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
3월 5일입니다 (3)
다음날.
MAN FC 43대회 계체행사가 열렸다.
마지막 순서는 메인이벤트인 미들급 챔피언전의 상대 권이슬과 서유림이었다.
권이슬은 원래 입담이 센 사람이었다. 경기가 잡히면 늘 트레시 토킹으로 상대방의 멘탈부터 흔들곤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대회를 앞두고는 조용했다. SNS는 물론이고 사전 인터뷰에서도 지나치게 얌전한 모습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권이슬의 탈을 쓰고 앉아있는 듯했다.
팬들은 그 모습에 ‘권이슬이 쫄았다.’고 비아냥거렸다. 서유림이 봐도 그런 느낌이었다.
상황이 그 정도면 팬들을 위해서 쇼를 하는 차원에서라도 악다구니를 쏟아 붓기 마련인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꺼비처럼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계체행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만 했다.
그러니 서유림도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늘 하던 식으로 간략하게 소감을 밝혔다.
“제 경기에서는 1라운드 끝나는 공 소리는 누구도 못 들으실 겁니다.”
그제야 관중들이 답답했던 가슴을 터뜨리듯 함성을 질러주었다.
계체행사가 끝나자마자 한태민이 서유림을 호출했다.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다.
면담 내용도 사전에 알려주었다. 서유림의 계약기간이 만료됨에 따라서 계약 연장문제를 논의할 계획이다.
서유림이 곧장 VIP룸으로 향했다.
VIP룸에는 한태민 혼자 앉아있었다.
그런데 한태민도 한상민과 비슷한 버릇이 있었다. 마치 자신이 황제라도 된 것처럼 소파에 몸을 깊이 묻고는 상대를 턱짓으로 조종했다.
“거기 앉아.”
갑자기 앉기 싫어지네.
“서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앉으라고.”
한태민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듯 눈에 힘을 주었다. 서고 앉을 자유도 없단 말인가? 도대체 자신을 얼마나 대단한 슈퍼갑으로 생각하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저 착각을 빨리 깨뜨려주는 게 좋겠다.
원래는 내일 경기가 끝나는 시점을 디데이로 잡을 계획이었는데, 오늘 면담도 잡혔으니 하루쯤 앞당겨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런다고 내일 경기를 취소할 것도 아니고.
제깟 놈이 수를 쓴다고 해도 당하지 않을 자신도 있고.
서유림이 당당하게 허리를 펴고 거절했다.
“앉아서 할 얘기 없습니다. 어차피 계약도 끝났고, 다시 재계약할 마음도 없고.”
“······뭐?”
한태민이 깜짝 놀랐는지 움찔하며 몸을 세웠다.
“할 얘기 없으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재계약을 왜 안 해?”
그야 당연하지. 그게 처음부터 계획이었으니까.
하지만 네 하는 꼴을 보니 다른 식으로 이야기해주고 싶다.
“대표님 같으면 나이도 어린 사람이 대표랍시고 반말 찍찍 내뱉으며 턱짓이나 하고 앉아있는데, 그런 대우 받으면서 경기하고 싶겠습니까?”
“아, 그것 때문에 그랬어? 하하. 미안, 미안. 버릇이 돼서 말이야. 알았어. 일단 앉아봐.”
곧 죽어도 계속 반말이네.
“그런 반말 들어가며 얘기하고 싶지 않다니까요. 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하세요. 집에 가게.”
물론 아직 집에 갈 마음은 없다. 이곳에서 확인해야 할 게 하나 있거든. 오늘 한태민과 면담이 잡히자마자 준비했던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왜 아직도 연락이 없지? 지금쯤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알았어요. 일단 앉으라니까요.”
비로소 한태민이 존댓말을 써주었다.
서유림도 못 이기는 척 맞은편에 앉아주었다.
“참내. 성격 하고는.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계약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한태민이 실실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있는 놈들은 원래 다 그런가? 웃는 것도 순수하지가 않다. 한쪽으로만 유독 많이 웃어서 꼭 비웃는 느낌이 난다.
어떻게 한상민보다 성격이 더 엉망인 것 같다.
적응하기 힘드네.
서유림이 딱딱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데요.”
“그럼 또 뭔데요? 다른 이유.”
한태민이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이며 물었다.
서유림이 담담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대답해주었다.
“내일 경기가 끝나면 수일 내로 UFC와 계약할 겁니다. 아마 다음 주 즈음에는 만나서 계약서에 사인하게 될 겁니다.”
“뭐, 뭐라고? UFC?”
한태민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왜 그렇게 놀라? 세상에 격투기단체가 MAN FC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어? 선수 관리를 그딴 식으로 하면서 어떻게 성공하기를 바라는 거야?
MAN FC 잘되는 꼴이 보기 싫어서라도 내일 권이슬을 완전히 묵사발 내줘야겠다. 그러고 UFC로 떠나면 꼴이 볼만할 거다.
