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더 강해져야 한다. (1)
권이슬의 펀치가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날카로웠다. ‘이 정도면 충분히 피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몸을 피했는데, 예상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펀치가 날아왔다.
서유림이 피하기도 전에 벌써 안면에 꽂혔다.
파앗!
펀치력도 상상 이상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뭐야? 권이슬의 복싱실력이 이 정도였나? 그런데 그동안은 왜 그렇게 재미없는 경기만 했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크로스카운터는커녕 지금은 권이슬의 주먹을 피하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권이슬이 다시 다가와서 펀치를 날렸다.
서유림이 이번에는 순발력을 보통 사람의 두 배 정도 발휘해서 피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권이슬의 펀치를 피하지 못했다.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빠른 펀치였다. 권이슬의 순발력이 일반인의 서너 배는 되는 듯했다.
펀치력도 더 강해졌다. 일반인이었다면 이 한 방에 그대로 기절했을 것이다.
서유림의 눈에 당혹감이 가득했다.
‘왜 이렇게 강해?’
순간 ‘능력을 더 끌어올려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건 위험하다. 자칫 비정상적인 힘이 발각될 수도 있다.
‘일단 조금 더 살펴보자.’
서유림이 크로스 카운터 욕심을 버렸다. 대신 강종범으로부터 전수받은 화려한 스텝과 위빙을 선보이며 수비에만 집중했다.
그러자 권이슬의 펀치도 빗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래도 눈이 돌아갈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권이슬의 실력이 원래 이렇게 강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서유림이 펀치를 제법 피해내자 권이슬이 능력을 더욱 끌어올렸다. 펀치를 뻗는데 스텝과 위빙으로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게다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랄만한 광경도 발견했다.
권이슬의 눈이었다. 어느 순간 눈빛에서 살짝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너무 미약하고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일반인이라면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유림은 볼 수 있었다. 분명히 붉은 빛이 감돌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빛이 낯설지 않다는 점이었다. 정령계에서 본 바로 그 눈빛이었다.
‘마족의 눈빛이다!’
서유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고민하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권이슬이 경기를 끝내기 위해서 달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이슬의 펀치가 또다시 서유림의 안면을 강타했다. 능력을 더욱 끌어올리면 충분히 피할 수 있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비릿한 느낌이 드는 것이 벌써 코피가 흐르고 있는 듯했다.
정령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코피를 치료하려는 듯했다.
‘치료하지 마. 그냥 둬.’
고민스러웠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승리를 취할 것인가. 아니면 정령의 힘을 감출 것인가.
고민은 길지 않았다.
당연히 후자였다. 그깟 챔피언벨트가 뭐가 중요하다고. 그깟 승리수당이 얼마나 된다고.
하지만 어떻게 패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납득할 수 있는 패배여야 한다. 정령의 힘을 감추면서도 크게 다치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격투기선수로서의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지 않아야 한다.
어렵지 않게 방법이 나왔다.
서유림은 지금까지 모든 경기를 타격으로만 끝냈다. 그것도 오로지 펀치.
다들 서유림의 그래플링 실력은 수준 이하일 거라고 예상했다.
반면 권이슬의 그래플링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겠군.’
서유림은 이리저리 피하는 데만 집중했다. 노골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면서 일부러 빈틈을 노출했다. 상체를 높이 세우며 안면 방어에만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덕분에 하체가 완전히 노출되었다.
권이슬이 재빨리 몸을 날리며 테이크 다운을 시도했다.
서유림이 황급히 피하는 척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하체를 잡혀주었다.
그와 동시에 엎어지듯 넘어졌다. 권이슬에게 뒤를 내준 것이다.
권이슬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손쉽게 서유림의 목에 팔을 집어넣으며 리어네이키드초크를 시도했다.
목이 꽉 잠기는 게 느껴졌다.
그런데 권이슬의 힘이 무지막지했다. 이 정도 힘이라면 일반인은 자칫 목뼈가 부러졌을 수도 있겠다.
‘이놈이 나를 아예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서유림이 재빨리 탭을 쳤다.
심판이 얼른 다가와서 권이슬을 만류했다.
경기는 그렇게 1라운드 만에 끝났다.
