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소소하지만 쓸 만한 능력 (2)
‘아휴, 죽겠네. 시발 꼼짝을 못하겠네.’
한상민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복도에서 넘어지고 벌써 하루가 지났는데도 통증은 전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러다가 정말 허리병신 되는 것 아냐?’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마침 의사들이 병실로 들어왔다. 간호사들이 커다란 차트 같은 것들을 잔뜩 들고 따라 들어왔다.
“상태가 어떻습니까?”
한상민이 다급히 물었다. 허리만 아픈 게 아니라 목까지 함께 아파서 눈알만 옆으로 돌려서 의사를 바라보았다.
의사의 표정은 심각했다.
“일단 사진을 보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의사가 몇 장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진을 본다고 한상민이 뭘 알 수가 있나?
“그냥 결과만 말씀해주세요.”
‘그래서 상태가 어떠냐고? 이 잡것들아!’
한상민이 버럭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의사가 아까보다 더욱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상황이 많이 안 좋습니다. 수술이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씨발!’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삼켰다. 수술이 필요하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몸을 수술할 의사 앞에서 욕을 할 수는 없는 일. 화가 나서 앙갚음이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물론 의사가 그런 비양심적인 일을 하지는 않겠지만.
“수술하면 완치될 수 있습니까?”
“완치까지는 어렵지만 일상생활에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한상민이 기어이 분통을 터뜨렸다.
“아! 씨발!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 악!”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시원하게 안 된다. 살짝 몸을 꿈틀했을 뿐인데 허리에서 끊어질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수술에 동의하시면 가능한 한 빨리 일정을 잡아보겠습니다.”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척추 분야에서는 지금 이 의사가 국내에서 최고 권위자다.
“알겠습니다.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잘 될 겁니다.”
의사가 병실을 나섰다.
“씨발, 씨발, 씨발.”
한상민이 욕을 마구 내뱉었다.
하지만 아무리 욕을 내뱉어도 가슴이 뚫리지가 않았다. 몸을 꼼짝도 못한 채 입만 나불거리듯 내뱉어서 더욱 그런 듯했다.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게다가 더욱 급한 일이 있었다. 그 생각만 하면 허리 통증조차 싹 잊을 정도로 긴장감이 느껴졌다.
손을 움직여서 휴대폰을 들었다.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으니 휴대폰 짚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전화를 걸려다가 문득 옆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눈에 걸렸다. 고개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니 누가 옆에 있는지 살펴보는 것조차 힘들다.
이러다가 눈알을 너무 심하게 굴려서 사시가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었다.
“다들 나가있어.”
“예.”
간호사와 조무사, 경호원 등이 얼른 병실 밖으로 나갔다.
한상민이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상대방이 냉큼 받았다.
“씨발, 어떻게 됐어? 내가 지시한 게 언제인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야?”
- 죄송합니다, 실장님. 저도 지금 몸이······.
누가 그걸 모르나? 장성식 부장도 그때 산에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허리와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한상민보다는 양호한 상태라고 했다. 아직 퇴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혼자서 걸어 다닐 정도는 된다지 않는가?
“이 새끼야. 그 정도로 안 죽어. 지금 이게 얼마나 위기상황인지 몰라서 그래? 빨리 안 움직여?”
- 그렇지 않아도 퇴원수속 다 밟았습니다. 오늘 아침부터 움직일 수 있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조치하겠습니다.
한상민이 휴대폰을 내팽개치듯 던졌다.
하지만 몸이 엉망이다 보니 휴대폰은 멀리 날아가지도 못하고 겨우 배 위에서 떨어졌다.
생각할수록 욕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황상규 개새끼. 감히 내 뒤통수를 때려? 넌 죽었어! 그나저나 피로는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거야? 졸려 뒈지겠네!’
한상민의 눈이 솔솔 감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한상민이 눈을 번쩍 떴다.
‘뭔가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문득 배 위에 놓인 휴대폰이 가물가물 보였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문자 한통이 도착해있었다.
장성식 부장으로부터 온 문자였다. 그런데 내용이 심각했다.
[경찰이 저를 찾고 있습니다. 3월에 태국에서 한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상민은 너무 놀라서 순간적으로 심장이 뚝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으악! 이게 무슨 말이야? 경찰이 그걸 어떻게 알아? 어쩌지? 장성식에게 전화를 걸어도 될까?’
