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7
일타오피 (2)
권이슬이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다른 마령의 계약자는 어떤 사람일까?’
누가 되었건 일단 기선부터 제압해야 할 것이다. 어떤 무리에서건 우두머리는 존재하는 법이니까.
마령끼리는 서로 위아래가 없다고 하니 사람들 사이에서 서열을 만들면 될 것이다.
권이슬은 자신감이 넘쳤다. 마령과 계약한 것도 자신이 선배고, 육체적인 능력에 있어서도 자신이 훨씬 우위에 있다고 자신하니까.
게다가 무려 미들급 챔피언이 아닌가?
‘뭐든 시작이 중요한 법이지. 후훗.’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상황을 그려보았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띵동!
시각은 어느새 자정에 가까웠다. 이 시각에 연락도 없이 권이슬을 찾아올 사람은 없다.
‘드디어 도착했군!’
권이슬이 현관문으로 도착했다. 경쟁심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동료가 도착했다는 생각에 가벼운 흥분도 느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현관문 렌즈를 통해서 바깥 상황을 살폈다.
“누구요?”
밖은 조용했다. 렌즈를 통해서 보이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해있는 모양이다.
‘이놈이 처음부터 나와 장난하자는 건가?’
“밖에 누구냐고?”
조금은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권이슬은 순간 덜컥 의심이 들었다.
‘혹시 임채모의 일행이······?’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신분을 완전히 감추고 공격했기 때문에 임채모는 자신의 정체를 절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밖에 있는 사람은 마령의 계약자가 분명한데.’
권이슬이 혹시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계약자요?”
그러자 밖에서 잠이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대답이 들려왔다.
“그렇소.”
“근데 왜 숨어있어? 렌즈로 얼굴을 보여 봐.”
권이슬이 다시 렌즈로 밖을 살폈다.
그제야 옆으로 숨어있던 자가 슬그머니 얼굴을 보였다. 하지만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얼굴을 보이라니까.”
하지만 사내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렌즈의 사각지대로 몸을 숨기면서 이야기했다.
“당신부터 모습을 보여 봐.”
무척 거친 목소리였다.
권이슬이 피식 웃었다.
‘자식! 겁은 많아가지고.’
사실 누가 되었건 두렵지는 않다. 무려 마령의 힘을 가진 자신이니까.
설령 임채모 일행이 우르르 몰려왔다고 해도 붙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곳이라면 오히려 자신이 더 유리했다. 좁은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싸운다면 머릿수는 큰 의미가 없을 테니까.
‘차라리 임채모 일행이었으면 좋겠군.’
권이슬이 바짝 긴장하며 현관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와.”
그때였다. 갑자기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마스크 쓴 자가 불쑥 들어오며 권이슬의 목을 움켜쥐었다. 미리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행동이 워낙에 빨라서 손쓸 틈이 없었다.
“억! 뭐······ 뭐야?”
상대는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다짜고짜 권이슬을 쓰러뜨리고는 뒤쪽에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MMA 격투기에서 자주 사용하는 리어네이키디쵸크였다.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을 보니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억!”
권이슬도 그라운드 기술은 수준급이라고 자신했다.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하지만 상대의 실력이 압도적으로 강했다. 힘으로도 기술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임채모 일행이 아니었다.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자였다.
‘대체 누구야?’
하지만 그런 의문을 품을 여유조차 없었다. 상대는 정확히 경동맥을 조르는 방향으로 목을 비틀고 조였다.
“우욱!”
권이슬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령의 외침소리도 들려왔다.
> 정령의 계약자다. 어디서 이런 강력한 존재가······! 내가 흡수당하고 있다. 어떻게 좀 해봐.
‘나도 죽을 지경이라고. 마계에 도움을 청해봐.’
> 그렇게 쉽게 되는 게 아냐. 집중이 필요······ 으윽!
마령의 힘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자 권이슬도 완전히 힘을 잃었다. 사내가 힘을 풀자 권이슬의 몸이 흐물흐물 내려앉았다.
그제야 서유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쉽군!’
권이슬도 체력을 잔뜩 흡수당했으니 한동안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 활동하려면 최소 일주일은 요양해야 하겠지.
서유림이 현관문을 닫고 권이슬을 방 안쪽으로 옮겼다.
