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성물 먹으러 갑시다 (2)
그와 동시에 성문 뒤쪽에서 갑자기 굵은 나무창살이 쿵! 쿵!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무려 5중이나 되는 보조성문이었다.
나무의 굵기도 하나같이 어른 허리통만 했다.
당황한 마족 군단이 성문을 마구 때렸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성문 위에는 마법 요정들이 잔뜩 포진해 있었다. 이때만을 기다리며 마력을 아껴둔 요정들이었다.
“마법 공격!”
요정들의 마법이 마족의 머리위로 맹렬하게 떨어졌다.
꾸구궁!
쩌저적!
화르륵!
화살은 여전히 비처럼 쏟아졌다.
마귀와 마물들이 성벽 아래에서 우왕좌왕하며 죽어나갔다. 암흑오거처럼 완력이 강한 마물들은 온몸으로 부딪쳐서 보조성문을 깨보려고 했지만, 보조성문 역시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마족 군단은 요정들의 마법과 화살에 의해 계속해서 쓰러져 나갔다.
하지만 마신의 성물 인근에 있는 마족 군단은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요정들이 힘껏 마법을 써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고, 타격을 받아도 금방 회복하곤 했다.
요정들은 전력을 다해서 마법을 구현했다. 덕분에 한두 번 마법을 사용하고 나면 마력이 바닥나서 다른 요정으로 교체되어야 했다.
그런 마법 요정만 리니스 성에 2천 명이 넘었다. 때문에 마법은 그치지 않고 계속 쏘아졌다.
서유림이 성문 위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지루할 정도로 긴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2시간가량이 지나자 마귀와 마물은 거의 다 전멸했다.
하지만 전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백여 명의 마족 본진이 성물 근처에 잔뜩 뭉쳐서 끝까지 저항했다.
“와, 마신의 성물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보네.”
감탄사가 절로 터져 나왔다. 벌써 수십 번도 넘게 마법을 쏟아 부었는데 마족들 모두 멀쩡했다. 요정의 마법이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하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어차피 마족들도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요정들이 지키고 있는 이상 성벽을 넘지도 못할 것이고 성문을 깨지도 못할 테니까.
“그만! 마력을 아끼세요. 어차피 저놈들은 독안에 든 쥐입니다.”
그제야 마법이 머졌다. 화살도 그쳤다.
이제부터는 버티기 싸움이었다.
서유림은 확신했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아리아나가 힘을 회복할 때까지만 버티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서유림이 아리아나에게 달려갔다.
아리아나는 깊이 잠들어있었다. 호흡이 가지런한 것을 보니 기력이 떨어졌을 뿐이지 몸이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 게 분명했다.
성주도 서유림을 따라서 아리아나에게 왔다.
아리아나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말 다행이군요. 그런데 성벽 안에 남아있는 마족들은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요정들의 마법이 효과를 보지 못하는군요.”
“아리아나가 힘을 회복하면 그때 공격하면 됩니다.”
“······아!”
성주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아리아나의 축복마법을 다시 한 번 사용한자는 의견임을 알아챈 것이겠지. 그러면 아리아나는 힘을 회복하자마자 또다시 진이 빠져서 이렇게 쓰러져있어야 할 테고.
그게 마뜩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아리아나 아끼자고 멀쩡한 요정을 쏟아 부을 수도 없는 것 아냐? 그것보다는 차라리 아리아나가 한 번 더 고생해주는 게 백 번 낫지.
아리아나도 그 편을 훨씬 더 선호할걸.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성주가 제안을 해보던가.
그리고 무려 마신의 성물을 얻는 일이잖아. 그럼 그만한 노력은 해야지.
“아리아나가 회복할 때까지 보조성벽의 경계를 늦추지 않도록 해주세요. 밤낮으로 지켜야 합니다.”
“물론이죠.”
“그럼 저는 주변을 돌면서 마족 군단을 들쑤시고 다니겠습니다.”
서유림은 쌩쌩한 요정 100여 명을 차출해서 함께 성벽을 돌았다. 그러다가 빈틈이 보인다 싶으면 재빨리 밧줄을 타고 내려가서 한바탕 헤집고 다녔다.
마족 군단이 몰려온다 싶으면 다시 밧줄을 타고 달아났다.
아리아나가 정신을 차린 것은 다음날 늦은 저녁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기력이 부족했다.
“내 체력을 조금 가져갈래?”
서유림이 입술을 슬쩍 들이밀었다.
아리아나가 고개를 옆으로 비켰다.
“아니에요. 이건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에요. 그런데 상황은 어때요? 마신의 성물은요?”
서유림이 방긋 웃어주었다.