상관없을 것이다. 자신이 비서로 거느리던 자가 아니던가? 전화 한통 한다고 해서 자신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을 것이다.
장성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벨이 한 번 울리자마자 통화거절 당했다.
대신 문자가 날아왔다.
[숨어있습니다. 근처에 경찰이 있습니다. 이대로 잠수 탈까요?]
장성식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니 상황이 심각한 듯했다. 장성식은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겠지.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상민이 재빨리 문자를 날렸다. 혹시 경찰이 볼 수도 있으니 발뺌할 수 있는 문자로 해야 할 것이다.
[ㅇ]
이 정도면 장성식은 알아봐도 경찰이 증거로 채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성식이 다시 문자를 날려 왔다.
‘이놈이 왜 자꾸 문자 질이야? 나중에 경찰이 통화내역 확인하면 어쩌려고?’
그래도 문자는 확인해보았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혼자 한 짓입니다. 대신 뒷일을 책임져주세요.]
[ㅇ]
한상민이 다시 최소한의 문자로 대답해줬다.
그래도 왠지 불안했다. 주고받은 문자를 증거채택까지는 아니겠지만, 의심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다시 휴대폰을 열고 지시했다.
[문자는 다 지워]
[알겠습니다.]
서유림이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내렸다.
옆에는 장성식이 붙잡혀있었다.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자신과 자신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몸이 서유림이라는 사실은 죽었다 깨어나도 짐작조차 못할 것이다. 복면을 쓴데다가 목소리까지 변조했기 때문이다.
서유림이 장성식을 바라보았다. 입술은 흐뭇하게 웃고 있었지만, 장성식은 그것도 보지 못하겠지.
<< 후훗, 너희는 이제 죽은 목숨이다. >>
“흥! 아무리 그래봤자 그 정도는 절대 증거로 채택될 수 없다.”
증거? 난 그딴 것 필요 없는데. 장성식도 한상민도 굳이 경찰이나 법정으로 보내야만 할 이유가 전혀 없거든. 너 같은 놈들, 여차하면 나만의 방식으로 처벌하면 그만이라고.
물론 서두를 일은 아니다. 이 일에서 장성식은 작은 깃털에 불과하니까. 이왕 손을 댔으니 몸통에 머리까지 모조리 잡아서 처벌해야지.
지하실을 빠져나온 서유림이 김영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이번에는 어떤 일인가요?
“휴대폰 하나를 입수했는데, 그 안에 있는 정보 좀 분석해주세요.”
며칠 후.
“만납시다. 만납시다. 장성식이오. 쫓기고 있소. 장성식이오.”
서유림이 목소리 톤을 바꿔가며 연습을 계속했다.
그럴 때마다 휴대폰으로 녹음해서 장성식의 목소리와 비교해보았다. 권진아 덕분에 우연히 발견한 성대모사의 능력을 발휘해보려는 것이다.
아리안 덕분에 목소리 변조가 자유자재이긴 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목소리나 말투를 똑같이 흉내 낸다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목소리는 비슷한 것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느낌이 달랐다.
“이상하네. 왜 이렇게 잘 안 되지? 장성식이오. 만납시다. 쫓기고 있소.”
계속해서 연습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더 비슷해지기는 했다.
한참 연습하고 있는데 김영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장성식의 휴대폰 확인했어요. 근데 아주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들어있네요.
그랬겠지. 장성식은 물론이고 한상민도 아주 재미있는 짓을 많이 하는 놈들이니까.
“혹시 마약과 관련한 정보도 있던가요?”
- 있어요. 밀가루라고 표현해서 종류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마약을 취급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요. 몇몇 사람과 문자고 주고받은 정황이 휴대폰에 남아있어요.
됐군. 드디어 고구마 줄기를 잡은 거다. 이제 줄기가 끊어지지 않게 쭉쭉 캐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어차피 다음 일을 처리하려면 장성식의 휴대폰이 필요하다.
서유림은 곧장 김영자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김영자는 언제나처럼 보이차를 권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런데 마약과 연루된 이들이 누군가요?”
“혹시 69캐피탈이라고 알아요? 장성식은 공급책이고 69캐피탈이 마약을 처분하고 있어요.”
