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소소하지만 쓸 만한 능력 (3)
- 그곳에 경찰이? 정말이오?
“경찰 중에 내가 아는 얼굴이 있소. 사복을 입고 주변을 서성이고 있소. 아무래도 이곳도 노출된 것 같소. 대체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이곳까지 노출됐단 말이오?”
서유림이 조금은 역정을 내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무리하지는 않았다. 자칫 목소리가 빗나가기라도 한다면 육구봉이 괜한 의심을 할 수도 있다.
육구봉은 쉽게 믿지 못하는 듯했다.
- 그럴 리가 없는데.
“아무래도 경찰이 아주 깊은 곳까지 알고 있는 것 같소. 일단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겠소. 그런 다음에 연락할 테니 그곳에서 봅시다. 휴대폰 꺼놓을 테니 내가 연락할 때까지 전화 하지 마시오.”
- ······알겠소.
서유림이 휴대폰 전원을 껐다.
입술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됐군! 설마 눈치 채고 도망가는 건 아니겠지?’
여기까지 했으니 나머지는 운에 맡기는 수밖에.
서유림이 장소를 이동했다. 은평구에 있는 광명회원의 원룸이었다. 그리고는 육구봉에게 원룸의 주소를 전송했다.
[이곳으로 오시오.]
잠시 후.
육구봉이 차량을 멈춰 세웠다. 원룸촌이 즐비한 좁은 골목이었다.
고개를 들어서 원룸 이름을 확인했다.
[사랑 원룸 102동]
‘여기가 맞는군.’
다시 사방을 살폈다. 혹시 몰래 지켜보는 이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육구봉이 차량에서 내려서 원룸을 향해 걸었다. 그러면서도 두 눈은 연신 주변을 살폈다. 조심성 많은 육구봉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때 휴대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육구봉이 얼른 문자를 확인했다.
[도착하려면 멀었소?]
육구봉이 답장을 보냈다. 아니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거의 다’라는 글자를 입력하는 순간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검은 복면을 쓴 사내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험하다!’
육구봉이 생각할 것도 없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복면인과 무려 20m 가량이나 떨어져있었는데, 불과 3초도 못 돼서 복면인에게 따라잡힌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빠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힘이 어찌나 세던지 뒷덜미를 잡히는 순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대로 질질 끌려서 육구봉의 차량으로 끌려 들어갔다.
“누, 누구세요? 저한테 왜 이러세요?”
“네가 육구봉 맞지?”
서유림이 장성식의 목소리로 물었다.
“아닙니다. 사람 잘못 봤습니다.”
육구봉이 일단은 발뺌부터 하고 봤다.
하지만 무의미한 발뺌이었다. 서유림이 육구봉의 휴대폰을 빼앗아서 문자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서유림이 장성식의 휴대폰으로 보낸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그제야 육구봉이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뭘 잘했다고 한숨이냐?”
서유림이 육구봉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육구봉이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것이 육구봉이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이었다.
* * *
정령계로 들어왔다.
정령계의 하루는 어제 같은 오늘의 연속이었다.
걷고 또 걷고.
그러다가 소규모 마계 마계 군단이 앞을 막으면 깔끔하게 청소하고 다시 동쪽을 향해 걷는 것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뜨자마자 동쪽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오르테나 군단과는 대략 1km가량의 거리를 두고 걸었다.
지형이 제법 거칠었다. 양쪽으로는 고개를 번쩍 들어야 정상이 보일 정도로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서있고, 그 사이로 계곡 같은 길이 나있었다.
길이 넓지 않아서 오르테나의 군단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얼마 걷지 않아서 아리아나가 걸음을 멈추었다. 전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기운에서 뭔가를 느낀 것이다.
“마계 군단이에요.”
또 나타났군. 대체 얼마나 많은 마계 군단이 정령계로 들어온 거야?
“이번에는 군세가 얼마나 되는데?”
“대충 2만쯤 되는 것 같아요.”
고개를 돌려보니 저쪽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오르테나 군단도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오르테나 역시 아리아나처럼 마계 군단의 출연을 느낀 듯했다.
“설마 벌써 따라잡힌 건 아니지?”
“그건 아니에요. 다른 마계 군단이에요.”
그러겠지. 뒤따라오는 마계군단과는 최소 이틀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었으니까.
2만의 군세라면 대단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자면 요정 군단이 적지 않게 희생될 것이다.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 최선의 길이겠지.
