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마인드 컨트롤 (2)
그렇다면 말은 되는군.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마계 군단의 추격을 늦출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또 다른 정령신의 후보라. 그녀는 어떤 요정일까?
혹시 그녀도 나와 같은 계약자가 있을까?
만약 있다면 그는 어느 세계의 존재일까? 설마 나와 같은 인간계의 존재는 아니겠지?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성주한테는 이야기했어?”
“아뇨. 저도 지금 정령의 기운을 느꼈어요.”
“그럼 얼른 가서 이야기하지. 이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잖아.”
“그래요.”
함께 성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성주도 요즘 들어 평화로운 한때를 지내고 있었다. 물론 암흑기 이전의 평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화로운 한때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리아나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크게 움찔했다.
“예? 배, 백만······ 이라고요?”
“그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마계 군단에 쫓기는 요정의 무리도 10만은 넘는 것 같아요.”
“이럴 수가. 리니스 성을 조금 보강했다고 하지만, 백만을 상대하기에는······.”
물론 무리지.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계 군단에 대고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아리아나가 방법을 제시했다.
“요정의 무리가 도착하는 즉시 함께 요나스 성으로 가겠어요.”
“요나스 성은 너무 멀지 않나요?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최소한 여섯 달은 걸려야 도착할 수 있는 곳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요나스 성에 도착하기만 한다면 백 만의 마계 군단을 너끈하게 상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긴 하죠. 요나스 성이라면 백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마계 군단도 상대할 수 있겠죠.”
요나스 성이 크긴 큰 모양이다.
그런데 여섯 달이나 걸린다니. 과연 마계 군단에 붙잡히지 않고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준비해주세요. 도착하는 즉시 떠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성주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리니스 성의 요정들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리니스 성을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아리아나나 서유림은 딱히 준비할 게 없었다. 챙겨야 할 짐 따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몸만 휙 떠나면 그만이었다.
이거야말로 공수래공수거였다.
그렇다고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남들보다 훨씬 마음이 조급했다.
“도대체 깨달음이라는 건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거야?”
“아무런 도움이 못 돼서 죄송해요. 그건 유림씨 혼자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요.”
답답하군.
이런저런 방법을 모두 동원해보았지만, 큰 진전이 없었다. 물론 스텟과 상관없이 조금씩이나마 능력이 오르긴 했지만,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찔끔찔끔 상승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훌쩍 지났다.
아리아나는 이른 아침부터 서쪽 망루에 올랐다.
서유림도 아리아나와 함께 움직였다. 하지만 서쪽에서는 아직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요정의 무리와 마계 군단이 오긴 오는 거야? 언제쯤 오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아리아나가 눈을 감고 뭔가에 깊이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때는 방해해서는 안 된다.
대신 리니스성을 크게 훑어보았다. 오늘이 리니스 성의 마지막 날이 될 테니까.
그런데 리니스 성의 분위기가 어딘가 모르게 이상했다.
요정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있었다. 한 부류는 전투태세에 임하듯 중무장한 채 성벽에서 대기했고, 다른 한 부류는 그 아래에서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문의 성벽 위에서 번쩍번쩍 빛나는 금빛 갑옷을 입은 요정은 성주일 것이다.
서유림이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떠날 준비 하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거야?”
“성주는 성에 남아서 마계 군단과 싸우려는 거예요.”
깜짝이야.
아리아나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눈을 뜨고 서유림처럼 망루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계 군단과 싸우려 한다고?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일 텐데.”
“맞아요. 성주는 요정들과 함께 이곳에서 죽을 계획이에요.”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너무도 평온하게 느껴진다. 아무리 요정이 감정적으로 메마른 종족이라고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런 감정도 없이 이야기해도 되는 건가?
“그럼 내려가서 설득해야지. 개죽음 당하게 할 수는 없잖아.”
“아뇨. 성주님과 요정님들의 뜻을 존중해드려야 해요. 제가 할 일은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거예요.”
아리아나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성주와 요정들에게 뭔가 깊은 뜻이 있는 듯했다.
대충 짐작도 된다.
“설마 아라이나를 위해서 시간을 끌어주겠다는 거야?”