원래는 권이슬의 마령만 처리하고 재빨리 철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권이슬이 조금 전에 아주 재미난 말을 했기 때문이다.
[계약자요?]
그 말은 마령의 계약자가 또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이곳으로 올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서유림이 현관문 앞에서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마치 명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았다.
그때부터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이따금 밖에서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때마다 서유림의 온몸은 긴장감으로 팽팽해졌다.
하지만 다들 다른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저벅. 저벅.
또다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한 사람의 것이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달랐다. 발걸음 소리에 조심성이 가득했다.
이어서 초인종 소리가 띵동! 하고 울렸다. 권이슬의 집 초인종 소리였다.
렌즈를 통해 보니 완전히 거지꼴을 한 중년인이었다.
서유림이 목소리를 낮게 하여 물었다.
“누구요?”
“저기······ 마령의 계약자······.”
이후의 이야기는 들을 필요도 없었다.
서유림이 현관문을 열었다.
순간 중년인이 멈칫했다. 서유림이 마스크와 모자로 신분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유림이 중년인을 가만 두지 않았다. 손목을 낚아채며 다급히 재촉했다.
“어서 빨리 안으로 들어오시오. 어서!”
중년인이 영문도 모른 채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서둘러서 신발을 제대로 벗지도 못할 정도였다.
그때 서유림이 갑자기 중년인을 덮쳤다. 권이슬에게 했던 것처럼 뒤에서 목을 조르며 마령의 힘을 흡수했다.
중년인은 거의 저항하지 못했다. 권이슬보다 힘도 약했고 기술도 떨어졌다. 그렇게 현관문 안으로 들어오고 10초 정도 만에 권이슬처럼 바닥에 흐물흐물 널브러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어서 세 명의 사내가 더 올라왔다. 하나같이 같은 방법으로 마령의 힘을 흡수하고 권이슬 옆에 나란히 눕혔다.
하지만 그 네 명이 전부였다. 새벽 세 시까지 기다려보았지만, 더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철수할 때가 되었군.’
서유림이 마스크와 모자로 신분을 가린 채 조용히 사라졌다.
* * *
똑똑.
여비서가 노크와 함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주었다.
서유림이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명진식품 대표 한명진을 비롯해서 주요 임원 세 명이 모여 있었다. 다들 서유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위기가 생각과는 다르다. 서유림이 들어오자마자 마뜩찮은 눈빛을 보낼 것으로 생각했는데, 뜻밖에 호의적이었다.
특히 대표 한명진이 그랬다. 가볍게 웃는 얼굴로 서유림에게 자리를 창했다.
“이쪽으로 앉지.”
임원들이 앉아있는 소파였다.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리였다.
하지만 시간이 변하면 사람도 변하고 자리도 변하는 법이다.
서유림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여비서가 내어주는 홍삼차도 후르릅! 소리를 내며 여유 있게 마셨다.
마치 어린 나이에 임원으로 승진해서 자리에 앉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리 편한 자리는 아니었다. 표정이 호의적이라고 해서 속마음까지 호의적이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 다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것이다. 단지 서유림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저렇게 표정관리 하고 있는 거겠지.
오래 앉아있고 싶지 않았다.
서유림이 안주머니에서 흰색 봉투를 꺼내서 한명진에게 내밀었다.
사실 이런 사표야 부장급 간부에게 던져주고 나오면 될 일이다. 그런데 한명진이 굳이 얼굴을 보자고 해서 사장실까지 들어온 것이다.
한명진이 사표를 꺼내서 내용을 살짝 들춰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봉투에 넣어서 서유림에게 돌려주었다.
“MAN FC와 갈라섰다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우리 명진식품하고도 등을 질 이유는 없지 않겠나?”
자존심도 없나? 오히려 명진식품에서 먼저 해고한다고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하긴, 기업의 이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그깟 자존심이 중요하겠는가?
물론 자존심을 더욱 중하게 내세우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한명진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좋은 조건을 제시한 기업이 있어서요.”
사실이었다. 비록 권이슬에게 불의의 1패를 당하긴 했지만, 많은 기업들이 서유림의 상품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도 기회를 주게.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겠네.”
왜지?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기업이미지가 아닐까 싶었다.
MAN FC가 유진그룹 소속이라는 것은 격투기 마니아라면 대부분 알고 있다. 만약 지금 시점에 서유림이 명진식품과 갈라선다면 유진그룹의 보복성 조치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걸 피하고 싶은 거겠지.
