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134화 (134/196)

# 134

그럴 줄 알고 (1)

그러는 사이에 성주라는 요정이 찾아왔다.

성주 역시 여자였다. 아리아나를 보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리 성을 찾아줘서 영광이에요.”

“받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이곳 상황도 좋지는 않은 것 같아요.”

“정령신께서 결국 소멸하신 것 같아요. 원래의 성주님께서도 마신의 유혹을 느끼시고는 자리를 내려놓고 스스로를 결박하셨어요.”

“아······! 결국······!”

기어이 그 때가 찾아왔구나. 그래서 정령계가 이토록 엉망이었던 거야.

“그래서 제가 대신 성을 이끌고 있어요. 하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마족 군단이 마신의 성물까지도 가지고 있어요. 상황이 무척 암울합니다.”

성주와 아리아나가 이런저런 상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유림이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

그런데 문득 귀에 박히는 내용이 있었다.

“마신의 성물이라고요?”

“우리 요정에게 정령신의 성물이 있다면, 마족에게는 마신의 성물이 있죠. 그것만 아니어도 어떻게든 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령신의 성물은 뭔지 안다. 요정마을마다 정령신의 제단이 있는데, 그 제단을 만드는 마나하트다.

하지만 요정마을의 마나하트는 모조리 힘을 잃었다. 그 때문에 남자 요정들이 마신의 힘에 사로잡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마족에게도 그런 성물이 있다니.

“그럼 마신의 성물만 파괴하면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다는 건가요?”

“성물은 파괴되지 않아요. 대신 정화는 할 수 있겠죠. 그러면 마신의 성물이 아니라 우리의 성물이 되겠죠.”

서유림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이게 무슨 입맛 돋우는 소리야?

“마신의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요?”

‘혹시 저도 그 힘을 갖는 게 가능한가요?’

그 질문이 목구멍까지 솟구치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렇지 않아도 더 강력한 힘이 필요했는데, 딱 적당한 놈이 나타나지 않았는가?

굳이 질문할 필요는 없었다. 성주가 묻지도 않은 것에 답을 주었다.

“마신의 성물은 정령신의 후보가 정화시킬 수 있어요. 우리에겐 아리아나님이 계시니 마신의 성물을 손에 넣기만 한다면 저걸 우리의 힘으로 이용할 수 있겠죠.”

우리의 힘으로 이용할 수 있다? 그 말은 나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설령 아니라고 해도 상관은 없다. 그래도 아리아나가 정화하여 가질 수 있을 것이니.

그것만 해도 모험을 걸어볼 가치는 충분했다.

서유림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서유림의 표정에 아리아나도 덩달아 기대어린 표정을 했다.

“왜요? 좋은 방법이라도 떠올랐어요?”

“아니. 아직. 뭘 알아야 방법을 떠올리건 말건 하지.”

하지만 뭔가 떠오를 것도 같았다. 분명히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무슨 근거로 그런 자신감을 갖느냐고?

이곳 요정마을을 다니면서 요정들과 마족들을 만나보고 내린 결론이다.

이곳은 전략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그냥 정직하게 힘 대 힘으로만 싸웠다.

그나마 요정이 조금 더 머리를 쓰긴 했지만, 그래봐야 제단을 쌓아서 신성력의 보호를 받거나 이렇게 성벽을 높이 세워서 그 방어력에 의존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는 다르거든. 이래봬도 위대한 고구려의 후예거든.

저 옛날 살수에서, 안시성에서, 요동성에서 수나라, 당나라의 대군을 상대로 어떻게 싸웠는지도 배웠거든.

게다가 성을 어떻게 쌓아야 강력한지도 배웠거든.

그래. 성을 이용하는 거다. 잘만 이용하면 훨씬 작은 전력으로 큰 전력을 궤멸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일단 성을 한 바퀴 둘러봐도 될까요?”

서유림의 요청에 성주가 흔쾌히 응했다.

“물론이죠. 제가 직접 안내하겠습니다.”

함께 성을 크게 둘러보았다. 예상보다 더욱 컸다. 조금 빠르게 걸었는데도 한 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다.