“맞아요. 제가 성주였다고 해도 그런 선택을 했을 거예요.”
대충 이해는 간다.
요정들에게 있어 정령신은 그 무엇보다도 우선시되는 절대적인 존재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말이다.
정령신의 후보 역시 마찬가지다. 그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종족이 바로 요정이다.
그러니 그런 결정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조금은 불쌍한 종족들이군.
그래도 선택은 자신의 몫이니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겠지.
“드디어 보이는군요.”
“응? 어디?”
아리아나의 말에 서유림이 얼른 서쪽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뭔가 뿌연 것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가까워졌다.
“내려가요. 도착하자마자 합류해서 함께 떠나야 해요.”
“그러지.”
아리아나가 망루에서 내려오자 금빛 갑옷을 입은 성주가 얼른 달려왔다.
“이제 떠나셔야 할 때로군요. 저희가 이곳에서 시간을 벌어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그 마음 영원히 잊지 않겠어요.”
“어서 가세요. 1만 명의 정예 요정 군단이 목숨을 걸고 아리아나님을 호위해드릴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 서쪽에서 달려오는 요정의 무리가 드디어 조금씩 눈에 보였다. 1시간 정도면 도착할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아리아나. 요정의 수가 10만 명쯤 된다고 하지 않았어? 아무리 봐도 그 정도 수는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거대한 무리이긴 했지만, 절대로 5만 명을 넘을 숫자는 아니었다.
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중간에 절반 이상의 무리가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마계 군단과 맞서 싸웠어요.”
“······아!”
생각났다. 저쪽에도 정령신의 후보가 있다고 했다.
이쪽이나 저쪽이자 모두 정령신의 후보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마구 희생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가요.”
아리아나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려서 서문을 향해 빠져나갔다.
성문 뒤에서 기다리던 1만 명의 요정 군단이 아리아나를 뒤따랐다. 리니스 성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들이었다.
잠시 후.
서쪽에서 거대한 요정의 무리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런데 또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이쪽으로 달려오는 요정의 무리가 순식간에 두 무리로 나뉘는 것이다.
한 무리는 약 1만여 명으로 아리아나가 있는 곳으로 곧장 달려왔고, 수만 명에 달하는 나머지 요정들은 그대로 리니스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아! 뭔지 알겠다.
“저 요정도 리니스 성에서 마계 군단과 싸우려는 건가?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맞아요. 아까 정령신의 후보와 함께 그 이야기를 논의했어요.”
눈을 감고 뭔가에 깊이 집중하던 게 그거였던 거로군.
정령신의 후보는 서로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모양이다.
어! 그런데 저건 또 뭐야? 요정의 무리 중에서 꼭 마족처럼 생긴 거대한 괴물이 하나 섞여있었다.
서유림이 자신도 모르게 카리스 정령검을 움켜쥐었다.
아리아나가 그런 서유림의 손을 가만히 잡아주었다.
“저쪽 정령신 후보의 계약자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다투지 마세요. 설령 저쪽이 저를 죽이고 유림씨를 죽인다고 해도 그냥 당해주세요. 부탁드려요.”
그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야?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아리아나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 하겠다.
물론 웬만한 상황이라면 아리아나의 얼굴을 봐서 참아 넘기겠지만, 만약 저쪽에서 이상한 짓, 그러니까 아리아나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려 한다면 절대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아리아나가 원하는 것도 단지 불필요한 다툼을 피하자는 것뿐이지 그렇다고 저쪽에게 모든 것을 다 가져다 바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물론 아리아나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리아나가 ‘그럼 마음대로 하세요.’ 하고 넘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아리아나가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모양이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품에 몸을 던지듯 안겼다.
무의식중에 아리아나를 안아주었다.
그런데 아리아나의 다음 말이 더욱 이상했다.
“미안해요.”
“뭐가?”
“유림씨에게는 이런 방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무슨 방법? 설마 미인계?
물론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리아나가 품에 안기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으니까.
아리아나의 부탁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고 싶은 욕구가 들 정도로.
“제 뜻대로 해주세요. 부탁드려요.”
