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더 강해져야 한다. (2)
“성동격서?”
아리아나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모르겠지. 이리아나가 손자병법 같은 인간계의 전술을 공부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리니스 성은 한눈에 봐도 규모가 엄청났다. 성벽을 따라서 길이를 재보면 못해도 10km는 될 것 같았다.
마족 군단의 규모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그 긴 성을 모두 두툼하게 에워쌀 수는 없다. 당연히 군데군데 빈틈이 보일 수밖에.
물론 빈틈이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다. 빈틈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면 사방에 있는 마족 군단이 즉시 몰려들 테니까.
순식간에 포위당할 것이고, 그것으로 끝이겠지.
반면 그 현상을 반대로 한다면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요정의 무리가 포위를 뚫고 들어가려고 하면 주변에 포진한 마족 군단이 몰려들 것이다. 그놈들을 유인하듯 꼬리에 매달고 멀리 달아나면 어찌 되겠는가?
당연히 마족 군단이 있던 자리가 텅 비게 될 것이다. 아리아나가 나머지 요정들과 함께 그 틈을 비집고 성 안으로 진입하면 된다.
“그런 방식이라면 굳이 서유림님까지 나설 필요 없어요. 서유림님은 아리아나님 곁을 끝까지 지켜주셔야 합니다.”
요정들이 결연하게 이야기했다.
서유림인들 그러고 싶지 않겠는가? 누구보다도 그 방법을 가장 택하고 싶은 사람이 바로 서유림이었다.
요정이라면 모를까? 세상에 죽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다른 요정들과 정이 쌓인 것도 아니고.
요정들을 희생시켜서 서유림이 살 수 있다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유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이 작전이 성공하려면 미끼가 충분한 시간을 벌어줘야 합니다. 제가 없으면 시간을 벌 수 없을 거예요.”
요정들이 할 말을 잃었다. 다들 서유림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유림의 힘이 더해진다면 버틸 수 있는 시간이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아리아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면 차라리 성으로 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피해요.”
서유림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피할 곳이 있어?”
“그건 아니지만, 최소한 며칠을 버틸 곳은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그 이후에는?”
“그게 사실······.”
아리아나가 뭔가를 이야기하려다가 주저주저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주변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아리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이밍 죽이는군. 마치 아리아나의 말을 막으려고 나타나는 것 같잖아.
“제가 요정들을 이끌고 시간을 벌겠어요.”
아리안이 등장하자마자 이야기했다.
주변에서 모습을 감춘 채 엿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데 그거 정말 괜찮은 방법인걸.
아리안도 정령왕답게 능력이 쑥쑥 성장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게 정령왕 맞아?’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나약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서유림의 능력을 추월한 상태였다.
당연히 서유림보다 시간을 더 잘 끌어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아리안은 위험한 순간에는 안개처럼 흩어지며 몸을 감출 수도 있다. 이 일에 이보다 완벽한 적임자가 또 있을까?
그런데 문득 아리아나의 말이 궁금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기에 그렇게 주저했을까? 아리아나 답지 않게.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잡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었다. 못 다한 대화는 성으로 들어간 후에 나누면 될 것이다.
“좋아! 그러면 내가 아리아나 옆을 지킬 수 있겠군!”
서유림이 무리를 나누었다. 20명은 아리아나를 도와서 성으로 향하고, 나머지 480여 명은 아리안과 함께 마족 군단의 관심을 끌 것이다.
성 주변을 움직이다가 포위망이 엷은 부분을 발견했다.
“출발!”
아리안이 요정들을 이끌고 리니스 성을 향해 뛰었다.
마족 군단이 곧바로 반응했다. 다들 아리안의 무리를 잡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아리안의 무리가 못 당하겠다는 듯 얼른 방향을 틀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가뜩이나 엷었던 포위망이 더 엷어졌다.
시간을 지체하지 않는다면 대충 50명 정도만 상대하면 될 것 같았다. 그나마도 띄엄띄엄 흩어져있었다.
“지금이야!”
