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3월 5일입니다. (1)
다음날 아침.
서유림은 채희라와 함께 아침을 먹은 뒤에야 도상국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한참 울리고 난 뒤에야 도상국이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 시외에 잠깐 나와 있습니다.
“아침부터? 시외 어디?”
- 미연이 묘지에요. 어제 형님하고 사장님이 함께 있는 모습 보니까 갑자기 미연이가 보고 싶어지더라고요.
도상국이 외로운 모양이군.
그런데 왜 여자를 안 만나지. 얼굴 흉터 때문에 여자들이 피하는 건가? 아니면 전과 때문에?
어쩌면 도상국 본인이 다른 여자를 못 받아들이는 것일 수도 있겠지.
서유림이 나설 일은 아닐 것 같다. 도상국 같은 녀석이 능력이 없어서 여자를 못 만나는 건 아닐 테니까.
“거기 위치가 어딘데?”
- 두리랜드하고 참사랑 보육원이 함께 보이는 산입니다. 그런데 왜요?
“아무래도 진범들이 너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서. 혹시 요즘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이 서성거리거나 한 적은 없지?”
도상국이 잠시 말을 멈칫하는 듯했다.
- 요즘 조금 느낌이 이상하긴 했어요. 오늘 아침에 나올 때도 그랬던 것 같고.
순간 서유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놈들이 벌써 작업을 시작한 걸까?
“정말이야? 어떤 일이 있었는데?”
- 후훗, 형님도 참. 농담입니다, 농담. 제가 언제는 안전했었나요? 전 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깜짝이야.
그래도 그렇게 안이하게 생각할 일이 아닌데. 도상국도 옥희경 살해사건과 그날 있었던 일을 뉴스를 통해서 보았을 것 아닌가?
그런데 왜 저리 태평이야?
혹시 놈들이 자신을 노려주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건가? 그러면 놈들의 정체를 알 수 있다는 생각에?
이거 불안하네.
“빨리 민들레로 돌아와.”
-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갈게요. 근데 오늘은 일찍 출근해야 하는 건가요? 저 원래 오후 3시에 출근인데.
“그건 아니고. 그럼 거기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통화를 마친 서유림이 다급히 움직였다.
채희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왜?”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 상국이 주변에 이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상국씨가 그래?”
도상국은 농담이라고 했다.
서유림도 들었을 때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농담이 아닌 것 같았다. 서유림이 묻는 순간 도상국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모르겠어. 확실치가 않아. 그래도 상국이한테 가봐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
“그럼 내 차 끌고 가. 나도 함께 가고 싶은데, 이따 점심에 약속이 있어서.”
채희라가 차키를 건네주었다.
“그래, 고마워.”
서유림이 채희라의 승용차를 끌고 급히 출발했다.
길이 제법 막혔다. 양주시로 들어가는 371번 지방도를 타는 데만 1시간이 넘게 걸렸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눈에 익은 오토바이가 다가오고 있었다. 눈에 익은 오토바이였다.
‘상국이? 거기 그대로 있으라니까.’
도상국도 서유림을 발견한 모양이다.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도상국 뒤로 선텐을 짙게 한 낡은 중형차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였다.
서유림의 눈이 커졌다.
“어! 저거 뭐야? 왜 속도 안 줄여?”
하지만 도상국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속도를 더욱 줄였다.
“안 돼. 피해.”
서유림이 차 유리를 내리며 소리쳤다.
그제야 도상국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중형차는 어느새 도상국 뒤통수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엔진소리를 내며 속도를 더욱 높였다.
속도가 거의 100km/h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도상국이 재빨리 옆으로 피하려고 했지만 너무 늦었다. 중형차가 그대로 도상국을 들이받았다.
꾸궁!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도상국이 오토바이와 함께 하늘로 튀어 올랐다. 거의 2m는 튀어 오른 것 같다.
그리고는 갓길로 추락했다.
중형차는 멈추지 않았다. 속도도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속도를 올리며 그대로 달아났다.
“저 개새끼!”
순간적으로 차량 번호판을 기억해두었다.
하지만 중형차를 추격할 수는 없었다. 그보다는 도상국의 상태가 먼저였다.