순간 가슴에 뭔가 뜨거운 기운이 다시 확 타오르는 듯했다.
아리아나를 향한 사랑 같았다.
“우리를 위한 길이에요. 제발. 저 믿죠?”
물론 믿지. 팥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믿지.
이상하다. 정말 무한의 신뢰가 느껴졌다. 아리아나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절대적인 믿음이 갔다.
서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리아나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말뿐이 아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승복의 대답이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이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다.
“고마워요, 유림씨. 그리고······ 죄송해요.”
그런 말 하지 마. 아리아나가 그렇게 말하니까 미친 듯이 슬퍼지잖아.
아리아나는 무조건 행복하기만 해야 해.
내가 지켜줄게.
서유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두 무리가 합류했다.
딱 봐도 정령신의 후보로 보이는 요정과 그의 계약자로 보이는 괴물 같은 존재가 아리아나 앞으로 곧장 다가왔다.
그러자 아리아나가 뜻밖의 행동을 했다. 상대 정령신의 후보를 향해서 군례라도 취하듯 한쪽 무릎을 꿉혀 인사하는 것이다.
“아리아나 인사드립니다.”
지금까지 같은 요정끼리 이런 식의 예의를 갖추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일반 요정도 정령신의 후보인 아리아나 앞에서 이런 군례는 취하지 않았다.
뭐야 이거? 나도 아리아나처럼 군례를 취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아리아나로부터 그런 부탁을 들은 적은 없다.
지금도 아리아나가 그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굳이 알아서 숙일 필요는 없겠지.
그런데 더욱 황당한 것은 상대편의 반응이었다. 똑같이 예의를 갖추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빳빳이 들고 고압적인 눈빛으로 아리아나를 내려다보았다.
계약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가 무려 2.5m는 되는 것 같은데, 번개라도 뿜을 것 같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손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철봉이 쥐어져 있었다. 힘이 얼마나 세기에 저런 엄청난 철봉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일까?
하지만 저쪽도 부탁받은 게 있는 것인지 먼저 시비를 걸어오지 않았다.
젠장! 나보다 훨씬 더 잘 싸울 것 같다. 외모에서 풍기는 위압감 때문에 괜히 자격지심이 느껴지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괜히 기분이 나쁘다.
하지만 절대 다퉈서는 안 되겠지.
순간순간 욱! 하는 성질이 터지려고 할 때마다 가슴 속에서 강한 억제력이 느껴졌다. 설령 상대방이 목숨을 취하려 한다고 해도 반항해서난 은 된다는 엄청난 억제력이었다.
아리아나의 부탁 때문이었다.
‘그래. 부딪치지 말자. 져줘야 한다.’
서유림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저쪽 종족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인간 남자는 사소한 눈싸움이 목숨을 건 칼싸움으로 이어지기 쉬우니까.
“아리아나. 드디어 만났구나. 갈 길이 바쁘다. 출발하자.”
“예, 오르테나님!”
원래 처음부터 위아래가 갈린 사이였나?
천천히 설명해준다고 했으니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계약자들의 시간을 공유하기 힘드니 무리를 나누어 달리겠다. 보조를 맞춰 잘 따라오도록.”
“알겠습니다, 오르테나님!”
오르테나의 무리가 다시 출발했다. 지금껏 달려오느라 피곤할 텐데 쉬어갈 틈도 없는 모양이다.
아리아나도 무리를 이끌고 출발했다.
하지만 오르테나의 무리와는 대략 1km 이상의 거리를 두고 움직였다. 이제 더는 저쪽 편과 부딪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자 아리아나가 또다시 서유림에게 사과의 말을 전했다.
“아까는 죄송했어요.”
“뭐가?”
사실 난 정말로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왜 그런 강력한 억제력이 느껴졌는지.
그리고 또 아리아나는 뭣 때문에 자꾸 죄송하다고 하는 건지.
그런데 아리아나가 그 의문을 풀어주었다.
“유림씨에게는 아무것도 속이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사실 아까 유림씨에게 마인드컨트롤을 사용했어요.”
“마인드컨트롤?”
“상대방의 생각과 의지를 제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마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