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살인청부 (1)
지글지글.
보글보글.
서유림이 맛있는 음식냄새를 맡으며 눈을 떴다.
어느새 정오를 넘어서 오후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채희라가 앞치마를 두른 채 요리를 하고 있었다.
채희라가 요리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된장찌개 끓이는 거야?”
“어머! 일어났어? 조금 더 자지.”
정령의 힘 덕분에 아무리 피곤해도 서너 시간만 자면 개운해진다. 더 잘 수야 있겠지만, 그 이상의 잠은 별로 달콤하지 않았다.
“실컷 잤어.”
“나 요리가 서툴러서 빨리 못해. 이거 준비하려면 아직 20분은 더 걸릴 텐데.”
“천천히 해.”
채희라가 음식을 준비하는 사이 샤워를 마치고 TV를 시청했다.
채널을 돌려서 뉴스를 확인했다.
예상대로였다. 간밤에 조폭들 정리한 것이 속보처럼 뉴스 대부분을 장식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폭력조직의 문제가 심각한 수준임을 보도드린 적이 있었는데요, 오늘 그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간밤에 외국인 폭력조직들 사이에서 대규모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서울지방경찰청의 발표에 따르면 중국의 흑사파, 필리핀의 가디언스파, 태국의 깽야이파, 방글라데시 군다파 조직원들이 대규모 폭력사태를 저질렀고, 이 와중에 약 300여 명의 폭력배들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불법체류자들로 파악되었습니다.
경찰은 주동자로 파악되는 이들을 상대로 계속해서 조사를 벌이고 있고, 조사가 끝나는 대로 불법체류자들에 대하여······.]
채희라도 보도를 들은 모양이다.
“오빠가 한 거야?”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채희라가 피식 웃었다.
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대신 서유림을 위한 식사준비에만 몰두했다.
“다됐어, 오빠.”
“와, 희라가 다 직접 차린 거야?”
“이거, 이거, 이거만 내가 한 거고, 나머지는 사온 거야.”
“어디 먹어볼까?”
서유림이 하나씩 맛을 보았다.
솔직히 맛있다는 평가는 못 해주겠다. 하지만 정성이 느껴져서인지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처음 해본 건데 어때?”
“진짜 처음 해본 거야? 수준급인데.”
“어머, 정말?”
서유림이 맛있게 먹어주었다. 아직도 식사량이 엄청나서 채희라가 준비한 밥과 반찬을 거의 바닥까지 쓸어주었다.
덕분에 채희라의 입술이 귀에 걸렸다.
서유림이 철마산 집회소로 향한 것은 어둠이 짙게 깔린 뒤였다. 한여름이라 그런지 그리 깊은 밤도 아닌데 벌써 아홉 시가 훨씬 넘었다.
광명회 회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각 조직에서 잡아온 외국인 조폭의 핵심들 역시 단상 바로 왼쪽에 묶여있었다. 서유림의 지시대로 입만 막혀있을 뿐 눈과 귀는 모두 열려있었다.
먼저 하노이파의 조직원들부터 단상으로 불러올렸다. 한 놈은 이미 폐인이 되었고 다섯 명만 남아있었다.
복면을 착용한 찌엣이 통역으로 함께 올라왔다.
<< 누가 나의 노예가 되어서 충성을 바치겠는가? >>
찌엣이 통역해주자마자 다섯 명의 하노이파 조직원들이 서로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저 시켜주세요.”
“저 노예 할게요.”
“저요.”
하루 동안 서로 작당모의라도 한 건가? 다섯 놈이 모두 똑같이 자신을 시켜달라며 애원하고 있었다.
다들 항복과 노예라는 단어는 알고 있어서 굳이 찌엣이 통역할 필요도 없었다.
이놈들 속셈이 무엇일까?
뭐, 상관없다. 어차피 한 놈만 노예로 삼을 계획이니까.
<< 오늘 너희 중 한 놈만 내 노예가 될 것이다. 나머지 네 놈은 폐인이 되어 평생 누워서만 살게 될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한 놈씩 나서서 자신이 내 노예가 되어야 하는 이유를 말아봐라. 누가 얼마나 쓸 만한 놈인지 보고 선택하겠다.
너부터 해봐라. >>
서유림이 맨 왼쪽 놈을 가리켰다.
찌엣이 통역해주자 왼쪽 놈이 자신을 마구 어필하기 시작했다.
찌엣이 즉석에서 통역해주었다. 찌엣도 한국말이 그리 능숙하지 못해서 통역도 어설펐다.