“그것도 시간이 해결해줄 거야. 아리아나가 힘을 회복하는 순간 성물은 아리아나의 것이 될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신의 성물 때문에 남은 마족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어. 아리아나가 다시 축복마법을 걸어줘야 놈들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아!”
아리아나가 알겠다는 듯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런데 깨달음은 역시 힘든 일인가 봐요.”
또 ‘깨달음’ 이야기다.
사실 서유림은 막막하기만 했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기도 하고.
뭔가 힌트라도 있어야 노력이라도 하지.
“그런데 내가 느린 건가? 다른 요정들은 금방 깨달음을 얻는 모양이지?”
“그럴 리가요. 2차성장판을 여는데 성공한 요정도 흔치 않고, 그런 요정들 중에서도 깨달음을 얻은 요정은 역사상으로도 거의 없어요.”
뭐야? 그럼 거의 불가능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잖아.
“그래도 유림씨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옛날 카리스가 그랬던 것처럼.”
서유림이 피식 웃었따.
“날 높이 평가하는 건 고마운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내가 아리아나를 만나서 특별한 놈이 된 것뿐이지 사실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놈이거든.”
“아니에요. 저는 유림씨를 믿어요.”
그거야 뭐 아리아나 자유니까.
나중에 너무 크게 실망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피곤해요. 자고 싶어요.”
“그래. 푹 자.”
서유림이 요정망토를 끌어올려주었다.
순간 함께 끌어안고 잘까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이내 포기했다. 아리아나가 수면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상황도 못 되잖아. 괜히 아리아나 불안하게 할 필요 있을까?
대신 아리아나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잘 자, 아리아나.”
“유림씨도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스스슷-
어디선가 은밀한 움직임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소리 같기도 하고 고양이 발걸음소리 같기도 했다.
스스슷-
움직임 소리는 끊어졌다 이어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주변을 살피면서 조금씩 움직이는 듯했다.
움직임이 복도의 모퉁이 앞에서 멈추었다.
길쭉한 대롱 두 개가 슬그머니 나오더니 투훅! 하는 바람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방문 앞에서 보초를 서던 요정 두 명이 동시에 목을 잡고 쓰러졌다.
그러자 날렵한 이미지의 요정 두 명이 뒤꿈치를 들고 소리도 없이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스슷!
요정이 문에 귀를 바짝 대고 방문 안쪽의 기척을 살폈다.
두 요정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요정의 눈빛이 아니었다. 눈빛에 붉은 기운이 가득했다. 요정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방문은 삐거덕거리는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요정들의 손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단검이 한 자루씩 쥐어져 있었다.
요정들이 방안을 빠르게 살폈다.
요정망토를 덮고 잠들어있는 아리아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쪽을 향해 다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갑작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것도 남자의 목소리.
요정들이 깜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보았다.
서유림이 어느새 일어나 앉아서 요정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정들의 붉은 눈빛에 당혹감이 물들었다. 서로를 한번 바라보고는 재빨리 아리아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서유림이 조금 더 빨랐다. 옆에 두었던 카리스 정령검을 그대로 던졌다.
슈앗!
카리스 정령검이 날카로운 호선을 그리며 두 요정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두 요정은 아리아나를 찌르기는커녕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쓰러졌다.
서유림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카리스 정령검이 다시 호선을 그리며 서유림의 손 안으로 들어왔다.
“됐어 아리안. 이제 힘 그만 써도 돼.”
그러자 아리아나의 방어막이 되어주고 있던 정령왕 아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리안 말이 맞았어. 여자요정도 마귀로 변하고 있군.”
“마신의 성물 때문입니다. 생각보다 힘이 더욱 강해요. 아마 더 많은 숫자가 변해있을 겁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아리아나가 잠든 건물을 지키는 요정의 수가 몇인데. 그 많은 요정을 아무런 소란도 없이 해치우고 여기까지 들어오려면 한두 명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아마 나머지 마귀들은 밖에서 보초를 서고 있겠지.
“아리안이 아리아나를 지켜줘. 밖은 내가 정리할게.”
“네.”
서유림이 밖으로 나갔다.
역시나였다. 복도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두세 명의 요정들이 지키고 있었다. 하나같이 눈빛이 붉게 변한 마귀들이었다.
서유림을 보자마자 단검이나 샤브르 같은 무기를 뽑아서 공격했다.
물론 무의미한 공격이었다. 카리스의 정령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하나같이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밖으로 나갈수록 마귀의 수가 많아졌다. 최소 20명 이상의 요정이 마귀로 변한 듯했다.