관중석은 뜻밖에 조용했다. 권이슬의 실력에 깜짝 놀랐고, 서유림의 패배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패자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서유림이 권이슬에게 가볍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케이지 밖으로 퇴장했다.
케이지 아래에서 기다리던 서미진이 서유림을 졸졸 따라붙었다. 서미진의 눈빛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오빠 괜찮아?”
서유림이 피식 웃었다.
“스폰서 비용 날려서 어떻게 하냐?”
서미진은 이번에도 서유림이 승리하는 조건으로 스폰서를 받았다. 서유림이 패배했으니 한 푼도 못 받게 되었다.
하지만 서미진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 그게 문제야? 어머! 이 피 좀 봐. 빨리 병원에 가보자.”
겨우 코피 좀 나는 것 가지고.
“격투기하다 보면 다 이렇게 돼. 이건 다친 축에도 못 껴. 괜찮으니까 호들갑떨지 마.”
그런데도 서미진이 주절주절 호들갑을 떨어댔다.
하지만 서유림의 귀에는 어느새 서미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권이슬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분명히 마계의 힘이었어.’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힘을 가지고도 지금까지 왜 그렇게 약한 척을 했던 것일까?
‘설마 최근에 마계의 힘을 가진 건가?’
만약 그렇다면 토너먼트 이후일 것이다. 저런 힘을 가지고도 마이티 무어 때문에 토너먼트를 포기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요즘 정령계의 꼴이 말이 아니었다. 곳곳에서 남자요정이 마귀로 변해서 요정들을 공격하고 겁탈했다. 이따금 마족이 출몰하기도 했다.
아리아나의 말도 생각났다. 마계의 힘이 인간계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적중한 셈이다.
띠링!
휴대폰으로 문자가 날아왔다. 아버지였다.
[괜찮은 거냐?]
경기는 TV로 전국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당연히 부모님도 보고 계셨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겠다.
[괜찮습니다. 질 수도 있는 거죠.]
[그래. 그렇게 대범하게 생각해야지.]
띠링! 띠링!
휴대폰으로 문자가 계속 날아왔다.
어머니도 보내시고, 서미연, 채희라, 권진아, 강은영, 강철중, 고등학교 동창들······.
정신이 없었다.
내용은 모두 대동소이했다.
서유림은 답장이 꼭 필요한 몇 사람에게만 단체문자를 보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꺼버렸다.
“관장님. 저 먼저 가겠습니다. 혼자 생각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 그······ 그래. 병원에는 안 가봐도 되고?”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닙니다. 생각을 정리할 게 있어서요. 미진아 나 먼저 갈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 알았어, 오빠.”
서유림은 곧장 북한산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권이슬과 관련한 생각을 해보았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냈다. 혼자 고민해서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를 상담하겠답시고 아리안을 인간계로 불러들일 수도 없고.
사실 분초를 다툴 정도로 급한 일도 아니었다. 이따 밤에 정령계로 들어가서 아리아나에게 물어봐도 늦지 않을 것이다.
권이슬에 대한 생각을 지우니 한 가지 생각만 남았다.
‘능력을 더욱 키워야 한다.’
특히 체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마법을 얼마만큼 사용할 수 있느냐가 능력의 차이를 결정할 테니까.
서유림의 체력은 거의 600 수준까지 올라와 있었다. 노력하면 더욱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긴, 잠재력이 999잖아. 반드시 그 절반에 머물러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잠재력의 한계치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겠지.
서유림은 잠시 내려와서 허기를 달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이 깊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러다가 밤 열 시 쯤이 되어서야 혼자 모텔에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 * *
서유림은 정령계로 들어오자마자 아리아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정령계 상황도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오히려 아리아나가 기다렸다는 듯 서유림을 재촉했다.
“빨리 이동해야 해요.”
“왜?”
“대규모 마족의 군단이 이쪽으로 곧장 몰려오고 있어요.”
꼭 달아나야만 하나?
대규모 마족의 군단이라고 해도 마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이 마귀나 마물이겠지.
이곳까지 오면서 열 개 이상의 요정마을을 만났다. 그럴 때마다 변질한 마귀들이 마을을 점령하고 있었고, 또 그럴 때마다 마귀들을 제거하고 요정들을 구해서 함께 움직였다.
덕분에 요정의 무리는 어느새 500명 이상 규모로 불어나 있었다.
