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
광명회, 움직이다. (1)
서유림은 경기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한국으로 날아왔다.
임채모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혹시 애초 계획과 달리 방송출연을 강행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임채모도 그렇게까지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다. 관악산에 있는 김영자의 별장에 꼼짝 않고 숨어있었다.
“일찍 왔군! 경기는 봤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PD님들과는 이야기가 잘 되었습니까?”
“대충은 되었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며칠간은 계속 나가야 할 것 같아. 하차하는 것도 개연성이 필요하지 않겠나?”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만약의 사태는 대비해야 할 것이다. 설령 임채모가 놈들에게 붙잡히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정령의 힘을 빼앗겨서는 안 되니까.
그리고 사실 지금 임채모의 건강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과한 편이지. 60이 훨씬 넘은 나이인데 40대 못지않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정령을 회수할 때가 된 것이다. 정령이 있건 없건 마령이 노리면 임채모가 당해낼 수 없다는 점은 변함이 없을 테니까.
정령의 회수는 아주 간단했다. 굳이 스킨십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건 서유림의 의지만 작용하면 된다.
서유림이 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렸다.
‘정령 회수!’
그러자 임채모가 순간적으로 현기증을 느꼈다.
서유림이 깜짝 놀라서 다가갔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선생님?”
“아니네. 갑자기 조금 어지러워서. 이젠 괜찮네.”
“혹시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괜찮네. 괜찮아.”
서유림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리아나를 통해서 정령을 회수해도 문제될 것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이제부터 임채모 스스로 몸 관리를 잘해야 할 텐데.
정령의 힘을 가졌을 때처럼 몸을 함부로 놀리다가는 금방 엉망진창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하긴, 그건 임채모가 알아서 할 일이니까. 이 정도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준 셈이지.
서유림이 후련한 마음으로 임채모를 놓아주었다.
“그런데 유림군. 그 광명회라는 곳 말일세. 나도 가보면 안 되겠나?”
그건 안 될 말이다. 광명회는 친목모임도 종교모임도 아니니까.
광명회의 목적은 딱 하나뿐이다.
서유림을 위한 군대.
그런 곳에 임채모 같은 일반인이 참여해서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할 것이다.
괜히 사람들 많아지면 쓸데없이 말만 새어나갈 것이고.
그러고 보니 집회가 이틀 후였다. 그때 새롭게 회칙 몇 개를 정해서 발표해야겠다.
“그건 회주님께서 금지하신 일입니다. 회주님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광명회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게 있었군.”
임채모가 아쉬워했다.
이틀 후.
서유림이 철마산을 누비다가 밤이 깊어서야 집회장으로 들어갔다.
서유림의 눈이 살짝 커졌다. 최근에는 조직을 흡수하지도 않았는데, 광명회 회원의 수가 전보다 늘었기 때문이다.
대충 50명은 되는 것 같았다.
돈 때문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서유림이 장로들을 시켜서 회원들 모두에게 적당한 일자리를 주도록 했으니까.
물론 대단한 일자리는 아니었다. 그래봐야 장로들이 운영하는 룸살롱, 노래방, 클럽, 식당 같은 곳의 종업원에 불과하니까.
사실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해주고 싶긴 하지만, 서유림인들 그런 능력이 있나? 그랬으면 여동생들 일자리부터 구해줬겠지.
그리고 원래 본인 밥벌이는 본인이 알아서 하는 거다. 그 정도 일자리 마련해준 것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더는 불법적인 일을 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매력일 것이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 집회에는 장로들도 모두 참석했다. 다들 똑같은 모양의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누가 장로인지 일반 회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서유림은 그들을 모두 구분해낼 수 있었다.
지금 장로의 수는 겨우 넷.
마령의 힘을 흡수해서 귀화시킨 정령들도 많은데 굳이 정령들을 놀릴 이유는 없었다. 희망하는 자가 있다면 계약시켜서 힘을 보태게 하는 게 좋겠지.
서유림은 먼저 광명회의 새로운 규칙들을 몇 가지 발표했다. 광명회원의 자격이나 금기사항 같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광명회가 앞으로 나아갈 길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추가적으로 장로 희망자도 모집했다.