한편으로는 서유림의 상품성도 인정하고 있을 것이고.
서유림 입장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명진식품이나 유진그룹에 딱히 원한을 품은 것도 아니고. 단지 꼴 보기 싫은 놈이 몇 있을 뿐이다.
“명진식품에서 제 가치를 인정해주신다면, 저 역시 명진식품을 떠날 이유는 없습니다.”
“역시 자네하고는 말이 통해. 하하.”
한명진이 기분 좋게 웃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구체적인 계약조건이 오가지는 않았다. 그런 일까지 대표가 나서서 처리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사실 이 일은 명진식품보다는 유진그룹에 더 깊이 관련된 일이었다. 재계약 관련 업무는 유진그룹 담당자와 진행하게 될 것이다.
“그럼 전 이만.”
서유림이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임원진들의 표정이 대번에 바뀌었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한명진을 바라보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UFC 진출하면 맥도 못 추고 찌그러질 놈입니다.”
“시끄러!”
한명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임원진들이 어깨를 움찔했다. 한명진이 임원진들에게 이렇게까지 호통을 친다는 것은 화가 잔뜩 나있다는 뜻이었다.
한명진이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자신인들 좋아서 서유림에게 웃는 낯을 했겠는가? 회장 한유진이 하라니 마지못해 한 것뿐이다.
“가서 일들 해. 윗대가리들이 일을 똑바로 못하니까 회사가 이 꼴로 돌아가는 것 아냐? 그렇게 일하면서 월급 받으면 부끄럽지도 않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 나가!”
임원진들이 조심스럽게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서유림이 회사를 나가려고 복도를 걷는데 익숙한 얼굴이 눈에 보였다.
예전이었다면 굳이 알은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웬만하면 마주치지 않는 방향으로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오히려 저쪽이 서유림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는 눈치였다. 얼른 다른 곳으로 피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서유림이 얼른 손을 들어서 불렀다.
“어이, 한동민 대리. 오랜만이네.”
한동민이 움찔했다. 서유림이 성큼성큼 다가가자 다른 곳으로 피하지도 못하고 이쪽을 몸을 돌려세웠다.
눈치를 딱 보니 속마음이 훤히 읽혔다.
‘저자식이 여긴 갑자기 왜 나타났어?’
물론 서유림은 모른 척했다. 세상 반가운 웃음을 지었다.
“잘 지냈어?”
존댓말 따위는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지. 나이도 많고, 직급도 이젠 팀장으로 더 높은데. 반면 한동민은 아직도 대리 신세였다.
원래는 작년에 팀장으로 승진했어야 했는데, 한유진 회장에게 찍혀서 승진이 1년 미뤄졌다고 들었다.
한동민이 망설이는 눈치였다. 서유림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막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서유림이 그런 한동민의 어깨에 팔을 과격하게 걸쳐 어깨동무했다. 서유림의 힘에 짓눌려서 한동민의 어깨가 휘청거렸다.
“왜 피하려고 그래? 누가 잡아먹어? 괜찮아. 편하게 대해.”
한동민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빨리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서유림이 한동민의 아랫도리를 슬쩍 가리켰다. 속삭이듯 물었다.
“근데 그건 어때? 다 나았나? 요즘은 잘 서?”
한동민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못했다.
서유림이 피식 웃었다.
둘 중 하나겠지. 아직도 잘 세워지지 않거나, 아니면 간신히 세워지기는 하거나.
만약 다 나아서 잘 세워지고 있다면 미안하게 됐다. 오늘부터 며칠간은 잘 세워지지 않을 테니까.
포이즌까지 동원해서 인상을 조져줄까 하다가 오랜만에 만나서 그러는 건 너무 심하다 싶어서 참았다.
한동민이 서유림의 어깨동무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제가 지금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알았어. 나도 바쁘거든.”
서유림이 한동민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주었다.
“근데 언제까지 대리로만 있을 거야? 빨리 팀장 달아야지. 파이팅 해.”
서유림이 먼저 회사를 나섰다.
한동민이 그런 서유림의 뒤통수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저 재수 없는 인간은 갑자기 왜······? 근데 내가 많이 긴장했었나보네. 왜 이렇게 피곤해. 하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