차를 갓길에 세워두고 재빨리 도상국에게 달려갔다.
상태가 무척 위태로웠다. 뼈가 부러진 게 문제가 아니라 몸 안이 엉망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머리 쪽이 문제였다. 헬멧을 쓰고 있었는데, 완전히 박살이 났고,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다.
도상국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죽을 것만 같았다. 아니, 살아날 가능성이 없어보였다. 구급차를 부른다고 해도 도착하기 전에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어쩌지?’
너무 당황해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도상국이 뭔가를 이야기하려고 입을 뻥긋거렸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생명이 빠르게 꺼져가는 것 같았다.
“죽으면 안 돼! ······아!”
순간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정령!
서유림이 재빨리 정령 하나를 도상국의 몸속에 집어넣었다. 물의 속성을 가진 정령이었다.
서유림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정령이 도상국의 몸으로 무사히 침투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도상국의 상태가 너무 위중했기 때문이다.
정령의 힘이 대단한 것은 알고 있지만, 과연 이런 위중한 상태까지 호전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다. 정령의 힘이 침투하자마자 철철 흘러내리던 피가 거짓말처럼 뚝 멎었다.
덜덜 떨리던 몸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호흡도 아직 미약하긴 하지만 조금 편안해졌다.
맥박도 잘 뛰었다.
비로소 서유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하지만 도상국은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깊은 잠에 빠져든 사람처럼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래. 한숨 푹 자고 일어나.’
서유림이 도상국을 조심스럽게 안아서 차에 태웠다. 그리고는 도상국의 집으로 향했다.
‘개새끼들! 절대 그냥 두지 않겠다!’
채희라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 왜? 상국씨한테 무슨 일 있어?
“그냥 오늘 하루 쉬고 싶대.”
- 알았어.
다행히 채희라가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통화를 마친 서유림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냥 사실대로 이야기해줄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당장 도상국을 보겠다며 달려올 것이고, 그러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치유되는 것에 의문을 품게 될 테니까.
차라리 웬만큼 회복된 상태에서 만나게 하는 게 낫다.
도상국은 여전히 깊이 잠들어있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정령이 치료하고 있으니 무조건 100% 치료될 것이다. 워낙 크게 다쳐서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그래도 도상국을 혼자 내버려두고 싶진 않다.
‘이참에 서류나 좀 볼까?’
차로 가서 김영자로부터 받았던 서류를 가지고 다시 도상국의 원룸으로 올라왔다.
김영자가 준 서류는 황국회와 관련한 정보였다. 파악된 회원들의 명단과 그들의 가족사항, 재산, 취미 등이었다.
황국회 회원은 7명이었다.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두세 명을 넘지 않을 거라고 했다.
황국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황국회 아래에는 명왕성, 하나회, 사모회 같은 예하조직도 있었다.
예하조직의 회원 수까지 합하면 100명도 넘었다. 그들에 대해서도 제법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져 있었다.
‘휘유, 대단하군.’
김영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조사해서 만든 자료인지 쉽게 짐작이 되었다. 그만큼 이 일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뜻이겠지.
적어도 어제 김영자가 한 말이 거짓은 아닌 듯하다.
황국회 회원의 자료를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그리고 예하조직의 자료들도 차례로 살펴보았다.
‘응? 유진그룹 한유진 회장도 명왕성의 회원이었네!’
그뿐이 아니었다.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도 모두 명왕성의 회원이었다. 하나같이 대한민국에서 엄지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엄청난 자들이 황국회도 아니고 황국회의 예하조직에 속해있다니.
황국회가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다는 김영자의 말이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예하조직 중에 사모회의 자료를 살펴보았다.
서류를 하나하나 넘기던 서유림이 손을 멈추었다. 아주 익숙한 이름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한태민?’
정보를 보니 한유진의 아들 한태민이 맞았다.
서유림이 다른 서류들을 빠르게 넘겨보았다. 하지만 한상민이나 한동민, 한경민 같은 다른 형제들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한유진의 아들 중에서 오직 한태민만이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왜 한태민만 이름을 올린 거지?’
쉽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모회 회원들의 명단을 살펴보았다.
