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소소하지만 쓸 만한 능력 (1)
그런 게 있었군. 뭔가 조금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게 아리아나의 마법 때문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덕분에 다시 확인할 수 있었어요. 유림씨가 저를 얼마나 깊이 믿어주시는지.”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아리아나를 깊이 신뢰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게 마인드컨트롤과 무슨 상관인데?
“마인드컨트롤은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어요. 믿음이 강할수록 마인드컨트롤도 강하게 걸리고요.”
아, 그런 거였어?
그래서 자꾸 죄송하다고 그랬던 거구나? 내가 이렇게 깊이 믿는데 그 믿음을 이용한 게 미안해서.
그럼 이제 나도 궁금증 좀 해소해도 되겠지?
“괜찮아. 그럴 만했으니까 그랬겠지. 그런데 아리아나가 굳이 저쪽에게 굽혀야 하는 이유가 뭐야? 저쪽이 태생부터 아리아나보다 위에 있기라도 한 거야?”
“그건 아니에요. 단지 싸우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아리아나가 조금 길게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정령신의 후보는 함께 공존하기 힘든 존재다. 언젠가는 서로 우열을 겨루고 승자가 모든 힘을 빼앗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러니 같은 후보끼리 ㅂ만나면 서로 상대방을 자신의 아래에 두려고 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다툼이 쉽게 생길 수밖에 없다.
계약자들은 더욱 그렇다. 이렇게 함께 동행 하는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왜 그래야 하는데?”
“정령신은 오직 하나뿐이니까요. 언젠가는 단 한 명의 정령신의 후보만이 남게 돼요. 그게 우리의 운명이에요.”
“그럼 만약 싸움이 붙으면 이 많은 요정 군단이 패싸움을 벌이는 거야?”
“아뇨. 요정들은 싸움에 전혀 관여하지 않아요. 그저 관망하다가 승리하는 정령신의 후보를 따를 뿐이죠.”
한마디로 이기는 편 우리 편이로군.
대충 이해는 갔다.
하지만 속이 시원하게 뚫리지는 않았다. 왠지 모르게 저쪽 계약자와 언젠가 한바탕 붙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쪽은 상당히 강해보이던데.”
“계약자의 이름은 쿤타! 전투의 종족이라는 드라크족이에요. 하지만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세요. 유림씨가 훨씬 강해요. 잊었어요? 유림씨는 무려 2차 성장판을 연 존재라고요.”
“그럼 저쪽은 아직 못 열었을까?”
“확신할 순 없죠. 하지만 2차 성장판은 아무나 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 위축될 필요는 없어요.”
그렇단 말이지?
좋아. 쿤타라고 했던가? 언제 걸리기만 해봐라. 날 노려보던 그 눈깔의 먹물을 쪽 빨아버릴 테니까.
“그런데 말이야, 아리아나.”
“네, 유림씨.”
“그 마인드컨트롤인가 하는 것. 혹시 나도 익힐 수 있어?”
정말 매력적인 마법이었다. 만약 인간계에서 사용할 수 있다면 굉장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익힐 수는 있어요. 하지만 불행히도 제가 가르쳐드릴 수는 없어요. 마법의 서를 구해야만 해요.”
“마물을 사냥해서 구할 수 있다는 거군.”
“맞아요. 하지만······ 쉽게 나오지 않을 거예요. 워낙 희귀한 마법의 서거든요.”
그렇군. 역시 좋은 건 귀하다니까.
괜히 헛물 켰네.
* * *
“훅. 훅. 훅.”
서유림이 런닝머신 위를 힘껏 달렸다. 민들레 옥탑방 한쪽에 마련된 런닝머신이었다.
채희라의 옥탑방은 며칠 사이에 많이 바뀌어있었다. 널찍했던 공간을 반으로 뚝 잘라서 서유림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준 것이다.
그곳에 런닝머신과 역기 같은 운동기구가 비치되어있었다.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나자마자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실컷 운동할 수 있었다.
- 오빠. 밥 먹으러 가자.