전략을 잘 세워서 효율적으로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곳 정령계는 그런 전략전술보다는 마구잡이식 난전을 좋아한단 말이야. 마계 군단도 그렇고 요정 군단도 그렇고.
“일단 상황을 좀 살펴보지.”
“시간이 많지 않아요.”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더욱 빠른 길이 될 수도 있거든. 1시간 일찍 시작해서 이틀을 싸우는 것보다는 1시간 늦게 시작해서 하루 만에 싸움을 끝내는 게 훨씬 효과적이지 않겠어?
잘하면 희생을 줄일 방법도 찾을 수 있고.
“나에게 1시간만 줘.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지?”
“저는 기다릴 수 있지만, 오르테나와 그녀의 계약자 쿤타는 성격이 급한 것 같아요. 기다려주지 않고 단독으로 돌파하려 할 수도 있어요.”
그러면 오르테나 군단만 피 보는 상황이 되겠지.
하지만 그런 상황은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미우나 고우나 같은 동료니까.
오르테나를 따르는 요정 군단은 또 무슨 죄야?
“알겠어. 서두를게.”
서유림이 계곡의 비탈을 타고 뛰었다. 육체능력이 크게 상승한 덕분에 800m 이상의 높이까지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높이 솟은 바위 위에 올라서니 드디어 전체적인 지형이나 상황, 군세가 한눈에 보였다.
마계 군단은 목책을 세우고 있었다. 1백만 마계의 대군단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만 끌겠다는 속셈이 명확했다.
목책으로 만든 저지선은 제법 탄탄해보였다. 아리아나와 오르테나의 요정군단이 합심한다면 못 뚫을 정도는 아니지만, 시간도 많이 걸리고 엄청난 희생도 치러야 할 것이다.
‘좋은 방법이 없나?’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화공이었다. 바람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정당하게 불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온통 돌로 된 계곡이었다. 화공을 펼치자면 메마른 수풀이나 숲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탈 만한 것이 없었다.
물론 계곡 주변에 나무는 제법 많았지만, 불길이 번질 정도로 울창하지는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지났다. 좀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러다가 오르테나가 먼저 움직이면 낭패일 것이다.
서유림이 다시 비탈을 따라 내려왔다.
“방법이 있나요?”
“될지 모르겠어. 그래도 손해볼 건 없으니까 일단 해보자고. 오르테나한테는 우리가 먼저 공격하겠다고 전해줘.”
“알겠어요.”
아리아나가 눈을 감고 집중했다. 정령신의 후보들은 서로 텔레파시 같은 것으로 대화가 가능한 듯했다.
“오르테나가 그러겠다고 했어요. 이제 뭘 해야 하죠?”
“화공을 펼칠 거야. 요정들에게 각자 장작 한 짐씩 구하라고 해.”
서유림의 명령은 빠르게 전달되었다.
요정 군단은 인간과 달랐다. 어떤 명령을 내리건 이유 따위는 묻지 않고 무조건 따랐다. 그것도 신속하게.
대부분 요정들이 커다란 장작 몇 개씩을 손에 쥐었다.
“돌격해서 목책을 향해 던져. 중앙만 태우면 돼.”
서유림의 명령에 요정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요정 군단이 달려들자 마계 군단이 활을 쏘고 돌을 던지며 대응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마물이고 도구를 사용할 수 있는 마족은 얼마 되지 않아서 큰 위협은 아니었다.
요정들은 목책 근처까지 다가가서 장작을 목책으로 던졌다.
다들 힘이 좋아서 장작은 30m 이상을 쉽게 날아갔다.
모든 장작은 목책의 중앙을 향해서만 던져졌다. 덕분에 목책 중앙은 장작들이 수북하게 쌓였다.
“불을 붙여줘!”
아리아나가 불의 요정을 소환했다. 정령술을 다루는 다른 요정들도 모두 불의 요정을 소환했다.
중앙에 쌓인 장작들이 순식간에 활활 불타올랐다.
“바람! 장작들을 옆으로 날려줘!”
이번에는 바람의 정령이 소환되었다. 돌풍이 일면서 불이 붙은 장작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불의 정령도 함께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불길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크아아-
마계 군단이 불길을 피해 옆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일부 마귀나 마물들은 마족의 명령에 따라서 끝까지 버티다가 불에 타죽기도 했다.
덕분에 목책의 중앙은 뻥 뚫린 상황이 되었다. 불길 때문에 그 누구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아리안! 길을 열어줘.”
정령왕 아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유림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불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아리안이 지나친 자리는 불길이 가라앉으면서 길이 났다.
