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채희라의 스폰서 (3)
김영자의 웃음이 갑자기 꺼져가는 불꽃처럼 흐려졌다.
“혹시 김지섭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요?”
“독립운동가 김지섭 열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머나!”
왜 자꾸 놀라고 그래?
하긴 김지섭 열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서유림도 예전에는 전혀 몰랐던 이름이니까.
물론 들어보긴 했지만, 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하지만 정령의 힘으로 기억력이 좋아지면서 다시금 생각났다.
“그런데 김지섭 열사는 왜······?”
“제가 그분의 후손이에요.”
“······아!”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영자가 다시 보였다. 왠지 자세한 이유를 듣지 않아도 황국회를 배반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사실 어려서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어요. 집안이 너무 가난했거든요. 그래서 오직 출세와 돈만을 목표로 공부하고 저를 가꿨어요. 그러다가 황국회의 눈에 띄었죠. 제가 지금은 이래도 젊었을 때는 좀 예뻤거든요. 공부도 좀 하고.”
그랬겠지. 그런 지성과 미모 덕분에 엄청난 로비스트가 될 수 있었던 거고.
“그러다가 문득 선조께서 지었다는 싯구를 발견했어요.”
김영자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한자로 적힌 싯구였다.
[萬里飄然一粟 舟中皆敵有誰親 崎嶇世路難於蜀 忿憤輿情甚矣秦 今日潛踪浮海客 昔年嘗膽臥薪人 此行己決平生志 不向關門更問津]
학창시절에 배운 싯구였다.
해석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만리창파에 한 몸 맡겨 원수의 배속에 앉았으니 뉘라 친할고. 기구한 세상 분분한 물정 촉도(蜀道)보다 험하고 태(泰)나라보다 무섭구나.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이깟 몇 글자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런데 이 싯구를 보는 순간 막 눈물이 났죠. 죽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어요. 내가 왜 그렇게 살았는지. 정말 이상하죠?”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실 나도 얼마 전에 그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거든. 임채모를 만났던 순간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때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향이 정해졌다.
반드시 엄청난 계기가 있어야만 사람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소한 순간에도 사람은 변할 수 있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꾸밀 수도 있겠지만.
서유림은 말없이 김영자만 바라보았다.
“그때부터였어요. 새로운 목표를 세웠죠. 적어도 이 나라를 황국회 같은 놈들의 손에 놀아나게 두어서는 안 되겠다.”
김영자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황국회에 충성하는 척하면서 황국회의 돈을 은밀하게 빼돌렸다.
하지만 결국 발각되었고, 황국회는 김영자를 ‘나라를 팔아먹는 로비스트’로 세상에 공개했다.
그 이후는 세상에 알려진 바와 같다.
수년간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 이렇게 다시 재기했다.
“황국회가 다시 압박해오지는 않았나요?”
“왜 아니겠어요. 출소 직후에는 저를 죽이려고까지 했었죠. 하지만 저도 그렇게 쉬운 여자는 아니에요. 로비스트로 17년간 활동하면서 국제적으로 쌓은 인맥이 제법 되거든요.”
하긴, 김영자가 그런 인맥들에게 도움을 청했다면 황국회가 쉽게 건들지는 못했겠다.
“물론 저도 납작 엎드리고 있었죠. 무려 20년 가까이. 그러니까 황국회도 제게서 슬그머니 관심을 거두더군요.”
“많이 답답하셨겠습니다.”
“아뇨. 엎드린 척만 했지 사실 나름대로 바쁘게 지냈어요. 그동안 빼돌린 재산을 은밀하게 키웠거든요. 그리고 5년 전쯤에 귀국해서 은밀하게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려 20년 동안이나 엎드리고 있었다니.
하긴, 황국회가 그렇게 엄청난 단체라면 어쩔 수 없었겠지.
그래도 그 긴 세월동안 신념을 잃지 않고 계속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유림은 김영자의 말을 딱 49%만 믿었다.
