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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미친 잠재력-140화 (140/196)

# 140

성물 먹으러 갑시다 (3)

성벽 위에서 북소리가 다급히 들려왔다.

둥. 둥. 둥.

후퇴를 의미하는 북소리였다.

요정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북소리가 울리자마자 썰물처럼 보조성벽 밖으로 사라졌다. 서유림도 요정들과 함께 움직였다.

보조성벽 안쪽은 순식간에 정적이 흘렀다. 100여 명에 달하는 마족의 시체 때문에 더욱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그 중앙에 마신의 성물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제야 아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유림과 함께 얼른 아리아나 곁으로 다가갔다.

아리아나는 고른 호흡을 유지하며 잠들어있었다.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걱정할 상태는 아니었다.

“일단 아리아나부터 숙소로 옮기죠.”

“네.”

요정들이 얼른 다가와서 가마를 들었다. 서유림과 아리안의 보호를 받으며 아리아나만을 위한 숙소로 옮겨졌다.

“아리안, 혹시 지쳤어?”

“아뇨. 괜찮아요.”

“그럼 잠깐 다녀오는 동안 아리아나를 지켜줄 수 있지?”

“네. 다녀오세요.”

서유림이 다시 남문으로 향했다.

남문의 상황은 아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다들 마신의 성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진 채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신의 성물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 힘이 너무 강해서 자칫 근처의 요정이 마귀로 변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밤에도 수십 명의 요정이 그런 식으로 당하지 않았던가?

성주도 근심스러운 표정을 했다.

“빨리 아리아나님께서 깨어나셔야 마신의 성물을 정화시킬 수 있을 텐데. 계속 저렇게 두면 성문을 지키는 요정들이 마귀로 변할 수도 있어요.”

“그럼 일단 안전한 곳으로 옮길까요?”

“가능할까요?”

가능하고말고. 나는 요정이 아니거든.

아까 마족과 싸울 때도 다른 요정들은 마신의 성물이 내뿜는 기운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워하는 듯했다.

하지만 서유림은 그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다. 아니, 전혀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감각이 999까지 올랐는데도 말이다.

“저는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마신의 성물을 중앙 공터로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 그곳은 주변을 비울 수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서유림이 다시 보조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마족의 시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예전 같았다면 무척 안타까워했을 것이다. 마족의 시체에는 강력한 마력의 서가 붙어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마력도 999까지 오른 상태였다. 더는 마력의 서를 흡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서유림이 탑처럼 생긴 물건을 향해 다가갔다.

성주를 비롯한 몇몇 요정들이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서유림도 괜히 긴장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아무런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신의 성물을 불과 3m 앞에 두었는데도 마찬가지였다.

자신감이 생겼다.

‘확실해. 내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아.’

더 가까이 다가가서 탑의 모양을 살폈다.

한쪽에 출입문 같은 것이 보였다. 손잡이도 있었다. 손으로 잡고 힘을 쓰니 가볍게 열렸다.

그 안에 석류빛으로 영롱하게 빛나는 보석이 하나 보였다. 크기는 작았지만, 빛이 강해서 잠깐 눈을 찌푸려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빛만 느껴질 뿐이지 마기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빛이 어느 정도 적응되자 성물의 형체가 보였다.

목걸이 같았다. 아니, 보석이 줄로 연결된 걸 보니 확실히 목걸이였다.

손을 뻗어서 만져볼까 하다가 괜한 욕심은 버렸다. 아리아나가 깨어난 후에 뭔가를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

성물은 납작한 돌판 위에 조심스럽게 놓여있었다. 돌판을 통째로 들어보니 그다지 무겁지 않았다.

그대로 들어서 성의 중앙으로 향했다.

서유림이 걸을 때마다 요정들이 멀찌감치 달아나며 거리를 두었다. 감히 구경하겠다며 다가오는 요정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성물은 중앙의 공터로 옮겨졌고, 성주는 대략 200m의 반경을 두고 사방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서유림은 다시 아리아나 곁으로 갔다.

며칠 후.

서유림이 눈을 떴다.

아리아나가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몸은 좀 어때?”

“이제 100% 회복된 것 같아요.”

서유림이 보기에도 그랬다. 서유림을 인간계로 보내줄 때만 해도 기력이 온전치 않았는데, 지금은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인간계는 어때요? 또 마령의 공격이 있었나요?”