또다시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윤경식.
얼마 전 서울지방경찰청에서 본 이름이다. 서유림을 담당해서 심문한 사람은 박순모 경장인데, 윤경식이라는 경찰이 자꾸만 기웃기웃하고 참견하곤 했었다.
서유림은 특히 윤경식이라는 인물에 집중했다.
옥희경이 황국회와 관련되어있다고 판단한 이유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윤경식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옥희경과 통화한 번호 중에 윤경식의 사무실전화번호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윤경식이 개인적으로 옥희경과 통화한 것이다.
윤경식의 아버지는 현직 경찰청장이었고, 조부님은 전직 법무부장관에 황국회 회원이었다.
‘정말 윤경식이 범인인가?’
김영자도 가능성이 높다고 이야기했었다. 하지만 옥희경과의 통화기록 외에는 아직 뚜렷한 증거는 찾지 못한 상황이었다.
“으음······.”
갑자기 도상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의식이 돌아온 모양이다.
서유림이 서류를 내려놓고 도상국의 상태를 살폈다.
도상국이 가물가물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
“······형님.”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좀 어떤 것 같아?”
도상국이 일어나 앉아보려는 듯 몸을 움직여보았다. 하지만 통증이 느껴지는지 신음소리와 함께 얼굴만 잔뜩 찌푸렸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아직은 말투도 어눌했다.
하긴, 겨우 서너 시간 전에 죽기 직전의 상황이 아니었던가? 이보다 더 빠른 회복을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이겠지.
“금방 괜찮아질 거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
“예. 웬 중형차가······.”
사실 기억이 가장 걱정이었었다. 만약 뇌에 손상이 있었다면, 정령이 뇌세포는 살릴 수 있겠지만 기억까지 되살릴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기억도 정상인 듯했다.
한시름 놓았다.
“어떻게 된 거죠? 죽는 줄 알았는데······.”
도상국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렇게 엄청난 사고를 당했는데 이토록 멀쩡하니 이상할 수밖에.
하지만 그건 서유림도 설명해줄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도상국에게 정령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잖아.
그냥 기적이라고 해두지 뭐.
“그러게 말이다. 나도 네가 죽는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하다니. 아무래도 그 여자 귀신이 도와준 모양이다.”
도상국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달리 답을 찾을 수 있겠는가? 그냥 귀신이 도와줬나? 하고 생각하는 수밖에.
그리고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할 정도의 몸 상태도 아니었고.
“그런데 김미연씨 묘지는 갑자기 왜 찾아간 거야?”
“아무 이유 없습니다. 그냥 가고 싶어서요. 바이크 타면 금방이니까요.”
“김미연씨 기일이 가까웠던 모양이지.”
“그것도 아닙니다. 미연이 기일은 3월 5일이에요.”
그랬군.
역시 일이 벌어지려면 상황이 묘하게 꼬이게 되어있다. 도상국이 그곳에 가지만 않았어도.
아니지. 놈들이 노리고 있는 이상 언제 어떻게든 사고가 터졌겠지.
가만, 그러면 도상국이 멀쩡하다는 것을 알면 놈들이 또······?
분명히 그럴 것이다. 다음번에는 훨씬 더 악랄한 방법을 사용하겠지.
도상국이 안전하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상국이 너 죽은 것으로 하는 게 좋겠다.”
“왜요?”
“멀쩡히 살아있으면 놈들이 또 노릴 테니까.”
“그렇겠군요. 그럼 자칫 사장님과 형님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겠어요.”
네가 지금 남 걱정할 때냐?
“아무튼 어떻게든 신분을 감춰야겠다. 당분간은 돌아다니지도 말고 민들레에도 출근하지 마. 특히 김미연씨 무덤 같은 곳은 절대 가지 마.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서유림 다시 자료를 들춰보았다. 사모회 회원인 윤경식의 자료가 펼쳐져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눈에 쏙 들어오는 단어가 있었다.
사모회?
어딘가 모르게 발음이 입에 붙었다.
왜 이렇게 입에 착착 달라붙지?
그러다가 다시 도상국을 바라보았다.
“김미연씨 기일이 언제라고?”
“3월 5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