서유림과 아리아나가 요정들과 함께 뛰었다.
남아있던 마족 군단이 서유림 일행을 발견했다.
크아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길을 막겠다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서유림의 검이 춤을 추었다. 하얀 서리가 뿜어질 때마다 마귀와 마물의 목이 뎅강뎅강 잘려나갔다.
다행히 마족은 없었다.
순식간에 성벽 아래에 도착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성 위에서 밧줄이 줄줄이 내려왔다. 서유림 일행이 밧줄을 잡자 위에서 힘껏 끌어올려주었다.
상승속도가 무척 빨랐다. 성벽의 높이가 20m도 넘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성벽 위에 안착했다.
마족 군단이 뒤늦게 우르르 몰려들었지만, 상황은 이미 종료된 뒤였다.
하지만 웃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고 나섰던 요정들이 다들 죽거나 붙잡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죽은 요정들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살아서 붙잡힌 요정들은······. 그 뒷일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서유림과 아리아나를 비롯해서 살아남은 요정들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휴식처로 안내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아리아나는 성에서도 귀빈 대접을 받았다.
정령신의 후보라는 자격은 정령계에서 그 어느 신분보다 높임을 받는 듯했다.
물론 그것으로 신분이 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리아나 덕분에 서유림도 덩달아 귀빈 대접을 받았다.
휴식처로 향하면서 주변 상황을 살폈다.
막막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요정들은 다들 침착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저렇게 침착한 모양이다.
“그런데 남자 요정이 한 명도 안 보이는군.”
“그러네요. 이곳도 정령신의 힘이 약해진 모양이에요.”
그렇게 쉼터에 도착했다. 비로소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주변에 다른 요정도 없었다. 아리아나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분위기였다.
서유림이 먼저 물었다.
“아리아나, 아까 하려고 했던 말이 뭐였지?”
“언제요?”
생각이 안 나는 거야? 아니면 안 나는 척하는 거야?
“성에 들어가는 대신 며칠 숨을 곳으로 가자고 했었잖아. 그때 뭔가 이야기하려 했었고.”
“······아!”
어라! 아리아나 표정이 갑자기 어색하게 변하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게 분명한데.
“그건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말씀드리고 곤란해요.”
역시 숨기는 게 있군.
하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아리아나를 하루 이틀 겪었나? 곱상한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고집이 고래심줄보다 더 질기다. 한번 ‘아니다.’ 하면 절대로 아니었다.
대신 인간계에서 있었던 권이슬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번에는 아리아나도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보였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게 분명해요?”
“100% 확실해! 게다가 눈빛도 순간적으로 붉게 빛났어. 마족들의 눈빛처럼 말이야.”
“그러면 마령의 계약자가 확실하군요. 결국 인간계에까지 마신의 힘이 뻗쳤어요.”
“그런데 왜 하필 그 사람을 택한 것일까? 단순한 우연일까?”
“그것까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해요. 마계의 존재가 인간계로 갔다면 첫 번째 목표는 정령계의 힘을 찾아서 흡수하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마신이 서유림을 목표로 삼고 권이슬을 계약자로 선택한 게 분명하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마령은 인간과 계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인간계의 일을 알 수 있나?”
“아니요. 인간의 눈과 귀를 통해야만 알 수 있겠죠.”
“그럼 앞뒤가 안 맞잖아. 계약도 안 된 상태에서 나를 어떻게 알고 권이슬을 계약자로 선택을 해?”
아리아나도 ‘그러고 보니 그러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가능한 상황을 추론해냈다.
“계약자를 옮겼을 수도 있죠.”
“그게 가능해.”
“쉽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에요.”
마령은 스스로 계약자를 선택할 수 있고, 또한 중간에 계약자를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도 있다.
하지만 계약자를 바꿀 때에도 기존 계약자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테면 계약자를 괴롭혀서 ‘제발 나가주세요.’ 하는 상황으로 만드는 식이다.
아리아나는 그 외에도 마령과 관련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령은 기본적으로 악의 기운이 강한 존재다. 계약하는 순간 계약자가 그 기운을 느낄 정도로.