그러다 보니 깊은 새벽에 제법 큰 소란이 일었다. 마귀들이 죽으면서 내지른 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그 소리에 사방의 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요정들이 쏟아져 나왔다. 성주도 자신의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모두 정리된 후였다.
“무슨 일인가요?”
“몇몇 요정이 마귀로 변해서 아리아나를 공격했습니다.”
“예에? 혹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보초를 철저히 세웠는데······.”
열 포졸이 도둑 하나를 못 지킨다고 했다. 숨어서 기습하는데 보초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그럼 아리아나님은······?”
“무사합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보초를 다시 세워주셔야겠습니다. 이곳 입구에 한 다섯 명쯤 세워놓으면 안전하지 않을까 싶네요.”
다섯 명이면 충분할 것이다. 제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다섯 명을 아무런 소란 없이 한꺼번에 해치울 수는 없을 테니까.
“저는 들어가서 조금 더 자겠습니다.”
서유림은 말투도 표정도 행동도 태연했다. 조금 전에 자객을 만난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여유가 넘쳤다.
성주만 멍한 표정으로 사라져가는 서유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
아리아나는 이틀을 더 쉬고 나서야 기력을 대부분 회복했다. 그나마도 100%는 아니었다. 대략 90%정도?
하지만 아리아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또 다른 혹사였다. 서유림이 아리아나를 재촉하듯 물었다.
“축복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
아리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표정이 측은해보였다.
물어보는 사람 미안하게시리.
“조금 더 쉬었다가 할까?”
“아니에요. 제가 쉬는 만큼 다른 요정들이 고생하잖아요. 빨리 끝내고 푹 쉬는 편이 나아요.”
그렇긴 하지. 아리아나도 빨리 마신의 성물을 손에 넣고 싶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이건 다 아리아나를 위한 거라고.
“그럼 가볼까?”
함께 남문의 보조성벽으로 향했다.
남문 인근은 여전히 긴장감이 넘쳤다. 이따금 쩌저적! 화르륵! 하며 마법이 펼쳐지기도 했다.
마족들도 기회를 봐서 성벽을 오르거나 성문을 부수는 시도를 하곤 했다.
하지만 사흘 전과 비교해서 변한 점은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팽팽한 대치상태만 계속되고 있었다.
마족들 역시 마신의 성물 덕분인지 쌩쌩하기만 했다.
“다들 준비하세요.”
서유림이 상황을 주도했다.
500여 명의 요정들이 보조성문 뒤에서 돌격을 준비했다. 그중 300명은 검술과 요정무술에 특화된 자들이었고 나머지 200명은 마법에 특화된 자들이었다.
선두에는 서유림이, 중앙에는 아리아나가 있었다.
“돌격!”
서유림의 외침과 동시에 보조성문이 열렸다.
요정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갔다. 곧장 마신의 성물을 향해 전진했다.
마족들도 깜짝 놀라서 달려들었다.
“지금이야!”
그와 동시에 아리아나가 모든 기력을 다 쏟아서 축복마법을 걸어주었다. 지속시간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강화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사방에서는 아리아나의 축복마법과 타이밍을 맞춰서 일제히 마법이 쏟아 부었다.
지난번처럼 순차적으로 쏟아지는 마법이 아니었다. 돌격하는 마법요정은 물론이고 성벽 위에 포진된 마법요정들까지 총 400여 명의 마법요정이 동시에 마법을 펼친 것이다.
마신의 성물 근처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마치 수백 대의 폭격기가 동시에 융단폭격을 가하는 듯했다.
번개와 불꽃, 돌풍등이 난무하면서 앞이 전혀 안 보일 정도였다.
마법 공격은 짧고 굵었다. 불과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신의 성물을 찍어 누를 것 같던 마법이 일순간 그쳤다.
그러자 서유림을 필두로 300여 명의 요정들이 검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직 먼지도 채 가시지 않아서 시야가 흐렸지만, 마족의 형태는 흐릿하게 볼 수 있었다.
서유림의 손에서 카리스의 정령검이 춤을 추었다.
마족은 마법 공격으로 만신창이 상태였다. 반항하기 위해 애는 썼지만 움직임에 영 힘이 없었다.
마신의 성물도 아리아나에 의해 강화된 마법의 집중포화만큼은 버텨낼 수 없는 듯했다.
마족의 수는 급격하게 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물의 힘으로 기력이 다시 되살아났지만, 전세를 역전시키기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마지막 남은 마족마저 서유림의 검에 의해 목이 잘렸다. 더는 성물을 지키는 마족이 남아있지 않았다.
“위대하신 정령신 만세!”
“아리아나 만세!”
요정들이 다들 손을 번쩍 치켜들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아리아나도 그 모습에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옆으로 스르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