김영자의 말 외에는 그 어떤 증거도 없으니까.
그리고 중요한 것은 김영자와 황국회의 관계가 아니다. 이야기가 한참 옆으로 샜는데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은 옥희경의 휴대폰 관련한 내용이었다.
그 안에서 재미있는 정보들을 발견했다고 했잖아.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안 될까?
그냥 놓아두면 이야기가 어디까지 흘러갈지 모르니 내가 슬쩍 돌려놓아야 하겠군.
“그런데 제게 황국회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게 옥희경씨 휴대폰의 정보와 관련이 있나요?”
이제 김영자도 삼천포로 빠지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
그런데 김영자가 뜻밖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정확히 봤어요. 이번 사건······ 황국회와 연결되어있어요.”
서유림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말이야? 그 낡은 빌라에 살던 옥희경이 어째서 황국회와 연결이 된 건데?
“이해가 안 가는군요.”
“저도 그랬어요. 평범하기 그지없는 옥희경이 어째서 황국회와 연결이 되어있을까? 그래서 한참을 분석하고 고민해보았죠.”
그래서 결론이 뭔데?
이 중요한 시점에 그렇게 보이차 마시면서 시간 끌면 반칙이지!
김영자는 서두르지 않았다. 보이차를 깨끗이 배우고, 찻주전자를 다시 데워서 보이차를 새로 따랐다.
서유림과 채희라의 찻잔에도 보이차를 따라주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여유를 보일수록 서유림이 자신에게 빠져들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서유림도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김영자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핵심만 이야기했다.
“약 7년 전. 여고생 강간살인사건. 피해자 이름이 김미연이었던가요? 그 살인범이 황국회의 핵심 중 한 명인 것 같아요.”
‘······아!’
하마터면 소리를 흘릴 뻔했다.
일이 그런 식으로 연결되나?
“아마 황국회 회원의 자식이 벌인 짓이겠죠. 재미삼아 데리고 놀다가 죽이게 되었고, 그걸 도상국에게 덮어씌우고.”
이후의 상황이 머릿속에 영화를 보듯이 그려졌다.
도상국이 출소 후에 진범을 찾으려고 노력하자 테러를 가해서 본때를 보여주었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옥희경이 노출되자 이번에는 옥희경까지 살해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다.
“그러면 차라리 도상국을 죽였을 것 같은데요.”
“그러고 싶었겠죠. 하지만 도상국은 당시 대중의 관심을 너무 많이 받고 있었어요. 물론 좋지 않은 방향으로. 그런 상황에서 도상국을 죽이면 오히려 일을 키우는 꼴이 되었겠죠.”
그러자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당시 도상국은 대중의 관심을 많이 받았지만, 그 관심은 이미 오래전에 싸늘하게 식어버렸기 때문이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도상국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 지금은······?”
“놈들이 도상국을 직접 노릴 수도 있겠죠. 아니, 분명히 기회를 노리고 있을 거예요.”
그렇겠군.
도상국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김영자와 이야기를 마치자마자 도상국을 만나봐야겠다. 시간이 여의치 않으면 통화라도 해보던가.
“그래서 말씀인데······ 저와 일을 함께 해보시는 게 어떻겠어요?”
오늘 나를 만나자고 한 이유가 저것 때문이로군.
채희라도 알고 있었겠지. 그러니 김영자의 제안을 듣고도 전혀 놀라지 않는 거고.
서유림을 바라보는 채희라의 눈빛에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 김영자와 손을 잡으면 그녀가 큰 힘이 되어주긴 하겠지만, 그러면 행동에 제약이 많이 걸릴 테니까.
“어떤 일을 함께 하자고 말씀하시는 건지······?”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황국회 타도를 일생의 목표로 삼고 있어요. 물론 불가능하겠죠. 황국회는 그렇게 작은 모임이 아니니까. 하지만 힘을 약화시킬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서유림씨가 제 일을 도와주셨으면 해요. 물론 저도 서유림씨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도와줄 거고요.”