때문에 마령과 계약을 맺었다는 것은 그 사람도 스스로 악인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했다.
또한 마령의 목표는 마계에서나 정령계에서나 인간계에서나 늘 같다고 했다. 힘을 흡수하여 강해지는 것과 여자를 겁탈하여 번식하는 것.
한마디로 본능에만 충실한 존재였다.
“그러니 마령의 계약자를 발견했다면 인정을 베풀면 안 돼요.”
아리아나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서유림은 문득 지나온 날이 후회되었다.
‘차라리 격투기를 시작하지 말걸. 아니면 적당히 패하면서 중간만 하거나.’
그런데 실력을 너무 드러냈다. 지금껏 모든 경기를 압도적인 실력 차로 승리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토너먼트에서는 무제한급 선수들조차도 가볍게 쓰러뜨렸다.
만약 다른 누군가가 그런 능력을 보여준다면 서유림도 당연히 의심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마령이나 정령의 계약자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더욱 그랬겠지.
하지만 뒤늦은 후회였다. 지금은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서유림의 물음에 아리아나가 아주 간단한 해결책을 주었다.
“마령을 제압해서 유림씨의 힘으로 흡수해야죠.”
순간 서유림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내 힘으로 흡수해? 그게 가능해?”
“가능해요. 마령이 되었건 정령이 되었건 강하면 잡아먹고, 약하면 잡아먹히는 싸움이에요.”
한마디로 오직 약육강식의 원칙만 적용된다는 뜻이잖아.
“내가 제압할 수 있을까?”
“당연하죠. 유림씨는 무려 2차성장판을 넘어선 분이잖아요. 그렇다면 설령 마왕을 직접 상대한다고 해도 능히 이길 수 있어요. 잠재력만 폭발시킨다면요.”
“잠재력?”
사실 잠재력은 이미 정해진 수치다. 스텟의 한계치가 999니까. 그 말은 제아무리 잠재력을 폭발시킨다고 해도 999 이상의 능력은 발휘할 수 없다는 뜻이다.
“겨우 999의 능력으로 마왕을 이길 수 있다고?”
서유림이 부정적인 말투로 물었다.
그런데 아리아나는 당연하다는 듯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기고도 남죠. 지금쯤이면 유림씨도 999라는 수치의 의미를 스스로 깨달으셨을 것 같은데.”
이건 또 무슨 소리야? 999의 의미라고?
서유림이 이해 못 하는 표정을 하자 아리아나가 방긋 웃었다.
“정령계에서 999에 도달했다는 것은 한계를 넘어섰다는 의미에요. 그래서 성장판을 열었다고 표현하는 거고요. 유림씨는 2차성장판까지 열었기 때문에 더는 능력의 한계가 없어요. 깨달음만 얻는다면은요.”
깨달음.
어려운 단어로군.
그런데 아리아나 말을 듣고 보니 조금 느껴지는 바는 있다. 2차성장판이 열린 후로 스텟의 수치는 전혀 변화가 없는데 능력의 변화는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수치와 무관하게 능력이 오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결국 깨달음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를 깨달은 거겠지. 아니면 자신감이 깨달음으로 연결된 것이거나.
그런데 이런 걸 물어도 될까? 아리아나도 답을 전혀 못 줄 것 같은데.
“깨달음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지?”
“그건 저도 몰라요. 정령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모를 거예요.”
“힌트나 조언도 없어?”
“죄송해요.”
역시 예상대로군.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자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젠장, 밑도 끝도 없이······.’
“그럼 마령의 힘을 흡수하는 방법이라도 가르쳐줘.”
“그건 어렵지 않아요. 마령의 계약자를 상대로 체력흡수마법을 사용하면 그대로 흡수됩니다. 하지만 만약 마령의 힘이 월등하게 강하다면 오히려 유림씨가 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해요.”
그렇군!
권이슬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이 정해졌다.
‘이참에 마령의 맛이나 좀 봐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