하지만 내용은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싸움을 잘하고, 누구보다 충성을 바치겠다는 식이었다. 자신이 얼마나 충성을 바칠 수 있는지를 가장 강조했다.
충성 따위는 별 의미가 없다. 정령으로 목줄을 옭아매면 충성을 바치지 않을 수가 없게 될 테니까.
<< 다음. 말해봐. >>
서유림은 그렇게 한 명씩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런데 네 번째 놈의 어필이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하노이파의 진짜 핵심세력은 김포에 따로 있습니다. 제가 본거지가 어디인지, 보스가 누구인지까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휴대폰 번호도 압니다. 그리고 저는 베트남 본국의 하노이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게 기회를 주세요.”
오! 지금껏 이보다 나은 조건을 내건 사람은 없었다.
<< 우두머리가 누구고 본거지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라. 만약 거짓이라면 이 자리에서 널 폐인으로 만들겠다.>>
“거짓이 아닙니다. 지금 확인해보셔도 됩니다. 보스는 땀낭이라는 자이고 주소는······.”
서유림은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동원하여 지도까지 확인했다.
본거지로 지목한 곳은 뜻밖에도 서울이나 인천 같은 대도시가 아닌 김포시였다.
서유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곧바로 장로들과 함께 김포로 이동했다.
비밀을 이야기해준 하노이파 조직원도 함께 대동했다.
나머지 조직원들은 소장로 두 명을 시켜서 다시 가둬두도록 했다.
굳이 서둘러서 놈들을 처단할 이유는 없었다. 놈들을 폐인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하니까.
자정이 되기 전에 김포에 도착했다.
조직원의 말대로였다. 그곳에 하노이파 조직이 있었다.
가장 핵심 조직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조직원이 꽤 많기는 했다.
<< 네 이름이 무엇이냐? >>
“티엔퐁입니다.”
<< 우두머리의 휴대폰번호를 알고 있다고 했지? 지금 전화를 걸어서 밖으로 나오게 할 수 있겠나?
그러면 너를 나의 장로로 삼아서 큰일을 할 수 있는 힘을 주겠다. >>
티엔퐁은 쯔엣의 통역을 듣자마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겠습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상대가 곧장 전화를 받았다.
다들 침묵을 지켰다. 베트남 말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무슨 말을 주고받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찌엣이 모두 듣고 있기 때문에 허튼 수작은 부리지 못할 것이다.
설령 허튼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달라질 것도 없고.
그렇게 티엔퐁이 통화를 마쳤다. 그리고 잠시 후 손가락을 뻗어서 누군가를 가리켰다.
“저 사람입니다.”
서유림도 그 사람이 눈에 보였다. 다른 조직원 20명 정도와 함께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 우두머리에게 뭐라고 한 것이냐? >>
“가디언스파의 우두머리가 협상하러 왔다고 전했습니다. 가디언스파와 우리 하노이파는 지금 흑사파를 상대로 연합관계입니다.”
그랬군.
그렇다면 더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장로 하나를 시켜서 티엔퐁을 감시하도록 했다. 그리고 나머지 장로들을 이끌고 승합차에서 내렸다. 서유림까지 포함해서 여섯 명이 전부였다.
그러자 땀낭으로 보이는 하노이파 조직원들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다들 긴장하는 표정을 했다. 이쪽이 하나같이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기 때문이다.
이쪽을 향해 알아듣지 못할 말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아마도 복면을 벗으라는 이야기겠지.
서유림은 못 들은 척하며 그냥 뚜벅뚜벅 걸어갔다. 장로들도 등 뒤로 무기를 감추고 서유림을 두세 걸음 뒤에서 따라가기만 했다.
그렇게 10m정도 거리가 되었다.
하노이파 조직원들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서유림 일행이 대답도 없고 복면도 여전히 벗지 않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며 경계자세까지 취했다.
그때 서유림이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하노이파 조직원들이 그제야 상황을 눈치 챘다.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그저 자빠지고 얻어맞고 기절하고 끌려가는 것뿐이었다.
이어서 건물 안쪽에 대한 정리도 이루어졌다.
확실히 핵심 근거지가 맞는 듯했다. 기습적으로 해온 공격인데도 불구하고 건물 안쪽에 웅크리고 있는 조직원들이 무척 많았다.
게다가 현금이나 금품 같은 돈 되는 물건도 많았다. 이곳에서만 압수한 금품만 10억 원어치는 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마약도 있었다. 그것도 양이 상당했다. 동남아 조폭들은 근거지마다 마약을 숨겨놓는 듯했다.