곳곳에서 마족 군단과 요정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성벽이 높고, 마족들도 성을 뚫는 방법을 몰라서 큰 위협은 없었다. 이따금 스톤풋이 특유의 도약력을 발휘하며 성벽을 뛰어넘으려고 시도해보았지만, 대부분은 벽에 부딪치는 자살행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성을 지키는 요정들의 숫자가 계속 줄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마족들은 마물을 끝도 없이 불러내서 전투에 투입하고 있었다.

결국 시간은 마족의 편이었다. 이런 식으로 전투가 계속된다면 한 달 버티는 것도 쉽지 않겠다.

“어때요? 방법이 보여요?”

아리아나가 급한 모양이다. 성을 둘러보자마자 또 묻는다.

하긴, 눈앞에서 요정들이 죽어나가고 있으니 애가 탈 수밖에 없겠지.

서유림이 가볍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공한다는 장담은 못 하지만, 해볼 만한 방법은 있어.”

“어머, 그래요? 어떤 방법인데요?”

아리아나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졌다.

성주 역시 눈을 크게 뜨며 서유림만 바라보았다.

왠지 전략가가 된 기분이다. 내 주제에 이런 어마어마한 전투에서 전략을 제시하게 될 줄이야.

하지만 이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성곽 전투에서 흔히 쓰이던 방법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함정을 만들고 그 안으로 마족 군단을 유인해보도록 하죠.”

“함정이라면 어떤······?”

서유림이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서 조약돌로 간단하게 그림을 그려주었다.

먼저 성문 안쪽으로 널찍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성문 안쪽으로 이렇게 보조성벽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족 군단이 들어와도 더는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죠.”

“마족 군단이 그 안에 갇힌 꼴이 되겠군요.”

“맞아요. 보니까 다들 활을 잘 쏘시던데 이 주변에서 활을 쏘면······.”

“······아!”

아리아나도 성주도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이 하나 더 있다.

“성문 밖에서는 이 사실을 몰라야 합니다. 그래야 마족 군단이 계속 안쪽으로 유인될 테니까요. 만약 마신의 성물까지 이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면······.”

그 다음의 일은 누구라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아리아나도 성주도 한껏 기대가 된다는 듯 눈빛을 반짝였다.

“그게 가능할까요?”

“적당한 시점에 성문을 닫아버리면 됩니다.”

“마족들이 성문을 점하고 있을 텐데 어떻게······?”

서유림이 방긋 웃었다.

“그것도 방법이 있죠.”

작업은 바로 시작되었다. 성문 안쪽으로는 이미 많은 구조물들이 있었다. 구조물 사이의 공간에만 보조성벽을 쌓으면 되는 일이었다.

재료도 충분했고 인력도 충분했다.

게다가 요정들이 하나같이 전력을 다했다. 정령신을 향한 충성심은 종교적인 신앙심을 뛰어넘을 정도였다.

물론 서유림은 작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일에 몰두했다. 마족 군단의 사냥이었다.

성벽을 빙빙 돌며 조금 허술해 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성벽을 내려가서 마족 군단을 학살했다. 그러다가 마족 군단이 몰려오면 위에서 내려준 밧줄을 타고 재빨리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보조성벽을 세우는 작업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 * *

서유림이 눈을 떴다.

잠에서 깨자마자 평소와 다른 긴장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긴장감이라기보다는 약간의 흥분이었다.

‘과연 내가 힘을 흡수할 수 있을까?’

정령계의 일도 그렇고, 인간계의 일도 그렇고 중대한 전환점에 와있었다.

정령계에서는 잘만 하면 마신의 성물을 먹을 수 있을 것이고, 인간계에서도 마령의 힘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정령계의 일이야 정령계에서 생각하면 될 것이고.

‘권이슬에게 붙어있는 마령의 힘을 흡수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은 간단한 일이다. 권이슬의 주소만 확인하면 주머니 속 물건을 꺼내듯 언제든 제압하고 흡수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서두를 일은 아니다.

아리아나는 분명히 다른 일당이 있을 거라고 했다. 마계의 존재들은 위계질서가 엄격하고 무척 조직적이라고 했으니까.