어! 인터폰까지 있네. 저쪽 방에 있는 채희라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솔직히 배가 막 고파오던 참이었다. 대충 씻고 함께 나가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소화도 시킬 겸 함께 거리를 걸었다. 채희라도 서유림도 얼굴 드러나서 좋을 게 없기 때문에 모자에 커다란 선글라스로 얼굴을 가렸다.
“요즘에는 민들레 괴롭히는 놈들 없지?”
“당연하지. 조금 진상 같은 손님들이 있어서 그렇지, 아주 잘 돌아가.”
“진상 같은 손님들?”
“그런 게 있어. 정상적인 거니까 오빤 신경 안 써도 돼.”
하긴, 내가 민들레 매니저도 아닌데 뭐. 내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하겠지.
실컷 걷고 다시 민들레로 돌아오니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이제 임채모에게 가봐야 할 시각이었다. 오늘 정오 즈음에 드라마 촬영이 예정되어 있었다.
서유림이 막 민들레를 나서려고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해보니 김영자였다.
그러고 보니 늘 김영자에게 도움을 받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인지 휴대폰에 김영자의 이름이 뜨면 괜히 반가웠다.
게다가 기다리던 전화이기도 했다.
얼른 전화를 받았다.
김영자는 불필요한 말로 시간을 낭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 점에서는 서유림과 코드가 맞았다.
오늘도 전화를 받자마자 용건부터 꺼냈다.
- 황상규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아봐달라고 했죠? 경찰이 그를 왜 조사하는지에 대해서요.
“네. 확인된 게 있나요?”
- 마약과 관련되었다고 하네요. 황상규가 올해 3월 말 즈음에 태국으로 가서 마약상인들과 접촉한 정황을 파악한 것 같아요.
서유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이건 황상규만의 문제가 아니라 유진그룹의 한상민 실장과도 연관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약을 취급한 게 확실한 건가요?”
- 경찰은 100%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 확실한 물증도 없고, 또 황상규를 실질적으로 움직인 몸통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조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통화를 마친 서유림이 혼자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만약 황상규가 정말로 마약 관련 범죄를 저질렀다면, 경찰의 예상대로 황상규의 단독범행은 아닐 것이다. 몸통은 따로 있을 것이고, 또한 그것을 움직였을 머리도 있을 것이다.
머리를 생각하자 한상민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정이 쉽게 세워졌다.
‘한상민이 지시하고 황상규가 손발이 되어 움직인 거로군.’
하지만 100%는 아니었다. 경찰은 100%라고 확신한다지만, 그건 황상규와 관련한 이야기고, 서유림은 한상민이 관련되어있다는 확실한 정황이 필요했다.
어떻게 확인하지?
서유림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 일만 확인하면 왠지 확실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유림이 얼른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 어머, 서 팀장님! 오랜만이에요.
전에는 대리님이라고 부르더니 이제는 팀장님이라고 부르네. 이제 직장 동료도 아닌데 호칭 좀 바꾸면 안 될까?
“오랜만이야, 권진아씨! 잘 지내고 있지?”
- 그럼요. 실장님 바뀐 후로 사무실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팀장님은요?
“잘 지내지. 그런데 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 뭔데요?
이틀 후.
서유림이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아가씨들이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꺄악! 서유림씨다!”
“어머! 너 정말로 서유림씨하고 친하구나!”
“안녕하세요. 팬이에요. 정말 반가워요.”
권진아를 포함해서 아홉 명이나 되었다. 그중 남자는 오직 서유림 혼자뿐이었다.
꽃밭이라는 말만 들어봤지, 이런 분위기는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긴장이 덜 되었다. 다들 서유림을 광적으로 반겨주었기 때문이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다른 이들과 달리 시종일관 팔짱을 낀 채 서유림과 권진아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는 아가씨가 있었다.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천소영. 권진아를 자극해서 나를 이곳으로 불러내게 한 장본인.