69캐피탈.
기억난다. 서유림이 마약 루트를 역으로 추적하다가 정일돈, 정이돈 형제가 운영하는 돼지이모를 잡아 족친 일이 있다.
그때 돼지이모가 마약을 공급받은 곳이 바로 69캐피탈이었다.
하지만 마약을 실질적으로 취급했던 핵심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더는 깊이 들어가지 못했었다.
그놈들이 여기에서 다시 튀어나오다니.
“또 누가 있나요?”
“제법 여러 사람이 연루되어있어요. 역시 장성식이 한상민의 가장 확실한 수족이었던 게 분명해요.”
김영자가 휴대폰 정보 분석한 내용을 모두 보여주었다. 보고서 형식으로 아주 잘 정리되어있었다.
서유림이 김영자의 설명을 들으며 놈들을 일망타진할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역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줄기를 따라서 천천히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한상민까지 나오겠지.
그래서 장성식 목소리를 연습하는 것이고.
“감사합니다.”
김영자의 집을 나온 서유림은 계속해서 장성식 목소리를 연습했다. 한 시간쯤 더 연습하자 서유림이 들어도 장성식과 똑같은 말투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장성식 가족이 들어도 구분하지 못하겠지?
자신감이 생겼다.
장성식의 휴대폰을 검색해서 육구봉이라는 이름을 찾았다. 실명인지는 모르겠지만, 69캐피탈에서 마약 관련 일을 처리한 핵심인물이었다.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해보았다. 조금이라도 어색하면 바로 탄로가 날 것이다.
‘됐어!’
먼저 문자를 보냈다. 조금 다급한 상황이 느껴지도록.
[만납시다. 은밀하게. 쫓기고 있소.]
약 5분 정도 기다리자 답장이 날아왔다.
[쫓겨요? 누구에게?]
[경찰에게]
[왜요?]
[밀가루가 걸린 것 같소.]
육구봉으로부터 갑자기 문자가 뚝 끊겼다. 마약 취급한 게 발각됐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서유림이 다시 문자를 날렸다.
[시간이 없소.]
그러자 육구봉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다. 아무래도 문자는 기록이 남을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듯했다.
드디어 지금껏 연습했던 장성식의 성대모사 능력을 써먹을 때가 되었군.
서유림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장성식이오.”
상대방이 잠깐 멈칫했다.
- 말투가 왜 그래요?
뭐지? 똑같이 한다고 했는데.
“내 말투가 어때서?”
- 지금 숨어있는 거요?
말투가 너무 조심스러워서 이상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경찰에 쫓기고 있는 상황이면 당연히 이렇게 조심스러워야지.
“그렇소. 시간이 없소. 내게 밀가루가 좀 더 있소. 이걸 빨리 안전한 곳으로 숨겨놓아야 할 것 같소.”
- 뭐요? 밀가루를 또 가져왔단 말이오? 지난번 것도 아직 한참 남아있는데.
“그렇게 되었소. 아무튼 숨겨놓을 곳이 없소. 경찰이 조만간 집에까지 압수수색을 할 것 같단 말이오. 만납시다.”
- 좋소. 그럼 그곳에서 봅시다.
그곳?
“어디 말이오?”
- 그곳 말이오. 우리가 자주 만나던 곳.
젠장. 장성식과 육구봉이 늘 만나던 곳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까지 알 방법은 없는데. 그렇다고 자꾸 캐물을 수도 없고. 인제 와서 장성식을 고문해서 장소를 알아낼 수도 없고.
어쩔 수 없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일단 일을 진행하는 수밖에.
“알겠소. 지금 출발하겠소.”
- 나도 지금 출발하겠소.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오.
통화를 마쳤다.
일단 급한 위기는 넘긴 셈이다. 그런데 그곳이 어딘 줄 알고 찾아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서유림이 머리를 긁적이며 방법을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굴려야 한다니까.
육구봉과 통화하고 30분이 조금 넘게 지난 듯했다. 지금쯤이면 육구봉이 약속장소로 한참 달려오고 있겠지.
그곳으로 가면 안 될 것이다.
서유림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 지금 가고 있소. 무슨 일이오?
“여기 오면 안 되겠소. 근처에 도착했는데 이곳도 경찰이 잠복하고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