큰 틀에서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다.
김영자 하면 떠오르는 것은 당장 민들레와 텐프로다. 뜻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건 제게 어떤 도움을 바라시는 건지를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바라는 행동을 말씀하시면 그때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영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서유림의 말이 부드러운 거절임을 눈치 챈 거겠지.
다시 보이차를 마셨다.
하지만 서유림의 눈에는 생각하는 것으로 보였다. 갑자기 막힌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에 대한 고민.
김영자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보이차를 두 모금쯤 마시고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어떻게?
“서유림씨는 저를 돕지 않아도 돼요. 대신 제가 무조건 서유림씨를 도울게요. 제가 가진 것을 마음껏 이용하세요.”
무슨 의도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제안을 들으니 머릿속이 하얗게 지워지는 느낌이다.
이것도 김영자의 화술인가?
상대방 당황하게 만들기?
“오해하지 마세요. 서유림씨가 하고 있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제안이니까. 그리고 전 가족도 없어요. 모든 걸 남김없이 쏟아 붓고 죽을 준비가 되어있어요.”
순간 김영자의 얼굴에 임채모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김영자도 그런 꿈을 꾸고 있었던 거로군.
“제 도움에 보답하지 않아도 돼요. 물론 저도 도움을 청하겠지만, 서유림씨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되고요.”
계약서라도 받아두고 싶군.
하지만 한 입으로 두 말 할 사람 같지는 않다. 채희라도 옆에서 함께 들었으니 나중에 일이 틀어지더라도 오해나 원망은 없을 테고.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다만 나중에 절 이기적이라고 욕하시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김영자가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서유림이 김영자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다. 난 지금까지 당신의 말만 들었을 뿐이지 내 눈으로 확인한 건 아무것도 없거든.
“그런데 옥희경씨 휴대폰에서 황국회 관련 정보가 있다고 하셨죠?”
“네.”
“저도 그 정보 좀 볼 수 있을까요?”
김영자가 다시 웃었다.
“물론이죠. 그럼 자리를 옮길까요? 그 이야기는 브리핑 룸에서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함께 옥탚방을 나와서 브리핑 룸으로 향했다.
김영자가 자리를 옮기면서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지시를 내렸다.
“옥희경 휴대폰 관련해서 브리핑 준비해줘.”
브리핑 룸은 한층 아래에 있었다. 작은 회의실 같았다.
20대 후반의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말쑥한 정장 차림인데 안경 때문인지 조금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고미영이라는 이름의 아가씨였다.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휴대폰 내용부터 보시겠습니다. 제가 찾아드릴게요.”
고미영이 휴대폰을 조작해서 통화내역과 문자 등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분석결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갈아입고 오는 건데. 운동복 입고 땀 냄새 풍기면서 이런 설명 들으니 조금 미안하네.
그래도 들을 것은 들어야지.
서유림이 고미영의 설명에 집중했다.
“어땠어?”
채희라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좋은 분 같았어.”
진심이었다. 비록 김영자의 제안을 거절한 셈이 되긴 했지만, 그건 김영자를 나쁘게 봤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채희라도 서유림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듯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다행이야. 근데 바로 집으로 갈 거야?”
가지 말라는 눈빛이군.
하긴, 벌써 자정을 훨씬 넘어서 새벽 1시가 다 되어가고 있다.
김영자와 나눈 이야기도 길었고, 옥희경의 휴대폰 정보를 확인하는 데만도 2시간가량이나 걸렸다.
서유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채희라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애교 가득한 토라짐이었다.
서유림이 피식 웃었다.
“희라네 집으로.”
채희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준비된 환한 웃음을 터뜨려주었다.
서유림의 팔을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가자.”
채희라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이 시각에 상국이한테 전화해도 될까? 조심하라고 충고는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너무 늦었지. 내일아침에 해.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 있겠어?”
하긴, 내내 아무 일 없었는데 단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
“그러지 뭐.”