지금이다. 타이밍을 놓치면 불길이 다시 길을 뒤덮을 것이다.
“돌격! 모두 목책을 통과해! 물의 정령으로 길을 유지해.”
요정 군단이 길을 따라서 빠르게 내달렸다. 뻥 뚫린 길을 따라서 수천 명의 요정 군단이 단숨에 목책 너머에 설 수 있었다.
그제야 마계 군단이 요정 군단을 상대하기 위해서 불길을 크게 우회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불의 정령과 바람의 정령이 소환되면서 불붙은 장작이 마계 군단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겨우 그 정도로 마물이 죽지는 않겠지만, 움직임을 주춤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그러는 사이 모든 요정이 목책을 통과했다. 더는 목책의 방해물 없이 마계 군단과 맞설 수 있었다.
서유림이 선두에 서서 마계 군단과 육박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오르테나 군단도 어느새 목책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쿤타가 거대한 철봉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마계 군단을 휩쓸었다.
역시 쿤타의 무위는 대단했다. 서유림도 나름대로 잘 싸운다고 생각했지만, 쿤타에 비하면 한수 아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무기에서 차이가 너무 컸다.
서유림이 지닌 카리스 정령검은 비록 훌륭한 무기이긴 하지만, 길이가 짧았다. 한 번에 한두 마리의 마귀나 마물밖에 사냥할 수 없었다.
하지만 쿤타의 철봉은 길이만 무려 3m가 넘었다. 그런 엄청난 철봉을 휘둘러대니 한 번에 서너 마리의 마귀나 마물이 휩쓸리듯 쓰러졌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쿤타의 사냥 속도가 훨씬 빨랐다.
아! 자존심 상해!
옆에서 싸우지 말자. 괜히 비교당하는 느낌이다.
서유림이 슬쩍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이놈 봐라! 내가 자리를 옮기자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옆으로 와서 싸운다.
설마 나와 경쟁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러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다시 자리를 옮기자 또 따라붙는다. 실력 차가 이렇게나 크게 난다고 자랑이라도 하듯.
그렇게 전투는 2시간 정도 만에 끝이 났다.
요정 군단의 희생자가 생각보다 많았다. 오르테나의 요정 군단까지 포함해서 대략 2천명도 넘게 희생된 듯했다. 만약 화공으로 길을 열지 않았다면 희생자가 세 배는 되었을 것이다.
물론 저쪽의 군단 2만을 전멸시켰으니 대승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웃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자꾸 줄어들다 보면 나중에는 결국 정령신의 후보와 계약자만 남게 될 테니까.
전투가 끝나자 오르테나가 아리아나 곁으로 다가왔다.
“계약자의 실력이 나쁘진 않군!”
설마 지금 날 추켜세워 주는 거야?
어쩐 일이래?
서유림이 쿤타를 흘끔 바라보았다. 큰 키로 서유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입술이 자랑스러움으로 씰룩 말려 올라가 있었다.
아! 나를 칭찬하는 게 아니었군.
나를 칭찬해주는 척하면서 자신의 계약자인 쿤타를 더 높이 띄워주는 거였다.
아리아나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쿤타님이야말로 정령계의 암흑기를 구원하실 영웅인 것 같습니다.”
오르테나의 입술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후훗, 이번에는 우리가 앞서 출발하겠다. 천천히 뒤따라오도록.”
오르테나가 자신의 요정 군단을 이끌고 먼저 출발했다.
* * *
“마약 유통에 대한 전말 보고서입니다, 주군.”
대장로가 서유림에게 공손하게 보고서를 올렸다.
서유림이 보고서를 펼쳐보았다.
여러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한상민을 시작으로 육구봉, 장성식, 황상규는 물론이고 69캐피탈에서 마약과 연루된 자들은 모두 있었다.
마약 유통과 관련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두 드러난 느낌이었다.
계좌번호와 거래내역도 있었다. 마약판매대금이 어느 계좌에 입금되었고, 언제 누구에게 얼마나 송금되었는지도 모두 나타나 있었다.
그 끝에 한상민이 있었다.
물론 한상민 명의의 계좌는 아니었다. 하지만 김영자가 경찰 지인을 통해 확인해본 결과 그 계좌의 카드를 사용하는 사람도 한상민이었고, 돈을 출금해간 사람 역시 한상민이었다.
마약을 숨겨놓은 곳도 확인했다.
이 정도면 완벽했다.
이제 선택만이 남았다. 이놈들을 서유림의 방식으로 처벌할 것인가? 아니면 경찰에 넘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