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
궁극적인 목표 (2)
뜬금없는 이야기에 뜬금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답이 뭔지는 알 것 같다. 나도 무협소설 좀 읽었다는 놈에 속하거든.
게다가 김영자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유추해보면 답은 쉽게 나온다.
“하오문인가요?”
김영자가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어떻게 알았어요?”
그 정도는 삼척동자도 알겠다.
“그냥 찍었습니다. 하하.”
“맞아요. 21세기는 정보의 시대죠. 제가 만들고 있는 조직이 언젠가는 대한민국을 바르게 움직일 수 있는 정보단체가 될 거라고 믿고 있어요. 지금도 웬만큼 목표는 이루었고.”
텐프로들을 정보원으로 활용한다는 뜻이군. 물론 다른 분야에도 손을 뻗쳤겠지만, 그 부분까지는 이야기하지 않을 테고.
“하지만 21세기의 하오문을 만드는 게 나의 최종 꿈은 아니에요. 진짜 꿈은 따로 있죠.”
“그게 뭔가요?”
서유림이 알아서 물어주었다. 이따금 장단을 맞춰줘야 이야기하는 사람이 힘이 날 테니까.
김영자가 주스를 마시며 살짝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는 다시 서유림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 나라를 부패시키고 있는 황국회의 멸절이에요!”
멸절! 멸망시켜서 아주 없어버린다는 뜻이다.
여자가 사용하기에는 조금 강한 의미다.
게다가 그 대상이 황국회다. 김영자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파워를 가진 단체라고 했다. 대통령도 황국회가 지명한다고 할 정도로.
그런 엄청난 단체를 김영자가 멸절시킨다고?
굉장한 도전이다.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될 수도 있다. 황국회가 아닌 김영자 본인이 멸절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겠지.
“알아요.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꿈인지. 하지만 실패해봤자 제 목숨 하나 내놓으면 끝나는 일이에요. 하지만 성공한다면······.”
김영자가 뒷말을 삼켰다.
서유림도 굳이 뒷말은 필요 없었다.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는 내용이니까.
그런데 황국회가 그토록 나쁜 존재인가? 김영자를 통해서 나라를 부패시키는 단체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에 대해서는 듣지 못한 것 같다.
“황국회가 어떤 단체이기에 그렇게까지······?”
“대한민국에 암적인 존재죠.”
김영자가 단언하듯 이야기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정치문제였다.
“유림씨는 우리나라가 왜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세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금권선거 때문이에요. 소신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나라를 이끄는 정치인이 되어야 하는데 돈을 많이 쓰는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기 때문이죠.”
돈은 돈을 부르는 법이다. 돈을 많이 써서 선거에서 이기면, 다시 그 돈을 회수하려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딱 쓴 돈만큼만 회수할까? 더 많은 돈을 회수하려 하겠지. 최소 몇 배에서 많게는 몇 십 배까지.
그 돈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그런 악순환이 대한민국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저는 그런 악순환을 끊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놈들의 돈줄을 말려버리는 거죠.”
무슨 말인지 이해는 간다.
그 돈을 좋은 곳에 쓰겠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놈들이 돈으로 나쁜 짓을 하지 못하도록 돈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게 빠져있네.
“어떻게요?”
그러자 김영자가 답을 주지 못했다.
“그것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어요. 지금은 그저 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죠. 그런 정보들이 모인다면 약점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봐요.”
하긴, 그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니까.
엄청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해야 할 것이다.
김영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서유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서유림의 눈을 통해 마음을 읽어보겠다는 듯.
왠지 김영자의 다음 말을 알 것 같다.
“혹시 저와 같은 꿈을 꾸고 싶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사실 전 유림씨 같은 분의 도움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사실 꿈이 다르지는 않다. 황국회가 정말로 그런 존재라면 나도 그런 놈들을 멸절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테니까.
아니, 그런 것이야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 이런 능력을 가진 내가 아니면 누가 그런 일을 하겠는가?
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목표가 같다고 해서 가는 길도 같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누군가와 동행을 결심할 때에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
누가 그 길을 이끌 것인가.
만약 서로의 의견이 갈릴 때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부분에서 갈등이 생긴다면 오히려 함께 가지 않느니만 못하다.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지금처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물론 지금까지는 김영자로부터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했지만.
그 정도 선이 적당할 것 같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만 말씀하세요.”
순간 김영자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이런, 내 말을 오해한 듯싶다. 더 큰 오해를 사기 전에 선을 확실하게 그어주는 게 좋겠다.
“하지만······.”
김영자의 웃음이 조금은 시들어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선을 긋는 일은 뒤로 미룰수록 서로의 관계를 어색하게만 만들 테니까.
“여사님의 부탁이 제 목표나 제 방식과 맞지 않는다면 돕지 않겠습니다.”
“그야 물론이죠. 유림씨는 제 아랫사람이 아니잖아요.”
김영자가 안도의 웃음을 지어보였다. 자신이 우려했던 이야기는 따로 있었던 모양이다.
서유림도 환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저도 여사님과 비슷한 꿈을 꾸고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함께 꿈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래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건배할까요?”
김영자가 잔을 들었다.
서유림도 채희라도 함께 잔을 들었다.
* * *
윤경식은 미칠 것만 같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귀신같은 것을 믿어본 적이 없다. 21세기에 귀신이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야?