서유림 일행은 그렇게 번개처럼 일을 마무리하고 20분도 지나지 않아서 현장에서 철수했다.
뒤늦게 도착한 경찰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또 밤새 이런 신고 들어오는 거 아냐?”
“일단 이놈들부터 잡아들이죠.”
철마산 집회소.
광명회 회원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광명회주가 기다려라 말라 하는 지시도 없이 그냥 떠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머리만 긁적이며 앉아있을 수밖에.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야?”
“조금 더 기다려봐. 주군 떠나시고 아직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았어.”
“하긴, 어제 일처리 하시는 것 보면 순식간에 끝내실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위치가 김포잖아. 오가는 시간만 한참 걸리실······ 어!”
회원들이 수군대다가 말을 멈추었다. 집회소 문이 열리고 장로가 포로들을 이끌고 우르르 들어왔기 때문이다.
몇몇이 이야기를 마무리하듯 수군댔다.
“와, 정말 빠르다.”
그러는 사이 서유림이 성큼성큼 단상 위로 올라갔다.
시간도 그렇고 움직임도 그렇고 조직 하나를 쑥대밭 만들고 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잠깐 밖에서 담배 한 대 태우고 온 사람 같았다.
하노이파 조직원들도 단상 위로 함께 올라갔다. 이제 하던 일을 마무리 지어야지.
<< 그대 이름은 뭐라고 했지? >>
“티엔퐁입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찌엣이 통역해주자 티엔퐁이 머리를 바닥에 찧을 정도로 조아렸다.
<< 티엔퐁. 그대로 선택했다. 나머지 놈들은 쓸모가 없으니 이제 죗값을 치르게 하겠다. >>
서유림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하노이파 조직원 네 명이 하나씩 서유림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순식간에 체력을 바닥까지 빨리고 포이즌에 중독된 상태로 몸을 떨어뜨렸다.
네 명 모두 순식간에 시체 같은 모습으로 변했다.
그러자 새롭게 잡혀온 세 명의 하노이파 조직원들이 겁에 질렸다. 하나같이 티엔퐁이 핵심인물이라고 찍은 놈들이었다.
“살려줘.”
살려달라는 한국말은 알고 있군.
그런데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 너희들 입으로 이야기해봐라. 내가 너희를 살려줘야 할 이유가 뭐가 있지? 너부터 이야기해봐. >>
하노이파 조직원들이 돌아가면서 길게 떠들어댔다.
다들 충성을 다하겠다. 돈을 주겠다. 하는 식으로 목숨을 구걸했다.
그런데 네 번째 놈은 오히려 서유림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눈빛이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매서웠다. 입담도 얼마나 거칠던지 찌엣이 우물쭈물 통역하지 못할 정도였다.
저놈이 무슨 배짱으로 저러나 싶었는데, 그럴 이유가 있었다.
대충 내용을 종합해보니 이랬다.
“내가 바로 하노이파 보스의 사촌동생이다. 내가 일을 당하면 하노이파 전체가 너를 노릴 것이다. 하노이파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모르지? 전 세계 조직원 수만 수천 명이다. 마음만 먹으면 너는 물론이고 너희 조직 전부 순식간에 몰살시킬 수 있다.”
이게 웬 떡이야?
서유림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저놈을 잘만 활용하면 하노이파 전체의 씨를 말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굳이 고문 따위를 하지 않아도 자신의 정보를 그냥 술술 털어놓고 있었다.
조금만 자극을 주면 더 많은 것을 털어놓을 것 같았다.
<< 혹시 그대가 땀낭이라는 자인가? >>
“그래. 내가 바로 땀낭이다. 너도 내 이름은 들어본 모양이군. 그렇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겠지? 내가 죽이겠다고 마음먹고 못 죽인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땀낭이 서유림을 협박하기 위해서 있는 말 없는 말 모두 쏟아내기 시작했다. 서유림이 말없이 그냥 듣기만 하니 자신의 기세에 겁을 먹었다고 판단한 듯했다.
통역하는 찌엣이 자꾸만 서유림의 눈치를 보았다. 서유림은 있는 그대로 모두 통역하라고 했다.
그런데 깜빡 잊고 있었던 일을 땀낭이 털어놓았다.
“내가 한국에 와서 죽인 목숨만 스무 명이 넘는다. 지금도 누군가를 죽여 달라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지. 우리 삼촌은 나보다 천 배는 무서운 사람이다. 마음만 먹으면 대통령도 암살할 수 있다. 너희 같은 놈들 몰살시키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아! 맞다! 살인청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