원래는 1천 명도 넘었어야 하지만, 마족 군단의 공격이 끊이지 않아서 수가 계속 줄었다. 여기서 마족 군단이란 주로 마귀와 마물을 의미했다.
그래도 매번 달아나지 않고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덕분에 이만큼이나 요정을 지킬 수 있었다.
만약 그냥 달아나기만 했다면 요정의 생존자는 지금의 절반도 안 되었을 것이다.
아리아나도 그걸 알 텐데 다짜고짜 달아나자는 식으로 이야기하다니.
“얼마나 큰 무리기에?”
1천 명도 넘는 것 같아요.
서유림의 눈이 커졌다.
서유림은 2차 성장판이 열린 후로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고 있었다. 스텟에서 수치상으로 보이는 변화는 전혀 없는데, 능력은 계속 올랐다.
보이지 않는 어떤 수치가 계속 오르는 듯했다.
때문에 이젠 마귀나 마물은 물론이고 마족조차도 그리 두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마귀 정도라면 설령 50명이 몰려온다고 해도 서유림 혼자서 해치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서유림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다른 일반 요정들은 능력의 성장이 거의 없었다. 다들 혼자서 마귀 하나 당해내기도 힘들었다.
그런데 마족 군단의 수가 1천명도 넘는다니. 서유림이 제아무리 날고뛰는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들 모두를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아리아나까지 지키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하겠지.
사실 서유림에게 중요한 임무는 마족 군단을 사냥하는 게 아니라 아리아나를 지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달아나는 게 맞겠군.
“그런데 어디로······?”
“이쪽으로 한나절 정도만 더 달리면 리니스라는 요정의 성이 나와요. 그곳이라면 설령 10만 명의 마족 군단이 몰려온다고 해도 막아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럼 권이슬과 관련한 이야기는 리니스 성에 들어가서 나누면 되겠군.
“가지.”
요정들이 전력으로 달렸다.
새벽같이 출발했는데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리니스 인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다들 리니스 성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리니스 성 주변이 마족 군단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아까 10만 명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 거라고 했던가?”
“······예.”
아리아나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러면 막아내기가 조금 어렵겠군.”
성 주변에 몰려든 마족 군단의 수는 10만을 가뿐히 넘기고 있었다. 게다가 마족도 무척 많았다. 마족은 다른 마귀나 마물과 달리 온몸이 붉게 빛나고 있어서 눈에 쉽게 띄었는데 최소 5천 명은 되는 듯했다.
서유림의 무리를 뒤따르는 마족 군단도 1천 명이 넘는다지 않는가? 다른 마족 군단도 이곳으로 계속 몰려들고 있을 터.
그런 식으로 몰려드는 마족 군단의 수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인근에 다른 성은 없어?”
“최소 몇 달은 달려야 도착할 거리에 있어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깊은 숲속이나 동굴에 숨어있을 상황도 못 되었고.
죽으나 사나 성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뿐이었다. 그것도 가능한 한 빨리. 뒤쪽에서 마족 군단이 몰려오고 있으니까.
이렇게 지체하는 사이에도 거리는 계속 좁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저길 뚫고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리아나도 막막한 모양이다.
사실 방법이 전혀 없진 않다. 500명이나 되는 무리 전부가 살아서 들어갈 수는 없겠지만, 그중 일부가 희생한다면 나머지는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서유림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우. 이젠 우리가 정말로 헤어질 때가 된 것 같아.”
“······예?”
아리아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서유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요정의 무리를 향해 물었다.
“아리아나를 위해서 저와 함께 희생하실 분 혹시 계신가요?”
그러자 많은 요정들이 망설이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아니, 500명 전부가 나섰다.
“제가 희생하겠습니다.”
“저도······.”
그럴 줄 알았다. 인간과 다른 요정의 특징이었다.
요정들은 모두가 한 가지 사명감에 사로잡혀있는 듯했다.
정령계의 안녕을 위한 희생.
그것을 위해서라면 목숨 따위는 전혀 살피지 않았다. 오히려 정령계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자신이 희생하겠다고 나서는 것이다.
아리아나가 서유림을 붙잡고 물었다.
“어쩌시려고요?”
서유림이 아리아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성동격서라고 들어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