“아니, 오늘은 조용했어. 마신의 성물은?”

“아직 중앙공터에 있어요. 유림씨 오면 함께 가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고맙게도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군.

“그럼 함께 가볼까?”

중앙공터로 향했다.

요정들은 여전히 중앙공터 주변을 철통같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동안 마귀로 변한 요정은 없었다. 200m까지는 마신의 성물이 영향을 전혀 미치지 못하는 듯했다.

아리아나와 서유림이 공터 안으로 뚜벅뚜벅 들어갔다.

마신의 성물은 돌판 위에 그대로 있었다. 석류 속살 같은 영롱한 붉은 빛도 전혀 잃지 않았다. 서유림이 가져다놓은 상태 그대로였다.

아리아나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마신의 성물로 다가갔다. 손으로 집어서 마치 기도라도 하듯 자신의 가슴에 꼭 품었다.

눈을 감은 모습이 정령신에게 기도라도 하는 듯했다.

그렇게 10초쯤 지났을까?

아리아나가 다시 손을 펼쳐서 성물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자 보석의 색깔이 바뀌어 있었다. 석류처럼 붉었던 빛이 지금은 사파이어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리아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제 됐어요.”

서유림도 함께 웃어주었다.

그런데 아리아나가 갑자기 목걸이 줄을 펼치더니 마치 서유림의 목에 걸어주듯 앞으로 내밀었다.

깜짝 놀란 서유림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왜?”

“이건 저보다는 유림씨에게 더 어울려요. 전 사실 힘을 발휘할 일이 거의 없잖아요.”

“하지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탐나는 물건이긴 하지만 그냥 덥석 받기에는 덩어리가 너무 큰 선물이었다.

게다가 자칫 ‘아리아나를 설득해서 빼앗았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제가 필요할 땐 다시 달라고 할게요. 그때 잠깐 돌려주셨다가 다시 유림씨가 사용하면 돼요.”

물론 그렇게 사용하면 효율적이기야 하겠지.

하지만 세상은 효율성이 전부가 아니거든.

“그것 때문에 요정들이 오해할 수도 있어. 힘보다 중요한 게 화합이야. 화합이 깨지면 차라리 성물을 안 구한 것만도 못하게 돼.”

“······아!”

아리아나도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했던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아리아나가 성물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는 공터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성주를 향해 걸었다.

이런! 역시 사람의 욕심은 무서운 거라니까. 아리아나가 주려다가 마니까 괜히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런 마음 버려야 하는데.

서유림이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아리아나와 함께 걸었다.

성주가 요정들과 함께 목이 빠지라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리아나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서너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리아나의 목에는 푸르게 빛나는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스스로 빛을 발하는 목걸이였기에 그것이 마신의 성물이었음을 모두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주의 얼굴이 성물의 빛처럼 밝게 빛났다. 얼른 달려와서 아리아나의 두 손을 꼭 잡았다.

“성공하셨군요.”

“네.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저희가 감사드립니다. 아리아나님은 정령계의 희망이십니다.”

주변의 요정들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몇몇 요정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웬만해서는 감정을 보이지 않는 요정들이 눈물을 흘릴 정도라니. 마신의 성물을 취한 것이 그만큼 엄청난 일이라는 뜻이겠지.

서유림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선물을 받지 않기를 잘했어.’

어쨌건 이렇게 기뻐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쁨은 모든 상황을 정리한 후에 누려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을 처리할까요? 밖에 남아있는 마족 군단도 물리쳐야죠.”

“그래야죠. 마신의 성물도 사라졌으니 우리에게 승산이 있습니다. 당장 특공대를 조직하겠습니다.”

성주도 의욕을 보였다. 이야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움직였다.

요정들도 서로 특공대에 자원하고 나섰다.

순식간에 8천 명의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서유림은 특공대를 2천 명씩 네 개 부대로 나누어 각각 동서남북의 성문에 배치했다.

동문과 서문, 북문의 보조성벽도 이미 모두 완성된 상태였다.

시작은 북문이었다. 그쪽에 마족의 수가 가장 적었기 때문이다. 일단 떨거지들부터 정리한 후에 마족의 본진과 정면대결을 펼칠 계획이다.

서유림이 특공대와 함께 북문 앞에 도열했다.