그 덕분에 아무런 부담 없이 권진아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런 부분을 생각한다면 고마운 존재이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얄미움이 훨씬 컸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서 따로 선물 하나를 준비해왔다. 선물을 풀기에는 지금이 적당한 타이밍인 것 같았다.
서유림이 손을 공손하게 뻗어서 천소영을 가리켰다.
“아, 이 아줌마가 그분이로구나!”
그러자 천소영의 얼굴이 갑자기 새빨개졌다.
“이보세요. 아줌마라뇨?”
“어! 결혼하신 분 아니었나요? 죄송합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군요. 그럼 그 결혼하신 아줌마는 어느 분이지?”
천소영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서유림을 매섭게 노려보다가 다시 권진아를 노려보았다.
“네가 시켰니?”
“응? 뭐를?”
권진아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권진아는 모르는 일이다. 서유림이 권진아로부터 사연을 듣고는 혼자 꾸며낸 일일 뿐이니까.
“나보고 아줌마라고 부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그런 걸 왜 시켜?”
“그럼 저 아저씨가 왜 나보고 아줌마라고 하는데?”
서유림이 티이밍을 노리다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결혼한 사람을 아줌마라고 부르는 것 아닌가? 딱 봐도 이중에 유일하게 아줌마로 보이는데.”
천소영이 다시 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가방을 챙겨들며 방을 빠져나갔다.
“아아, 기분 나빠. 나 갈래.”
“얘, 소영아. 그렇게 가면 어떻게 해.”
“소영아, 기다려봐!”
다들 천소영을 향해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정작 나서서 팔목을 잡거나 옷깃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말뿐이었다.
그렇게 천소영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로 눈을 한 번씩 마주치며 어깨를 들썩 해보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자자, 앉아요. 간 사람은 간 거고 우리끼리 재미있게 놀아요.”
이런 자리에 끼어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왠지 발각되면 세상 모든 남자들로부터 공공의 적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여자들 노는 것도 알고 보니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는 분위기였다. 술 종류도 소맥이었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안 마시면 쳐들어간다. 쿵짜라작작.”
남자들 노는 것보다 더 심한 듯하다.
오늘 보니 권진아도 그렇게 쾌활할 수가 없었다. 술도 곧잘 마셨다.
물론 그 분위기의 중심은 서유림이었다. 말도 서유림이 가장 많이 한 것 같고, 이런저런 재롱도 서유림이 가장 많이 떤 것 같다.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서유림만 붙잡고 늘어졌기 때문이다.
“오빠, 개인기 없어요?”
이번엔 또 개인기야?
“그런 건 없는데.”
“에이, 그러지 말고 보여줘요. 성대모사나 모창 같은 것 있잖아요.”
“성대모사 좋다. 아무나 좀 해줘요.”
성대모사?
그런 거라면 자신 있다. 정령 아리안을 만나면서부터 목소리 변조가 자유자재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콕 짚어서 흉내내본 적은 없지만, 시도한다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럼 임채모 선생님 흉내 한번 내볼까?”
“꺄악. 좋아요. 해줘요.”
서유림이 아가씨들의 응원에 힘입어서 임채모의 목소리를 흉내내어보았다.
“다들 일찍 집에 가서 자야죠. 그래야 얼굴이 예뻐져요.”
“꺄악! 똑같아. 똑같아!”
아가씨들이 좋다며 박수를 쳐주었다.
그런데 거짓 칭찬이 아니었다. 권진아도 깜짝 놀랐다는 듯 예쁜 입을 떡 벌리며 마구 박수를 쳐주었다.
심지어 서유림 본인조차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내가 성대모사를 이 정도까지 잘했나?’
내친 김에 다른 유명연예인들의 성대모사도 해보았다. 그리고 정치인들까지도.
완벽했다. 게다가 하면 할수록 실력이 느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들으면 그 사람이 옆에 와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오호! 이거 아주 쓸 만한 능력인걸!’
권진아 덕분에 새로운 능력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오늘 나오길 잘했군. 시간을 투자한 보람이 있어.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