<< 광명회는 지금부터 사회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악의 무리를 처단할 것이다. 너희들이 몸담고 있었던 불법 폭력단을 정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 땅에 악의 무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광명회의 활동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자면 나를 곁에서 도와야 할 장로가 더 필요하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장로에게는 큰 힘을 줄 것이다. 그러나 그 힘을 그릇되게 사용한다면 폐인의 길을 면치 못할 것이다.
누가 나서서 큰일을 해보겠느냐? 뜻이 있는 자는 앞으로 나서라. >>
그러자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자들이 우르르 일어서서 앞으로 나섰다.
덩치 큰 자도 있었고, 왜소한 자도 있었다. 뚱뚱한 자도 있었고, 비실비실한 자도 있었다.
하지만 그깟 신체적인 조건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오직 마음가짐만이 중요했다.
<< 훌륭하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묻겠다. 이 길에 한번 들어서면 다시는 벗어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악과 맞서 의를 세워야 한다.
그럴 마음가짐이 되어 있느냐? >>
“예. 맡겨만 주십시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다들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목소리만 들으면 마치 항일운동을 위해서 목숨을 건 투쟁가들 같았다.
서유림의 마음이 괜히 뿌듯해질 정도였다.
<< 좋다. 그대들을 각각 소장로에 임명하겠다. >>
서유림이 사내들의 머리에 한 번씩 손을 얹어주었다. 정령의 기운이 침투할 때마다 사내들이 몸을 가볍게 움찔거렸다.
집회는 그렇게 간단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뭔가 아쉬웠다. 집회 내내 일방소통만 있었기 때문이다.
회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도 한 번쯤은 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집회를 마치고 장로들만 따로 불러 모았다. 이번에 새롭게 소장로가 된 여섯 명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열 명의 장로들이 서유림 앞에 나란히 앉았다. 다들 똑같은 복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은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 힘들었다.
물론 서유림은 정령의 느낌만으로도 구별할 수 있지만.
<< 내가 너희들을 따로 부른 이유는 회원들의 의견을 듣고자 함이다. 회원들의 불만사항이나 바라는 바가 있다면 가감 없이 이야기해봐라.
이런 자리에서 늘어놓은 불만사항으로 그대들을 탓하거나 벌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
장로들은 쉽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서유림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단 한 번의 실수로 폐인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당연히 말을 아낄 수밖에.
하지만 서유림이 절대 보복 따위는 없다고 거듭 약속하자 하나둘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서유림이 들어보니 가장 큰 불만은 무기력함이었다.
“지난번에 명동파가 하노이파에게 당했습니다. 그 일로 명동파는 쑥대밭이 됐고, 그 자리를 하노이파가 모두 먹었습니다.”
그건 서유림도 TV에서 본 기억이 있다. 김영자를 만나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에는 대규모 싸움과 관련한 기사만 봤는데, 결국 하노이파가 모두 집어삼켰던 모양이다.
“얼마 전에는 공항파도 흑사파에게 당했습니다.”
공항파라면 하노이파와 인연이 깊다던 그 조직이었다. 그래서 흑사파가 하노이파를 견제하기 위해서 공항파를 친 모양이다.
“그 일로 하노이파가 흑사파를 노리고 있습니다. 아마 조만간 대대적으로 한판 붙을 겁니다.”
“아무리 조폭이 나쁘다고 하지만, 그래도 외국계 조폭에게 뒷골목을 내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게다가 외국계 조폭은 우리 쪽보다 훨씬 잔인하고 더럽습니다.”
그건 서유림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만간 손을 쓰려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김영자에게 외국계 조폭 관련 정보를 구해달라고 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
드디어 움직일 때가 된 것이다.
시기적으로도 딱 맞아떨어졌다.
광명회 회원들에게는 뭔가 자극이 필요했다. 말로만 ‘견리사의’를 외쳐서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자신들의 손으로 직접 악을 물리치고 그 쾌감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자긍심을 느낄 수 있겠지. 자신들의 힘을 더는 악을 저지르는데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물리치는 데 사용한다는 자긍심.