그나저나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그때 한태민의 휴대폰이 띠링! 하고 울렸다.
드디어 온 모양이다.
그런데 한태민은 휴대폰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서유림의 UFC 진출 선언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씨발, 그게 무슨 소리야? UFC라니.”
서유림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냥 씩 웃어주기만 했다.
그러면서 한태민처럼 턱짓으로 가리켰다.
“휴대폰에 문자 온 것 같은데요.”
“씨발, 지금 문자가 문제야?”
말은 그러면서도 휴대폰을 열어서 문자는 확인해본다. 혹시 한유진 회장 같은 중요인사의 문자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문자 씹으면 MAN FC 흥행 따위가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문자를 확인한 순간 한태민이 온몸을 얼음처럼 굳혔다. 얼굴도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서유림이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후훗, 준비한 문자가 맞는군.’
문자 내용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런 내용이겠지.
[8년 전 3월 5일 양주 폐교 여고생 강간살인사건.
내가 지금 진범 잡으러 간다.
오늘은 윤경식부터. 다음은 한태민 네 차례다.
저승에서 도상국이]
서유림이 다시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럼 더 할 이야기 없죠? 전 가보겠습니다.”
“가긴 어딜 가? 잠깐 기다려.”
“왜요?”
서유림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한태민은 이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서유림과의 대화를 우선해서 할 것인가? 아니면 통화부터 할 것인가?
만약 후자라면 스스로 여고생 강간살인사건의 진범임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공범은 되겠지.
서유림의 얼굴이 아주 살짝 일그러졌다.
역시!
한태민은 후자를 선택했다. 서유림을 잡아야 하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전화통화를 먼저 선택했다. 그것도 걸려온 전화를 받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거였다.
상대는 당연히 윤경식이겠지.
“너 여기에서 꼼짝 말고 기다려. 알았어?”
존댓말로 부탁해도 기다릴까말까 한 상황인데 또 반말이네.
하긴,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여유도 없겠지.
물론 나도 지금 바로 떠날 마음은 없다. 만약 여건이 된다면 한태민의 통화 내용을 조금 엿들어보고 싶거든.
한태민이 휴대폰을 들고 황급히 문 밖으로 나갔다.
서유림이 재빨리 몸을 움직여서 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한태민은 목소리를 바짝 낮춰서 통화하고 있었다. 극도로 예민해진 서유림의 청력으로도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언뜻언뜻 들려오는 단어는 있었다. 서유림의 추리까지 덧붙여서 이어붙이니 대충의 내용이 파악되었다.
한마디로 이런 내용이었다.
[너 도상국한테 문자 받았냐? 지금 너한테 갈 모양이다.]
이제 확실해졌다. 사모회의 원래 이름이 삼오회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모회의 회원 중 다수가 그 사건에 관련되어있다.
이제 남은 문제는 사모회 회원 중 누가 이 사건에 관련되어 있느냐와 그놈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다.
지금 답을 얻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즉, 더는 이 자리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한태민도 통과가 거의 끝난 듯했다.
굳이 기다려줄 이유도 없다. 서유림이 먼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제 막 통화를 마친 한태민이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어디 가? 내가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잖아.”
하마터면 주먹으로 저놈 면상을 날릴 뻔했다.
하지만 원초적은 싸움은 피해야 한다. 서유림 혼자라면 거칠 게 없겠지만, 가족이 있잖아. 특히 여동생들.
한태민이 되었건 그 가족이 되었건 ‘복수’라는 단어를 떠올릴 정도의 원한관계가 된다면 뒤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약속이 있어서요. 하실 말씀 있으면 카톡이나 이메일로 내용 주세요. 확인해보고 대화가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서유림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서. 안 서?”
한태민의 명령소리가 복도를 공허하게 울렸다.
하지만 서유림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태민도 서유림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다시 휴대폰을 붙들고 다시 통화하기 시작했다.
“모이자. 지금 당장.”
- 우리 지금 자영이네 집에 모여서 스크린 치고 있어.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 내가 지금 갈게.”
한태민이 스크린골프장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갔다.
다섯 명이 모여 있었다. 멤버를 보니 그날 이야기를 꺼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도상국 일을 맡아서 처리하기로 했던 윤경식도 있었다.
게다가 이곳은 비밀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든 마음 편히 나눌 수 있었다.
한태민이 다짜고짜 윤경식에게 물었다.
“너 도상국이 확실하게 처리한 것 맞아?”
“당연하지. 그런데 진짜 그런 문자 받았어?”
한태민이 자신의 휴대폰을 열어서 문자를 확인시켜주었다. 하지만 윤경식은 그런 문자를 받은 적이 없었다.
한태민이 다시 따지듯 물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시신을 못 찾아? 물에 떠내려간 것도 아니라며.”
윤경식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부분은 자신도 이해가 안 되었다.