하지만 그 굳건한 마음이 자꾸만 흔들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너무도 해괴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상윤과 한태민의 일만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도 비슷한 일들을 겪고 있다고 했다. 두 친구는 며칠 전부터 갑자기 몸이 아파서 끙끙 누워버렸다.
하나같이 7년 전 3월 5일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이었다.
그러니 두려울 수밖에.
하지만 애써 힘을 냈다.
‘씨발, 귀신이건 도깨비건 내 눈에 나타나기만 해봐. 죽여 버릴 테니까.’
윤경식이 더욱 힘껏 뛰었다. 귀신과 상대하기 위해서는 정신이 건강해야 하니까. 그래서 아침마다 아파트 주변을 힘껏 뛰고 있었다.
주변에는 조깅하는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더욱 자신감이 샘솟았다.
한참을 뛰었더니 목이 탔다.
윤경식이 생수통을 열고 물을 마셨다.
아니, 마시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생수통의 물이 미친 듯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마치 뱀처럼 꿈틀꿈틀하며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마치 채찍이라도 된 것처럼 윤경식의 얼굴을 후려쳤다.
그리 아프지는 않았지만, 너무 놀라서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비명이 절로 튀어나왔다.
“으악! 씨발, 이게 뭐야?”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윤경식을 바라보았다. 물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은 못 본 모양이다.
윤경식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귀······ 귀신이다!’
친구들의 말을 들었을 때는 전혀 믿지 않았는데, 자신이 직접 겪고 보니 이제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휴대폰으로 계속 문자가 날아오고 있었다.
내용은 늘 같았다.
[자수해. 안 하면 내가 죽일 거야.]
윤경식 뿐만이 아니었다. 사모회 회원들, 그중에서도 7년 전 3월 5일에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 모두가 같은 문자를 받고 있었다.
윤경식이 얼른 전화를 걸었다. 다른 사모회 회원이었다. 7년 전에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친구였다.
“씨발, 나도 귀신 봤다.”
- 너도 봤냐? 사실은 나도 어제······.
친구도 비슷한 경험을 했단다.
윤경식의 일만이 아니었다. 모든 회원들이 같은 고통을 겪고 있었다. 여고생 귀신이 돌아다니며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 어떻게 하냐? 흐흑. 난 그냥 자수해야겠다.
“씨발, 미쳤어?”
- 미안해. 나는······ 더는 무서워서 못 버티겠다. 그냥 교도소에서 몇 년 살다 나오는 게 나을 것 같아.
친구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윤경식이 자수를 만류하기 위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도 않았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날 함께 있었던 아홉 명 중에서 벌써 네 명이 자수하겠다고 나섰다. 그리고 두 명은 자수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목사도 해결 못 하고, 굿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이러다가 정말로 귀신에게 죽을 것만 같았다.
윤경식도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교도소는 절대로 가고 싶지 않았다. 죽어도.
‘그래! 차라리 그렇게 하자.’
며칠 후.
서유림이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으로 향했다.
출국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당분간은 외국으로 나갈 계획이 전혀 없었다.
공항에 도착한 서유림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놈이 어디 있지? 분명 오늘 여덟 시 비행기라고 했는데.
아! 저기 있군!
윤경식이 보였다. 신분을 감추겠답시고 모자에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었다. 하지만 뭐가 두려운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만 봐도 그가 윤경식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서유림의 입술이 씰룩 말려 올라갔다.
외국으로 도망가시겠다.
정말 좋은 방법이었다. 그러면 서유림도 윤경식에게 손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 물론 사람을 시켜서 테러를 가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웬만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서유림이 윤경식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두세 걸음 가까이 다가갔을 때 서유림의 손이 기묘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윤경식이 갑자기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바닥에 쓰러졌다.
“으앗!”
서유림이 얼른 다가가서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괜찮으세요?”
“감사합니······ 아!”
윤경식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순간 온몸의 체력이 바닥까지 쭉 빨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뭔가 찌릿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부터 갑자고 온몸이 욱신욱신 쑤시기 시작했다. 마치 독감에 걸린 것처럼.
“조심하셔야죠.”
서유림이 살짝 힘을 줘서 윤경식을 일으켜주었다. 그리고는 할 일 다 했다는 듯 다시 뚜벅뚜벅 멀어졌다.
그러면서 서유림의 손이 다시 한 번 슬쩍 움직였다.
가뜩이나 힘이 빠진 윤경식은 슬립다운 마법에 온몸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이쿠!”
서유림의 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갔다.
‘평생 그렇게 고통 받으며 살아가라. 너는 그래도 싼 놈이다.’
비슷한 시각.
사모회 회원 여섯 명이 함께 서울지방경찰청으로 몰려갔다. 하나같이 7년 전 3월 5일의 사건과 연관된 회원들이었다. 고상윤에 의해 이름이 노출된 자들이기도 했다.
그중 세 명은 온통 죽을상이었다. 심한 독감에 걸린 것처럼 온몸이 욱신욱신 쑤셨기 때문이다. 몸이 덜덜 떨릴 정도의 심한 오한도 느껴졌다.
감기나 독감은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의사를 찾아가 진료를 받아보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게다가 휴대폰 문자는 계속 날아왔다.
[자수해. 안 하면 죽어.]
그래서 결국 이렇게 경찰청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단체로.
사실 윤경식이 미국으로 출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외국으로 도망갈까?’ 하는 고민을 했었다.
그런데 하루도 못 돼서 윤경식이 미국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 더는 방법이 없었다.
“자수하겠습니다. 7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