그렇다면 그놈들을 일망타진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 놈도 빠짐없이 모든 마령의 힘을 다 흡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놈들의 일당을 어떻게 찾아내지?

어렵지 않게 방법이 떠올랐다.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서유림의 조력자가 되겠다고 자청한 이가 있지 않은가?

‘김영자에게 부탁하자. 그러면 권이슬의 집도 쉽게 찾아낼 수 있겠지.’

아직은 새벽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이른 시각이다. 김영자는 오후나 되어야 만날 수 있겠지.

서유림이 아침운동을 위해서 밖으로 나갔다.

모텔 가까운 곳에 제법 큰 공원이 있었다. 공원을 뛰면서 머릿속으로는 마령과 관련한 생각을 했다.

‘이놈의 다음 행보는 어떻게 될까?’

마령이 최우선 목표로 삼는 것은 하나라고 했다. 정령을 찾아서 그 힘을 흡수하는 것.

서유림은 스스로 마령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았다. 다음 목표를 누구로 삼을 것인가?

그러자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쩌면 마령이 벌써 움직였을 수도 있겠군.’

시각은 아직 일곱 시도 안 되었다. 그래도 정령의 힘을 얻었으니 지금쯤이면 일어나 있겠지.

서유림이 휴대폰을 열어서 전화를 걸었다.

* * *

채희라를 동행하지 않고 서유림 혼자서 김영자를 찾아갔다.

물론 김영자는 서유림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어서 와요.”

김영자는 보이차 마니아답게 보이차부터 권했다. 서유림도 서두르지 않았다.

“드세요.”

“감사합니다.”

천천히 보이차를 음미했다.

비싼 거라 그런지 향이 좋긴 하다. 이러다가 김영자에게 전염돼서 보이차 마니아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데 유림씨는 기수련 같은 것은 안 해요?”

김영자가 먼저 분위기를 띄워보겠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사실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육체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오직 운동만 고집해왔는데, 몸을 지배하는 것은 정신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강해지고 있었다.

특히 정령계에서 2차성장판을 연 후로 그런 생각이 더욱 강해졌다.

육체의 수련만으로는 넘지 못하는 벽이라는 게 분명히 있었다. 그것을 넘을 열쇠가 바로 정신인 것 같았다.

“이제부터 해볼까 합니다. 혹시 좋은 선생님 있으면 추천해주시겠어요?”

“물론이죠. 마침 이따가 이곳으로 오실 계획인데 바쁘지 않으면 그때 함께 봬요.”

바쁠 게 뭐가 있나? 그냥 혼자 바쁜 척하는 거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다고요? 와우, 이거 설레는걸요. 과연 유림씨가 제가 할 처 부탁은 뭘까요?”

역시 미국에서 오래 살긴 했나보다. 이따금 미국 드라마나 헐리웃 영화에서나 보던 액션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서유림도 이제 본론을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모회와 관련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최대한 자세하게요. 누가 있고, 성격이 어떻고, 친구는 누구고, 취미, 특기, 주로 가는 장소, 버릇, 학력사항, 가족사항 등 알아볼 수 있는 거라면 모두요.”

“무척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군요. 좋아요. 이유는 당연히 묻지 않기를 바라시겠죠? 두 번째는요.”

잘 아는군. 쓸데없는 것을 묻지 않으니 마음이 가볍다.

“권이슬과 관련한 정보도 필요합니다. 집이 어디인지. 가족사항은 어떻게 되는지. 최근에 어디를 주로 다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등등요.”

“권이슬? 전혀 뜻밖의 인물이군요. 그것도 제가 이유를 알면 안 되는 일인가요?”

당연하지. 오히려 사모회 관련 부탁보다 더욱 보안이 필요한 일이다. 김영자 앞에서 마족이니 마령이니 하는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으니까.

물론 그런 티를 내서도 안 되겠지.

그냥 일종의 규칙처럼 정해두는 게 좋겠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 어떤 일에도 이유는 묻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제가 무슨 일이건 마음 편히 부탁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영자가 서유림의 부담을 줄여주겠다는 듯 활짝 웃어주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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