그런 자긍심들이 쌓이고 쌓이면 결국 사람을 바꾸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장로들도 더 많이 선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모든 정령을 다 투입해서 최대한의 규모로 성장시키는 게 좋겠지.
물론 변절자도 나올 것이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야 그때그때 찾아내서 일벌백계하듯 정리하면 된다. 그러면 그것이 본보기가 되어 오히려 광명회의 결속력을 더욱 강화시킬 것이다.
서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대들의 뜻을 알겠다.
그런 상황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면 우리 광명회는 있으나마나한 조직이 되겠지.
지금부터 전국의 불법 폭력배들을 소탕하러 다니겠다. 그대들이 앞장서줄 수 있겠는가? >>
그러자 장로들 모두 기다렸다는 듯 힘차게 대답했다.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흑사파와 가디언파의 본거지는 김영자를 통해서 확인했다.
하지만 하노이파는 아직도 본거지를 찾아내지 못했다. 워낙에 점조직으로 운영되고 있어서 어느 곳이 본거지라고 딱 짚어 말할 수가 없었다.
혹시 이놈들은 알고 있을까?
<< 하노이파의 본거지가 어딘지 아는가? >>
“그건 공항파의 장문석을 통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렇군! 공항파의 장문석이 하노이파와 관계가 긴밀하다고 들었다.
그러면 공항파의 장문석부터 잡으면 되겠다.
<< 장문석은 어디 있지? >>
* * *
장문석이 여성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방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힘없는 여성이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아악!”
방바닥에 이불이 깔려있긴 했지만, 충격을 흡수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를 악물어도 신음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갓 스무 살이나 넘었을까?
베트남계 여성인데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했다. 방바닥에 깔린 이불 곳곳에 여성의 옷이 널브러져있었다.
그것만 봐도 옷이 어떤 식으로 벗겨졌는지 알 수 있었다.
“싫어요. 살려주세요. 안돼요.”
여성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한국말이 어색해서 더욱 가엽게만 느겨졌다.
하지만 장문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스스로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여성을 더욱 험악하게 다뤘다.
“누가 죽인대, 이리와!”
장문석이 여성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개처럼 웅크리게 했다.
여성은 반항할 수 없었다. 그저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빨리 이 악몽 같은 시간이 끝나기만을 빌었다.
장문석이 황급히 팬티를 벗어던졌다. 장문석도 비로소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그런데 그때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쿵쿵쿵!
눈치도 더럽게 없는 녀석이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어떤 새끼야?”
장문석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사실 지금 장문석은 기분이 최악이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더니 장문석이 딱 그 꼴이었기 때문이다.
하노이파와 흑사파의 세력싸움에 괜한 희생양이 되어서 조직이 거의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그러니 뭐든 꺼리만 있으면 스트레스를 풀고 싶었다. 닥채는 대로 때리고 부수고 죽여 버리고 싶었다.
베트남 여성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하는 것도 돈에 대한 욕심을 떠나서 스트레스 해소차원이었다.
그런데 문 밖에 있는 놈이 자꾸만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쿵쿵쿵!
“썅. 문 열어봐. 어떤 새끼야?”
캠코더를 들고 촬영하던 사내 하내가 잠금을 풀고 철문을 열었다.
그러자 수하 하나가 얼굴을 빼꼼 들이밀었다. 수하의 표정은 완전히 얼어있었다.
“사장님. 밖으로 좀······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들어온 지 1년도 안 된 막내 급 조직원이었다. 딱 죽기 좋은 짬빱이다. 장문석의 스트레스를 풀기에도 딱 좋은 녀석이고.
“X새끼. 중요한 일만 아니어봐. 넌 뒈졌어.”
장문석이 베트남 여성을 내팽개치고 팬티를 주워 입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철문이 활짝 열리면서 웬 복면을 쓴 자들이 모습을 보였다.
장문석이 순간적으로 눈동자를 움직여서 철문 바깥쪽의 상황을 살폈다.
바닥에 쓰러져서 꿈틀거리고 있는 조직원들이 보였다. 20명도 넘는 조직원들이 모두 고꾸라진 것이다.
그제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구······ 세요?”
<< 네가 장문석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