면 그의 정신을 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그렇군.”
아리아나의 설명을 듣다 보니 마인드컨트롤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가 금방 떠올랐다.
서유림의 입술이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