아리아나는 이번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치고 빠지는 방법으로 마족 군단을 보조성벽 안으로 유인하는 작전이다. 이리아나를 무리시키면서까지 능력을 강화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공격에 앞서 아리아나가 갑자기 자신의 목에 걸려있던 성물 목걸이를 벗었다. 서유림 앞에 서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 암흑기는 카리스라는 계약자가 영웅이 되어 정령계를 구했습니다.”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마치 확성 마법이라도 사용한 듯했다.

“저는 당신께서 이번 암흑기로부터 정령계를 구해줄 영웅이 되어 주리라고 믿습니다.”

이거 분위기가 이상하네. 난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닌데.

그런데 분위기가 너무 엄숙하다. 모든 요정들이 서유림을 바라보는데 눈빛에 믿음이 가득했다.

젠장,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정령계를 위해 헌신해야 할 판이다.

“하여 당신께 이 성물을 맡기겠습니다. 마족 군단으로부터 이곳 리니스 성을 지켜주세요.”

아리아나가 목걸이를 서유림의 목에 걸어주었다.

이걸 그냥 받아도 될까?

서유림이 주변 눈치를 슬쩍 보았다.

그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결연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서유림이 그대로 목걸이를 받아주었다.

그러자 순간 온몸이 화끈화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아리아나로부터 축복마법을 강하게 받은 느낌이었다.

“부탁해요. 리니스 성을 구원해주세요.”

밖에 있는 마족 군단만 물리치면 되는 거잖아. 마신의 성물도 없는데 그까짓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물론 그렇다고 미련하게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약삭빠르게 싸워야지. 그래야 최소의 희생으로 승리를 취할 수 있을 테니까.

서유림이 활짝 웃어주었다.

“고마워, 아리아나. 그럼 한번 놀아볼까?”

아리아나가 성문 위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잠시 후.

“돌격!”

서유림의 외침과 동시에 2천여 명의 요정 군단이 마족의 무리를 향해 송곳처럼 찔러나갔다.

게임은 템빨이라고 했던가?

전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카리스 정령검에 성물 목걸이의 힘까지 더해지니 거칠 것이 없었다. 혼자서 마족 군단 속을 파고들어도 얼마든지 헤집고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유림의 손에서 카리스의 정령검이 춤을 출 때마다 앞을 가로막던 마족 군단이 볏단처럼 쓰러졌다.

하지만 무리하지 않았다. 서유림 혼자 싸우는 게 아니니까.

제 기분에 취해서 싸움에만 정신이 팔리면 뒤따르는 요정들 죽어나가는 것을 까맣게 모를 수도 있다.

마족 군단이 적당히 몰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서유림이 크게 외쳤다.

“후퇴!”

요정 기수들이 백기를 뒤로 눕혔다. 요정군단은 훈련받은 대로 일사불란하게 리니스 성 안으로 빠르게 후퇴했다.

수천의 마족 군단이 뒤따라 들어왔고, 그 이후의 상황은 마치 잘 짜여진 각본대로 흘러갔다. 보조성문이 떨어지면서 마족 군단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고, 이후 요정 군단의 무차별 공격이 시작되었다.

마족 군단과의 전투는 보름이 넘게 계속되었다.

욕심을 냈다면 조금 더 빨리 전투를 끝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유림은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요정 군단의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한마디로 정면대결을 피하고, 싸움이 격해진다 싶으면 재빨리 성문 안으로 달아나는 식의 유인작전만을 펼쳤다.

덕분에 20만이 넘는 마족 군단을 전멸시키는 동안 요정 군단의 희생은 2천명도 채 안 되었다.

그나마도 마지막 남은 마족 본진과의 전투 때 대부분 발생한 희생이었다.

덕분에 리니스 성 밖은 어느새 평화가 찾아왔다.

요정들이 커다란 함성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정령계 만세!”

“아리아나 만세!”

“서유림 만세!”

이런! 내 이름까지 연호해주니 기분이 묘하군.

물론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죽인 마족 군단의 수가 몇인데.

그리고 이런 때는 엉덩이를 빼는 것보다는 오히려 연호에 화답해주는 게 낫다. 요정 군단의 사기를 위해서도 말이다.

게다가 덤으로 아주 기분 좋은 보상까지 있었다. 마족의 군단을 베다가 마법의 서를 몇 개 주웠는데, 그중에 아주 쓸 만한 것들이 있었다.

서유림이 아리아나, 성주와 함께 높은 단에 올라가서 요정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다크핸드라. 아주 재미있겠어.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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