“그래도 죽은 건 확실해. 블랙박스 영상 볼래?”
“보자.”
한태민이 윤경식을 재촉했다.
윤경식이 블랙박스 영상을 보여주었다. 도상국을 친 중형차에 달려있던 블랙박스였다.
다들 관심을 두고 영상을 지켜보았다.
도상국은 바이크에 탄 상태에서 제대로 뒤를 치였다. 그대로 하늘로 날아서 사라져버렸다.
저런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었다.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저승 문턱을 오락가락할 정도의 중태에 빠졌겠지. 그러면 당연히 병원에 입원했을 것이고.
하지만 그 어느 병원에서도 도상국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윤경식이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
“어때? 이러고도 못 믿겠어?”
시신을 확인하지 못한 부분은 찜찜하지만, 영상을 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문자는 어떤 새끼가 보낸 거야?”
한태민이 갑자기 모여든 멤버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너희들이 장난친 거냐?”
“씨발, 미쳤냐? 그런 장난을 치게?”
“그럼 누가 그런 건데? 이건 말이 안 되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상국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풀렸지만 내내 뒤통수가 간질간질했다.
고상윤은 아예 두려움에 몸까지 떨었다. 덩치도 좋고 술도 잘 마시고 완력도 좋은 놈이지만, 유독 ‘귀신’에 대한 두려움은 큰 놈이었다.
그래서 어두운 곳도 무척 싫어한다.
“그럼 진짜······ 귀신이 보냈다는 거야?”
“인마.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어? 저건 덩치에 안 어울리게 왜 저렇게 겁이 많아?”
“그런데 죽은 놈이 어떻게 문자를 보내?”
질문을 던지는 고상윤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 질문에는 누구도 답을 주지 못했다.
한태민이 복잡하다는 듯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아, 씨발 아무튼 귀신은 아니라고. 지금이 때가 어는 때인데 귀신 타령이야?
“그나저나 신경 쓰여 죽겠네. 대체 어떤 새끼 짓이야?”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 새끼가 갈만한 곳에 감시카메라 설치하자. 그년 무덤에도, 보육원에도, 민들레에도. 만약 놈이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걸리겠지. 안 그래?”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 경식이가 좀 해봐.”
윤경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다들 조심하는 게 좋겠어.”
“유림아. 무슨 고민 있냐?”
“아! 아닙니다, 아버지.”
서유림이 움찔하며 시선을 들었다.
아버지 목소리 덕분에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밥 먹다 말고 웬 생각을 그리 깊이 하냐?”
“예? 아, 내일 경기 생각 좀 했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권이슬이 대단하긴 한 것 같다만 내가 보기에는 네 실력이 월등히 낫다. 분명히 네가 이긴다.”
“그래야죠. 하하.”
서유림이 대충 웃어넘기고는 다시 수저를 놀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사모회 관련 생각뿐이었다.
‘이놈들을 어떻게 하지?’
급히 움직여서 좋을 건 없다.
도상국도 당장은 모르는 게 나을 것 같다. 만약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이 될 테니까.
그래서 문자도 채희라를 시켜서 보내도록 한 거였다. 무엇보다도 안전이 최우선이 되어야 하니까.
대신 확실하게 처리할 것이다. 한 놈도 빠짐없이 잡아들여서 죗값을 치르게 해야지.
그러자면 한 놈 한 놈 각개격파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놈들이 눈치를 채고 숨어버리거나 꼬리를 잘라버릴 수도 있으니까.
진범을 모두 색출한 후에 한꺼번에 처리한다.
‘김영자의 도움을 받는 게 좋겠군.’
내일 경기가 끝나고 약속을 잡아봐야겠다.
일요일.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장은 만원이었다. 빈자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서유림 덕분이었다. 오늘 드디어 얄미운 권이슬의 허리에서 챔피언벨트를 풀어내서 서유림의 허리에 두를 것이다.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싶은 것이다. 이왕이면 권이슬을 곤죽으로 만들어서 대리만족도 하고 싶겠지.
기대는 충분히 충족시켜줘야 할 것이다.
땡!
공이 울렸다.
권이슬은 원래가 아웃복서 스타일이었다. 미들급에 어울리지 않게 빠른 몸놀림과 지치지 않는 체력을 바탕으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했었다.
때문에 권이슬의 게임은 타이틀매치인데도 불구하고 늘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서유림을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왔다.
그래주면 고맙지.
서유림도 경기를 오래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UFC와의 계약조건도 합의되었으니 빨리 끝내고 챔피언벨트만 얻으면 된다.
‘오늘은 30초 안에 끝내자.’
그래도 납득이 되는 경기를 해야 하겠지.
서유림이 특기인 크로스 카운터를 선보이기 위해서 기회를 노렸다.
권이슬이 거리를 잡고 먼저 펀치를 뻗었다.
그런데······.
슈악- 팟!
‘엇! 뭐지? 뭐가 이렇게 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